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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칼럼

초대칼럼 상단 이미지

칼럼니스트들이 여러분들께 ‘발달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건네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시선으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 계시나요?
이 게시판은 보다센터에서 초대한 각 분야의 칼럼니스트들이 여러분들께 ‘발달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건네는 곳입니다. 발달장애와 관련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칼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또한 발달장애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의 일상이야기,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의 소박하지만 통렬한 이야기와도 공감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은 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게시물 총 116

  •  오늘 퇴근은 딸 집으로 향했다. 딸이 결혼하고 김포에 살고 있는데 같이 회사에 다녀서 늘 마주치며 살지만 때로는 보고 싶다며 또 때로는 자고 가라며 붙잡는 날이 많다. 그런 이유를 돌아다보면 아들과는 4살 차이가 나지만 어려서부터 아들의 치료와 여러 이유로 외할머니께서 육아를 도와주셨던 탓에 엄마인 나에게는 사랑이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자식 중에 아픈 아이가 있으면 알게 모르게 그 아이에게 눈길 손길이 먼저 가게 마련이고, 또 혹여 더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노심초사하는 마음에 나는 더 아들에게 매달려있었다. 더구나 친정엄마가 함께 살면서 나의 힘듦을 도와주었고, 딸의 모든 것을 다 돌봐주시는 걸 믿고 의지하는 마음에 돌이켜보면 딸에게는 늘 소홀했음을 느끼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어나서부터 너무 순하고 해서 신경 쓸게 별로 없었고 아들에 비해 늘 조용히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내고 양보하면서 참 어른스럽다고 느꼈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요즘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는 <오은영의 금쪽같은 내 새끼>를 자주 시청하면서 육아에 대한 양육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할 수 있었고, 금쪽이라고 불리는 아이보다 또 다른 형제나 자매를 보는 시각에 눈을 떴다. 거기서 우려하는 문제점과 금쪽이 외 다른 아이로서 상처받는 심리 그리고 간과해서는 안 될 것들을 내가 고스란히 딸에게 느끼게 하는 지난 날이었다. 그래서 결혼하고 나이가 들었지만, 충족하진 못했던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고 유난히 ‘엄마랑 엄마랑~~’이라며 엄마와의 시간을 오롯이 둘이 보내고 싶어 하는 심리가 생겨난 듯해, 그 또한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진다.   하여튼 또 ‘엄마랑~~’ 그게 또 오늘이고, 내일은 어디 스파를 예약해 놨다며 민망스러운 수영복까지 준비했다고까지 하면서 자고 가라고 한다. 어쩌다가 자고 가라고 할 때나 놀러 가자고 할 때도 가끔은 전제조건이 붙는다. ‘엄마만’이라는 그 조건이 붙는 그날은 영락없이 ‘아빠랑 오빠는 그냥 집으로 고이 가랍신다~~’라는 뜻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오늘도 당연히 그러리라고 생각했었는지, 사무실에 같이 근무하는 남편의 행방을 묻는 "아빠는 미리 갔고?"라는 나의 말에 "그럼, 오빠는?"이라고 되물어 왔다. "아니 같이 자고 오빠는 내일 엄마랑 바로 출근하라고 해야지."라고 했다. 그때는 아직 퇴근 전이고 며칠 전 교통사고 여파로 허리, 목이 아파서 물리치료를 일주일째 받는 중이지만 호전되지 않아서 조금 일찍 나와 한의원에 같이 가보자며 가던 중이었다. "그럼 퇴근하고 오빠는 어떻게 와?""치료 끝나면 우리가 데리러 가야지."갑자기 가시 돋친 듯 "지금 막히고 피곤한데~~"라며 불편한 심기가 역력해 보였다. "그럼 어쩌니, 내가 어제 같이 자고 간다고 했었잖아." 나는 왜 늘 딸 앞에서는 작아지며 눈치를 보게 되는지, 그러면서도 혹여 나로 인해 또는 오빠를 포함해 우리로 인해 불편하고 그럴까 조심하게 되었다. 또 딸에게는 오빠이고 나는 아들로 인한 생각 차이가 저만치 느껴지는 거리로 기분이 언짢아지기 시작했다.   그 오빠는 다른 사람과 조금 특별한 나의 아들이다. 딸로서는 오빠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늘 먼저 생각해 주어야 했고 양보해야 했고 엄마와의 시간도 늘 오빠가 먼저 가져간 후 남는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을 거다. 초등학교 시절 점심시간이면 늘 교실 뒷문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그렇게 크고 자라 지금은 서로 20대 후반 아들은 겉모습은 장성한 청년이지만 아직은 많은 것에 서툴고 부족함이 많은 딸에게는 그런 오빠다. 하지만 여동생을 끔찍하게 좋아한다. 결혼을 조금 일찍 하고 남편이 생기고 둘만의 오붓한 공간에 때로 불청객으로 찾아드는 오빠가 불편했던 거다. 불편하다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신경 쓰일 만큼 많은 말을 하고 거기다 때로는 안 해도 되는 말과 요즘 아이들 말로 낄끼빠빠가 잘 안되니 가끔은 당황스러운 상황이 생기기도 하는 그런 점에서 좀 가끔 왔으면 그런 생각을 은연중에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들은 동생이 결혼한 후, 유일하던 ‘동생이 없으니 허전하다고 집이 텅 빈 것 같다.’며 감정을 여러 차례 표현했다. 그래서 가끔 동생 집에서 자고 가는 게 최상의 행복한 날로 알고 있다는 것도 딸은 안다. 그렇지만 그 후 대화는 상심이라고도 표현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너는 지금 젊었는데도 그렇게 오빠를 대하는데 더 나이가 들면 어쩌니?“"왜? 내가 늘 말했지 무슨 잘해준 게 있어야지.“"스페셜한 오빠가 너한테 할 수 있는 게 무얼까?“"뭘 바래, 몰라 난." 딸내미 속내를 듣고 나니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런 책임감과 무게감으로 오빠를 안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속으로 하면서도"남같이 대하지만 말라고~ 잘해주고 못 해 준 걸 떠나 그냥 가족이잖니, 부족한 오빠가 널 위해 뭘 해 줄 수가 있니?"하고 감정 섞인 말을 쏟아냈다."그러니까 부족한 오빠를 내가 왜?"그 말에 나도 와락 화가 나서 "너한테 책임지라고 안 해. 후견인 정할 테니 걱정하지 마."속으로는 ‘너한테 맡기지 않는다는 말 유언장에도 적어 놓을게.’라는 말까지 내뱉고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죽은 후에는 결국에는 자기가 돌보고, 책임져야 한다는 무게를 느낄 게 사실임을 알기에 도장 찍듯 하는 말은 꾹 삼켰다.   가끔은 오빠를 보면서 어느 때는 짠하고 말 안 듣고 자기 맘대로 행동하면 보기 싫고라는 말로 마음을 내보이기도 하며, 부모 같은 마음으로 오빠를 보기도 하고 사소한 것도 잘 챙겨주며 누나 같은 동생의 모습을 보였지만 때로 보이는 마음을 읽어 보면 아들의 존재와 미래를 부모인 나처럼 안고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오빠에 대한 책임감을 벗고, 너의 삶에서 행복하고 즐겨.’라고 말은 또 그렇게 하지만, 그 또한 마음에 전해지지 않는 말이 되리라는 것도 안다.   어쨌든 이 저녁에는 엄마와 동생이 어떠한 대화를 했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오늘도 "너 싫어할까 봐 양말 챙겨왔어. 발 냄새가 날까 봐."동생 앞에서는 한없이 고분고분한 딸의 오빠 나의 아들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좋~~다~~’라며 행복해한다.  세월은 흐르고 우리가 마냥 사는 건 더구나 아니니 서로에게 짐이 되지 않게 숙제를 잘 해결할 수 있게 정리 정돈을 서둘러야 할 것 같다. 정답은 찾을 수 없어도 서로를 위한 무엇인가의 결정이 필요한 때임이 오늘은 새삼스럽게 크게 다가와 마음에 내려와 앉는다.  

    게시일2023-09-06

  • 생애 최초로 시작한 장보기   전 10대 중후반부터 어머니의 부탁으로 이따금 혼자 장을 봐왔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너무 헷갈리고 제가 잘 까먹는 바람에 몇 번이나 고생했고 지금도 까먹는 건 변하지 않았기에 살짝 골치를, 썩었지만 그래도 조금씩 경험을 쌓아왔습니다.   하지만, 초반엔 싱싱한 걸 고르긴커녕, 오히려, 시들시들한 것만 고르는 바람에 상당히 골치가 아팠습니다.   그러나 몇 번이고 어머니 대신 장보는 횟수를 늘리다 보니, 조금씩이나마 눈이 밝아지며, 처음보다 신선한 걸 고르는 방법에 관해 많이 알게 됐고, 이후로는 홀로 가서 되도록 신선한 걸 집어오는 횟수가 훨씬 늘었습니다.   예를 들어 참외나 상추가 있는데, 참외는 그 과일의 단단함과 무게를 어림잡아 확인하거나 상추는 줄기 부분이 곧게 뻗어있는지를 살펴서 신선한 걸 고를 수 있게 됐습니다.   비록 경험이 쌓이고 신선한 걸 집어오는 횟수가 늘었어도 이따금 실수할 때도 있지만, 그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실수와 실패를 겪으며, 성장합니다. 자신의 성장에서 겪은 실수와 실패를 부끄러워 말고 받아들이십시오,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누구나 처음에는 어렵고 힘든 법입니다. 설거지나 밥 짓기에서도 말했듯이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기만 하면, 잘할 수 있습니다.   장애냐 아니냐는 그저 아주 얇고 투명한 벽일 뿐 모든 건 자신의 마음가짐과, 적응하느냐 못하느냐일 뿐입니다. 자신을 믿고 실천하십시오, 그럼 반드시 능숙해질 수 있습니다.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자신의 실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받아들이며, 극복해내십시오, 그럼 분명, 사회의 인식이 달라질 겁니다. 

    게시일2023-08-24

  • 장애학생이 위험하다 - 임태희 경기도교육감의 위험한 생각   1. 임태희 경기도 교육감이 어제, 교사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령 개정을 추진하겠다면서, “초·중등교육법을 개정해 무분별한 아동학대 관련 법령 적용을 배제하는 근거를 마련하고 아동복지법상 교원을 금지행위 적용대상에서 제외하겠다"고 했다. 또 "아동학대처벌법도 개정을 요구해 아동학대 범죄 신고 의무자 범위에서 교원을 제외하겠다”고 했다.   놀랍다. 교원을 ‘금지행위 적용대상에서 제외’시키고, 교원에게 아동학대 범죄 신고 의무를 없애겠다니. 정말 경기교육감 뜻대로 된다면 학교 현장은, 특히 장애학생에게 학교는 어떤 곳이 될까. 두려운 마음에 옛 기억까지 뒤섞이며 많은 생각이 두서없이 올라온다. 2. 학교란 그 사회에서 가장 평등한 곳이어야 한다. 사람은 모두 평범하고 누구나 평등하다는 진리를 온몸으로 배우는 곳이어야 한다. 그런 상징의 장소여야 한다. 그 곳에서 누구도 동등해야 한다. 누구도 누군가의 위에 있거나 누군가의 아래 있지 않는 곳이어야 한다. 학교에서 이 감수성이 몸에 배지 않으면 학교 밖 사회에서 숱한 불평등과 불의에 맞설 수도, 그것을 알아차릴 수도 없게 된다. 나는 평등하게 존엄한 인권에 대한 감수성은 언감생심, 키워낼 생각도 하지 못하는 학창시절을 지냈다. 나중에야 뒤늦게 그 시절이 얼마나 불의했던 것인가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내 아이는 그런 시절을 겪지 않을 것이라 기대했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우리는 학주를 비롯한 교사들에게 수시로 뺨을 맞고 먼지 나는 출석부로 두드려 맞았다. 부모는 내 새끼만 잘 봐달라고 교사에게 촌지를 먹였고, 소풍 때면 목욕비도 챙겨줬다. 차별의 말도, 은근하고 거북한 손길도 있었다. 그 안에서 희생된 자는 누구였던가. 가난한 집 아이들이고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이었다. 물론 촌지를 받은 교사들도 자존심을 할퀸 희생자였다고 믿는다. 본인들은 몰랐겠지만. 평등하지 않은 학교였다. 인간과 인간의 무게가 같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시절이 내 학창시절로 끝나는 것 같아서 변해가는 세월에 고마웠다.   3. 그러다 내 아이가 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그 악몽이 또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 학교를 보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교감은 장애학생 엄마들을 불러놓고, ‘어려운 애들을 맡아주니 엄마들은 선생님에게 정말 잘해야 한다’고 훈시했다. 시키지 않아도 장애학생 엄마들이 매일 교실 청소를 했다. 바뀐 시간표를 누구도 따로 알려주지 않아서 빈 교실에 멍하니 앉았던 아이는 운동장에 서서, 반 아이들이 다 있는 데에서 담임에게 혼나는 엄마를 보아야 했다. 엄마는 최대한 혼나는 것 같지 않아 보이려고, 아이들에게서 비껴서서 잇몸을 드러내며 자꾸만 웃었다. 웃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아이는 또래 아이들에게서 겪지 말아야 할 모든 일을 다 겪었다. 모래가 뿌려진 몸이 가려워 아이는 수업시간 내내 몸을 뒤척였고, 벌레처럼 몸을 꼰다며 놀림을 받았다. ‘띠껍게 군다’는 이유로 여럿이 아이를 끌고가 입 속에다 쓰레기와 침을 뱉었다. (쓰다보니 한도 없다, 따로 모아서 그 시절을 고발해야 속이 후련할 것 같다.)   학교는 악몽이었다. 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은 평등하지 않았고, 교사는 평등을 가르치지 않았다. 학교는 평등한 곳이 아니라 경쟁하는 곳이고, 평등은 경쟁에서 이기거나 유리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논리였다. 단지 두 명의 교사만이 아이들에게 인권을 부르짖었고, 그 2년 동안만 아이는 안전했다.   나는 내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내 아이 이후에 학교에 가는 아이들은 이런 일을 겪지 않았으면 하고 기대했다. 아마도 내 아이도 그렇게 바랐으리라. 그러나 학교는 여전히 장애학생에게 가혹한 장소이다.(물론 다는 아니다)   4. 교사가 목숨을 끊었고, 그 사건으로 무너진 교권의 현실이 고발되어, 온 나라가 여름 내 펄펄 끓었다. 입 달린 자는 모두 한마디씩 거들었기에 말을 보태기도 민망하다. 그런데 이 와중에 장애학생이 교사를 가장 힘들게 하는 주범으로 소환되었다. 어이없다. 단 한마디로 묻는다면 이렇다. 특수교육 대상자 학생의 어려운 행동문제가 교권 침해의 증거들인가. 장애학생은 오직 민폐이고 가해자인가. 장애학생은 그를 제외한 나머지 교육현장의 주체들과 평등한 지위를 갖고 있는가. 평등한 존재로 취급받고 있는가.   지금 단단히 잘못된 교육현장을 바로잡고 싶다면, 진단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잘못된 바닥이 어디인지 내려가 살피고, 누구도 다치지 않을 장치는 무엇인가 찾아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한결같이 머리와 가슴에 새겨두고 스스로 검증해야 하는 것은, 학교는 그 사회에서 가장 평등한 곳, 구성원 누구도 똑같은 무게로 존중받는 존재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니, 얼결에, 여론의 광풍에 슬쩍 편승해서, 이참에 눈엣가시 같은 학생인권이니 평등교육이니 하는 ‘좌파식’ 생각들을 싹 몰아내려는 반교육적 기도를 멈추라. 누구를 손쉬운 희생양 삼고 여론을 왜곡시켜서 뭔가 세상을 거꾸로 돌리려는 가짜교육전문가들은 자리를 내려놓으라. 스스로 하는 일이 ‘짓거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부끄러움을 짐작한다면.  

    게시일2023-08-17

  • 고성 삼포해변에서     아들 자조모임에 부모들이 동행했다. 서울을 떠나 강원도 고성의 삼포해변으로 이동하면서 승용차 앞좌석 부모들은 말을 조심했다. 자폐성장애인 아들들이 우리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으니 함부로 그들 얘길 하면 안 된다는 것쯤 잘 알고 있기에. 안 듣는 척 창밖을 응시하면서도 우리가 웃을 대목에선 본인들도 웃었다. 아들은 옆 좌석 영후형에게 반갑다는 인사로 상체를 들이대며 친근함을 보였다. 그런 걸 싫어하는 영후군은 몸을 창가로 피하는 모습이 우리를 웃게 했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의사소통 수단이다.  ​홍천휴게소에서 일행들을 만나 점심을 먹었다. 휴가철이라 붐비는 휴게소에서도 청년들은 점잖게 빈자리를 찾아 얌전하게 밥을 먹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어릴 적 다동이었던 아들이 생각난다. 나대지 못하도록 식탁 안쪽으로 밀어 붙여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주위의 시선이 불편하고 아들이 난리치는 게 두려워 외출을 삼갔다면 오늘같은 아들의 모습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물빛과 하늘빛이 유난히 맑은 삼포해변에 텐트를 쳤다. 어느 기업의 대형 텐트가 일렬종대로 설치되었지만 이용객은 소수였다. 뻔뻔하게도 백사장에 텐트 치는 걸 금한다는 기업 이름의 팻말을 보았다. 기업이 해변을 전세 낸 것도 아닐진대 그들은 되고 개인은 안되는 게 말이 되나 싶었다. 개의치 않고 우린 우리만의 방식으로 바다를 즐겼다.  ​물을 좋아하는 아들이 바닷물 앞에서 들어가질 않고 계속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내가 먼저 발을 적시고 허리까지 오는 깊은 곳을 갔지만 아들은 먼 산보며 딴청을 피웠다.  ​“하진아, 선생님하고 천천히 물에 들어가 볼까?”  ​불안함을 눈치 챈 선생님이 손을 내밀자 아들은 선생님의 손을 잡고 움직였다. ‘어? 쟈가 들어 오는구나’싶어 얼른 아들 곁으로 달려갔다.  ​“얼른 들어가자, 엄청 시원해!”  ​팔을 잡아 당기는 나의 채근에 놀란 아들은 뒤로 돌아 백사장으로 냅다 뛰어갔다. 아! 나의 잘못을 깨닫는데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천천히 마음을 움직이는 아들에게 성급한 엄마가 그 새를 못 참고 덤볐으니 아들은 놀랐을 것이다.  ​다시 선생님의 접근으로 아들은 마침내 바다에 몸을 담갔다. 그렇게 재미지게 놀 걸 왜 그리 뜸을 들였을까? 아들 나름의 생각과 속도를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빨리’만을 강요한 나를 반성했다.  ​한 번 입수한 아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물 위에 둥둥 떠서 하늘을 바라보며 즐거워했고 잠수를 시도하는 모습에 나는 그저 흐뭇했다. 상황에 맞게 그 순간을 즐길 수 있다는 건 성숙했다는 걸로 보인다. 하기 싫어서 그저 바라만 보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움직여서 뭐든 해본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여가를 다양하게 즐기며 사는 것, 삶의 질을 높이는 방법이지 않겠나.     ​아들이 바닷속에서 노는 걸 보다가 중년의 부부가 청년의 튜브를 밀어주고 끌어주는 모습에 시선이 멈췄다. ‘아, 장애인 가족이구나’ 직감하면서 아들 보는 척 자꾸 눈길이 그쪽으로 향하는 건 어쩔 수 없어 결국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아드님이 즐거워 하네요. 제 아들은 스물여덟인데 아드님은 몇 살이세요?”  ​“아네, 스물다섯이요. 어디 다니세요?”  ​“저흰 평생교육센터 다녀요, 아드님은요?”  ​“주간보호센터요, 평생센터는 5년이 기한이죠?”  ​“네, 그래서 내년에 다른 곳 알아봐야 해요.”  ​짧은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남편되는 분은 말없이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혼자 아들 키우는 엄마인가?’라고 묻는 듯 했다. 나의 상상력은 엉뚱해서 가끔 혼자 웃게 하는 맛이 있다. 보아하니 남편보다 아내가 아들 키우는 데 더 적극적인 모습이어서 뇌병변 아들 건사하느라 마음보다 몸이 더 힘들었을 것 같았다. 뇌병변 자녀의 부모들은 내가 아는 대부분 허리와 손목이 다 망가져 고생하고 있었다. 자폐인 부모는 자녀가 많이 움직여서 못 움직이도록 붙잡고, 뇌병변 부모는 이동이나 거동을 지원하느라 힘든 걸 예전에 서울시청 농성에서 알았다. 만나서 대화하지 않으면 장애인 부모라도 서로의 고충이 다름을 알지 못한다.  ​청년은 경직도 경련도 없어 보였고 걷는 것도 가능하니 그리 나빠 보이진 않았다. 가족이 함께 여행하는 건 남편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한데 그 가족의 휴가가 행복해 보였다.     ​어딜 가든 나의 시선을 멈추게 하는 대부분은 장애인이다. 신체장애는 무심히 지나치지만 자폐나 지적장애는 한 번 더 보게 된다. 물론 그들이 모르게 곁눈질하지만 알아도 그냥 서로 외면한다는 걸 느낀다. 동변상련이라선지 동지라는 유대감은 나쁘지 않고 따듯하다.  ​비장애인들의 시선도 동정이나 시혜보다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따듯함이면 좋겠다. 자폐인의 독특한 언행에 때로는 무관심의 친절이 우리를 편하게 한다.  ​다함께 잘 사는 사회를 바라는 건 모두의 바람이라 여기며 삼포해변으로의 나들이가 물놀이로 행복했던 아들을 담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게시일2023-08-14

  • 취업의 종착지 아들은 돌아 돌아서 결국은 아빠 회사에 입사했다. 졸업 후 다른 몇 곳에 취업해서 3개월~6개월 근무를 거듭했던 게 2018년부터였던 것 같다. 그동안 취업의 경험을 돌아보면 어떤 곳은 적성에 맞기는 했지만, 장기근무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또 어떤 곳은 혼자서 긴 시간을 지켜야 하는 업무로 지겹고 힘들어했다. 그러면서 아들의 성향에 맞는 일자리는 어떤 것이냐는 기준이 생겨났다. 아들은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로는, 일단 혼자서 근무하는 것보다는 여럿이 함께 근무하는 것에 흥미를 더 느끼고, 정적인 것보다는 움직임이 많은 활동적인 것 그리고 스스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에 관심을 더 많이 가지는 듯했다.그런데 장애인 일자리는 대부분 환경정리(미화) 등의 사무실 청소나 식당 카페 등 설거지나 테이블 정리와 같이 간단하지만 그래도 일반인이 꺼리는 일자리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혼자서 묵묵히 그 일을 해야 하는데, 종종 싫증을 내기도 하고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사무보조로 파일 정리를 해보기도 하고 배운 골프를 가지고 초등학교 저학년생들의 스윙을 도와주는 골프(강사) 보조도 해보고 아름다운가게 등에서의 옷가지와 비품의 정리 정돈을 해서 상품 가치를 높여주는 포장과 진열하는 업무도 해보고 건물 내·외의 환경미화도 해보고 하면서 아들은 그 일자리가 힘들고 자기 능력은 안 되지만 더 좋고 좀 더 쉬운 그런 직업을 가지고 싶어 한다는 걸 평소의 생각으로 가늠할 수 있었다. 그나마 하루 4시간씩의 단기 근로를 해서 받은 급여로 적금도 들고 예금도 해서 필요할 때 자신의 힘으로 노력해서 받은 돈으로 선물이라며 엄마 아빠 때로는 친척 조카들에게도 뽐내며 가끔은 용돈을 챙겨주는 모습을 볼 때는 기특해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런데 늘 아빠 회사에 출근하겠다고 아빠한테 말을 했지만, 또 다른 곳에 출근해서도 자기는 아빠 회사에 출근하고 싶다고 말을 하니, 언제나 그만둘 수 있다는 모습으로 보여서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을 게 뻔했다. 그래서 지금껏 그래도 여러 차례 경험했으니 더는 아니라고 할 게 아니고 그것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기로 하고 작년 가을부터는 아빠 회사에 정식 직원으로 입사했고 현재 근무 중이다.아빠 회사는 김포에 있고 그라비아 인쇄 회사인데 그라비아 인쇄는 주로 비닐 원단에 각종 제품의 디자인을 인쇄하는 곳이다. 잉크의 조색을 통해 디자이너가 원하는 명도 채도가 완벽한 색감으로 샘플대로 제품을 완벽하게 인쇄하는 과정이 중요했다. 화장품 마스크팩의 파우치, 식품회사의 비닐포장지, 수산물 농산물을 담는 비닐 파우치 등 디자인을 통해 동판을 만들어 인쇄과정을 거치면 무지의 투명 비닐이 각종 색깔을 입고 디자이너가 원하는 그 색감의 제품으로 태어난다. 제1공장에는 사무실과 인쇄 현장이 있고, 제2공장은 1차로 인쇄한 비닐을 2차 공정인 합지를 해서 오면 그다음 단계의 공정으로 파우치 형태의 제품으로 만들어 내는 가공을 하는 곳이다. 아들은 거기에서 대리라는 직함으로 인력사무실에서 일을 하러 나온 외국인 근로자들을 관리하고, 그 사람들이 제품의 불량을 선별하고 할 때 상자도 옮겨다 주고 또 상자에 테이핑 또는 포장하는 일도 하며, 현장에서 필요한 소모품도 점검해서 유·무를 사무실에 알려주기도 하는 업무를 맡았다. 처음에는 무엇을 할지 어색해하며 한자리에 서 있기도 하고 무엇을 하라고 알려주는 것만 하는 듯했었다.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난 지금은 직원으로서 한몫을 잘 해내고 있다. 가공하는 사이사이에 자투리로 나오는 비닐을 수거하는 것은 물론 하루 종일 빗자루, 물걸레질로 구석구석 먼지를 훔쳐내고 불량 샘플은 가지런히 모아두었다가 인쇄부서에 전달해서 똑같은 불량이 나지 않도록 하는 데 도움도 주고, 가공기 9대가 돌아가면 매우 시끄러워서 그리고 잠시 집중을 안 하면 위험할 수 있음도 감지해서 "핸드폰 사용금지"라는 스티커를 뽑아서 기계 앞에다 붙여놓기도 했다. 선별하는 아르바이트 직원에게도 작업 도중에는 말을 삼가야 능률도 오르고 선별을 집중해서 할 수 있는 거라며 뼈 있는 소리를 날리는 등 관리자로서 책임감 있는 모습도 보여주고 열심히 자기 임무와 할 일을 찾아가는 모습에 흐뭇해지기도 한다. 때로는 월급날에 가까이 있는 마트에 몰래 가서 아이스크림을 한 보따리 사 와서 나눠 주기도 하고 고생한다며 외국인 근로자를 점심시간에 불러내어 그 나라 음식을 사주기도 했다.점심시간이면 휴게실에서 식사하는 데, 식사 시간 30분 전이면 어김없이 미리 에어컨을 가동해 놓는 센스있는 행동도 한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생겨나는 눈썰미인 것 같다. 쓰레기 분리도 아들이 오기 전에는 잡동사니들을 마구 한데 다 모아서 일반폐기물로 버렸는데 그 모습을 보고는 뒤 커다란 비닐봉지에다 캔·플라스틱이라고 적어 와서 붙여놓고 직원들에게 분리수거를 확실하게 철저하게 하라고 말하기도 하고 플라스틱 물병도 띠지를 깨끗이 떼어 낸 다음 알뜰하게 잘 분리해서 모으고 있다. 그리고 가공 원단을 감아서 온 지관을 재활용업체에서 수거해 가면서 얼마의 돈을 주곤 하는데 보통 사람이었다면 모른 채 그냥 주머니에 넣고 말았을 수도 있지만 아들은 회사물건을 팔아서 생긴 돈이라며 한사코 회사경리에서 건네주는 것을 보면서 남들은 조금 느리고 어눌하다고 이상한 시선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거짓 없고 순수한 영혼임에 감사하게 된다.얼마 전에는 24살의 남자 신입사원이 들어 왔는데 그때도 새로운 직원이라고 입사를 축하하고 잘해 보자며 불러내어 점심과 커피를 대접하는 모습이 때로는 계산적이지 못해 손해 보는 듯 해도 누군가를 생각해주고 챙겨주는 마음은 우리에게도 본보기가 된다. 그리고 신입사원이 어린 나이인데 나이 든 형이나 사장님 앞에서 담배를 마주 보고 피우는 모습이 내 눈에도 거슬려서 나도 한마디 할까 하다가 참았는데 그다음 날 아들도 그 느낌을 받았는지 멀리서 지켜봤더니 그 직원을 불러서 "00야! 일루에 와봐 할 말 있어. 사장님이나 어른들 앞에서는 담배 피우지 마~~"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왜요?"라고 되묻는 그 직원을 향해 "그거는 예의 없는 행동이야."라는 말을 하는 걸 보고 그래도 형다운 모습과 직장에서 상급자로서 눈에 벗어나는 행동도 깨우쳐줄 줄 아는 모습을 보고는 많이 성숙하고 성장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제 20대 후반 30대를 지나 40대~50대가 되었을 때 부모가 없는 일상을 먼저 생각해 보면 답답하고 암담한 모습으로 늘 불안한 미래의 아들이 가장 큰 숙제이고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장애 부모들의 염원은 자식보다 하루 늦게 죽는 게 소원이라는 한결같은 생각들이 나의 가슴에도 늘 가시처럼 박혀 있는데 조금씩 그리고 한 걸음씩 나아지고 발전하는 모습에서 그나마 한시름 놓을 수 있고 또 여유를 가지게 된다. 오늘도 작업 때 "찔림·베임 주의"라는 스티커를 프린터 해와서 붙이며 직원들에게 일일이 조심해야 한다고 일깨워주고 조심스럽게 작업을 하라고 알려주는 모습에서 여느 직장에서 볼 수 있는 관리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니 세월이 약이 되고 대리라고 불리는 그 직함에서 완장의 힘이 주는 책임감과 자존감의 상승으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그래도 지금까지 짧게 근무했지만 몇 년에 걸쳐 장애인 일자리 여러 곳에서 배우고 경험한 도움이 컸다는 생각이 든다. 출근해서 8시간 동안 하루에 2만 보 이상을 걸었음이 걷기 앱에서 확인이 되는 걸 보면 공장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완장에 부여된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러면서 돌고 돌아 정착한 아빠 회사에서 자기 몫을 다하며 하루하루 조금씩 더 발전하는 계기가 되어 홀로서기의 발판이 되기를 조용히 염원해 본다.  

    게시일2023-08-11

  • 더위 먹은 세상, 장애학생이 위험하다   1. 비극의 시작   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교사가 자살을 했다. 교사가 된 지 2년차, 새내기 젊은이다. 이 충격적인 사건으로 온 나라 여론이 날씨만큼 뜨겁게 타올랐다. 처음엔 강남 부촌 자제들이 많이 다닌다는 학교라고 해서 갑질로 괴롭힌 유력자 학부모가 누구냐고 난리였다. 그러다 갑자기 갑질 학부모 뒤지기는 쑥 들어갔다.   전국의 교사들은 무참히 침해 받은 교권을 세우라고 들고 일어났다. 문제제기는 당연하고 자연스런 순서다. 그런데 이후 양상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무너진 교권의 원인으로 학생인권조례, 진보(라 쓰고 좌파라 읽는다)교육, 진상 학부모들이 지목되더니, 급기야는 장애학생과 그 부모들이 불려나왔다. 이 광풍에는 인터넷 여론, 언론, 심지어 교육감과 장관까지 가세해서 입 달린 사람이라 경쟁하듯 무책임하고 거칠고 한심한 소리와 진단들을 쏟아냈다.   민감하고 자극적인 사건으로 촉발되었으니 온갖 견해와 주장이 폭주하는 건 당연한 일이긴 하다. 세상 일이란 게 이런 광풍의 시간이 지나야 그 안에서 반성과 정제된 소리가 비로소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제된 소리를 기다리는 중에 느닷없는 탁류가 세상을 삼킬 듯이 쏟아져 흘렀다. 이번에는 특수교육 현장이다.   주호민 씨가 지난해 자기 아이를 정서적 학대한 것으로 의심되는 특수교사를 고발했고, 그 교사는 직위해제된 채로 재판 중이다. 그 교사는 다만 훈도하였을 뿐이라고 억울함을 호소했고 그를 옹호하는 이들은 탄원서를 작성했다. 사실여부는 여기서 멈춰있다. 진위와 그에 따른 처벌의 경중은 법원에서 판가름 나겠지만, 법이라는 도구의 한계는 모든 진실을 다 드러내거나 피차간 모두의 마음을 속시원하게 다 헤아리지도 못한다. 법은 극히 최소한의 갈등 정리만 할 뿐, 화평탕탕하게 해소하는 건 사람의 일이다.   그럼에도 성부르게 이 사건이 초등교사의 자살로 촉발된 교권침해 논란과 한 몫에 묶인 것은 매우 고약한 일이다. 대체 누가 이 사건을 학부모 갑질의 상징인 양 묶어 내놓았는가. 누가 어떤 의도로 그랬든지 이 뜨거운 여름날 근 보름여 몰아치고 있는 광풍은 저열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다. 나는 주호민 씨가 스스로 작성한 입장문도 보았고, 해당 교사나 주변 사람들이 썼다는 탄원서 등 문건도 보면서 나름대로의 판단을 하고 있지만, 여기서 그러한 판단에 이르기까지의 긴 논리적 과정을 밝힐 필요는 없겠다. 다만 학대냐 아니냐에 대한 무수한 판단들이 터져 나오면서 그동안 매우 엄격하게 지키려고 무진 애를 썼던​ 장애학생 인권이 흔들리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에 큰 위협을 느끼며 깊이 분노한다.   2. 갑질하는 장애학생 부모?   학생 훈도와 학부모 대응에 어려움을 겪는 요즘 교사들에 대한 공감 속에서, 그 중에서도 고역 중의 고역으로 특수교사의 처지가 부각되더니 설리번 선생님 같은 특수교사들을 괴롭히는 주범으로 장애학생들이 불려나온 것은 비극이다. 그 아이를 어렵게 훈도하는 교사들에게 그 부모들은 위협과 고발을 일삼는 진상 중의 진상, 갑질 중의 갑질로 대응하는 존재가 되었다.   물론 무리하고 무례하게 구는 부모들이 왜 없겠는가, 분명 있다. 또한 훈도와 학대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교사도 있고 학대를 은폐하고 있는 교사도 있다. 악당을 가려서 찾아내야 한다면 진상 갑질 부모도, 진정성을 잃은 교사도 있고, 양쪽에 끼어서 조정의 의무를 하지 못하고 비겁하게 뒷줄로 빠져있는 학교 관리자도 있고, 이 못지않게 문제를 방치해왔다가 허둥지둥하고 있는 교육행정 당국도 있다. 이것을 외면하고 단순한 악당 뒤지기에만 몰두하고 있는 여론은 딱하고, 이에 편승해서 댓글 받아쓰기 수준에 있는 언론은 한심하다. 아니, 한심한 작태라기 보나는 아예 범죄행위에 가깝다. 하다하다 최근엔, 정작 교사에게는 털끝 하나 못 건드리게 하면서 집에서 자기 자식 때리는 부모도 있다면서, 대체 핀트가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교수까지 생겼다.   언론이 가세한 이 광풍이 고약한 건, 교육을 걱정하는 척하고는 있으나 실상은 장애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되었거나 그것을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교사와 급우들을 무시로 때리고 할퀴고 꼬집고, 머리채를 휘잡고, 대소변도 못 가리고, 말도 못하면서 욕은 하는 파렴치한 가해자일 뿐이고, 그 부모들은 제 자식이 무도한 가해자인 건 외면한 채 교사를 내 아이를 위한 노예로 부리려 하는 염치없는 사람들로 간주된다.   이렇게 규정해 놓은 그들에게 장애를 가진 아이는 두 부류다. 학교에 있어서는 안 되는 문제아이와, 자기들이 수용할 정도가 되는 불쌍하면서도 고분고분한 장애아이. 이제 봐줄만한 정도가 아닌 애들은 학교와 교실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왜 굳이 통합학급에 있으면서 다른 애들에게 피해를 주냐, 특수학교로 가라, 학교를 떠나라, 홈스쿨링을 해라.   3.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이게 얼마나 무서운 생각을 담고 있는가. 장애는 남에게 피해를 주니 보통의 ‘일반’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마땅하고, 장애인은 인격적으로 무시해도 되는 예외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분노와 충동행동으로 어려움을 겪는 장애 학생이 있다면, 그 다음 순서는 무엇인가. 그것을 혐오하고 피하거나 강제로 제압하는 게 아니다.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그런 행동으로 괴롭고 힘들다. 그것을 위험하지 않은 방식으로 분출하고 해소하게 누군가 도와야 하지 않나. 그리고 스스로 조절해갈 수 있을 때까지 전문가와 조력자가 붙어서 지원해야 하지 않나. 그리고 학급에 함께 있는 비장애학생들에게 장애의 어려움을 이해시키고 서로가 서로를 돕는 방식을 함께 모색해야 하지 않나. 그것이 학교이고 교육이 아닌가. 그동안 장애학생에게 제대로 된 맞춤형 통합교육을 하기나 했던가. 그 안에서 천덕꾸러기 취급 받았던 장애학생들은 가해자가 아니고 피해자가 아니었던가. 지금 이 나라는 피해자를 보고 가해자라 손가락질하며 인격을 폄하하고 인권을 훼손시키고 있는 이 광풍을 막지 않고 있다. 자기 대신 가해자로 지목된 장애 학생 뒤에 서서 무슨 염치없는 계산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지금이 방학인 게 오히려 다행스럽다. 방학이 아니었다면 이런 분위기에서 통합학교 통합학급에 있는 장애학생들은 어떤 취급을 받고 있을까. 온 사회가 ‘존재가 민폐’라고 손가락질하는 상황에서, 장애학생을 괴롭히고 따돌리며 혐오의 말을 쏟아내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 없는 아이들이 늘어나지 않았을까.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늘어나지 않았을까. 왜냐면 저들이 ‘틀렸고’, 저들이 잘못이고, 저들이 가해자이기 때문이라고 항변하면서.   그 속에서 장애를 가진 우리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더 가혹해진 교실에 앉아있어야 했을 것이다. 눈을 흘기고 조롱하고 눈에 띄지 않게 괴롭히며,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고, 귀찮아 하는, 절대로 친구로 인정하지 않는 친구들 틈에서. 내 아이가 겪은 12년 동안의 악몽처럼.   장애학생 교육권 운동이 시작된 지 이십 년이 흘렀다. 그동안 더디지만 우리 교육의 현장을 차근차근 바꿔왔다. 이제야 비로소 학교에서 우리 아이들이 숨이나마 제대로 쉬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2023년 폭염의 여름, 장애학생의 교육권은 심각한 위기에 놓였다.   이 모든 일의 단순한 해법을 장애학생 부모도 알고, 아마도 특수교육 현장의 특수교사도 알고, 학교도 알고, 교육청도 교육부도 안다. 언론도 모르지 않을 게다. 잘 모르는 이가 아는 체하려고 몰려와 무언가를 공격하고 있다면 그는 어리석거나 심성이 고약해서이겠지만, 알만한 주체들이 알면서도 이 여론의 광풍을 막아내고 돌리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바로 악당이다.   악당은 가장 약한 자를 악당으로 둔갑시키는 비겁한 술수를 쓰는데, 지금은 장애를 가진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내몰렸다. 세상이 더위를 먹어도 너무 심하게 먹었다. 

    게시일2023-08-04

  • 생애 최초로 시작한 밥 짓기   전 20대가 되고부터 처음으로 밥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론상으론 밥을 지을 줄 알아도 실제로 지어보니 그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걸핏하면 물의 양 조절에 실패하고 씻은 물을 버릴 때 쌀이 대량으로 섞여 나오는 바람에 쌀이 많이 낭비 됐습니다.   어느 정도 경험이 쌓여도 죽이 되거나 죽밥이 되는 통에 마음이 편치가 않았고 최악의 경우 쌀을 불리는 정도에서 끝났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다 보니, 서서히 감이 잡히며, 쌀만 불리는 정도에서 끝나는 일은 좀 드물었고, 이따금 진밥이나 죽밥이 되는 일도 잦아들었습니다.   또한 밥을 짓는데 다양한 쌀을 사용하고, 쌀 외에도 현미나 콩 따위를 섞어서 사용하다 보니, 이전보다 맛있고, 건강한 밥을 만들 수 있게 됐습니다.   밥을 지을 때의 쌀은 같은 백미라도 물의 양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이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기에, 모두가 익숙해지기만 하면, 혼자서도 밥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밥을 짓게 되면 가족들에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며, 가사 중 하나를 도맡는 느낌이 들어서 마음이 뿌듯하고 한결 의젓해진 것 같았습니다.   장애가 있어도 밥을 짓지 못하란 법도, 그러지 말란 법도 없습니다.장애인도, 충분한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면, 스스로 쌀을 씻어서 밥을 지을 수 있습니다.중요한 건 장애냐 아니냐가 아니라 적응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자신을 믿고,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의 마음가짐이 여러분의 인생을 바꿀 수 있습니다.  

    게시일2023-08-02

  • 지나온 학교생활   아들은 초등학교 중학교를 일반 학교 일반학급에서 수업받았다. 그러면서 일 년 행사의 시작은 늘, 학기 초가 시작되면 학사일정에 앞서 가장 먼저 담임선생님이 정해지는 그날이 두근거렸다. 어떤 분이 담임이 되느냐에 따라 그 선생님의 장애 이해도와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에 의해서 1년이 어떻게 정해질지 감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담임이 정해지면 그다음 순서로 선생님을 찾아뵙고 아들에 대한 history를 하나도 빠짐없이 녹음테이프 틀어 놓은 것처럼 되뇌었다. 아들이 1년을 잘 보낼 수 있게 하려, 때로는 탐탁하지 못한 눈빛과 때로는 왜 하필 우리 반이라는 불편한 시선을 극구 거부하며 그저 잘되리란 잘할 수 있으리라는 그렇게 초·중학교의 시작을 되풀이하곤 했다.1학년 때는 전교조 선생님이라 그런 편견이 없으셨고 한 반에 있던 짓궂은 아이 하나로 인해 아들이 피해를 본 적이 있었는데, 나는 상관없다고 했음에도 그 아이와 그 아이의 부모님을 함께 사과하도록 도와주셨고 감사의 선물 하나도 괜찮으시다며 극구 사양을 하시며 학급에서 모둠활동에도 적극 참여하기를 원하기도 하셔서 처음으로 시작하는 학교생활은 나름 잘 할 수 있었다.2학년 때는 담임선생님이 처음 발령받아 부임한 곳이 그곳 초등학교였다. 때 묻지 않은 열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시고 도움을 주려고 했지만, 교단에서의 경험 부족 때문인지 아들과 의사전달에도 의사소통도 잘 이루어지지 못해서 둘 다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그 한 예로 아들이 정말 배가 아파서 수업 중에 화장실 가기를 원했는데 수업 방해라는 이유로 화장실 가는 걸 허락하지 않아서 결국 실수하게도 하고, 굳이 선생님 책상 옆에 아들의 책상을 붙여놓고 옴짝달싹도 못 하게 하는 과한 관심을 보여 주시기도 했다.3학년 때는 퇴직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연세가 드신 선생님이었다. 엄마들이 보는 앞에서도 아이들이 점심시간에조차 눈에 조금 벗어난 행동만 해도 등짝 스매싱을 해대고 그때는 급식 도우미를 학부모님들이 도와주었는데 급식 후면 남은 반찬에 점심을 함께 먹는 게 일반적이고 보통 있는 일이었지만 그 선생님은 그것마저도 금기하시는 특별나고 악명(?)높은 선생님이셨다. 그분은 장애아를 둔 나한테 유난한 관심을 주시면서 반 대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반대표 역할을 짊어지게 하셨는데 학교행사 때 교장 선생님 방에 꽃꽂이를 비롯해 그 외에 사소한 필요한 주문을 전해왔다. 돌아보면 힘들게 하는 아들을 대신해서 엄마가 물질적으로나마 반을 위해 도움을 주라는 뜻이었음을 시간이 지난 뒤에야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은 문득 면담 때 아들로 인해 반 평균이 다 깎였다며 하소연하셨다. 아들이 어떠한지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반 평균을 운운하는 말에 너무도 놀라서 이번에는 강한 어조로 그러면 시험 날 결석을 해야 하느냐고 조금 불쾌한 심기를 표시 하고고 집으로 왔다.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집으로 전화하셨대서 무슨 일인가 싶어 다시 찾아갔더니 내가 한 말에 조금 그러했던지, “00 어머니 정말 존경하고 제가 절만 믿는 분입니다~~ 그리고 00을 위해서 제가 매일 기도합니다.”라며 내 손을 잡아주기까지 하는 황당한 상황을 만들었다.5학년 때는 무관심한 선생님. 아들이 소풍을 갔다 왔는데 입고간 점퍼가 다 찢어져 있을 때도 무념무상으로 대처했고 결국 상대 아이 집을 직접 찾아가겠다는 말에서야 겨우 아이 엄마 전화번호를 전해주는 하여튼 무관심과 안일한 사고의 선생님 탓에 있는지 없는지 존재감마저도 확인되지 못하는 시기가 지나갔다.6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은 애정으로 아들을 신경 써주는 게 눈으로도 보였다. 학과 수업을 따라가기는 어려웠지만 예체능 시간이면 꼭 학생들과 함께 축구 경기든 어떤 게임이든 동참시켰고 교실 뒤편 학생들의 작품이 걸리고 하는 곳에도 어설프지만 이름을 붙여 함께 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중학교 진학 시에도 함께 고민해 주시며 특수학교로의 진학에 대한 내 생각을 되새겨 보고, 최종적으로 겪어본 후에 옮겨도 괜찮으니 일단은 일반 학교에서 그래도 함께 어울려 지내기를 조언해 주셨다. 결국 선생님 생각이 깊어 그 의견에 일반중학교로 입학했다.1학년 때의 친절한 담임선생님 배려로 무탈하게 지냈다. 감사의 표시로 어느 날에는 귀걸이 하나를 선물해 드렸는데 다음날하고 와서는 아들에게 이쁘냐고 엄마가 선물 주셨다고 하며 사소하지만, 아들과 관계 형성을 위해 많은 정성을 보이셨다. 친구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작은 일들도 분배해주면서 누군가를 도와주는 기쁨도 나눌 줄 아는 방법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하지만 2학년 때 선생님은 또 정반대의 성향이라 몹시 못마땅한 내색이 역력했다. 조별 모임이나 외부 체험에도 누군가 챙겨주어야 하는 불편함을 핑계로 불참을 넌지시 종용했다. 1학년 때 선생님의 “어머니께서 함께 오셔도 되니 꼭 참석하세요.”라고 했던 일과는 너무도 상반되어서 결국에는 그 선생님이 추천해주시는 대안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전학이 아니고 학적은 그대로 본 학교에다 두고 따라가지 못하는 학습 부분에서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학교였다. 대안학교는 영등포 신길동에 있었다. 거기는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 하는 일반 학생이나 발달장애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처음 등교 때에는 자유자재로 때로는 책상이 없는 바닥에서의 수업 등 낯선 교실 풍경에 쭈뼛거렸지만, 차츰 적응하면서 도봉에서 영등포까지 혼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등하교하는 등 학교 수업 뒤에 새로이 경험하는 일상들에서 많은 변화가 시작되었다. 늘 어디를 가든 함께 이동하던 모습에서 차츰 시내버스 지하철의 이용 방법도, 환승 방법도 터득했다. 전까지 일반 학교에서는 볼 수 없었던 비슷한 학생들끼리 조금은 어눌해도 서로의 감정과 생각들 그리고 하고 싶은 말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대안학교 수업 대부분이 체험을 위한 익힘으로 서로 함께 늘 모둠활동과 조별 활동으로 야외수업과 여행 등에서 듣고 보고 느끼고 만드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을 나누고 도와주며 친구라는 개념도 형, 동생이라는 선후배가 아닌 가족 같은 개념으로 더 친근해져서 학교생활이 활기차게 변했다. 일반 학교의 선생님에서 느끼는 거리감도 좁혀지고, 함께 뒹구는 체험학습이 대부분이어서 의식주를 함께 같은 공간에서 나누는 시간이 많은 까닭에 일반 학교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사제 간의 정도 돈독해지는 느낌이 들었다.중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3년 과정을 마치면서 친구들도 생기고 형, 누나, 동생이라며 전화도 연락도 하게 되는 즐거운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느껴졌다. 일반 학교에서 버거운 학사일정을 벗어나 자유로운 방식의 학사일정이 성장하는데 커다란 계기와 기회가 된듯했다. 학기 말에는 발표회가 있어서 그동안 길고 닦은 여러 방면에서의 소질을 발휘하는데 누구는 사회를 보고 그 진행에 따라 연극도 하고 단체 안무도 하는 등 그 재미 또한 모든 학부모의 가슴에 학기 말이 기다려지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대안학교로 옮긴 후 처음 1주일간 제주도로 체험 여행을 떠날 때는 난생처음 아들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어서 온 가족이 노심초사했던 기억도, 그리고 돌아오는 날은 이산가족 상봉처럼 감격의 눈물을 흘렸던 기억도, 지금 생각하면 많은 추억거리가 되어서 새삼스러운 느낌으로 전해온다.졸업하고 나서도 이제는 20대 후반이지만 그때 그 친구들이랑 연락도 하고 일상을 공유하는 모습을 본다. 처음 일반 학교에서 대안학교로 옮겨 갈 때 혹시라도 적응을 못 해서 여기도 저기도 소속감 없이 길을 잃어버릴까 염려했던 마음이 후회스럽지 않을 만큼, 아들은 대안학교에서의 자유를 몸소 체험하며 한걸음 성장하고 성숙했다. 지금도 아이들의 진로와 학교의 선택에 힘들어하는 부모님이 계시리라고 본다. 경험을 통한 대안학교의 장점을 공유하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의 골프에 입문하게 되면서 골프대학을 문을 조심히 두드려보았고 당시 골프대학 학장님이 골프와 장애학생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많아서 면담할 수 있었다. 벌써 장애학생인 선배 한 명이 입학해 골프를 전공하고 있어서 아들이 진학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수시 입학전형을 통해 입학하게 되었다.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고, 한 번도 없었던 일이라 처음 기숙사에 들어가는 날은 얼마나 떨리고 또 설레기도 했다. 짐을 싸서 기숙사에 혼자 두고 오는 발걸음은 얼마나 무겁던지 함께 생활하는 룸메이트에게 매달 장학금 비슷하게 전달해주고 도움을 받았는데, 일주일마다 금요일 수업이 끝나면 학교가 있는 횡성에서 원주까지는 셔틀버스를 타고 원주에서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하면 마중을 가곤 했다. 그 일주일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길고 길던지…ᆢ 학교에서 학과장님이 여자교수님이셔서 엄마라고 부르라며 다독이고 챙겨주었고, 남자교수님들도 형이라고도 부르라며 아들에게 학교에 잘 적응하기를 도와주었다. 처음 1주일 학교생활 후 금요일에는 집에 와서 색다른 곳에서의 학교생활과 기숙사 생활에서 어색함과 긴장감으로 심리적으로 몹시 불안하게 보였고 일요일 오후 다시 학교로 들어갈 시간이 되면 예민해져서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사소한 것에도 짜증을 냈다. 그래서 첫 일 주일은 조마조마했다. 혹시나 학교로 다시 가지 않겠다고 하는 비상사태가 생겨날까 봐 조심하며 아들의 심기를 살폈는데, 싫은 모습이 역력했지만, 잠실에서 학교로 가는 버스에 오를 때는 “다녀오겠습니다.”라며 순순히 차에 오르는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쉬곤 했다.학교생활은 교양과목과 매주 한 번의 라운딩, 골프의 기초 그리고 체력 보강을 위한 헬스, 필라테스 등으로 이루어졌고, 교내 연습장에서는 수시로 숏게임을 비롯한 자율적으로 연습을 한다고 했다. 염려와는 달리 교수님들의 관심과 배려로 한 학기만 룸메이트의 도움을 받았고, 그 후부터는 다른 학생들과 생활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저녁이면 함께 치킨을 시켜 먹었다고 나누어 내기 때문에 돈을 보내달라기도 하는 등 조금씩 학교생활에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스크린골프를 함께 치기도 하고, MT를 함께 떠나기도 했으며, 겨울이면 필리핀으로 한 달간 전지훈련을 떠났다 오기도 했다. 그래서 그 덕분으로 지금도 온 식구가 함께 라운딩을 즐길 줄도 알고 때로는 엄마 아빠의 스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나름 조언을 하기도 하는 시간이 왔다.   지나온 학교생활은 늘 처음은 마음 졸이며 시작했지만, 차츰 적응하면서 또 즐기게 된 시간이 오니 감사할 따름이다. 이제 또 다른 시작, 사회생활도 학교생활을 지나왔던 것처럼 긴장과 또 설렘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우려와 염려를 지나 어느 시간에는 또 한걸음 발전하고 성숙해져서 맡은 바 자기 일을 잘할 수 있는 능력도 책임감도 조금씩 생겨나는 것을 볼 수 있으니 이 또한 더 감사할 일이다. 늘 그대로인 듯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콩나물시루에 매일 흡족한 물을 주면 어느 날 쑥~자란 콩나물이 보이듯이, 분명 그렇게 잘 자라나리란 생각으로 매일 사랑의 물, 정성의 물, 믿음의 물 그리고 가끔 채찍질도 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아들에 환희의 박수를 보낸다. 울 아들 화이팅!  

    게시일2023-07-28

  • 근로지원사를 통해 본 서로 통한다는 의미​ 뉴스에서 장애 전담 어린이집 교사들이 어린이들을 폭행하고 학대, 무시하는 등 도를 넘는 행동을 뉴스로 접하면서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희로애락은 태어나면서 가지게 되는 기본 감정이고 감정에 불균등이 일어날 때 불편함과 불쾌감을 당연히 느껴야 하는데, 사람의 기본 감정까지도 무시한 채 아이들을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장애 부모로서 지켜보는 것은 여전히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장애인을 대하는 편견과 무시가 너무도 큰 슬픔으로 전해졌다.아들 또한 어렸을 때부터 또 성인 된 지금까지도 현실에서 마주하게 되는 커다란 벽과 견뎌야 하는 낯선 시선들과 부딪히므로 암담함을 느끼면서 살고 있기에 수많은 장애인이 앞으로도 느껴야 할 수많은 힘듦과 어려움을 단편적으로 보는듯해서 가슴이 더욱 아팠다. 또한 수많은 장애인과 그 부모들이 풀어야 할 과제 중의 하나인 것을 느끼게 했다.아들이 학교를 졸업하니 또 다른 숙제가 시작되었다. 어렵지 않은 직장에 하루 몇 시간의 일거리가 있으면 경험으로 사회일원으로 성장할 계기가 될 것 같았다. 그때 우연히 지인을 통해 카페 근무를 시작으로 그다음 ○○슈퍼에, 그 후에는 장애인고용공단을 통한 취업에 도전했고 그때에는 근로지원인 제도가 있다는 걸 알아서 그 제도를 이용하게 되었다.그 제도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 취업하고 직무에 적응하는 동안 함께 도움을 주는 근로지원인이 동반해주는 제도여서 장애인 취업자에게는 커다란 힘이 되고 출근 후 퇴근 시간까지 집에서 온통 신경을 쓰면서 혹시나 무슨 일이 있지는 않을지 노심초사하는 부모 마음에 안심을 주기도 했다.장애인 일자리는 장기가 아니고 대부분 주로 6개월~1년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자의든 타의든 그래서 근로지원인분들을 몇 차례 접할 기회가 있었고, 그러면서 취업 때 근로지원사 분들과의 상호작용과 유대관계에 대해 아들이 경험한 일들을 한번 이야기하려고 한다.근로지원 제도를 이용한 취업의 시작은 ○○병원부터였다.그것이 근로지원 제도를 통한 근로지원사를 만난 첫 번째 경험이었다. ○○병원에서 하는 일은 휠체어를 대여하고 또 되돌려 받는 업무였는데 어렸을 때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탓에 거동이 불편한 환자 더구나 연세 드신 분들의 휠체어 사용을 도와주고 때로는 진료받는 과까지 모셔드리기도 했다. 그때 감사하다며 환자분들이 전해 주신 음료나 과자 한 봉지에 너무 좋아하고 칭찬을 받았다며 집에 돌아와서는 하루 일들을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해주면서 일상의 또 다른 재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그중에서 근로지원사분과의 일상도 빼놓지 않았는데 때로는 함께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어떤 날은 선생님께 감사하다며 식사를 대접하기도 하고 퇴근한 후에도 저녁이면 전화도 주고받았다고 했다. 어떤 날은 아들이 몸이 아파서 조금 늦어지면 버스 정류장까지 선생님이 직접 마중을 나오시는 것으로 보아 아들과 선생님은 상호작용이 잘되는 듯했다. 선생님도 아들이 너무 인정스럽고 성격도 밝아서 너무 재미있다며 칭찬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더욱 감사와 사랑을 느끼게 했던 경험이 있었다.그 후 몇 년도 인지 확실한 기억은 아니지만 아마도 3~4년이 지난 듯한 일이었다. ○○호텔 직원 식당 정규직원 모집을 보고 이력서를 제출 후 면접에 통과하게 되었다.소통 토론 강의를 보면 대부분 이럴 때 서로 잘 즐기며 일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던데 우리 가족은 기쁜 나머지 합격이라는 문자 통지를 보고 물론 축하한다고 시작은 했지만, "이제 ○○맨 이야. 직원들한테 잘하고 열심히 하고 잘못하면 끝이야…."등 지금 또 생각해 보면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군더더기처럼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렇게 정규직이 되기 전 통과의례로 2주간 사전훈련이 시작되었다.정규직이 되기 전 통과의례로 그동안 직무의 적응도나 성실성 등의 평가로 합격 불합격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아들과 동행해 주는 근로지원사가 배정되었다.아들의 말에 의하면 8호선 장지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2호선 잠실역에서 내려 맥도날드 앞에서 근로지원 선생님을 만난다고 했다. 처음이라 지하에서 찾기가 좀 어렵다며 첫 출근 후 그다음 날은 함께 가 주기를 원했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장지역에서 내려 8호선으로 갈아타고 잠실역에 내려서 약속 장소를 찾아가는데 나도 어디가 어딘지 너무 힘들었다. 여긴가 저긴가 아들은 몇 번 잘못 들기도 했지만, 용케 약속한 장소라며 가리켰다. 그리고 잠시 후 어떤 여자분이 다가오더니 대뜸 하는 말이 "○○씨! 여기서 기다리라니까 왜 거기서 기다려요?" 몇 걸음 더 내려와서 기다렸다고 저러지? 가시 돋친 듯 내뱉는 말투를 지켜보는 나의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인사를 할 겨를 도 없이 그분은 내가 엄마인지도 모른 채 아들을 데리고 사라지는 뒷모습을 쳐다보는데 몹시 씁쓸했다. 그 순간에 아들의 평소 모습은 다정다감하고 친절하고 목소리 톤이 부드러운 사람을 좋아하고 너무 많은 말(잔소리)을 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평소 모습이 떠오르며 어쩌면 이분은 아들과 정서적인 코드가 잘 맞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혼자서 출근이 어렵다는 말 없이 잘 다니기에 대견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2주 동안 그 선생님과 직원들의 평가점수로 정규직으로 전환이 결정된다는 말은 미리 듣고 시작했던 터라, 출근 후 며칠이 지나서 영양사님의 전화는 너무 쾌활하고 좋아서 분위기가 살아난다는 말과 또 힘든 부분 있으면 최대한 도와주시겠다고 하는 전화에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2주간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고 어떤 날은 근로지원사님으로부터 아들이 락스 냄새를 싫어한다. 어떤 날은 이런 일 한 번도 안 해 봤다고 하며 투덜댄다고 하면서 아들로 인해 좀 힘들다는 내색을 하기도 했다. 혹여 평가점수가 낮아질까 봐 "죄송합니다. 잘하도록 지도하겠습니다~~"라고 응대를 한 뒤 퇴근해 오면 전해 들은 일들을 아들에게 "조심하고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 말대꾸도 하면 안 되고, 버릇없는 행동을 하면 안 되고~" 하면서 앵무새처럼 되뇌었다.그러던 어느 날 대형 사건(?)이 터졌다. 공단 직원이 집으로 전화해서 근로지원인 분이 아들 때문에 울면서 전화했고 더 이상 안 하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말은 해주지 않고 말을 함부로 해서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평가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때였고 괜히 더 신경이 쓰여 퇴근해 온 아들을 앉혀놓고 혼도 냈지만 수긍하지는 않는 눈치였고, 근로지원사님을 이해하는 데는 무엇인가 걸림돌이 있어 보였고 아들 또한 근로지원사를 몹시 못마땅하게 느끼는 눈치였다.이전의 분들과는 다른 서로 소통하는 행동이나 톡이나 전화 문자 등은 물론 근로지원사에 대한 언급을 한 번도 하지 않는 걸 보면 둘 사이에는 차가운 기류가 흐르는 게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에 아들은 "엄마 합격 되는가 봐?"라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듯 해서 "왜?"라고 물으니 "다음 달 일정표에 내 이름이 적혀있던데…."라며 얼굴이 상기 되기도 했다. 떨어져 실망할까 봐 걱정도 되었지만 "그래 잘되겠지."라고 기다리던 마지막 날 근로지원사님의 전화가 왔다.이런저런 2주간의 이야기와 기분 상하고 자존심이 상했다는 말과 함께 결과는 기다려봐야 아는 거고 자기가 어떻게 합격 불합격을 내라는 건 아니다 말속에는 아들이 되는지 봐라 그건 내 탓이 아니라는 말로 들렸다.그리고 마지막 날 결과가 나오는 날 아들은 힘없이 퇴근 후 "내일부터는 안 나와도 된대"라며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가슴이 덜컹 무너졌고 기대했던 마음을 알고 있어서 너무 가슴이 아팠는데 저녁에 영양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이번 정규직에는 불합격했다기에 아들은 다음 달 일정표에 이름까지 있다고 좋아했다는 말을 전했더니 그랬는데 근로지원 선생님과 의견충돌이 있는 모습을 보고ᆢ 죄송하다며 아들 위로 잘해주라는 말을 전해 들으니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의견충돌이 아닌 감정 충돌이었다. 어떤 이유로 자존심이 상했는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지만, 장애인을 대상으로 직무의 어려움을 도와주고 조금이나마 직무에 익숙해지는 시간과 때로는 격려 또는 응원해줄 수 있는 역할을 가진 사람이면서 더구나 가장 가까이 장애를 이해하고 도와주어야 하는 직무를 가진 분이 그 도중에 자존심을 운운하고 또 자존심 상해서 그만두어야겠다고 공단에 전화했다는 사실도 합격 불합격을 떠나 그 일이 스스로 맞지 않거나 최소한 장애인의 지적 수준이나 성향 등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지 못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이야말로 어른답지 못하다고 생각했고 감정 장애가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최소한 장애아를 맡아주는 장애 전담 어린이집 교사나 근로지원사처럼 가장 가까이 장애인에게 도움을 주고 보살펴주는 사람들은 장애를 이해하고 진심으로 대하지 못한다면 그 직업군에 도전조차도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게 장애인을 둔 부모의 경험에서 나오는 마음이다. 그 후에도 몇 차례 또 다른 근로지원사님과의 만남이 더 있었고 다정다감하며 애정으로 아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통한다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한다는 건 감정의 소통이 잘되어 서로서로 잘 이해하고 걸림이 덜 하다는 것도 그래야 부딪힘도 적어진다는 것도 아들을 통해 거울처럼 바라볼 수 있었다. 

    게시일2023-07-21

  • 나홀로 여행   바닷가에서 자랐지만 바다와 친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수영복 차림으로 수건 하나 걸치고 3~4분 뛰어 바다로 가곤 했는데, 커서는 지척에 바다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결혼하고 서울에서 살다보니 바다가 그리웠다. 가까이 있는 한강으로 달래지지 않아 가끔 동해 일출과 서해 일몰의 황홀한 바다에 빠져들곤 했다. 부산에서 살던 둘째언니가 거제로 이사한 지 8개월이 되어간다. 가족여행으로 너 댓 번 갔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장소만 옮겨졌지 여전히 내가 챙겨야 할 가족이 있으면 여행의 맛이 반감된다.일 때문에 바쁜 남편을 두고 아들과 거제에 가겠다고 했다. 혼자 긴 시간 운전 힘들다며 남편은 기차로 혼자 가란다. ‘아싸! 이게 웬 떡이냐’ 내심의 소리는 숨기고 ‘그래도 될까?’ 걱정스런 표정을 했더니 흔쾌히 ‘돈 워리’라는데 사양할 이유는 없었다.   못이기는 척 나선 여행길은 SRT 기차에 오르는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앞좌석 뒤에 붙은 테이블을 내려 휴대폰과 안경집을 나란히 놓고 오래 전에 구입했던 시집 ‘컵라면이 익어가는 시간에’를 읽었다. 내가 여태 보아온 시집의 시들은 마침표가 없었는데 여기 수록된 시들은 꼼꼼하게 마침표가 찍혀 있었다. 차이가 뭔지 단순하게 시인의 마음인지 궁금했다. 짧은 문장으로 많은 것을 표현하는 시인들은 위대하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메타포를 접하면 몇 번을 반복해서 읽기도 하지만 결론은 그저 내가 읽고 싶은 대로 읽을 뿐이다.국내 최장 50km의 율현터널을 지나니 눈부신 바깥세상이 시집을 덮게 만들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천천히 움직이는 산과 하천에 비해 빠르게 지나가는 나무들은 환한 미소로 내게 손을 흔들었다.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일상에 찌들어 사는 나는 대체 무슨 걱정을 하며 살고 있나 싶었다.   부산역에 나온 두 언니들을 만나 거제로 향하는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승용차보다 높은 대형버스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더 넓고 깊어 보였다. 거가대교와 해저터널을 지나 깊은 산골에 도착한 우리는 텃밭채소와 문어 등 도시와는 질이 다른 저녁을 먹었다. 다섯 자매가 모이면 뭐든 해먹이려고 동분서주하는 형부가 고맙기도 하고 몸이 안 좋으니 안타깝기도 하다.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마을은 인기척이 없다. 영화 ‘이끼’에서 이장 정재영 배우가 마을을 두루 바라보는 그 느낌이 갑자기 전해온다. 멀리 거가대교는 섬과 육지를 연결해 주느라 고정된 분주함이 보인다. 다리를 건너올 때 보는 바다와 섬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같지만 다르다. 서 있는 자리가 바뀌면 보이는 것도 달라진다는 말이 새삼스럽지 않다. 날이 좋으면 움직임이 거의 보이지 않던 바다였는데 바람과 비를 만난 바다는 제법 일렁거림이 보여 거대한 늪을 상상하게 한다. 생명을 앗아가는 거센 해일 말고 이런저런 모습의 바다는 언제나 옳다.   조그마한 배를 타고 섬에서 섬으로 이동했다. 둘레길 2.9km를 잘 조성해 둔 작은 섬 이수도. 1박3식으로 유명한 그곳은 거의 대부분 가정집이 민박을 하고 있었다. 일반 음식점은 보이지 않았고 민박 예약을 하면 그 집에서 세 끼 밥을 제공했다. 사실 1박까지 하면서 구경할 거리는 없었는데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밥을 먹고 바다를 끼고 둘레길 걷는 것만으로 충분한 힐링이 되었다. 장마철이라 후텁지근하고 끊임없이 오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꿉꿉한 비마저 싫지 않았다. 두어 시간동안 걸으며 흘린 땀을 샤워로 씻어내니 세상 부러울 게 없는 밤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나란히 누워서 이런저런 얘길하며 천장을 뚫고나갈 기세의 웃음소리에 잠자던 새들이 벌떡 일어날 것만 같았다.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양껏 웃을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참으로 고맙게 느껴졌다.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게 남이 해주는 음식이라고 했던가. 아침까지 든든하게 먹고 이수도를 빠져나왔다. 지난번에 가봤던 멀리 보이는 매미성에 다시 가보고 싶었으나 언니네 집 야채와 과일 딸 욕심에 바로 돌아왔다.주렁주렁 열린 살구는 제풀에 떨어진 것이 정말 맛났다. 새들이 쪼아 먹은 흔적을 보니, 우리가 먹을 거라 상관없지만 상품으로 출하하여 생계를 잇는 사람들에겐 치명적일 것 같다.   2박3일의 여행에서 돌아오니 집이 낯설지 않았다. 나름 정리정돈도 잘 되어 있었고 설거지도 제때 해서인지 씻어 놓은 그릇들이 많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사흘 동안 나는 집을 잊고 있었다. 예전에는 혼자 집을 나오면 가끔 전화해서 잘 있냐고, 아들 어떠냐고 먼저 묻곤 했다. 이번에는 부녀의 긴 말들이 오고가는 가족대화방도 외면했다. 남편이 급기야 ‘거제 간 엄마는 지금 묵언수행중’이냐고 물었다. 그럴 리가, 언니들과 수다 떠느라 입에 침이 마를 지경이었는데.아들을 조금씩 마음속에서 떠나보내는 중인 나를 느꼈다. 어쩌면 독립을 주저하는건 아들의 부족함이 아니라 엄마인 내 마음이지 싶다. 나홀로 여행으로 나는 내 삶을 즐기고 아들은 엄마의 간섭과 참견을 벗어나 스스로를 챙길 줄 아는 일일우일신하는 일상이 되면 좋겠다.  

    게시일2023-07-14

  • 선택도 연습이 필요해      익숙한 등굣길에 내가 좋아하는 푸른색이 지천에 가득하고 뜨거운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걸 보니 7월이다. 그리고 요즘은 열기를 식히듯 예고하지 않은 잦은 비가 오고 있다. 그러다보니 매일 아침 출근을 앞두고 일기예보를 재차 챙겨보며 고민한다. 오늘은 우산을 가져갈 것인가, 가져가지 않을 것인가? 어느 날은 나의 직감으로 우산을 가져가지 않기도 하고, 어느 날은 우산의 예쁜 무늬를 핑계로 챙겨가기도 한다. 그리고는 매일의 선택에 따라 비오는 날 우산이 없어 낭패를 보기도 하고 우산이 무색하게 쨍쨍한 날 무거운 우산의 무게를 한껏 느끼며 땀 한 바가지와 함께 퇴근을 하기도 한다. 물론 어느 날은 딱 맞는 선택에 스스로를 칭찬하며 콧노래 흥얼거리는 퇴근길을 맞이하기도 하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매 순간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오늘 입고 나갈 옷과 양말, 점심 메뉴, 버스를 탈 것인가 지하철을 탈 것인가, 운동을 갈 것인가, 침대와 한 몸이 될 것인가. 정말 사소하지만 인생은 매 순간이 선택이다. 나의 경우, 대부분의 선택 상황에서 어렵지 않게 의사를 결정하고 선택한 것에 대한 후회나 미련은 가지지 않는 편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의 의견을 경청해주고 결정을 지지해주는 부모님의 양육 태도가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는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며, 내 선택에 따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온 몸으로 받으며 지나온 과거의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여전히 선택의 순간에 서면 망설이게 되고 누군가 나 대신 선택을 해주었으면 좋겠고 선택하지 않은 선택지에 대한 결과가 어떨지 궁금하고 지금 한 선택을 후회하게 될까봐 두렵다.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는 우리 아이들은 비장애인들과 비교하여 많은 순간 자신의 의사와는 다르게 또는 의사를 묻지 않고 보호자, 부모님, 교사 등 타인이 대신 무언가를 결정하는 순간에 숱하게 놓인다. 영유아기를 비롯해서 학령기에도 당사자의 선택 이후의 변수에 대한 예측이 어렵거나 또는 안전을 우선으로 하거나 혹은 선택의 기회를 주어야한다는 것도 잊은 채 당연한 듯이 장애인 당사자의 의견 없이 많은 것들이 결정된다. 하물며 특수교육현장에서 법적 근거로 인해 반드시 실시해야하는 개별화교육지원팀 운영에 있어서도 장애 학생 본인의 의견이나 선택이 우선시 되거나 반영되는 경우는 극히 제한적이다. 물론 장애의 정도와 유형에 따라 의견을 반영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공감한다. 다만 일상에서 아주 사소한 선택이라고 할지라도 장애인 당사자, 나에게 있어서 우리 학생들이 스스로 본인의 인생을 살아가는 만큼 본인의 의사와 결정을 최대한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현재까지 기고자가 만난 많은 학생들 중에서는 장애인복지법의 장애 판정 기준에 해당하지는 않고 교육적 어려움은 있는 것으로 판단되어 현장에서 이야기하는 ‘복지카드 없는 특수교육대상학생’들이 있다. 보편화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학생들은 대부분 장애의 정도가 심하지 않은 편이며 자신의 의사를 행동이나 말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한다는 것은 선호도를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며 선호도가 확실하다고 하면 이전 칼럼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사소한 것은 일상생활패턴에서부터 크게는 직업적 선택까지 수월하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당사자 개인의 명확한 의사표현은 선택에 따른 만족도와도 대부분 일치하게 된다. 따라서 학교 현장에서 사회로 나가는 전환기에 있는 고등학교, 전공과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특히 ‘자기결정’, 선택의 중요성에 대해 꼭 가르치려고 노력한다. 덧붙여서 선택에 따른 ‘책임’도 함께 따르는 것임을 꼭 설명한다.    ​그러나 일 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자기결정’을 가르치는 일은 쉽지 않다. 특히나 ‘선택’의 경험이 없는 학생들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큰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가르치는 나조차도 힘이 들 때가 빈번하다. 실제로 올해 맡게 된 이제 졸업반인 남학생 A는 장애 정도도 심하지 않고 교우관계도 좋으며 학습 능력도 뛰어나 여러모로 미래가 기대되는 학생이다. 그러나 지역사회현장학습을 진행하며 주어진 예산 내에서 먹고 싶은 점심 메뉴를 고를 때 늘 한 발짝 뒤로 물러나고, 간식을 먹을 때도 두 개의 과자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을 극도로 어려워하며, 자신의 선택이 본인을 포함한 타인의 일정에 영향을 주는 경우가 되면 몹시 당황해하고 얼굴이 빨갛게 변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평소의 A학생의 성품을 알기에 선택의 상황에서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기를 몇 번 반복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선택 상황의 해결은 주변인 누군가의 결정으로 종료되는 것을 관찰하게 되었다.    ​어느 날, A학생과 둘이 이야기를 나누며 허심탄회하게 물었다. 왜 선택을 하지 않으려고 하느냐고. 그랬더니 A의 대답이 한 편으로는 마음이 아팠다. 자신의 형도 장애가 있고 형은 꼭 자신이 원하는 걸 해야 부모님이 덜 힘드시고(A학생은 지적장애이며 A학생의 형은 자폐성장애를 가지고 있다) 무언가를 결정해본 적이 없어서 선택 상황이 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긴장된다고. 그래서 솔직하게 이야기해줘서 고맙다고 말하고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에는 ‘선택’이라는 것을 해야만 한다고 말해주었다. 오늘 사용할 연필을 고르는 아주 사소한 선택부터 시작해서 점차 연습해나가면 선택 상황에 대한 불안함도 줄어들 것이라고 격려하면서.    ​‘선택’이 어려운 건 비단 발달장애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선택’없이는 자기주도적이고 자신을 중심에 둔 삶을 살아가는 게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선택’도 연습이 필요하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사소한 선택사항에도 당사자의 의견을 물어주고 수용해주는 것. 그러한 연습이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힘을 키우는 우리 학생들에게 꼭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 

    게시일2023-07-10

  • 생애 최초로 시작한 설거지   전 10대 재학 시절 처음으로 설거지를 시작했습니다. 비록 첫 설거지인지라 그리 능숙하진 못했지만, 이후로 조금씩 횟수를 늘려가며, 실력을 키워갔습니다.하지만 그때의 전 설거지 하는 게 보다, 어른스러워 보였기에 멋있을 것 같아 시작하게 된 거였지만, 점차 실력을 늘리다 보니 어느샌가 그릇에 묻은 기름때 같은 것도 곧잘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설거지 횟수를 늘리고 설거지의 기름때도 말끔히 제거하게 되자 언젠가부터는 설거지가 점점 즐거워졌고, 지금은 하나의 취미로 자리매김하게 됐습니다.물론 설거지하는 게 그리 즐거운 일만은 아니고 힘들다는 생각이 들 수는 있지만, 저는 집에서부터 설거지한 경험이 있어선지 바리스타로서 첫 출근 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식기를 그 누구보다 꼼꼼하게 씻게 됐고, 손님들에겐 보다, 청결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됐습니다.비록, 다리나 팔이 골절된 사람들은 당장 하는 게 어려운 일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조금씩 회복되고 언젠가 완치되었을 때부터라도 배워두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장애인이 다른 사람들보다 시간이 오래 걸릴지언정 조금씩 연습하다 보면, 언제나 큰 도움이 될 테니 자신감을 가지십시오.장애인도 엄연한 사회의 일원이며 능숙해지는 시간이 다를 뿐,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익혀두면, 장애의 장벽을 허무는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게시일2023-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