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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칼럼

[새벽까페4_김종옥] 부디 좋은 해 맞으소서
글쓴이보다센터 게시일2020-12-28 조회수1,744

부디 좋은 해 맞으소서

 

1. 영화를 보는 가장 행복한 때

 

예전에 어떤 강의를 듣는데 강사가 살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냐고 물었다. 나는 그 때 근사하게 대답하려고(그리고 진심도 어느 정도 담아서) ‘삶의 모든 순간이라고 대답했다. 강사는 멋있는 대답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러고 나서 곧 후회했다. 행복한 순간과 덜 행복한 순간을 뭉뚱그려서 한 몫에 대답을 해버렸으니, 특별히 호명되지 못한 진짜 행복한 순간들은 얼마나 섭섭했으랴,

 

그래서 그 때 진짜로 나에게 행복한 시간을 주는 때는 언제일까 생각해봤는데, 그것은 홀로 오전에 조조영화를 볼 때라는 걸 알았다. 우리집 근처엔 빌딩 12층에 근사한 작은 극장이 하나 있고, 거기 상영관이 두 개(0관과 1) 있는데, 이른바 예술영화니 저예산영화니 하는 영화들을 튼다. 무엇보다 야외로 트인 넓은 베란다에 나서면(처음엔 완전 야외라 바람이 휘몰아쳤는데 지금은 유리온실처럼 유리벽을 만들었다) 관악산이 한 스크린에 담긴 듯 보였다. 스크린 위쪽은 멀리 산이 가득 차 있고, 스크린 아래쪽은 도시의 불빛이 뿌려져 있는 기막힌 전망을 가진 이 베란다에는, 세월호 리본으로 겹겹이 치장된 크리스마스 트리가 놓이는가 하면 작은 영화행사 같은 것이 벌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0관은, 영화가 끝나면 한쪽 벽면 전체를 덮고 있던 커튼이 웅~, 하고 올라가면서 전면 유리벽이 드러나는데, 그쪽으로는 그 영화관 건물만큼 높은 빌딩들이 엎어서 멀리 언덕 위의 아파트에게까지 이어지는 너른 벌판처럼 보이는 풍광이 참 근사하다. 무엇보다도 그 유리벽은 서쪽을 향해 트여 있어서 오전에는 경사진 빛이 뿌옇게 도달해서 몽환적이고, 혹시라도 저녁때쯤 끝나는 영화를 볼라치면 영화의 여운을 느낄 겨를도 없이 서쪽 스크린에 펼쳐지는 기가막힌 도시의 노을에 압도당하게 된다.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에 그대로 앉아서 도시의 풍경을 또하나의 스크린으로 보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곳은 아마도 그 영화관뿐일 게다. 때론 말도못하게 이상하게 사무치는 기분으로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또 멀리 보이는 관악산을 조망하며 커피를 마시고, 그리고는 비로소 먼지 낀 세상 속으로 내려가는 작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기 전까지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다.

 

그러니 다음에 또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바깥 풍경이 좋은 영화관에서 영화를 한 편 보는 두어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바로 대답해줄 것이다. 수십, 수백명의 스텝들이 혼신을 다해 만든 영화를 아름다운 공간에서 편안히 누리는 이 호사는, 행복이라고 말하기에도 넘친다.

 

2. ‘멜랑꼴리아의 깊은 우울

 

앞수다가 길어졌다. 그 곳에서 봤던 한 영화 얘기로 시작하려다 사랑하는 공간과 거기서 보낸 시간을 길게 떠올렸다. 올해 이런저런 이유로 가지 못한 아쉬움이 컸나보다.(뭐든 미련이 남으면 쓸데없이 말만 길어지는 법이다.)

 

몇 년 전에 멜랑꼴리아라는 영화를 봤다. 2012,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무거운, 깊은, 우울한, 깊숙이 가라앉는, 우울이 사무치는 영화다. 우울하다고 느끼는 분들은 모두 이 영화를 한 번 보시길 권한다. 나도 그 때 제법, 상당히 우울했으므로 이 영화를 봤고, 그리고 그 때 알았다. 우울은 연민과 닿아있고, 인류는 그 연민의 연대, 그것말고는 아무 것도 아니어야 한다는 것을.

 

멀리서 소행성이 지구를 향해 날아오는데,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인류는 그저 한 달 뒤쯤으로 계산된 그 시각에 지구상의 모든 생명과 함께 종말을 맞게 된다. 그걸 앞두고 벌어지는 세상의 혼란 속에서 오직 평소 깊은 우울에 빠져있던 주인공만이 처연하게 침착하다. 모든 우울은 시간의 상실과, 존재의 고독과, 생명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차서 바야흐로 침잠하고 있는 데서 나오는 것이니, 본질적으로 그러한 종말에 처한 상황에서 주인공은 달리 호들갑을 떨거나 생떼를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는 그 영화를 보고나서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어찌 할 것인가를 생각해봤다. 상황을 반전시킬 무엇이 없을 때,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어찌 할 것인가는 쉽게 답이 나왔다. 그런데 남들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다만 초기 혼란이 빨리 수습되고, 인류가 품위있게 종말을 맞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이왕 벗어날 수 없는 파국이라면, 이 우주 안에서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지라도, 좀 품위있게 인류의 역사를 마치자, 이런 생각을 했다.

 

3. 새로운 것의 시작일까

 

오래 묵은 영화까지 들먹인 이유는, 2020년을 덮친 코로나19 때문이다. 꼬박 일년을 코로나19 뉴스를 보면서 살았다. 이것이 전 지구적 재앙으로 이렇게 길게 갈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마도 많지 않았을테고, 우리는 미증유의 사태에 그야말로 일년 내내 휘둘렸다.

 

바이러스는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의 허점을 드러내고, 인류란 게 생물학적으로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지 스스로 드러내게 했다. 생물분류학상 단일종인 인간은, 한 인간에게 치명적인 어떤 것은 바로 77억 모두에게 치명적이라는 결정적인 약점을 갖고 있는 존재다. 분명히 한 개의 변종 바이러스로 시작되었을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순식간에 전 지구적 재앙이 되어 인류를 위협했고,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백신이 나오고, 치료제가 나온다고 하니, 어떻게든 이 겨울을 무사히 넘겨서 내년 봄과 여름을 맞아야 할텐데, 우리들에게 다가와 있는 거대한 우울한 질문은 그 다음이다. 백신이 나오면 끝이 날까. 백신도 듣지 않는 변종이 나오면 어찌 될까. 우리는 살면서 이 난리를 얼마나 자주 겪게 될까. 결국 우리는 소행성이 닥쳐오기 전에, 핵으로 서로를 폭파시키기 전에, 마이크로 수준의 이 작은 바이러스에 의해 멸종할까. 요컨대 올해의 이 난리가 그저 힘겹게 넘어가는 고비일지, 아니면 새로운 무언가 어두운 것의 시작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예전에 철학과 관련된 책을 쓰고는 이곳저곳 그것과 관련한 강의를 다닌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도 인류의 종말에 대해 얘기하면서, 인류가 파국을 맞을 몇 가지 상황을 들어보곤 했는데, 그 때마다 가장 가능성이 큰 위협으로 지목된 것이 바이러스의 위협이었다. 그러면 그 다음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정확히는 어떻게 종말을 맞을 것인가. 그런데 사람들은 누구나 다 비슷한 생각을 한다는 것을 강의를 통해 알았다. 처음엔 혼란스럽겠지만 곧 받아들이고 침착해질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거나, 조용히 홀로 있을 것이다. 나는 분명히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런데 남들은 어떨지 잘 모르겠다.

 

일년 내내 코로나19 상황이 만든 우울 속에 있으면서, 이 거대한 우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했을까. 나는 영화 멜랑꼴리아를 보고나서 얻은 결론, 인류는 생명에 대한 연민, 그 연민의 연대, 오직 그것뿐 다른 것이 아니다,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없다, 라는 생각을 하고 또 했다.

 

한번뿐이고, 그나마 유한한 삶을 살다가 소멸하는 모든 생명 존재는 그 이유로 서로가 서로를 연민해야 한다. 그 안에서 누구나 똑같이 대접받고 대접하고, 누구나 누리는 것이 엇비슷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나이 먹고 늙어갈 때는 누구나 엇비슷한 수준의 삶을 살다가 가야 하지 않겠는가. 특별히 사는 데 힘들었던 조건이었던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그런 대접이 주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많은 것을 맘껏 누리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그래, 맞다. 평등사회를 얘기하고 있는 거다. 누구나 자신의 조건으로 말미암아 더 불리하게 살지 않는 사회, 그러한 평등사회를 얘기하고 있는 거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갖는 본질적인 연민과 연대의식으로 이뤄내려는 사회이니까.

 

코로나19 상황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우리는 발달장애를 가진 이들은 사회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왔지만, 그들이야말로 누구보다도 바로 사회적 환경, 공공의 시간, 공공의 공간이 필요한 이들이었음이 이 상황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공공의 시간과 장소가 부족해진 발달장애인이 겪은 어려움이란 호소는 일년 내내 외친 주제였다. 더불어 그동안 발달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어떠한 공적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주었던가에 대한 반성도 하게 되었다.

 

발달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올 한 해가 어땠는지 꼼꼼히 물어야 한다. 우리는 그에게 어떤 엄마, 어떤 가족, 어떤 이웃이 될지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어떤 이웃이 되고 싶어하는지도 물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소멸하게 되는 시점에서는 서로의 몸뚱이를 부둥켜 끌어안고 세상에서 가장 깊은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향한 것이었음을 확인할 테니까 말이다, 그 마음으로 살아보자는 소리이다.

* 덧붙이는 흰소리... 2020년을 그냥 없었던 해로 치고, 올해 1231일 자정을 넘기면서 다시 2020을 시작하면 안 될까. 나이도 한 살 되돌리기 하고. 인류 모두가 한 살 묵혀서 다시 시작. 그냥 2020년은 연습삼아 살았던 해로 치고, 다시 시작, 이건 안 될까. 한 해를 이렇게 보냈다는 게 못내 억울해서 하는 말이다. 이만 총총. 모두 좋은 해, 맞으소서~


글쓴이 김종옥 

이런저런 인역과 삶의 엮임으로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서울지부장을 하고 있음.

워낙은 SF소설 쓰는 것이 소망이나 청소년 철학 도서 몇 권과 칼럼을 쓰다가 일시 작파 중.

삶의 모토인 즐김과 쓰임 사이에서 오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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