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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칼럼

초대칼럼 상단 이미지

칼럼니스트들이 여러분들께 ‘발달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건네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시선으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 계시나요?
이 게시판은 보다센터에서 초대한 각 분야의 칼럼니스트들이 여러분들께 ‘발달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건네는 곳입니다. 발달장애와 관련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칼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또한 발달장애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의 일상이야기,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의 소박하지만 통렬한 이야기와도 공감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은 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게시물 총 116

  • 학교폭력에 쉽게 노출되는 우리 아이들   TV 프로그램 중에 요즘은 트로트가 대세이고 미스터트롯을 통해 임영웅이 영웅이 되면서 여느 때보다 유난히 더 많은 트로트 경연대회가 방송국 여기저기서 펼쳐졌었다. 그중에서 불타는 트롯맨에서 우승자로 거의 확정된 사람이 지난날의 학교폭력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결국 도중 하자를 하게 되면서 그 결과를 보고 어렸을 때 철모르고 한 것을 한 번만 선처해 주면 앞으로 더 반성하고 돌아보면서 살 수 있게 기회를 주자는 사람과 그 반대로 그것은 용서할 수도 있는 사과할 수도, 피해자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 안고 살았을 세월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냐면서 반기를 드는 사람으로 나누어져 의견들이 분분했었다.돌아보면 아주 오래전 학교폭력이라는 게 언급되지도 않았고 학교에서 선생님과 학생, 그리고 학생과 학생 사이에 일어난 폭력들도 그저 선생님이 제자를 선배가 후배를 잘되리라고 사소하게 생각했고 그래서 때로는 사랑의 매로 불리기도 했었다.   지금은 20대 후반인 아들도 초등학교를 일반 학교 일반학급에서 생활했다. 그런데도 걱정과는 다르게 저학년 때에는 별문제 없이 지냈었다. 그런데 고학년이 되면서 아들은 키가 큰 편에 속했고 거기에 비해 다른 친구들과는 좀 달라 보였던 이유에서 인지, 유난히 한 반 아이에게 지금 생각하면 괴롭힘을 당했었다. 하교 시 기분 좋게 집으로 오는 적이 없고 늘 울면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눌하게 상황설명을 들어보면, 00이라는 아이가 뒤에서 가방을 발로 차고 왜 그러냐고 하면 돌아서서 안 그런 척하고 때로는 바보라며 놀리는 등등의 행동과 또 다른 아들을 자극하는 언어로 화를 돋게 했다. 그 아이로 인해 조용할 날이 없었고 그러한 일들로 아들이 학교에서 등·하교 시간은 살 얼음장 같은 날로 보냈었다. 하지만 그저 우리 아이가 보통 아이와 다르다는 이유로 혹시나 또 다른 피해나 따돌림을 당할까 늘 그냥 아들을 달래며 그 친구가 뭐라고 하든 대꾸도 하지 말고 그 자리를 모른 채 피하거나 지나쳐 오라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교문 앞에서 그 아이를 만났다. 또래보다 훨씬 키가 크고 덩치도 커서 애아범처럼 느껴지는 그 아이에게 지금껏 아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사이좋게 놀았으면 하는 말을 전했다. 그 아이는 우리 아들이 자꾸 먼저 그런다고 하길래 그 말끝에 덧붙여 그럴 경우가 생기면 이제부터는 나한테 직접 말하라고 한 데 얼마를 지났을까. 아들은 또 그 아이 때문이라며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너무나 화난 표정과 그리고 억울한 감정을 어쩔 수 없어서인지 처음으로 아이들이 하는 욕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하라고 했던 이유로 그 애는 아들이 자기에게 잘못 했다며 집으로 가자며 손을 끌고 당겼던 모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이를 대신해서 찾아가 자초지종도 들어보고 잘잘못을 따져 혼을 내고도 싶은 마음이 더 컸지만, 장애가 있는 부모로서 늘 위축되고 자존감이 떨어져서 냉철하게 대응을 잘못하지 못해서인지 그때는 그래봐야 또다시 그 아이는 어쩌면 아들에게 더 큰 화풀이를 행사할 것 같아서 속상한 마음을 삼킨 채, 담임선생님께나 그 누구에게도 언급도 하지 않고 속앓이하면서 속상한 마음에 아들을 안고 펑펑 울었던 생각이 난다.   20여 년 전만 해도 그렇게 학교폭력 자체가 드러나지 않은 때였고, 부족한 아들이라는 그 핸디캡을 감내하고 참고 혹여 그런 일들이 학교에 전해져 봐야 좋을 게 없다고만 생각하며 단지 그 아이 같은 애들이 두 번 다시 그런 행동을 하지 말기를 기도로 대신 하곤 했었다. 그러고는 아마도 한두 차례 그러한 일들이 더 있었고 학년이 바뀌고 또 중·고등학교를 가면서 그 아이와는 더는 마주치는 일이 없어져서 한결 학교생활이 부드러워졌었다.그리고 몇 년을 지나 대학생이 된 어느 날, 우연히 이사한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 아이를 만났다. 우리 아들은 그 아이 이름을 또렷이 기억했고 그 아이 이름을 중얼거리며 내 뒤에 얼른 숨는 것이었다. 나도 그 아이 얼굴을 보니 지난 일들이 다시 생각나서 심장이 뛰었지만, 조심스럽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 아이를 향해 우리 아들을 알아보겠냐고 물었더니 그 애 또한 머뭇거리며 우리 아들 이름을 말했다. 나는 갑자기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 우리 아이는 수년 동안 그 아이로 인해, 저만치 또래 아이들이 보기만 해도 삽시간에 어디론가 숨어버릴 만큼 그 아이를 싫어했고 무서워했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그 많은 세월 시간을 과연 어떻게 지냈을까? 짧은 시간에 수만 가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00아! 너 그때 왜 그랬니?"라고 말을 하는데 가슴이 떨리면서 그때의 고통과 우리가 겪어야 했던 아픔들이 되뇌어지면서 얼굴도 상기되고 목소리까지 떨려나 왔다. 왜 그랬냐는 말에 그 애도 무엇을 내가 말하는지 자기가 했던 일을 기억하는 듯 쭈뼛거리더니 "죄송합니다. 그때는 철이 없어서~~" 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나는 "그랬구나! 그런데 너로 인해 우리 아들은 그 시간 동안 얼마나 아프고 힘들어했는지 알고 있니? 그럼, 네가 정말 잘못을 인정한다면 진심으로 우리 아들에게 사과해라."라고 했고, 그 애는 아들에게 다가가 "정말 미안했어! 미안해~"라며 아들의 손을 잡기도 하고 안아 주었다. 당황하던 아들도 내 말과 00이가 하는 말과 행동을 보고 자기에게 사과한다는 것을 느꼈는지 다가가 안으면서 대성통곡을 했다. 그 모습의 가슴에 얼마나 상처가 응어리로 남아 있었을지 짐작이 갔다. 옆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나는 그 아이에게 "00야! 시간이 지났지만, 진심으로 사과해 주어서 고마워"라고 안아 주었다. 죄송하다는 말과 아들에게는 미안했다며 다시 악수를 청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얼마를 지나 엘리베이터에서 그 아이를 만났다며 환하게 웃는 아들의 모습에서 평안함을 느꼈다.   문득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아들이 초등학교 그 시절로 돌아가 그런 일들로 또다시 힘들어한다면, 지금처럼 그냥 참고 그리고 그 순간을 피하라고만 했을지? 아니면 학교에나 그 아이 집에 알려 징계받게 했다면 우리 아들은 더 이상 힘들지 않고 상처도 깊어 지지 않았을까? 아니면 확대된 일로 많은 사람의 시선에 더 깊은 아픔을 낳게 했을까? 수많은 질문이 나에게로 쏟아졌고, 또 한편으로는 이런 경우는 일어날 기회가 없을 수도 있지만 아들의 경우처럼 어느 시간이 흘러 우연이라도 만나 진심으로 사과받게 되는 게 옳았을까??아들은 지금은 그 아이를 보면 겁나고 싫냐고 하는 물음에, "괜찮아"라고 하니 묵은 감정들이 조금은 사라지는 기분이 드나 싶어졌다. 요즘은 가끔 페이스북에서 그 애 소식을 보고 알려줄 정도가 되었으니 일단은 안심이지만. 어떤 게 현명한 대처이고 최선이 될지에 대해서는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일반적인 경우가 아닌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경우라서 더 특별하고 조심스러워서 지금도 그때도 적절하게 대응을 한 것인지 모른다. 다만, 사과는 상대에 대한 진심이어야 하고 상대가 그걸 받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사과하면서 안 받아 준다고 사과하는데 왜 안 받아 주냐고 되레 화를 내는 경우를 본 적도 있는데, 그 애와 아들은 진심으로 사과하고 진심으로 사과받아주어서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수 있었던 것 같다.그래서 하여튼 누구에게나 어디서든 그러한 괴롭힘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를 지금도 기도하며 장애인이라고 해서 무시하고 무관심하고 함부로 해도 된다는 몰지각한 사고들이 사라진 건전한 세상 밝은 세상에서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날들을 꿈꾸어본다. 

    게시일2023-06-29

  •  이보다 더 좋을 수 있다    책 제목이 신박하다. ‘싱글맘의 마음 보고서’라는 부제에는 입을 삐죽거렸다. 약간의 궁상과 열심히 사는 젊은 엄마의 뻔한 이야기려니 생각했다. 큰 오산이었다. 우선 재밌다. 이혼이라는 과정을 부모, 형제, 본인까지 다 겪으면서도 선천적으로 보이는 명랑, 쾌활함이 그녀를 어둠 속에 가두지 않았다. 살다보니 어둠은 다른 어둠을 불러들이거나 내 몸과 마음을 땅 속으로 꺼지게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저자는 달랐다. 고비마다의 고뇌는 그 정도 당연한 것이었고 잘 흘려보내는 현명함이 있었다.세 번의 유산으로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네 번째 아이를 만나면서 남편과 헤어졌다. 헤어진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리셋 하겠다는 남편이 새로운 사랑을 찾아 일방적으로 떠나버렸다.책 읽는 내내 이보다 더 좋을 수 있다는 희망이 보였다. 배우자의 배신은 일상을 무력하게 하는 강력한 이유가 될 것 같은데 글 속에 남편을 비하하거나 원망하는 일이 없다.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않고 딸 재희와의 일상에만 전념하는 모습이 독자로 하여금 안심하게 만든다.   오래 전, 정치인 출판기념회라는 곳에 가서 장애부모들이 두 시간 내내 손피켓을 들고 서 있었던 적이 있다. 그 정치인이 선동하여 지역에 들어설 장애인 시설을 막았기에 힘없는 우리 엄마들이 할 수 있는 건 우리를 봐 달라고 묵언 투쟁하는 것뿐이었다. 그 때와 달리 독자로서 당당히 참여한 ‘이보다 더 좋을 수 있다’의 저자 북토크 현장은 따뜻했다. 싱글맘 저자의 환한 웃음 뒤에 든든한 연대의 힘을 보았다. 부산에서, 진주에서 작가를 응원하고자 찾아왔다니 남편 없어도 세상 부러울 게 없어 보였다. 책속의 등장인물들이 다 참석했다. 할머니, 엄마, 딸, 이모, 이혼한 남편의 어머니와 미용실 여인까지, 저자의 오늘이 늘 이보다 더 좋을 수 있도록 함께 살아온 많은 이들의 응원과 격려가 어린 모녀의 삶을 지켜주고 있었다.   책에 없는 내용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걸 들으며 싱글맘이 받는 사회적 시선이 장애인 가족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알았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불행의 프레임에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다르게 사는 이들을 가두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빠 없는 아이 표정이 밝다는 말을 들을 때의 심정, 장애인 자녀 키우면서 어둡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듣던 나와 다르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이 그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봐 달라는 것, 장애가 있건 아빠가 없건 그래서 불행할 거라는 선입견은 거둬 달라는 바람은 닮아 있었다.   최근 6개월 동안 전 남편이 양육비를 보내지 않는다고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곤 있지만 다달이 쓰임이 빤한 비용을 지불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면 얼마나 불안할까 싶어 안타까웠다. 이런 것들을 제도적으로 보완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얘기하는데 공감이 되었다. 국가가 양육비를 선지급하는 것, 정당한 사유 없이 양육비 채무를 이행하지 않음으로 미성년 자녀의 안정적인 환경을 파괴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 국가의 책무는 이런 것이다.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외면하지 않고 지원하는 것. 악의적인 행동으로 누군가의 삶이 망가지게 하는 것을 막아주고 지켜주는 일.   우리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해 무조건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선입견은 버렸으면 좋겠다. 한부모, 조손, 장애인, 다문화, 재혼 가족 등 각자의 상황에서 열심히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따가운 눈총이나 동정의 시선은 옳지 않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뭔가를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필요하고 중요하다. 싱글맘의 수필에서 보여준 일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매우 컸다. 공감과 동감으로 읽혔고 가족의 형태에 따라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다시 생각해 보게 했다. 벌써 2쇄를 발행했다니 많은 이들이 읽고 저자의 삶에서 통통 튀는 삶의 활기를 느꼈으면 좋겠다. 지금 행복하냐는 독자의 질문에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모아 ‘오케이’하던 저자의 환한 표정에서 박수치는 많은 이들에게 행복이 전염되고 있음을 느꼈다.우리 모두의 삶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기를 바란다.   

    게시일2023-06-19

  •    * 이번 칼럼에는 좀처럼 보기 어렵다는 꽃을 피워낸 우리 교실에서 키운 호야 꽃 사진을 함께 첨부하여 보냅니다. 함께 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행복’을 찾아가는 일       ​“얘들아, 안녕~! 다들 즐거운 휴일 보냈니?”   ​6월 5일 학교장재량휴업일과 6월 6일 현충일을 더해 4일 간의 휴일을 보냈을 아이들에게 반가운 마음을 담아 아침인사를 건넸다. 이 녀석들, 또 웃으며 ‘으~~ 학교 오기 싫었어요~.’라고 하겠지라는 마음 속에 예상 답안을 써두고서. 그랬더니 통학 거리도 시간도 가장 멀고, 점심 식사 시간 이후부터 줄곧 ‘집에 가고 싶다!!’를 입에 달고 다니던 한 녀석이 이렇게 말한다.   ​“아 학교 못 와서 너무 너무 심심했어요! 학교와도 되니깐 너무 좋아요!!”   ​여지없이 나의 예상을 빗나가는 녀석의 말에 나도 ‘그랬어? 하하하!’하고 웃었다. 주변의 친구들도 동조하며 함께 웃는다. 행복감이 느껴지는 공기, 그리고 그 대화의 끝에 생각이 머물렀다.     ​어느 날이었던가, 좋아하는 라디오를 듣던 중이었는데 청취자들에게 디제이가 묻는다.   ​“여러분에게 행복한 순간은 어느 때인가요? 누군가 행복한 순간이 언제였느냐고 물었을 때 답할 한 순간이라도 있다면 당신의 마음은 이미 풍족할 겁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툭 마음이 튀어나왔다.   ​“저는 매일 아침 출근해서 교실을 환기하며 아이들을 기다릴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그냥 좋아요. 행복하구요.”   ​그래서일까, 오늘 학교에 오고 싶었다는 아이들의 말이 내 마음 속에 훅 들어와 앉았다. 분홍색 물감이 확- 하고 퍼져 꽃물처럼 따뜻하게 번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감사한 마음이 일었다. 우리 대부분은 살아가면서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선택과 조정을 고민하며 직업을 가진다. 스스로가 최선을 다하고 싶고 다하고 있는 일이면서 동시에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나는 정말 얼마나 행복한 사람일까.     ​길지 않은 시간, 알알이 보석처럼 빛나는 아이들과 학부모님을 만나며 느낀 점이 있다면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한 이후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결정을 내린 가정의 경우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아이가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인가?’에 대한 가족들의 합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합의가 된 가정의 경우에는 사회적(지원 인력), 경제적(소요 비용) 여건에 따라 무엇보다 학생의 의사를 존중한 진로 선택이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그런 경우 특수교사로서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지원을 제공하는 것도 훨씬 수월하였다. 반대로 진로 선택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가정의 대부분은 외부의 시선, 취업의 조건, 개인 내적인 어려움 등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경우가 다수였다.   ​나의 경우, 특수교육 현장에서 우리 아이들을 만나 아이들과 함께 자라고 아이들의 졸업 이후의 삶을 함께 고민하는 것이 너무나 의미 있고 행복한 일이다. 이러한 일과 직업에서 오는 가치와 행복을 우리 아이들과 꼭 느껴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자면 우리 아이들과 아이들의 부모님, 함께 사는 형제자매들이 행복해야한다. 아이들이 만나는 교사 역시 행복해야한다. 행복은 내면의 힘을 단단하게 해주고, 가끔 살면서 시련이 닥쳐도 툴툴 털고 일어나는 힘이 되어주고, 지칠 때 기댈 어깨가 되어줄 것이며,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안내해주는 나침반도 되어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어떤 장소에 있을 때, 무엇을 할 때, 누구와 함께 있을 때 행복한가?’     

    게시일2023-06-08

  • ​울 아들은 갬성쟁이     어느새 담장이나 울타리마다 장미가 붉게 타오르는 아름다운 계절이 돌아왔다. 이 아름답던 꽃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떨구어져 바닥을 붉게 물들이는 시간이 온다. 꽃은 피어 있어도 예쁘지만, 또 떨어져 깔려있는 모습에서는 피어 있을 때 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나에게는 지금 29살이 된 아들이 있다. 지금은 언어의 발달도 사회성도 많이 좋아진 편이라 때로는 능청스럽게 농담도 하고 때로는 자기에게 불리한 상황에서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대충 얼버무릴 줄도 알게 될 정도로 많은 발전이 있었지만 5살까지만 해도 겨우 필요한 몇몇 단어를 말할 정도의 언어와 인지능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아들은 그 중에서 그나마 유난히 감성이 풍부했었다. 그래서 쇼핑이나 시장에 가게 되면 주인분들의 말이나 행동에 리액션을 너무 멋지게 잘해서 정육점에서 고기를 써는 모습에도 백화점에 즐비한 상품을 보고도 "와~~"라는 감탄사를 연발하곤 했다. 그 모습에 그분들은" 너 때문에 기분이 좋아서 덤을 준다"라며 무엇인가를 하나씩 더 얻어 오기도 하는 것처럼 마음에 어떤 느낌이 작용하면 그렇게 리얼한 표정을 지으면서 감정을 전달하기도 했다.     ​3살~4살쯤 어느 봄날이었다 개나리 진달래가 피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온통 주변이 꽃 대궐이던 때, 우리가 살았던 창동 하나로마트 근처 가로수길에도 벚꽃이 만발했었다. 정말 길 양쪽으로 즐비하게 서 있는 나무마다 하얗게 핀 꽃들을 보면 누구나 탄성이 저절로 나오기도 했지만, 어느 날 시장을 보고 나오며 그 벚꽃 핀 모습에 영락없이 감탄의 언어가 튀어나왔는데 너무도 웃겨서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너무도 아름다운 벚꽃 무리를 보고 아들이 동그랗게 눈을 크게 뜨고 벚꽃을 향해 하는 말이 ‘와~~이쁘다 민들레!!’라고 반전 언어를 보여주어 모두들 박장대소 하게 했고 지금도 우리 식구는 봄날 그렇게 만개한 벚꽃 광경을 마주하게 되면 입을 모아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와~~이쁘다 민들레"라는 말이 동시에 터져 나온다. 그리고 아들에게 그런 어릴 적 이야기들을 해주면 머쓱해서 피식 웃고 만다.   ​내 기억 속에는 또 꽃에 얽힌 아들의 감성을 엮어 내던 또 다른 일 하나가 생각난다. 장미의 계절이 오면 5살이던 유치원 시절의 한 장면이 바로 그날이다. 유치원을 집에서 떨어진 곳에 보내게 되어 늘 차로 등·하원을 시켜야 했고 그날도 하원 시간에 맞춰 아들을 데리러 갔다가 조금 이른 시간이고 여유가 있어서 주변을 거닐다가 문득 빨갛게 떨어진 장미꽃잎이 너무 예뻐서 무얼 할까 생각하다가 무심히 차 앞 범퍼에다 꽃잎을 모아서 커다랗게 하트를 만들어 놓았다. 만들 때는 아들에게 보여줄 이벤트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고 단지 떨어진 꽃잎이 너무도 이쁜데 아깝고 아쉬운 마음에 심심풀이로 한번 해 본 거였는데, 아들이 보여준 의외의 모습에 마음이 더 뭉클해졌던 일이라 아직도 기억에서 붉게 남아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게 하얀 차 범퍼 위를 빨간 장미 꽃잎으로 일궈낸 하트는 내가 봐도 정말 이쁘긴 했었다. 아들은 멀리서 뛰어오다 순간 걸음을 멈추고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달려와 내 품에 와락 안겼다. 그래서 엉겁결에 "엄마가 널 사랑하는 마음이지"라고 처음 의도와 다르게 분위기가 그렇게 말하게 했고 주위의 모두도 아들을 위해 엄마가 이벤트를 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선생님이 가까이 다가오시더니 "어머님 저도 눈물 나려고 해요"하시며 "○○이 감성이 어머님을 닮아서인 것 같아요" 그래서 그렇게 한바탕 사랑타령을 했던 날도 있었다.   ​활짝 핀 민들레 홀씨가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린다는 사실을 아직 알지못할 때 딴에는 민들레 홀씨의 하얀 아름다움을 따다가 선생님께 드린다고 뛰어 가다가 홀씨가 다 날아가는 바람에 꽃대만 들고 마냥 섭섭하며 야속한 마음과 선생님께 드리고 싶었던 마음이 불발이 된 속상함에 과부화가 생겨 그날은 또 한차례 전쟁을 치루기도 했던 일들이 새록새록 기억이 피어난다.     ​또 감성이 풍부해서인지 흥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ᆢ... 테크노 댄스가 열풍이던 때 그때는 길거리 가게들에서 테크노 음악을 크게 틀어 놓기도 해서 길을 걸으면 여기저기서 신나는 음악 소리를 듣게 되고 아들은 브릿지라고 머리카락 전부가 아닌 몇 가닥만을 탈색해 멋을 때 부리는 걸 참 좋아했다. 그래서 옆 머리카락 몇 가닥을 노랗게 염색해주면 너무 좋아했다. 그런 모습으로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하고 신나는 테크노 음악에 오른손을 반쯤 꺽어 세우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리듬을 타면 주위에서 보는 사람이 "어머 저 애기 좀 봐!"라며 박수를 쳐 주곤 했었다. 세월이 흘러 생각을 해보면 그때는 모르고 지나쳐서 순간순간을 힘들다고만 했었는데, 이제와서 돌아다보니 아들로 인해 웃고 행복하고 즐거웠던 일들이 참 많이 있었구나. 다시 한번 소중해진다.     ​아들은 그렇게 자라 어느새 올해 29살이 되었고 이제는 제법 어엿한 청년의 모습을 갖추는데 한 걸음씩 더 가까이 가게 되었고 가족들의 생일이나 기념일은 꼭 기억해서 립스틱 향수 모자 등을 얼마인지 가격은 모르지만, 선물이라며 몰래 사와 머리맡에 두기도 하고 가끔은 달려와 안기며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엄마가 최고지"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뽀뽀하기도 하면 나는 "다 큰 것이 징그럽게~~"라고 말은 하지만 고맙고 또 얼마나 감사한지. 그러면서 어렸을 때부터 풍부했던 갬성쟁이 우리 아들이 그런 감성으로 모두에게 사랑을 주고 또, 사랑받는 가슴 따뜻한 남자로 아들로 그렇게 더 성장하고 더욱 성숙해지기를 바라며 기도한다.​ 

    게시일2023-06-07

  • ​ 생애 최초로 혼자 간 영화관   전 고등학생 시절 태어나서 생전 처음으로 영화관을 다녀왔습니다.어릴 적부터 친구나 가족들과 함께 영화관을 다녀온 적은 많았고 그 외에도 많이 다녀봤기에, 혼자 영화관을 다니는 것에 로망을 품고 있었습니다.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처음으로 영화관을 갈 때는 굉장한 흥분과 긴장감을 동반했는데, 어찌나 긴장했는지 영화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하지만, 그 후로, 2번 3번 조금씩 영화관에 가는 걸 늘리며, 문화생활을 만끽했는데, 학창시절과 직장생활이 제법 바빠서 많이 늘리진 못했지만, 확실한 건 장애인이라도 스스로 문화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여부를 떠나서 제, 스스로 영화관 같은 곳을 들린 건 처음이고, 애초에 제가 장애인임을 알기 전에도, 영화관에, 들린 적이 없기에, 굉장히 색다른 느낌이었습니다.그렇게 장애인의 판정을 받은 뒤, 들린 영화관은 제게 있어서 그저 처음으로 혼자 즐기는 문화생활이란 의미 외에는,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해서인지 그리 개의치 않았습니다.생애 최초로 혼자 간 만화방   전 20대가 되자마자 마치 중ㆍ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것처럼 여러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그중 한 곳엔 만화방이란 곳이 있었습니다.거긴 소설이나 일반적인 만화책과는 달리 주로 흑백 만화가 주를 이뤘지만, 중학생 때 자주 봤던 슬램덩크나 이누야샤 같은 만화책을 주로 볼 수 있어서 느낌이 새로웠습니다.솔직히 슬램덩크는 중학생 때 만화책으로 처음 본 것이기에 딱히 새롭다기보다는 정겹다는 느낌이 강했지만, 이누야샤 같은 건 애니메이션으로 많이 본 적은 있어도 만화책으로 본 경험이 한 번도 없어서 굉장히 신선했습니다.애초에 만화책에서부터 애니메이션이 시작된 것이고 제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만화책으로 본 경험이 한 번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지만, 다들 한 번쯤 가보시는 것도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그리고 만화방 같은 곳에선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막론하고 모두가 사이좋게 만화를 보고 있던 지라 딱히 소외감을 느낀 적도 없어서 장애인들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습니다.장애인도 엄연한 사회의 일원으로 비장애인들과 이용방식의 차이는 있을지, 언정 여가 공간을 이용하지 못하리란 법은 없습니다. 

    게시일2023-06-02

  • ​   ​네버엔딩 우리들의 이야기​ 준수한 청년이 마이크를 잡고 웃었다. 준비해 온 원고를 펼치며 자기소개부터 하는데 말투가 살짝 어눌한 것 빼고는 훌륭했다. 삭발과 농성으로 부모운동의 역사를 언급하며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체계 구축을 위해 이 자리에 섰다고 말하는 청년은 장애부모 단체의 상근자였다. 진행자의 질문에 적절한 미소와 유머로 참가자들의 환호를 받았다. 혼자 사는 것에 대한 외로움을 말하면서도 연애를 하고 싶지만 바빠서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말에 모두들 박수치며 응원했다. 딱 요즘 젊은이의 모습이었다. ​수줍음 많은 청년은 등장부터 시선을 모았다. 큰 키와 웃음기 머금은 얼굴은 편안함이 묻어 있었다. 돈도 많이 벌고 싶고 댄스와 노래, 난타 등을 취미로 가졌으며 8년차 자조모임을 하면서 자립과 독립을 통해 여행을 꿈꾸는 청년. 여자친구 생기면 투쟁 현장에 함께 오고 싶다니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이 몸에 밴 것 같다. 2년째 댄스로 아침을 연다는 말에 음악을 틀어주니 바로 나오는 춤사위에 집회 현장은 콘서트장이 되었다. 길쭉한 팔다리를 양껏 휘두르며 아이돌 춤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모습에 다들 열광했다. ​바이올린 앙상블 연주자들, 예술적 기능을 타고 태어난 부분도 있겠지만 매일 연습하며 보냈을 노력의 시간들이 보였다. 그들 곁에서 뒷바라지한 부모들의 땀방울도 맺혀 있었다. 여러 곳에서의 공연을 통해 그 일로 자신들의 삶이 얼마나 빛나는지 알 것 같은 청년들, 참 훌륭하다.흥 많고 끼 많은 이분들의 삶이 늘 즐겁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부모가 세상을 바꾸는 일에 더욱 박차를 가할 이유다.    ​당사자들의 이야기는 늘 웃음을 선사한다. 마이크 잡은 모습만 봐도 대견하고 기특하다.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할 때는 한마디 한마디가 신선하다. 부모인 우리들의 고민과 걱정이 무색할 뿐이다. 저들은 나름의 일상을 재밌게 잘 살고 있다는 안도감이 슬쩍 생기기도 하지만 세상은 약자들을 노리는 요소들로 가득하다. 이분들의 웃음을 지켜주기 위해 부모가 나서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하는 부담감이 크다. ​발언하는 당사자들을 보면 순간적으로 찾아오는 부러움이 있다. 저 정도만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어느 새 자리 잡고는 내 아이와 비교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내가 그들을 부러워하는 지점은 좀 다르다. 남들 앞에서 말하는 거와 여러 가지 능력이 있는 것이 부러운 게 아니다. 타인의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남들이 웃을 때 함께 웃는 모습을 보면 그들의 공감 능력이 좋아 보인다. 웃음 코드가 각자 다르긴 하겠지만 대중들과 호흡을 함께 하는 느낌, 오늘 자리한 청년들을 유심히 보니 특히 자신들의 말에 더 많이 웃고 즐거워하는 모습들이 인상적이었다. 아는 사람이라 더 집중하고 반응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은가. 어쩌면 그것이 훈련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 또한 나쁘지 않다. 감정을 표현하는 건 연습이 필요한 부분도 있으니 말이다.    ​장애자녀와 함께하는 삶을 이야기하는 부모들의 이야기는 다들 비슷해서 더 공감이 간다. 생후 1년 정도는 여느 아이와 다를 게 없어 보였지만 고집과 집착이 강하고 울음떼와 잠을 안 자던 시절은 대부분 겹치는 것 같다. 온갖 치료와 교육의 열을 어려서부터 들이댔던 경우도 다 비슷하다. ​한때는 차라리 편하게 놀도록 놔두는 게 더 나았을 거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교육을 놓친 엄마들의 얘기는 또 그때 더 많이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이래저래 우리의 과거는 후회와 반성의 날들이지만 다들 열심히 살아왔다는 점은 또 인정한다. ‘열심히’보다는 ‘잘’ 했어야 했는데... ​우리만이 아는 지난한 과거로부터 벗어난 이들도 있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경우도 있다. 벗어난 이들은 남들 앞에서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아직도 힘든 경우는 말을 아끼고 그저 안으로 삭이며 살고 있다. 그저 남들처럼 큰 소동없이 잔잔한 일상을 원하지만 크고 작은 일들이 끊이지 않으니 장애가족의 삶은 고단하다.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체계 구축’을 위한 끊이지 않는 우리들의 이야기에 고단한 삶을 말하는 부모들 얘기도 좋지만 당사자들이 직접 말하는 자신들의 이야기가 더 많아지면 좋겠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 그들이 바라는 세상을 더 많이 소문내고 알리면서 함께 살아가는 ‘여기’를 만들어야 되지 않겠는가.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 탄탄해지는 그날까지 매주 화요일 오전 11시, 여의도 이룸센터 앞 농성장에서 진행되는 우리들의 이야기는 네버엔딩이다.     

    게시일2023-05-22

  • ​ “안녕하세요, 올 한해 여러분들과 함께할 000선생님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개학날, 아이들과 부모님을 눈으로 빠르게 스캔하며 나누는 설레는 첫인사. 경력이 10년이 되어가도록 적응되지 않는 낯설고 설레는 순간이다.  ​특수교사에게 1년 중 가장 떨리는 때가 언제냐고 물어본다면 아마 10명 중 8명은 담당하게 될 학급이 발표되는 때라고 말할 것 같다. 3월 개학일을 앞두면 어떤 개성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을 만나게 될지, 그 아이들을 낳고 기르신 부모님은 또 어떤 분이실지, 아이들이 날 잘 따라줄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며 걱정과 설렘으로 잠을 설친다. 일반학교의 특수학급에 근무하며 타교과 선생님들과 특수교사를 비교해볼 때, 특히 특수교사는 비장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반교과 선생님들에 비해 내가 맡게 된 학생 뿐만 아니라 그 학생의 부모와 가정까지 가까이 들여다보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개학 첫 날이 더욱 긴장되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 사람을 만나는 일은 하나의 우주를 만나는 크고 값지고 무거운 일이라고 했는데 특수교사는 하나의 우주와 그 우주를 감싸고 있는 또 다른 우주까지 만나게 되니까 말이다.  ​특수교육 현장에서 발달장애학생을 만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실제로 2022 특수교육통계(교육부) 결과를 살펴보면 2022년 4월 1일 기준으로 발달장애인에 포함되는 지적장애와 자폐성장애를 가진 특수교육대상자가 전체 인원의 68.7%로 과반수를 훨씬 뛰어넘고 기고자 역시 학교에서 만난 학생들의 80%는 발달장애학생이었다. 그렇다면 학교 현장에서 발달장애를 가진 학생들을 만난 특수교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할까? 의심할 여지없이 가장 기본적으로 발달장애학생들의 학업적 성취를 도울 수 있는 교육 전문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할 것이다. 더하여서 지적장애학생과 자폐성장애학생이 공통적인 어려움을 가지는 사회적 능력의 제약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교육적 지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사회적 능력은 사회생활에 필요한 자기조절, 일상생활능력을 포함하여 타인과의 대화나 협력 등을 포함한다. 학생의 사회적 능력에 대한 현행수준은 교사의 직접적 관찰만으로 파악하는 것은 제한점이 있어 부모나 주양육자의 면담이 필수적이며, 현행수준 파악을 통한 교육적 지원과 중재가 효과적인지 확인하거나 일반화를 위해 학교-가정에서의 공통된 지원이 필요한 경우에도 가정과의 협력과 소통은 반드시 필요하다. 문제는 특수교사가 파악해야 할 정보가 너무 방대하다는 것이다. 학생의 기저질환, 복용 중인 약에 대한 정보, 정기검진일 등 건강에 관한 정보를 포함하여 가족 구성원과 학생의 상호작용, 거주 환경, 가정의 지원 정도, 방과 후의 활동 내용까지 살펴야 하는 부분이 광범위하다.  ​다행히 지금까지 만났던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학생의 학습적, 사회적 교육에 많은 관심과 흥미를 보이며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고 소통에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 그러나 가정형편이 극도로 빈곤하거나 의복이나 개인 위생 부분에 있어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아 규칙적인 등교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학생의 경우 학습적 측면의 지원은 차치하고 생활에 있어서의 지원이 우선이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학생의 부모가 관공서에 직접 지원을 요청할 여건이 안 될 경우에는 특수교사가 대신하여 관할 주민센터 복지 담당 부서에 직접 연락을 해 도움을 요청하거나, 가정에 방문하여 학생의 등하교를 지원하는 등 특수교사 혼자 감당하기에 버거운 일들도 있었다. 교육도 물론 중요하지만 학생들의 안전이 가장 최우선 되어야하는 상황에서 교육적 전문가로서의 교사의 역할과 생존 또는 돌봄의 교사 역할이 혼동되는 경우가 많았고 때때로 특수교사의 역할은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다행인 것은 특수교육대상학생을 포함하여 교육비, 교육환경개선 등이 필요한 학생들을 지원해주는 교육복지사를 배치하는 지역교육청이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복지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제도의 확대를 통해 교육 이전에 생활 환경이나 돌봄에 어려움이 있는 학생들을 지원해주는 보편적인 제도가 실시되고 특수교사가 학생의 안전과 생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면, 발달장애학생들에게 쏟을 수 있는 특수교사의 에너지와 교사로서의 역할도 보다 더 분명해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게시일2023-05-11

  • 회사의 급한 사정으로 미리 계획했던 가족 여행에 휴가를 낼 수 없다며 딸이 아쉬워했다. 다행히 다른 직원의 도움으로 이틀 휴가를 하루로 변경했다.수도권에서 혼자 사는 딸은 여행 당일 아침 7시에 서울 집으로 출발한다고 연락이 왔다. 딸 도착하면 같이 아침 먹으려고 음식 해놓은 걸 보고 기다려야 하는 아들은 힘들어 했다. 일찌감치 만들어 놓은 나물 종류와 된장찌개 냄새는 아들의 식욕을 자극했다. 손을 씻고 오더니 수저를 챙겨 식탁에 놓았다. “하진아, 좀 있으면 누나 올 건데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폐인 아들은 두 손으로 본인 머리를 치며 눈을 부릅떴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이 필요 없다는 걸 알고 돌아섰다. 괜히 냄비 뚜껑을 열어 큰소리 나게 닫았고 음식 준비로 지저분한 씽크대 주위의 식기들을 세게 들었다 놨다 하며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평소와 다른 엄마를 보며 아들은 살짝 겁을 먹었다. 소파에 앉아 주방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화난 엄마를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어? 이게 통하네?’하는 마음으로 분이기를 풀지 않았다. 한편으론 먼저 밥 먹게 하려던 마음이 싹 달아났다. 평소 8시에 먹던 아침을 9시 반이 넘도록 준비만 하고 먹지 못하게 했으니 아들에겐 고역일 수도 있었다. 순간의 자해 행동은 있었지만 더 고집 피우지 않고 잘 참아준 아들이 또 기특했다.넷이 식탁에 앉자마자 아들을 칭찬했다. “누나 올 때까지 기다려줘서 고마워 하진아.” 아들은 자신의 행동이 엄마의 소리없는 화남으로 억지춘양이었음을 알고는 겸연쩍은 듯 웃었다.   바삐 움직여 도착한 강릉 아르떼뮤지엄은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제주에 이어 여수와 강릉에 설치된 빛과 소리의 미디어아트 전시관은 눈과 귀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거울로 반사된 공간은 실제보다 훨씬 넓은 착각을 불러왔다. 파도가 밀려와 발을 적시는 느낌은 실제와 흡사했다. 낯선 걸 피하는 편인 아들도 모든 걸 즐겼다. 손으로 만지거나 얼굴을 대보기도 하면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경포호 주변을 산책하며 벚꽃과 목련 등 봄꽃에 취해 적당한 인파 속에서 봄을 즐겼다. 숙소에 도착해서 옷장을 열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우리 앞의 투숙객이 옷을 놔두고 퇴실했나 싶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아들은 안방 옷장에 겉옷을 걸어두고는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있었다. “세상에나, 말로 일일이 지시하고 눈짓으로 싸인 줘야 움직이는 우리 아들이 이렇게 훌륭하게 옷을 걸어놨네, 정하진 최고!” 엄지를 치켜세우며 호들갑스런 나의 반응에 ‘뭘 그런 걸 가지고’의 표정으로 미소짓는 아들은 꽤 늠름했다. 할 수 있는 걸 안하다 보니 못할 거라는 짐작으로 늘 다그치고 명령하는 나를 또 반성했다. 기다려줘야 한다는 기본 전제를 잊고 재촉하는 버릇을 버리는 게 참 어렵다. 낮에 찍은 사진을 가족대화방에 올리며 웃고 떠드는 사이 밤이 깊었다. 아들에게 침대와 온돌방 중 어디서 자고 싶냐 물으니 침대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집과 비슷한 구조의 숙소라 아들은 모든 게 낯설지 않아 보였다. 편안한 익숙함이 지속되도록 아들의 독립을 현재와 비슷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다음 날은 포천 광릉식물원을 방문했다. 유독 고사목이 많아 화려한 봄꽃보다 갈색 나무들이 즐비했다. 만보 이상 걸으며 가끔 걷기 싫은 티를 내면서도 아들은 우리 뒤를 잘 따라왔다. 남매가 개나리꽃 아래 다정하게 서 있는 모습은 그림 같았다. 아들 주위의 풍경을 찍으려고 폰을 들면 어느 새 자기 찍으라고 폼 잡는 아들을 보며 우리는 또 크게 웃었다. 포천 하면 이동갈비라고 어디가 좋은지 검색해서 찾아간 곳은 꽤 인적 드문 외진 곳이었다. 영업을 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용했는데 주차장에 대여섯 대의 승용차가 보였다. 반찬도 깔끔하고 갈비는 연하고 맛났다. 우리가 먹고 나올 때쯤 식당은 만석이었다. 단골로 보이는 손님이 많았는데 맛과 친절로 사람들이 많이 오는 것 같았다. 이런 외딴 곳에 까다로운 고객을 고정으로 확보하려면 얼마나 치열했을까 생각하니 사는 게 경이롭다.   한두 번쯤 식당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아들에게 인상 쓰기도 하던 예전과 달리 이번 여행은 무난함을 넘어 만족스러웠다. 짧아서 아쉬웠다. 여전히 우리 가족의 분위기는 아들이 주도하는 것 같지만 아들에게 과한 간섭이나 반응을 그냥 봐주고 넘어가다 보니 자연스런 가족여행이 되어간다.우리를 놀라게 하는 아들의 행동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유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짙어진다. 그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가족의 힘이 크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가족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아들의 모든 것을 그냥 받아들이기보다 상황에 맞게 생각하고 움직일 수 있도록 내가 더 세심하게 두루 살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아들의 돌발행동으로 침묵의 순간이 잦았던 과거와 달리 여행의 즐거움이 이번 정도면 딱 좋다. 남산공원 벚꽃 축제 무대 앞에서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춘 것 정도는 흥이 많아 그런 걸로 이해하고 넘어간다. 

    게시일2023-04-14

  •  여느 해와 다름없이 같이 가자는 남편을 뿌리쳤다. 몇 해 전부터 친정부모 기일은 내가 홀몸으로 움직이는 유일한 외박 여행이 되었다. 집안일에서 해방되는 게 좋고, 운전의 부담도, 누군가를 신경 써야 하는 눈치도 볼 것 없어 가장 홀가분한 자유다. 자폐인 아들을 남편에게 오롯이 맡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포기하면 내 삶이 너무 옹색해서 어느 날 머리에 꽃 달고 거리를 활보할 것 같았다. 남편이 직장인일 때는 감히 엄두를 못 냈는데 자영업으로 전환하고 집에 사무실을 꾸미고부터 가능했다. 아들을 맡기고 반나절부터 시작해서 하루로 늘렸고 이틀에서 사흘까지 이제 거리낌 없이 나 혼자 움직이게 되었다. 예전엔 반찬도 많이 준비해 뒀는데 이젠 그것도 하지 않는다. 밥은 해 먹고 매식하면 된다며 국만 두어 가지 끓여 달라니 참 편해졌다.그래도 나물 몇 개 해두면 먹을 것 같아서 봄동과 오이무침, 가지나물을 한 두 끼 양만 만들어 작은 반찬통에 담아 두고 나왔다.   코로나로 3년 만에 모인 남매들은 부모님 생전 얘기에 웃다가 울먹이며 고생 많이 하고 떠난 두 분을 그리워했다. 우리 세대는 이런 제사상도 받지 않을 거란 말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그렇게 헤어지고 자매들만 따로 모여 동생네 집에서 늦게까지 놀다 자고 거제로 이사한 둘째언니네로 이동했다. 태풍 매미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고자 홀몸으로 쌓았다는 매미성과 돔식물원의 웅장함도 좋았지만 역시 바다와 가까이한 시간이 가장 좋았다. 바위틈에 있는 고둥과 홍합, 파도에 밀려와 돌아가지 못한 해삼 두 마리를 잡으며 환호했다. 열 살 조카손주가 가장 신났다. 역시 아이들의 놀거리는 스마트폰이 아니라 자연이다. 우리 손으로 마련한 먹거리로 어스름한 바다 바라보며 먹는 저녁은 꿀맛이었다. 밤에 ‘불멍’ 시간도 좋았고 유호전망대에서 거가대교가 보여주는 빛의 향연도 멋졌다.   사흘 놀면서 집에 있는 부자는 잊었다. 가끔 문자와 전화로 ‘뭐한다고 가물치 콧구멍에 함흥차사냐’며 궁금해 하는 남편에게도 짧은 답변만 보냈다. 꿈같은 시간을 뒤로하고 집에 오는 날, 수서역까지 마중 나온 남편은 혼자였다.   “하진인 뭐해?”  “어, 노래 듣고 있어서 내만 나왔지.”  무심하게 말하는 남편이 놀라웠다. 자폐인 아들을 혼자 집에 있게 하는 건 방치, 학대라며 절대 용납하지 않던 남편이었다. 빈 집에서 혼자 있는 게 얼마나 편한지 아냐고 귀에 딱지가 붙도록 얘기해도 귓등으로만 듣더니 지난 달 모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있게 해 본 이후 남편이 달라졌다. 안 하면 불안하지만 해 보면 괜찮은 일이 이것 뿐 이겠는가.  집에 들어오니 내가 사흘간 비운 집이 맞나 싶을 정도로 깔끔했다. 아들은 씨익 웃고는 제 방으로 들어갔고, 남편은 자신이 살림 잘하고 살았다는 칭찬이 듣고 싶어 내 눈치를 보는 듯했다.   “이제 주부 다 됐구만, 살림하느라 애썼다요.” 아들과 똑같은 표정으로 씨익 웃는 남편, 이제 일주일 여행을 시도해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미리 겁 줄 필요는 없으니까.    다음 날, 아침을 먹으려고 냉장고를 열었더니 빈 반찬통이 나란히 들어 있었다.   “뭐야? 빈 통을 왜 다 넣어놨어? 설거지하기 싫어서 그런 거야?”   내 말에 갑자기 웃는 남편.   “어제 저녁 먹고 하진이한테 반찬통 뚜껑 닫으라 했더니 냉장고에 넣기까지 하더만 빈통이었나 보네, 허허허...”   표정이 확 바뀐 나는 아들을 바라보며   “아이고, 니가 그랬구나. 잘했다 정하진!”  ‘엄지척’ 해보였더니 아들은 ‘뭘 그정도 가지고’의 표정으로 거만한 자세를 취했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걸 자꾸 잊는다. 기회를 주지 않고 기다리지 못하는 성급한 버릇을 고쳐야 됨을 또 깨달았다. 뭔가 지시하고 잘 했나 슬쩍 살펴보는 나와 달리 남편은 아들 행동을 믿고 확인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아들의 달라진 점은 혼자 생각하고 고민하는 모습이다. 거창하게 표현해서 고민이지만 나름 생각하는 모습이 꽤 진지하다. 밥을 적당히 먹은 것 같은데 평소에는 더 먹고 싶으면 본인이 일어나 바로 밥을 떠오든지 엄마한테 빈 그릇 내밀며 더 달라고 했다. 요즘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있다. 밥그릇, 국그릇 빈 걸 뚫어져라 바라보며 ‘더 먹고 싶은데 말을 해? 말어?’ 고민하는 것 같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나 알아들을 수 없는 모음만을 나열한다.   “밥 더 먹고 싶어? 그럼 밥 한마디라도 해봐.”  그제야 ‘밥’을 말하는 아들에게 ‘그래, 네가 갖다 먹어’라 하면 신나게 주방으로 움직인다.   남편과 아들의 작은 변화에도 큰 기쁨을 얻는 나의 요즘은 평화롭다. 우리 가족의 삶이 예전처럼 고달프기만 한 건 아니라서 감사한 날들이다. 긴 세월 나의 언행으로 부자가 달라졌다는 자부심이, 남편에게 모든 걸 맡기고 혼자 여행하려는 이기심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적당한 수위 조절이 필요하다. 

    게시일2023-03-10

  • 마땅한 장소가 없어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하고 들뜬 마음으로 그날을 기다렸다. 젊은이들이 한다는 ‘파자마 파티’를 위해 똑같이 생긴 싸구려 원피스와 촌스러워 보이는 꽃무늬 손수건도 주문했다. 주먹밥과 샌드위치, 과일, 와인에 주전부리까지 각자 맡은 것들을 준비하는 과정도 즐거웠다.매월 한 번씩 만나는 8명의 지인들, 봉사단체에서 만난 아름다운 인연이 14년째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은 ‘독서모임’, 이번 달은 ‘푸드 테라피’를 한다. 각자 돌아가면서 자신의 취향대로 모임을 이끌어 가는데 다들 재주가 많아 늘 새롭고 행복한 시간이 기대된다.   갑자기 남편이 그날 약속이 잡았다고 했다. 내가 미리 말했는데도 지방에서 오는 거래처 사장의 일정에 맞추다보니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내 모임보다 먹고사는 일이 우선이니 난감했다. 자폐인 아들을 데리고 모임에 가려니 내키지 않았다. 늙은 엄마 모임에 가는 아들도 달갑지 않을 텐데 생각하다가 아들에게 물어봤다.“하진아, 오늘 엄마 모임 있는데 아빠 없어도 혼자 집에 있을래?”“네!”짧게 대답하는 아들의 표정이 밝았다. 그런 적 거의 없는 아들이 ‘혼집’을 하고 싶었나 보다.   그날이 되었다. 나는 모임 도중에 아들을 데리러 나왔다. 아들에게 한 번 더 얘길하며 집에 들어섰다. 혼자 있을 아들을 생각하니 나도 아들도 살짝 긴장했다. 식탁 위의 과일을 먹으라 했더니 싱긋이 웃기만 하는 아들이 평소와 달랐다. 집에 오면 씻고 냉장고 뒤져 먹거리 찾던 녀석이 점잖게 소파에 앉아 ‘엄마 빨리 나가’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유튜브 아이돌 공연을 틀어 주고 나중에 저녁은 같이 먹자 말하고 집을 나왔다. 아들을 잊고 나는 음식으로 마음을 표현해 보는 ‘푸드 테라피’에 집중했다. 사춘기 소녀처럼 크게 웃을 일도 아닌데 누군가의 발표에 까르르 넘어가고 울컥 감동하면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웃고 떠들면서도 내 안에 아들 생각은 없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더 안심이 되었나 보다. 게스트하우스는 우리 아파트에 있는 거라 아들이 혼자 있는 ‘모험’을 실행해 볼 수 있었다.   저녁 먹으러 가자고 집에 들렀다. 근 두 시간동안 계속 소파에만 있었는지 평소처럼 제 방에도 가서 책도 보고 푸쉬팝도 하고 그랬는지 알 순 없었지만 느긋한 자세로 엄마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아들이 편안해 보였다. 식탁 위의 과일도 먹지 않았다. 냉장고 그만 열라는 나의 잔소리가 없으니 그 좋은 먹성도 잠시 외출했나 보다. “우리 밥 먹으러 옆 동에 가자.”아들은 벌떡 일어나 점퍼와 마스크를 챙겼다. 엄마 지인들에게 고갤 끄덕이며 인사하고 잘 생겼다, 피부 좋다, 듬직하다 등 쏟아지는 칭찬에 아들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음식도 게걸스럽게 먹지 않고 자꾸 내 손에 있는 걸 먹으려고 했다. 녀석이 체면 차리나 싶은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예정했던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사람 좋아하는 아들은 우리 활동을 바라보며 연신 소리없는 웃음을 보였다.   그동안 아들의 ‘혼집’은 일부러 시도하지 않았다. 집에서 근무하는 남편과 시간을 맞춰 늘 빈 집에 아들만 있게 하지 않고 마트나 잠시의 볼 일을 볼 때도 30분을 거의 넘기지 않고 살았다. 과거에는 집에 아들만 둔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생각해 보면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문제될 게 없었는데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혼자 놔두면 큰 일 나는 줄 아는 나의 불안이 너무 컸었다. 코로나로 인해 긴 시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아들은 아들대로 혼자 지내는 법을 터득했다. 나는 아들을 개의치 않고 내 일을 하면서 같이 또 따로 사는 방법을 익힌 것 같다. 어쩌면 우리는 코로나라는 위기를 기회로 활용했기에 아들이 혼자 집에 있는 게 불안하지 않는 마음이 두꺼워진 게 아닌가 싶다.   함께 살면서 각자의 공간이 편안하고 서로 의식하지 않는 따로 사는 시간이 늘고 있다.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여하며 답답해하고 잔소리하는 엄마에서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사는 일상이 평화롭다.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되는 일인데 참으로 긴 세월이 필요했다. 다음 모임에도 혹시 남편이 일이 생긴다면 아들의 ‘혼집’ 시간을 늘여봐야겠다. 요원하게만 느껴졌던 아들의 독립이 한 발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가슴 뛴 날이었다. 

    게시일2023-02-22

  • 크게 다를 것 없는 일상이지만 새해가 밝았다. 살다보니 이제 달력 바뀌는 것에 무덤덤해졌다. 예전처럼 신년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작심삼일 될 것이 자명했고 딱히 뭔가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사실이 버거워졌다.   자폐인 아들이 피아노에 관심을 갖는 것 같아 디지털 피아노를 ‘덥석’ 들였다. 삶이 단조로운 아들이 뭔가 좋아하는 기색을 보이면 가급적 제공하려고 신경 쓰는 편이다. 생활비를 쪼개서 딴에는 큰 맘 먹고 샀는데 아들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아까웠다. 흉물스럽게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 이참에 내가 배우자’생각하고는 ‘피아노 왕초급’을 검색했더니 수많은 자료들이 좌르르 펼쳐졌다. 악기라고는 어렸을 때 언니들 어깨너머로 배웠던 리코더 외에 아무 것도 못하는 내 자신을 잘 알기에 채근하지 않았다. 배우는 과정을 즐기자고 다독였다. 부담과 스트레스로 다가오면 그만 두자 생각하며 ‘열심히’보다 ‘꾸준히’ 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20대 초반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피아노 악보를 가슴에 안고 다니는 선배가 있었다. 연주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가늘고 긴 손가락이 건반 위를 춤추는 상상만으로도 그녀는 멋져 보였다. 나도 배우고 싶었다. 동네 피아노 학원에 갔더니 초저학년과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아이들로 붐볐다. 조막만한 손들이 피아노 건반 위를 날아다녔다. 나도 저런 날 기대하며 등록했다. 바이엘 책을 끼고 다니려니 쑥스러워서 멋진 선배 흉내는 내지 않았다. 종이 가방에 넣어 다니면서 하루 한 시간 한 달 쯤 되었을 때 내게 피아노는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겨우 한 손 연습인데도 어려웠다. ‘포기는 빠를수록 좋다’며 바로 접었다. 기타를 기웃거렸다. 남들은 노래 부르며 쉽게 연주하는 듯 보였는데 세상에 쉬운 건 없음을 또 깨달았다. 하모니카가 나를 빤히 쳐다보던 날, 인연이 되려나 싶었지만 역시나 내겐 무리였다. 더 이상 도전하고픈 악기는 없었다. 부는 건 호흡이 달리고 손으로 하는 건 손목이 뻐근해서 내 몸은 악기와 친할 수 없는 구조라 생각했다.   아들 핑계로 우리 집에 들어 온 피아노는 서서히 접근하는 나를 내치지 않았다. 공짜 동영상이 나를 피아노 앞에 앉혔고 매일 한 시간 정도씩 몰입하게 만들었다. 바이엘은 한 손으로만 해서 재미가 없었는데 요즘은 흥미를 위하여 처음부터 양손으로 하도록 지도했다. 어설프지만 재미있었다. 하다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버려 깜짝 놀라는 날이 많아졌다. 당구를 처음 하면 잠자려고 누웠을 때 천장에 당구대가 보인다더니 집을 비우는 날이면 피아노가 아른거렸다. C와 G코드를 익히고 ‘도레미’만 뚱땅거리면 되는 동요 ‘비행기’를 자연스럽게 연주하던 날 나는 내가 대견스러웠다. 그렇게 어렵다고만 느끼던 피아노를 스스로 배우고 동요를 치다니 놀라웠다. ‘생일축하’를 더듬더듬 치고 귀에 익은 ‘모짜르트 소나타 11번’을 제법 흉내 낼 때는 뿌듯했다.영상을 오래 보다 보니 스마트폰의 데이터 소모가 상당했다. 계속 영상을 볼 필요는 없었기에 설명을 들은 후 악보만 캡처해서 인쇄했다. 폰 보는 것보다 종이 위의 악보가 더 보기 편했다. 이런 잔머리 굴리는 내가 영리한 편이라며 혼자 잘난 체도 했다. 초보들을 위해 쉽게 편곡한 악보를 영상으로 제공하는 유투버들이 고마웠다. 올해 계획이 생겼다. 피아노 연주를 SNS에 올리는 것이다. 동요보다 조금 더 난이도 있는 곡을 공개하여 ‘혼자 해 낸 것’이라 자랑하면 지인들이 칭찬하는 댓글에 답글 쓰는 나를 상상한다.그리고 내 연주에 반한 아들이 슬그머니 내 옆으로 와서 감상하는 모습도 그려본다. 굵고 짧은 손가락을 주무르며 이순을 넘긴 나이에 피아노 치는 여자를 꿈꾸는 나는 오늘도 디지털 피아노와 한 몸이 된다. 

    게시일2023-01-11

  • 수다를 떨다   나에게 올해는 대체로 우울했지만 한결같이 참담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여느 해보다 미소며 웃음소리의 총량이 줄었었고, 찌푸리고 핏대 올리고 한숨 쉬고 했던 시간이 많았던 것은 틀림없다. 마음의 무게를 그래프로 그려놓는다면 대체로 평정심의 기준선 아래에서만 선이 그어질 터이다. 그럼에도 일주일에 하루씩은 분명하게 마음을 끌어올려주는 시간이 있었다. 특별하고 귀한 시간이었다. 지난 6월부터 발달장애를 가진 청년들과 글쓰기 수업을 함께 했다. 예전에 마을공동체방송국에서 인터뷰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두어 번 발달장애를 가진 청년들과도 인터뷰를 할 일이 있었다. 그 때 그 청년들이 뭔가 맘껏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걸 봤다. 수줍고 자신없어하는 표정으로 내내 입을 꼭 다물었던 이가 있었는데, 남들이 저마다 얘기하는 것을 보고는 인터뷰 시간 말미에 가자 막혔던 말이 서둘러 나오기도 했다. 그런 기억이 선뜻 글쓰기 수업 제안을 받게 한 이유가 됐다.   발달장애를 가진 이들은 대화를 하고 싶으나 많은 경우 스스로 포기하고 만다. 당장 내 아들만 봐도 그랬다. 다섯 살에 처음 의미있는 음절을 내기 시작했지만, 그래서 제 때 근육운동이 되지 않은 발음기관이 어눌하지만(서른이 된 지금까지도 여전해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외국서 살다 오셨어요?’라고 묻기 일쑤다.), 일단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는 일방적인 자기 주제를 주저리주저리 끝도 없이 얘기했었다. 그러다 해가 갈수록 말수가 줄더니 지금은 매우 과묵한 청년이 되었다.상대의 말을 온전히 다 이해하지 못할 때, 상대가 내 말을 이해해 주지 못할 때, 서로 하는 말이 서로 흥미 없을 때, 대화란 얼마나 어렵고 고단한 일인가. 상대가 내 말을 미처 못 알아들은 채로 서둘러 끝내려고 건성으로 대답하는 것도 느끼고, 내가 못 알아들었을 때 알아들을 수 있게 성의 있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도 느낀다. 대화란 모름지기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죽죽 늘어나는 인절미 같아야 하는데, 고집스레 단단한 고무같이 느껴질 뿐이다. 그래서 아들은 말수가 줄었다. 그나마 대화에 알량한 성의를 보이는 엄마와도 대화의 폭은 날로 줄어갔던 것 같다.   그런데 아들은 몇 년째 블로그에 매우 분량이 긴 글을 올린다. 주제는 낯선 분야라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지만 그 글의 표현만큼은 상냥하고 의젓하고 친절해서 상대를 앞에 앉혀두고 조곤조곤 이야기해 주는 투이다.(심지어 한껏 노오오오력했음이 분명한 유모어까지 곳곳에 심어놓으셨다!) 나는 그 글들을 읽으며 미안하고 부끄럽다. 대화를 건성으로 보낸다는 것을 아들에게 몇 번이나 들켰을까.   우리가 누구나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필요하다. 고양이, 개, 화분, 인형, 로봇일지라도 무언가 얘기하고, 그것들에게서 분명한 반응을 듣는다(고 믿는다). 내 마음과 기분 털어놓기를 포기한 이들의 세상에는 미세먼지같이 만연한 우울이 있다. 그러니 우리는 발달장애를 가진 이들과 더 많은 대화를 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 노력해야 한다. 소통하기 쉬운 말들의 통로를 찾아서 함께 앉아서 한 마디 한 마디를 발견해내듯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어미부터 그리 하지 않으면 아이는 누구와 다정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까. 이런 이유로 나는 내 아들과 엇비슷한 나이 또래의 발달장애를 가진 청년들과 즐거운 수다시간, 진지한 글쓰기 수업을 갖게 되었고, 지난 몇 달 동안 참으로 귀한 시간을 보냈다.   몹시 기품있는 청년들   첫 시간부터 그들은 매우 상냥하고 친절했다. 기대와 호기심도 가득했다. 수업의 주제가 ‘나를 표현하는 글쓰기’이니 이 시간에는 오직 ‘나 자신’에 집중해서 내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고 엄숙하게 선포하고 시작했는데, 어려워하거나 싫은 내색이 없었다. 마치 준비하고 기다려왔던 일을 대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처음부터 몇 가지 원칙을 정하고 시작했다. 말을 많이 하자, 말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말하자, 혼자서만 말하지 말자, 남이 말할 때는 들으며 기다리자, 모든 것은 상의해서 정하자. 이에 따라 첫 시간에 우리가 한 일은, 제일 처음 자기 소개하는 인사말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한다면 누구부터 할 것인가, 앉은 자리 순서로 할 것인가, 나이 순서로 할 것인가, 이름의 가나다 순서로 할 것인가, 하고 싶은 사람이 먼저 손드는 순서로 할 것인가를 상의했다. 합의가 안 될 때는 거수로 할 것인가, 자기 의견을 양보할 것인가도 상의했다. 물론 재미삼아 더 시시콜콜한 것까지 상의하고 정하고 했던 것이지만, 기대보다도 더 즐거운 분위기가 만들어져서 첫 시간, 첫 대면의 부담이 가볍게 날아갔다.   무엇보다 첫 시간에 내가 깊이 감명 받은 것은, 이 청년들이 매우 좋은 태도, 좋은 매너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대를 ‘님’으로 부르는 것, 모두에게 존대하는 것, 상대가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 상대 말에 ‘그렇군요’라고 공감해 주는 것 등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한결같았다. 아마도 오랜 시간 서로 노력해서 몸에 밴 약속인듯 했다.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에 이르는 나이 폭을 가진 이 청년들은, 그래서 그 나이에 맞는 기품 있는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 결과 실제로 그래 보였다. 나는 이 기품 있는 청년들과 함께 일주일에 두 시간씩 수다를 떨며, 그들 삶의 기품 있는 시간을 함께 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는 중이다.   수다의 기록 1   - ‘맘에 걸린다’무슨 말 끝에 ‘맘에 걸린다’는 얘길 했다. A가(A,B,C는 특정인이 아니라 대화의 순서대로 붙임) 맘에 걸린다는 게 무엇일까 물었다. 청년들은, 생각이 사라지지 않고 자꾸 떠오르는 것이라는 훌륭한 정의를 내렸다. 맘에 걸리는 생각이 무엇이 있는가 물었더니, B가 “학교 다닐 때 아토피가 있던 친구가 있어서 도와주고 싶었는데 못 도와준 것이 맘에 걸린다”고 했다. C는, “지하철에 가면 시가 붙어있어요. 시를 보는데 마음에 걸렸습니다.”라고 했다. 시의 내용이 마음에 걸렸냐고 물으니, 그게 아니란다. “나도 시를 쓰고 싶은데 못 쓰고 사진만 찍었습니다.”라고 했다. 그 시를 낭독해 달라 했더니, ‘풀잎처럼’이라는 제목의 시를 낭독했다. “그 시가 왜 좋아요?” C의 대답은, “시가 귀여워요.”였다. C는 우리 글쓰기반의 두 시인 가운데 한 명이다. 둘은 글쓰기 시간에 시를 척척 써냈다. C는 산, 바다, 꽃, 자전거, 별에 대한 시를 썼고, 다른 한 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러 견종에 대한 시를 시리즈로 썼다. 나는 이들 마음 속에 가득한 시심(詩心)에 매번 마음이 울렁인다. 그러면서 내가 산문을 쓰는 사람인지라 시를 이끌 재주가 부족한 것이 몹시 ‘맘에 걸린다’.   - 텔레비전에 내가 나온다면 글쓰기팀은 영화 ‘니얼굴’을 보고와서는 기분들이 좋았다. ‘니얼굴’은 발달장애를 가진 화가이자 이제는 연기자까지 된 정은혜 씨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영화다. 영화를 보니 어땠냐고 물으니 D가 답한다. “좋았어요. 아는 사람이 나와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꼭 만나고 싶어요, 저는 팬이에요.” 그런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본 이가 없다. 드라마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가 보다. 그래도 화제가 된 것은 알고 있는 이들이 몇몇 있었다. 발달장애를 가진 이들이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가 많이 알려지니 어떤 기분이 드는지 물었더니 이런 대답들이 나온다. “드라마나 영화에 우리 발달장애 활동가들이 나오니까, 기분이 좋아져요. 사람들이 보고 좋아하니까 나도 좋아요.” “나도 내가 나오는 다큐를 찍고 싶습니다.” “나는 영화, 나는 드라마도 찍고 싶습니다.”   - 응원을 보낸다, We will Rock you!한번은 E가, 공연을 앞두고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 많이 떨린다고 했다. 정말로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잘 할 거라고 다독이니 너도나도 “잘 될 거에요!”를 외친다. 이때 가만히 있던 F가 갑자기 책상을 쿵, 쿵 두드렸다. 그러고는 이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쿵, 쿵, 짝! 쿵, 쿵, 짝!) We will, We will Rock you! 갑자기 분위기는 롹콘서트! 다같이 신나게 발을 구르고 책상을 두드리며 We will Rock you!를 외쳤다. 한참을 그러고 나서 E에게 이제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음, 아직도 떨려요.”그러자 다시 F가 We will Rock you!를 외쳤다. 다시 한 번 롹콘서트. E에게 어떠냐고 물었다."아직도 좀 떨립니다.“다시 다같이 We will Rock you! E가 외쳤다. “이제 그만! 잘 할 것 같습니다!”우리는 모두 배꼽을 잡았다.   수다의 기록 2   -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대체로 어떤 주제든 기분 좋은 얘기로 시작하려고, 좋아하는 느낌들, 좋았던 기억을 얘기할 때가 많다. 그런데 얘기를 하다보면 이내 나빴던 기억, 싫어하는 것들로 옮겨가기 일쑤다. 좋았던 것, 좋아하는 것들보다 나빴던 것에 대한 기억이나 느낌이 더욱 자세하다. 나도 그런가 하고 생각을 해보았는데, 그건 잘 모르겠다. 나는 나빴던 기억이나 싫어하는 것들의 목록은 조금씩 꺼내서 각자 마음의 손길로 툭툭 건드리고 슬슬 쓸어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햇볕과 바람에 말리는 건어물들처럼, 널어놓은 목록들의 생채기가 무뎌질 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그런데 귀퉁이마다 부서져 나오는 그 목록들은 굴러 떨어지면서 마음 벽을 긁었다.   한 번은 G가 좀 우울해 보였다. 왜 그러냐 했더니 예전에 기분 나빴던 기억이 떠올랐다. 했다. 말이 나온 김에, 기분 나빴던 일을 얘기하고 서로 위로해보자 했다. “차렷 열중쉬어를 계속 시켰어요.”“혼내면서 가르치는 거 싫어요.”“욕하면서 가르치는 거 싫어요.”“집에서 방문 열어놓으라고 잔소리하는 거 싫어요.”“사람 툭툭 치면서 그만하라고 할 때 기분 나쁩니다.”“애들이 내 새 신발을 계속 밟았어요. 빵셔틀도 시키고요.”“자꾸 돈 갚으라고 했어요.”......H는 학교 다닐 때 같은 반 애들이 왕따를 시켰단다. 수학을 몰라 물어보니 무시하고 왕따를 시켰다. I가 물었다. “근데, 왕따가 뭐에요?” H가 간결하게 대답했다. “혼자 노는 거에요.” 아무도 말 걸어주지 않고 아무도 놀이에 끼어주지 않는 것, 왕따.   J는 이런 기억을 떠올렸다. “초등학생 때 급식시간에 친구들이 내가 음식 먹는 모습이 꼴보기 싫다고 판자로 앞을 가렸어요.” J의 표정이 슬펐다. 다들 화가 났다. 누군가 지금이라도 그때 그 애들한테 욕해보라고 했다.(파이팅~!) J는 슬픈 얼굴로 웃으며 “친구들인데 어떻게 욕을 해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 때 친구들이 이제 잘못을 깨닫고 사과를 해온다면 어떻게 할래요, 라고 물었다가 대답을 듣고는 아연실색했다. 대답은, “나도 사과할래요.”였다.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대가 사과를 해올 때는 나도 사과해주는 게 좋은 거란다. J는 그때부터 내 마음 속에서 ‘천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나는 J가 즐거운 기억이 많은 천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설레지 않는다K는 장애와 인권에 대해 매우 많은 생각을 했고, 그 생각들이 잘 정리되어 있어서 대화를 하면서 배우는 것이 많은 활동가이다. 어느 날 그가 사람을 사귀는 일에 대해 했던 말들은 마음이 아렸다. 그는 ‘나는 포기와 체념을 습득하고 살아갑니다. 누군가 좋아하고 설레는 마음이 들까봐, 그런 마음이 들지 않게 합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자기 선택대로 살아가는데 나는 그러지 못하게 살겠구나 하는 마음에 기분이 나빠집니다. 또 장애를 인정해주고 다름을 인정하고 배려하려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어떤 사람이든 나의 장애에 거리를 둘 거고 그러다 결국에는 멀어질 것이라 누군가를 보아도 설레지 않습니다.’ 쉽게 포기하거나, 포기하지 않아도 될지 잘 몰라서 포기하거나, 포기하지 못할 것을 포기해서 못내 마음이 쓰리고 아쉽거나, 끝내 포기하지 못해 슬프거나. 발달장애를 가진 이들은 하루에도 수도 없는 순간 무언가를 포기하며 살고 있다. 나는 이들이 포기하고 만 목록보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의 목록이 점점 더 길어지기를 바란다. 포기했던 것을 찾아내어 끝내 이룬 행복한 목록이 점점 더 확장되기를 바란다.   - 우리 세상은우리 중 L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의 최다기록보유자인데, 그는 작은 글씨로 꼼꼼하게 자기가 좋아하는 목록을 적기 시작해서 글쓰기 시간마다 목록을 보태나갔다.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장소, 좋아하는 일들이 A4 두 장을 빼꼭하게 채우고도 넘쳤다. 그 덕에 우리는 L이 좋아하는 것들을 굉장히 많이 알게 됐고, 어쩌다 그 음식, 그 장소를 보게 되면 L을 떠올린다.모두에게 좋았던 시간, 좋았던 기억의 목록이 열 장, 백 장을 넘어 한권의 책, 칸막이가 많은 책장을 채우길 바란다. 우리 세상은 그것을 위해 있는 거다. (2022.12) ​

    게시일2022-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