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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칼럼

[새벽까페 10_김종옥] 내가 본 것과 그가 본 것
글쓴이관리자 게시일2021-10-05 조회수1,591

학 때 잘 놀았던 선배 중에 술자리 좋아하던 이가 있었다.(이렇게 얘기하자니 좀 우습다, 술자리 안 좋아하던 이가 없었으니.) 그때는 누구나 용돈이 궁해서 점심을 싼 것으로 대충 때우고 저녁엔 제일 싼 홍합탕이나 오뎅을 시켜놓고 소주를 마셨다. 사정이 그마저도 어려울 땐 볼품없이 담긴 김치쪼가리를 안주 삼기도 했다. 맥주를 마실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는 안주를 시키지 않고 기본으로 주는 팝콘을 눈칫밥과 같이 먹었다. 그 때 궁상맞은 버릇이 들어서인지 이후로도 술은 안주 없이 먹는 게 젤 맛있긴 하다. 물론 술 잘 먹던 얘기는 옛날옛적 얘기다. 그리고 지금 술 얘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술자리 좋아하던 선배 중 하나를 문득 떠올렸다는 얘기를 하려다가 알콜 냄새 나는 샛길로 잠시 혹해서 들어갔던 게다, 주책스럽게도.

 

무튼, 술자리 좋아하던 선배가 있었다. 어느날 그 선배와 같이 학교 언덕을 내려오다가 문득 광장 너머 서쪽 하늘을 보았다. 시나브로 해거름에 붉은 놀이 장관이었다. 긴 숲 위로 넓게 펼쳐진 하늘이 술에 취한 듯(, !) 붉었다. 지금은 하늘 가득 진홍빛의 바람꽃이 일어나듯 하던 그 광경이, 한 폭의 그림으로 기억나지 않고 단지 그랬었다는 사실로만 기억에 남아있지만(아나로그가 아니라 디지털데이터로만이라는 얘기다), 어쨌든 자주 보던 놀이 아니고 아주 특별하게 근사했던 것 같다. 나는 호들갑을 떨며(술 한 잔, ?) 소리쳤다.



, 저거, 저거 좀 봐요.”

그러나 선배는 뜨악했다.

, ,,,,?”

저거, 저 놀 좀 보라고! 우와, 장엄하지 않아?!”

....., 그러니?”
 

는 그 미적지근한 반응에 기가 막혀서 선배의 어깨를 흔들어댔다. 보라고, 얼굴에 놀의 빛이 가는 화살처럼 와서 꽂히는 것 같지 않아? 일 년에 몇 번이나 이런 놀을 볼 수 있겠어, 이건 행운이지, 어쩌고 하면서.

선배는 그러나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뗐다. 나는 아쉬움에 조금 뒤쳐져서 고개를 외로 꼬고 놀을 좀더 쳐다보다가 다시 함께 걷기 시작했다. 선배는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근데, 몰랐구나. 나 적록색맹이라서 놀이 안 보여.”

....!

붉었던 놀이 어서 지고 사위가 검기울기를 바라마지않던 그 날은, 아마도 저녁나절부터 뭔가 부실한 안주를 앞에 놓고 술을 마셨을 게다. 좀 많이 마셨을 수 있다. 내 얼굴은 저녁 내내 부끄러움인지 미안함인지 안타까움인지 범벅이 되어 붉었을 테고.

 

저거 좀 봐, 우와~!
 

만하게 싸돌아다니는 걸 좋아한다. 어떤 목적지를 두고 쭈욱 걸어가는 것보다는 건들건들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우연히 마주치는 풍경을 누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어딘가 여행할 때, 나랑 같이 걸으려면 시간이 늘어져버린다. 우리 식구들은 이런 내 버릇을 참 못마땅해 한다. 특히 아들이 제일 싫어한다. 밖에 나갈 때부터 언제 몇 시에 어디로 가고, 무슨 일을 보고 몇 시에 어떤 경로로 집에 오는지가 명확해야 안심이 되는 아들은(자폐를 가진 이들의 특징이기도 하니), 내가 예고도 없이 멈춰서고 쓸데없이 옆길로 새는 것을 못견뎌한다. 특히나 더 질색하는 건 바로 이런 거다.

 

우와, 00, 저거 좀 봐, 너무 멋있지 않냐, 우와, 우와~!”

 

렸을 때부터 손을 꼭 붙잡고 걷다가 멈춰서서 이렇게 소리지르며 아이에게 감탄을 강요할라치면 아이는 뜨악한 얼굴을 했다. 어딘가 엄마가 말하는 그 곳을 쳐다보기는 해야겠는데 대체 어디를 쳐다봐야 하는지 모르겠고, 더구나 감탄까지 하라니 난감하기도 이렇게 난감할 데가 없는 표정으로.

 

마치 풍경에 감탄하는 방법을 가르쳐서 끄집어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 앞에서 집요하게 호들갑을 떨어댔었다. 그러다 어느날 문득 덤덤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저녁놀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선배 얼굴을 떠올렸다. 그 때 깨달았다. 저녁놀만큼이나 붉게 부끄럽던 그 날의 내가, 멈추지 않고 내내 아이에게 저것 좀 봐, 라면서 또 어깨를 잡아흔들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문득 선배 얼굴을 떠올린 다음부터는 아이에게 어떤 풍경을 보고 멈춰서서 감탄하기를(감탄에 열렬히 동참하기를) 강요하지 않고 슬쩍 한번 소리 질러보고는 이내 그만둔다. 흥은 덜 나지만 고약한 에미가 될 수야 없지.

중에 선배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러면 세상 풍경이 무슨 색으로 보이냐.

선배는 색맹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각기 자신이 느끼는 색깔의 미묘함이 다를 거라 했다. 내가 감탄해마지않는 깊은 푸른 색, 아스라한 청회색, 맑은 감청색, 품위있는 자주색이 정확히 어떤 색인지 잘 모르겠지만, 자기 나름대로 느끼는 색감이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때 내가 느끼는 회색이 선배가 느끼는 미묘한 여러 색깔의 결을 다 담고 있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가 보는 색깔들과 남이 보는 색깔들이 꼭 같다고 어떻게 자신할 수 있으랴. 그러면서 속으로 적이 안심했던 것도 같다. 다행이야, 내가 보는 것을 다 못 보는 것이 아니라, 좀 다른 것을 보고 있다는 말이지, 참 다행이야-.‘
 

만 인간은 단일종족이라 인간들의 눈 구조도 한결같을 것이고, 물리적 작용 또한 한결같을 것이니 내가 느끼는 색깔의 감각이 78억이 느끼는 색깔의 감각과 크게 어긋나지 않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파란 눈의 외국인이 보는 파란 물빛이 혹시나 더 파랗지는 않을까, 그는 붉은 빛이 좀 덜 뜨겁지 않을까 하고 궁금했던 내 안의 아이는 여전히 어른이 되어서도 그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지만, 나는 나대로 내 눈의 세상 속 여러 결의 빛을 느끼고, 남은 남대로 자기 눈 속 여러 결의 빛을 느끼고 살아간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나를 안심시키기도 하고 자제시키기도 한다. 나는 때때로 자주 감정을 가라앉히고 주저 않아서, 똑같은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나, 누구나 나름대로 느끼고 살아간다는 것, 그러니 내가 보는 것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애태울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 그리고 내가 보고듣고 느끼는 것을 굳이 상대에게서 찾으려고 기를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아들의 항의와 즐거운 거래
 

마전에 아들 녀석이 이렇게 나에게 항의를 했다.

 
엄마는 거실에 앉아서 티비를 보다가 시도때도 없이 이것 좀 보라고 식구들을 불러제끼면서, 왜 내가 좋아하는 게임장면을 보라고 부르면 이따가, 나중에, 라고 하면서 안 봐주나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엄마도 봐야 해요.

 

,이것은, 공평하게 주고받자는 거래의 기본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엄마의 이중적인 태도 - 아마도 권위적 판단을 지적하기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녀석 소견이 이렇게까지 큰 것이 충격적으로 놀랍고 대견하면서도, 한 대 얻어맞아서 정신을 못 차린 듯한 얼빠진 얼굴로 사과를 했다. 그리고 간사하게도 당장에 아들이 권하던 만화영화 슈퍼소닉을 얼른 다운받아 함께 보았다. 그랬는데, 재밌었다. 물론 며칠 전에 본 샹치만큼 재밌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보게 하려면 나 역시 걔가 좋아하는 것을 봐주면 된다. 우리 사이에는 이런 거래가 성립된 것이다.

 

각해보니 이것처럼 훌륭한 공정거래가 없다. 어쨌든 우리는 각자 감격해마지않는 어떤 것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 그만큼 느끼거나 못 느끼거나간에 우리는 적어도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존중하는 태도를 통해서 우애를 돈독히 할 수 있을 것이고, 혹시나 그런 기회를 자주 갖다보면 각자 자기 세계에 있는 복잡미묘한 감각의 촉수들을 일정 부분 공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물론 공유가 목적은 아니나.)

 

름다운 흑백영화  자산어보를 보면서 또 문득 그 선배 생각을 떠올렸었다. 그가 보는 세상이 이런 것일지 아닐지 모르지만, 혹시 그는 내가 자산어보를 보면서 아름답다 감탄하는 것의 열배, 백배만큼 느낄지도 모른다고. 마찬가지로 아들이 내가 가리키는 곳의 아름다움을 내가 부르짖는 방식으로 느끼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건성으로 대답하는 그 속에서 뭔가 다른 것을 움켜쥐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 일이다. 각자 자기 세상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게 또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지.

 




김종옥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문화예술특별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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