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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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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들이 여러분들께 ‘발달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건네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시선으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 계시나요?
이 게시판은 보다센터에서 초대한 각 분야의 칼럼니스트들이 여러분들께 ‘발달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건네는 곳입니다. 발달장애와 관련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칼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또한 발달장애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의 일상이야기,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의 소박하지만 통렬한 이야기와도 공감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은 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게시물 총 116

  •  “하진아, 엄마야. 문 열어 줘.”   거제로 이사한 언니네 집에서 나는 함께 모인 자매들과 수다 떨며 놀다가 잠이 들었고 남편과 아들은 근처 숙소에서 밤을 보냈다. 아침밥을 같이 먹으려고 부자 데리러 숙소로 갔다. 벨을 눌렀으나 아무 기척이 없었다. 한 번 더 누르니까 아들인 듯 발소리가 들렸다. 문틈으로 아들을 불렀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가 생각나 웃음이 나왔다. 집에서는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초인종 소리에 문 여는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한 번 더 아들을 불렀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아들은 문을 열고 활짝 웃었다.   “오올, 하진이 덕분에 엄마 들어왔네. 고마워.”   호들갑 떠는 소리에 놀란 남편이 일어났다.   “언제 들어 왔노? 문은 우째 열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남편이 물었고 아들이 문 열어 줬다는 내 대답을 멀리 소파에 앉아 듣던 아들은 잘난 척하는 표정으로 우릴 바라보았다.  “하진이가 엄마 언제 오는 지 목 빼고 기다린 거 아나?”  남편의 너스레에 아들과 나는 눈 맞추며 웃었다.   남들은 자연스럽게 배우는 일상을 아들은 본인이 하고 싶거나 무심한 척 보고 습득하는 자폐인이다. 집을 떠나 다른 곳에서 보이는 아들의 행동을 나는 유심히 살피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가끔은 내 시선을 너무 신경 쓰는 것 같아 안 보는 척 하지만 눈치 빠른 아들은 그걸 놓치지 않는다. 그렇게 서로를 의식하며 살아온 모자 관계가 조금씩 달라지는 걸 느꼈다. 코로나로 외부 활동이 멈춘 시기에 나는 아들을 데리고 인적 없는 곳으로 많이 다녔다. 아들의 어떤 행동도 외면하려고 애썼다. 워낙 겁이 많아 위험한 일은 하지 않아 다행이었고 손이나 몸을 앞뒤로 흔드는 상동행동은 말리지 않았다. 예전에 사람 많은 곳에서는 우릴 바라보는 남들의 이상한 시선이 싫어서 못하게 막았다. 그러면 아들은 더 심하게 하거나 소릴 지르며 뛰어다녀서 난감했다. 보는 눈이 없는 곳에서는 우선 내 마음이 편했고 아들은 본인이 어쩔 수 없는 상동행동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스트레스를 덜 받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서로 편한 외출이 잦다 보니 아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있었다. 아들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엄마의 눈이 다른 곳에 머무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상동행동의 강도와 횟수가 낮아지고 줄었다. 말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아들의 눈은 많은 것을 읽어내게 한다. 그것을 읽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아들의 삶이 좀 더 행복하려면 그 눈빛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소통 가능함을 주변인들은 잘 안다. 눈맞춤을 어려워하는 자폐인이 있지만 눈으로 말하려는 아들같은 자폐인도 있다.   한해의 끄트머리다. 여느 해와 달리 올해 아들은 그동안 보여 주지 않았던 모습을 많이 보여 주었다. 어쩌면 꼭꼭 숨기고 있던 것들을 이제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고 자신도 모르게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유아적 질문이라고 못하게 말려도 장난삼아 하는 남편의 ‘아빠가 좋아? 비가 좋아?’라는 질문에 아들은 귀찮은 듯 ‘아바!’라고 답한다. 유일하게 또렷이 발음하는 단어가 ‘비’라서 남편은 자신과 비를 동일선상에 놓고 있다.휴일 점심, 아들이 국수를 다 먹고는 누구한테 좀 얻어먹을까 둘러보다가 양이 많이 남아있는 누나에게 빈 그릇을 내밀었다. ‘먹고 싶은 만큼 가져가라’는 누나의 말에 조금 덜어 와서는 맛있게 먹었다. 갑자기 남편이 ‘아빠가 좋아, 누나가 좋아?’라고 물었더니 어설픈 발음으로 ‘누우나’ 하던 바람에 우린 또 까르르 웃음꽃을 피웠다.원형 식탁에서 음식 차리는 분에게 걸리적거릴까봐 스스로 의자를 뒤로 빼서 잠시 기다리더니 셋팅 끝나자 의자를 당겨 바로 앉는 일은 생각지도 못했다. 시켜도 멀뚱멀뚱 바라만 보던 때가 엊그제였기에.머리를 감고 드라이기를 직접 사용하다니, 이발 후 미용사가 드라이기 대는 것조차 못 견뎌 가만있지 못하던 아들이었기에 ‘점점 사람 꼴 난다’며 아들 덕에 많이 웃은 한 해였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지만 사회적 약자들이 사는 세상의 속도는 여전히 느리고 더디다. 아들도 자신만의 치열한 노력으로 느리지만 20대 중반의 시간들을 그냥 보내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나쁜 행동이 고착되고 잘 하던 일들이 퇴행하는 것 같아도 여전히 아들과 아들을 지원하는 주변인들은 애쓰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우리의 노력이 모두의 행복으로 다가갈 수 있는 세상, 갈망한다. 

    게시일2022-12-19

  • “정말 그지같은 2022년이었어.” 12월이 시작될 때 제일 친한 사촌동생에게 이렇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누군가에게는 나처럼 엉망진창인 한 해였을 테고, 누군가에게는 환호작약하는 한 해였을 것이다. 나는, 대체로 어두웠던 한 해로 기억하는 이가 많았으리라 생각한다.(환호작약했던 이들과는 상종하기 싫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도 집안 어른들이 여럿 돌아가셨고, 큰 병을 앓거나 앓고 있는 친척도 여럿이었다. 우리 가족에게도 코로나19에 모두 걸렸던 일 말고도 어려움이 좀 있었다.부모연대 회원으로서도 몹시 어두운 한 해였다. 코로나19 시기에 가족참사에 대한 뉴스가 잦았지만 올해는 유난히 더 그랬다. 보도되어 알려진 것만 올해 열 건이 넘는다. 더 이상 희망을 품지 못해서, 죽음보다 고통의 무게가 더 커서, 우울의 깊이가 더 깊어서 세상을 뜨면서, 끝까지 책임지지 못한 생명을 스스로 거둬가는 모질고 잘못된 일을 저질렀다. 자신도, 자녀도 소멸시켜 버리는 무서운 슬픔. 우리는 거의 일 년 내내 검은 옷을 입고 지낸 것 같다. 뜨거운 여름, 집중된 가족참사에 우리는 햇볕에 벌건 얼굴에 눈물을 흘려가며 추모제를 지내고 또 지냈다. 그러다 여름의 끝에서는 기어코 들이치는 흙탕물에 장애를 가진 이와 그 가족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희생되기까지 했다. 반짝이는 구둣발로 나타나 반지하 창살 밖에 쭈그리고 앉아서 남의 일 묻듯 하던 그 무례함을 지금도 용서치 못한다.   그러다 그러다 가을의 끝에서는 축제에 나섰던 젊은이들이 압사를 당했다. 우리는 낱낱의 이름도, 얼굴도 없는, 그저 ‘사망자를 추모합니다’라는 글자 앞에 추모의 국화를 헌화하는 희한한 일을 보았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두고 다른 속계산으로 어이없는 일을 저지르는 몰염치한 장면을 보았다. 우리는 한참이 지나서야 그 어이없는 추모의 장면을 그대로 보아넘겨준 우리가 얼마나 생각없고 비겁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모멸감과 함께 왔다. 대통령과 총리의 조화를 내동댕이친 유족이 우리의 부끄럼을 일깨워주었다. 2014년부터 달아 온 노란 리본 옆에 이제는 검은 리본 하나가 더 보태졌다. 2022년은 검은 리본의 해이다. 많은 사람에게 참혹했던 해.   우리 사회가 아직 그렇다. 숨기고 왜곡시키고 피하고 거짓을 말해서 그 참혹을 가릴 수는 있다. 분칠을 하고 포장을 해서 그 저열과 저급함을 가릴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안에 한 줌의 진심과 일말의 인류애와 생명에의 연민이 부재함을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을 들춰내는 것은 누구의 힘일까. 슬픔은 힘이 세다. 우리를 무기력하게 가둬버릴 때가 많지만, 낱낱의 슬흠이 모이면 숭고한 힘이 생길 때가 있다. 저무는 2022년이 끝내 ‘그지같은’ 해로 남지 않으려면 그 슬픔의 위안 정도는 남겨두고 가야한다. 그렇게 생각한다.  올해는 임인년, 호랑이의 해였다. 호랑이를 좋아하는 나는 호랑이의 해가 이렇게 참혹하게 지나가는 것이 못내 억울하다. 호랑이 꼬리털의 끝, 그 가장 끝이 사라지는 날까지 나는 호랑이의 명예스런 퇴장을 기원한다. 퇴장과 함께 그것이 어떤 것의 조짐, 그 미세한 발단이기를 바라마지 않는 것이다. 나는 올해 동짓날 팥죽을 퍼먹으며 오직 그것을 빌 터이다.(12.10)   - 김종옥(전국장애인부모연대 문화예술위원장)  ​ 

    게시일2022-12-13

  • 제 이야기입니다.   기억이 잘나지 않습니다만 천천히 쓰겠습니다.   저는 3살 때부터 초등학교 6학년을 졸업할 때까지 보육원에서 살았습니다.   보육원에서의 삶은 좋지 못했습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항상 싸움으로 승자를 가릅니다. 잘하면 1등이고 아니면 모두 2등입니다. 왜싸우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저 보육원에서는 형들이 법입니다. 그곳에서 저는 약자였습니다. 심심해서 퍽... 짜증난다고 퍽퍽....또 푹푹....입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가다 잡히게 되면 2배는 더 맞았습니다. 또한 벌도 받았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과 다르기 때문인 걸까요? 항상 궁금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식 전에 저는 보육원에서 나와 기쁜우리 복지관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저는 외쳤습니다.   “ 아~ 저는 장애인 구재희입니다!”   장애인이라서 차별받으면서 자라 왔지만 졸업한 제가 대견스러웠습니다. 졸업하고 나서 지금까지도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요. 하지만 장애인을 대하는 차별들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차별을 받을 때면 어릴 적 보육원에서 같이 지낸 그 형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럴 때 마다 화도 나고 복수도 하고 싶지만 불가능하겠지요. 지금은 어릴 적과 다르게 알고 있습니다. 차별하는 사람이 나쁘고 저는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요.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멈춰야 합니다.​ 지금은 번듯한 직장도 다니고 자립해서 혼자 잘살고 있습니다. 장애인도 차별받지 않고 지역사회에서 같이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차별받지 않아야 하고 커서는 자립할 수 있는 지원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이 제일 좋습니다.   저는 장애인 구재희 입니다!  

    게시일2022-12-05

  • 2022년이 되었다며 새해 다짐을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22년이 마무리 되어간다. 온유도 8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1살을 지나 이제 곧 5학년인 고학년을 준비하게 되었다.온유가 성장하면서 학교생활도 중요했고 학교생활에 불편함이 그리고 어려움이 없도록 준비해야 할 것 도 많았고 온유의 재활 치료도 학령기에 맞춰서 변화가 필요했다. 영아기 때는 치료사가 중심이 되어서 온유가 직접 배우고 익혀나가는 시기였다면 유아기 때는 영아기 때와는 조금 다르게 치료사의 중재를 최소화하여 움직임을 스스로 많이 늘려나가는 치료로 이루어졌다. 유아기 때는 스스로 움직임에 재미를 많이 느끼고 치료의 주도권이 온유에게로 서서히 바뀌었고 하고 싫고 힘든 치료가 아닌 운동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운동을 하다 보니 온유의 자존감도 더 높아졌고 몸을 움직이는 방법을 자신의 방법으로 터득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움직임이 변화 되었다. 물론 단독보행이 힘들기 때문에 학교에서 쓸 이동식 책상도 준비를 해서 학교 내에서의 이동에 어려움이 없도록 준비를 해 두었다. 이것 또한 일상재활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여러 종류의 쓰기도구와 연필(홈있는 연필, 얇은 연필, 삼각 연필...), 길이, 연필심의 굵기(B,2B,4B,6B) 중에 온유가 직접 오랜 시간 써보고 사용한 뒤 최적화된 것으로 준비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많이 경험해 보지 못한 곳을 조금씩 다녀보기도 했다. 유치원과는 달리 학교는 더 많은 사람과 비장애 학생들에게 대부분 맞춰진 시설이라서 치료실에서 운동했던 것을 중심으로 주변의 공원, 과학관, 미술관, 공연장, 백화점, 마트, 놀이공원, 재래시장, 고궁, 언덕길, 흙길, 돌길, 바다, 산, 계곡......그리고 자동차로 긴 이동을 하며 전라도 여행, 비행기를 타고 여름과 겨울 제주도 여행(장애인 서비스로 받아보고), 기차를 타고 서울 여행을 다니며 다양한 형태의 환경에 적응을 했다. 또한 공공 장소에서의 예절과 장소에 따른 어려움, 그리고 그곳에서의 대처방법을 직접 경험하며 유아기 때와는 또 다른 재미를 경험했다. 1년, 2년, 3년, 4년이 지난 지금은 온유가 다녀왔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방학이나 휴일을 기다리며 재미난 일을 계획하고 또 가고 싶거나 궁금한 곳은 구글 지도를 보며 살펴보는 아이로 성장했다. 아이가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성장 할 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지만 어쩌면 지체장애 아이라는 이유와 엄마만의 생각으로 아이를 계속 치료실을 전전하며 다녔다면 어땠을까? 라고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아직은 미성숙한 부분이 많이 알려 주고 싶은 것도 많지만 지금 현재 어떤 상황 속에서도 당당하고 재미도 느끼고 궁금증이 많이 아이로 성장 중이다. 토끼 같은 딸과 거북이 같은 아들 온유가 있는 우리 가정은 토끼와 거북이의 동화를 더 재미있고 다음 이야기가 기대가 되는 가정으로 거듭나고 있다. 내년의 거북이, 몇 년의 지난 뒤의 거북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가 되고 변화가 있을지 기대가 된다.

    게시일2022-11-30

  • 안동 봉정사 매표소 앞, 아들의 복지카드와 내 신분증을 보여줬다. 직원이 앉은 채로 힐끗 아들을 바라보더니 벌떡 일어나 다리를 훑어보았다. 그분은 발달장애에 대해 잘 모르고 신체장애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진이가 장애인 같지 않았나 봐, 하하하...” 일주문이 보일 때까지 곱게 물든 단풍을 보며 나는 크게 웃었다. “그러게, 저렇게 대놓고 스캔하는 건 또 처음이네.” 가족들도 짧게 웃으며 가을 속으로 들어갔다.   20대 자폐인 아들은 가끔 야무지게 입 다물고 있으면 평범한 청년으로 보인다. 어렸을 때는 티 나지 않는 외모로 오해도 많이 받았다. ‘자식을 버릇없이 키운다’느니 ‘무슨 애가 저렇게 산만하냐’는 등 어른들의 호된 말을 많이 들었다. 울기는 또 왜 그렇게 많이 울었는지 땅바닥에 드러누워 사지 흔들며 발버둥 칠 때는 정말 난감했다. 외모에 대해 별 관심 없는 아들이 묘한 표정을 지을 때면 보는 사람들이 ‘왜 저래?’하며 힐끔거리지만 정작 본인은 얼굴 찡그리는 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이름을 불러 표정이 바뀌도록 했지만 나도 궁금하다, 그럴 땐 무슨 생각을 하는 지.수용언어에 비해 표현언어가 서툴다 보니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하면 탠트럼(분노 표출)으로 답답함을 호소했다. 사람들의 힐끗거림이 불편해서 외출이 두렵던 시절이었지만 숨어 살 순 없었기에 많이 나돌아 다녔다. 한적한 곳에서는 행복한 표정으로 잘 걷고 뛰어 다녔지만 사람 많은 곳에서는 뭐가 불만인지 자주 떼를 쓰고 울었다. 사람들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가 있나 생각해 봐도 수긍할 만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자주 경험하다 보니 원인은 내게 있음을 알았다. 아들의 장애가 보이지 않게 하려고 알게 모르게 나는 아들을 강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소리를 내면 입을 막았고 두 손을 허공에 대고 흔들면 잡아서 멈추게 했다. 한적한 곳에서 허용하던 것들을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 억제하니 아들은 엄마의 통제를 힘들어 하고 있었다. 내가 견뎌야 할 타인의 시선만 생각하고 아들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던 시절이었다. 주 양육자인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걸 알았고 실행해 나갔다. 떼쓰고 우는 행동이 과할 때 양해를 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웃으며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아들에게 집착하면서 같이 흥분하고 그만하라 다그칠 때보다 빈도와 강도가 줄어들고 약해졌다. 주위 사람들에게 요청한 나의 말 한마디에 생각보다 사람들의 반응은 꽤 너그러웠다.   태어날 때는 몰랐던 자폐와 달리 다운증후군 엄마는 어딜 가도 장애가 먼저 보이니 대놓고 바라보는 게 너무 싫다고 했다. ‘멀쩡하게’ 생긴 아이가 눈에 띄는 행동하면 뒤늦게 검지 손가락을 허공에 대고 동그라미 그리는 사람이 나는 미웠다. ‘난 사람들이 바로 알아보니 차라리 더 낫다’는 말을 주고받던 어린 시절 엄마들이 떠오른다. 이래저래 아이 어렸을 때의 젊은 엄마들은 자녀들의 장애를 부정하고 싶었고 힘들었다. 자녀 양육보다 우릴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에 더 신경 쓰느라 마음고생이 심했다. 우린 늘 총 맞으며 살아간다고 씁쓸해 했다. 사람들의 ‘눈총’.많이 익숙해졌지만 아직도 누군가의 반응에 웃거나 서운하기도 한 걸 보면 아들의 장애를 온전히 수용하는 게 내게는 영원한 숙제인 것 같다.   ‘장애인 같지 않아요’라는 말에 반색하고 내 눈에도 의젓해 보이는 아들을 흡족해 할 때면 딸이 말한다. “엄마 기분 나쁘라고 하는 말은 아닌데 그런 말 자체에 당신 아들 장애인이란 게 내포되어 있는 거야. 엄마 눈에 멋진 아들이지만 누가 봐도 장애는 보여, 뭐 어때? 내 동생은 그냥 내 동생이지.”“어허이, 티 나면 어떻고 안 나면 어떻노? 이래도 저래도 우리 아들인데!”남편도 거들면서 나를 나무라듯 한 마디 던진다. 두 사람 말을 수긍하면서도 가끔 아들을 보는 시선에 내 기분이 달라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살면서 타인의 말이나 행동에 가볍게 기분 좋거나 나쁠 수 있는 그런 사소한 감정이라 생각한다. 어찌 보면 아들에게 가장 많이 매달렸던 나와 달리 남편이나 딸은 자식과 동생이라는 혈연에 대한 생각이 나와 좀 다른 것 같다. 덜 집착하거나 있는 그대로를 보려는 마음의 눈이 나보다는 한 수 위라는 생각이 든다. ‘뭐 어때?’하는 표정들을 보면 나도 아들에 대해 좀 더 객관적이고 너그러워야겠다.보이는 게 다가 아님을 알면서도 행동과 외모에 신경 쓰며 살다보니 아들이 겪었을 통제와 억압이 많이 미안하다. 그러면서도 늘 만삭인 배를 보며 한숨 쉬는 것은 ‘비만이 건강의 적’이라고 포장된 말을 하면서도 입을 옷 사는 게 힘들고 옷태가 나지 않는다는 속내를 감추고 산다. 자해를 하고 알 수 없는 이유로 크게 웃거나 울던 시절엔 거기에 매몰되어 다른 건 잊고 살았다. 힘들었을 때를 생각하며 지금 보이는 것이 내 맘에 들지 않아도 건강한 하루를 잘 살아내고 있는 아들을 고맙게 생각해야겠다.   내년엔 봄 봉정사의 풍경을 보러가야겠다. 아들을 뚫어져라 보던 그 직원의 어떤 반응에도 나는 무심하리라. 

    게시일2022-11-18

  • 얼마 전 서울 한 구청에서 발달장애에 관한 이해교육을 하게 되었다. 공무원들이 봉사활동을 나가기 전에 사전교육으로 요청한 것인데, 이런 경우가 흔치 않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미리 알고 가겠다는 건, 봉사활동을 건성으로 하지 않겠다는 뜻이니 말이다.그런데 교육 장소에 가는 전철 안에서 문득 고래를 보았다. 이렇게 말하면, 이 무슨 우영우 같은 소리인가 하겠지만, 전철 출입문 위 화면에서 느긋하게 유영하는 고래를 봤다는 말이다. 교육방송의 ‘지식채널e’에 나왔던 한 장면이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 52 헤르츠 고래’ 이야기였다. 갈아타느라 한 정거장을 걸치는 바람에 지켜보지 못하고 제목만 기억하고 내렸는데, 발달장애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날 아침에 마주친 우연이 무척 반갑기도 해서 이동하는 동안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았다.    -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 52헤르츠 고래   52헤르츠 고래(52-Hertz Whale, 속칭 52 Blue)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로 알려져 있다. 이 고래는 냉전 말기였던 1989년, 미국 해군이 소련의 잠수함 탐지 목적으로 만든 수중음향감시체계(SOSUS)에 처음으로 포착되었고 이후 여러 지역에서 정기적으로 관찰되었는데, 미국 해군은 고래가 내는 음향주파수인 52헤르츠에서 착안해 고래의 이름을 ‘52헤르츠’라고 불렀다. (사실 이 고래는 ‘미확인된 종의 고래로 추정되는 무언가’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울음소리를 수중청음기Hyhone로 들은 사례가 전부이며 실물을 발견한 적은 없다고 한다.)고래는 보통 12~25헤르츠 사이의 주파수로 의사소통을 하고, 대왕고래는 30헤르츠 주파수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이 고래는 52헤르츠, 정확히는 51.75헤르츠의 고음으로 운다. 다른 고래들과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해군은 이 음역대의 소리를 내는 다른 고래가 있는지 조사했는데 오직 한 개체의 소리만 포착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52헤르츠 고래를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라고 부른다.   52헤르츠 고래 이야기는 그림책으로, 노랫말로, 다큐멘터리 영화로, 소설로 쓰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방탄소년단의 곡 ‘Whalien 52’의 노랫말이 이 고래 이야기이고,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주인공 우영우의 핸드폰 뒷자리 번호가 이 고래를 상징하는 5252라고 한다. 고래와 외계인의 합성어라는 ‘Whalien 52’ 노랫말은 이렇다.(일부)   이 넓은 바다 그 한가운데 / 한 마리 고래가 나즈막히 외롭게 말을 해 / 아무리 소리쳐도 닿지 않는 게 / 사무치게 외로워 조용히 입 다무네 ...... Lonely lonely lonely Whale 이렇게 혼자 노래불러 / 외딴 섬 같은 나도 / 밝게 빛날 수 있을까 이렇게 또 한 번 불러봐 / 대답 없는 이 노래가 / 내일에 닿을 때까지 끝없는 무전 하나 / 언젠가 닿을 거야 / 저기 지구 반대편까지 다 ......(생략)   고래들의 울음은 넓고 깊은 바다 속을 울리며 나아가며 지구 반대편에 있는 동족에게까지 닿는다고 알려져 있으니, 어떤 고래든 소리를 내면 지구 어디에 있든 누군가 그 소리를 듣는 고래가 틀림없이 있기 마련이다. 반드시 가닿는 소리를 내는 고래들의 노래는 신비롭고 아름답다. 그런데 그 누구에게도 포착될 수 없는 주파수로 노래하는 고래라니, 그 고래가 깊고 푸른 바닷속을 천천히 유영하며 지구 반대편에라도 혹시나 있을지 모를 동족에게 보내는 혼자만의 노래를 부른다니, 이 외톨이 고래의 외로움은 얼마나 깊고 푸른가. 52헤르츠 고래의 외로움은 세상의 외톨이들에게 감정이입의 대상이 되고 있고, 그 외로운 자기만의 노래는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전철을 내릴 때쯤 52헤르츠 고래의 먹먹한 외로움의 이야기로 오늘 강의를 시작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서둘러 가다보니 좀 이른 시간에 강의 장소에 도착하는 바람에 52헤르츠 고래 이야기를 좀더 찾아볼 시간이 되었는데, 뜻밖에도 먹먹함을 넘어서는 이야기들이 이어서 눈에 띄었다.   - 세상에서 가장 외롭지는 않을지도 모르는 52헤르츠 고래   두 번째 52헤르츠 고래에 대한 기록이나, 동시에 여러 지역에서, 또는 여러 차례 비슷한 신호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고, 1992년 이후 고래 울음소리의 주파수가 약간 낮아졌다는 보고(고래가 성장, 성숙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는 보고)도 있었다. 북쪽으로 알류샨 열도와 코디액 군도에서 남쪽으로 캘리포니아주 해안까지 이동한다는 보고, 이동거리에 관한 기록도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 어떤 해양학 과학자들의 견해인데, 이 고래가 선천성 장애를 가졌을지 모른다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어찌되었든 이 고래는 혼자만의 울음소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 살고 있다는 얘기다. 다큐멘터리 ‘가장 외로운 고래: 52를 찾아서’(2021, 감독 조지 지먼)에서는, 이 고래가 대왕고래의 이동경로와 함께 다니고 있는 것을 근거로, 소통할 수 있는 주파수는 다르지만 ‘무리’ 안에서 지내고 있다는 추정을 하기도 한다.   52헤르츠의 울음소리가 한 마리 이상 발견되었든, 또는 아직도 유일한 한 마리가 소통의 어려움은 있겠지만 ‘무리’ 안에서 살고 있든, 어쨌든 52헤르츠 고래가 더 이상 외톨이가 아닐 수 있다는 소식을 보고 있자니, 마치 드라마 속에서 어떤 순간 우영우의 머리 위로 반짝이는 고래들이 폭죽처럼 빛나며 유영하듯, 내 머리 속으로도 더 이상 외롭지 않은 52헤르츠 고래가 묵직하니 헤엄을 쳤다.   이 아름답고 기쁜 이야기를 알리며 강의를 시작했다. 좋은 날이었다.  (2022.11.02.)   (* 참고 : 위키백과, 이데일리 2022.07.14. 기사 ‘우영우와 BTS에 담긴 52헤르츠 고래 이야기’)  ​ 

    게시일2022-11-02

  • 복지관에서 프로그램 끝나고 복지관 쉬는 시간에 놀러 갔는데 사회복지사가 화를 내면서 속상했다고 그래서 내가 가든지 말든지 화내는거였갔데 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프로그램 마치고 어딜 가든지 내 자유인데 사회복지사가 짜증나게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동내 친한 형님이 이야기할 때 어깨나 가슴을 두드리면서 이야기해서 기분이 나쁜적 있었다.그래서 형님한테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물어보고 해야 하는데 막 만지면 경찰한테 신고 할 수 있다고 몇 번씩 말했다 00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사람들이 막 대하는 것 같다. 장애인이라고 우리한테 짜증내고 우리 사진도 마음대로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고 몸도 함부로 만진다. 내가 생각하기엔 분명 차별이다. 우리한테 물어보고 만지거나 이야기 해야지 안 그러면 폭행으로 간주하고 경찰에 신고하겠다.​ 

    게시일2022-11-01

  •  시월엔 여행 가자는 말에 모두가 박수치며 환호했다. 스터디 모임으로 휴일 하루를 공부 반 수다 반으로 만난 지 6개월 남짓, 자녀들의 미래를 생각하며 심각하다가도 까르르 웃을 때가 많던 우리들에게 영암 2박3일의 여행이 그렇게 결정되었다. 제이네 외가의 별장으로 우리가 양껏 떠들어도 괜찮은 시골 마을이라 생각만으로도 들떴다. 자폐청년과 엄마들 총 8명이 함께 했다. 기차와 대중교통을 이용하자는 제안에 다들 흔쾌히 동의했다. 영암을 찾는 관광객이 아닌 숙소에서 쉬면서 자녀들은 그들끼리 우리는 우리끼리 편안한 시간을 갖자는 게 이번 여행의 목적이었다. 엄마들 중 전문가 한 명이 있기에 그동안 살면서 자녀들의 ‘종’ 노릇 하는 우리를 관찰하고 지향해야 할 것과 지양해야 할 행동들을 서로 나누는 시간이 되고자 했다.    수서역 가까이 사는 나는 아들에게 이번 여행에 대해 얘길 했다. 걸어서 역까지 간다 했더니 눈을 껌벅이며 엘리베이터 앞에서 계단으로 이동했다. 1층에서 현관 쪽으로 가는 나를 잡아끌더니 지하 주차장으로 가자고 했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계단으로 내려가 나를 바라보는 아들이 황당했다.   “오늘은 우리 차 안 타고 수서역까지 걸어가서 기차 탈거야. 어여 올라와라!”   싫다는 표현을 그리 확실하게 하는 건 병원 들어가지 않겠다는 태도와 똑같았다.   “기차 타면 우리 차 둘 데 없어 걸어가야 해. 잘 생각해 봐, 엄마 기다릴게.”   아들은 1층과 2층 계단 사이에서 나는 공동 현관 앞에서 서로 채근하지 않고 서로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일찍 도착하려고 넉넉하게 시간 배정하고 나온 터라 여유가 있어 다행이었다. 20여분의 시간이 흘렀고 아들에게 가서 다시 말했다.   “걷기 싫으면 버스 타고 가자, 더 지체하면 우리 기차 못 탄다.”  차분하게 혼잣말하듯 중얼거리고는 바로 몸을 돌려 현관으로 나왔다. 어느 새 내 뒤를 따라오는 아들이 느껴지면서 더 오래 고집 부리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에 아들이 고맙게 느껴졌다. 그래도 우리 차 타겠다는 자신의 의견이 묵살된 것에 대한 분함으로 계속 심통난 표정과 웅얼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출발부터 불협화음이 있었기에 이번 여행이 순조롭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행동에 엄마가 화난 걸 인지한 아들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경직된 내 뒤를 따르며 불안한 표정이 역력했다.  일행을 만나 기차에 오르니 드디어 우리가 먼 곳으로 떠난다는 게 실감났다. 각자의 취향대로 창밖을 보거나 폰에 몰입하는 등 청년들의 모습이 매우 점잖았다. 유독 내 아들만 머리카락을 꼬며 후후 입바람을 불었다. 나의 불안감이 올라와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들 앞좌석의 승객에게 맨 뒷좌석의 나와 자리를 바꾸자고 했더니 ‘아, 자폐인가 보네’라며 얼른 일어나 주었다. 자폐라는 단어를 쉽게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이게 우영우 효과구나 싶었다. 그 분의 관심은 부담스럽지 않았다. 아들이 답답해서 그래 보인다며 객실 밖으로 나가 보라고 권했는데 아들 표정이 나쁘지 않아 조금 그러다 말 것 같았다. 역시 평정심을 되찾아 잘 도착했다.  나주역에서 저녁을 먹고 버스를 이용하려 했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택시 두 대를 불렀다. 타지에서 온 우리를 알아보고는 기사의 친절한 설명이 과했다. 대답을 줄였더니 눈치 빠른 분이라 바로 조용해졌다. 초승달의 진노랑 빛깔이 유난히 뜨거워 보였고 손 뻗으면 잡힐 듯 가까이 있었다. 아들 넷은 자폐인답게 서로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아도 함께 모여 있었고 엄마들은 한 자리에 모여 앉아 담소 나누며 자신의 아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상생활에서 엄마라 잊기 쉬운, 고쳐야 할 행동들을 우리가 교재로 활용하는 책 ‘TEACCH 자폐와 더불어 사는 법’의 내용을 상기하며 여행지에서의 스터디가 이어졌다. 스스로 하는 공부는 재밌으면서도 자녀들에게 적용하는 건 역시 쉽진 않다. 청년들과 전문가 엄마가 아침 준비를 하고 엄마 셋이 산책을 하면서 느낀 점은 우리 자녀들의 조력자가 적절한 지원을 한다면 지역사회 안에서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발달장애인들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자원은 사람이다. 무조건 도와주고 대신 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조력자가 필요한 것이다.   첫 여행으로 서로의 자녀에 대해 알았고 무엇보다 마음 맞는 엄마들 조합이라 행복한 시간이었다. 관광이 아니라 집에서 어떻게 지내는지에 초점을 둔 여행이었다. ‘가족과 함께 평범한 일상을 즐겁게 사는 것’이 실현되어야 지역사회 안에서 이웃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여행의 맛은 달디 달았으니 다음을 또 기약한다. 

    게시일2022-10-12

  •  2년 동안의 코비드 상황을 겪으면서 대면 수업, 줌 수업이 병행되었지만 나름 상황을 잘 헤쳐나가며 적응을 했던 시간이 지나고 4학년이 되었다. 학교생활은 3년을 했던 경험이 있어서 나름대로 생활이나 물리적 환경에 대한 적응은 많이 되었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식사 후 자유시간에는 온유가 친구들에게 부탁을 해서 도서관도 가고 열린 공간(온유학교에 각층마다 있는 아이들의 쉼터 공간)을 산책하러 갈 만큼 많이 다양해졌다. 스스로 움직임에 어려움이 많아서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며 이동이 불가능한데 스스로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용기도 생겨서 엄마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물론 친구들도 흔쾌히 온유와 함께 잘 다녀 준다. 모둠 수업이 많아진 4학년 수업에서도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기록하고 꾸며서 만든 파일과 코딩 수업을 한 파일, 메타버스 수업을 한 뒤 Padlet 게시판에 올려서 공유하는 시간이 많았다. 처음에는 과연 온유가 탭, 노트북을 활용한 수업이 가능할까? 친구들의 속도에 맞춰서 할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그러던 중 첫 게시물이 올라왔을 때 많은 감동이 있었다.온전히 혼자 만들었다는 것에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평소 즐겨 쓰지 않았던 미디어를 활용한 수업을 이해하고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 엄마인 내가 평소 생각했던 온유와는 많이 달랐다. 온유가 다니는 학교가 AI 중점학교, 메이커 실천 학교여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1인 탭, 노트북이 제공되어서 온유에게는 좋은 기회와 효과가 있었다. 엄마보다 더 많은 지식이 생겼고 친구들과의 경쟁을 생각하며 더 잘하려고 하는 욕심도 생겼다. 선생님께서도 부탁할 일이 있으면 부탁도 하고 감사의 표현도 적절하게 하는 아이로 성장했고 자신에게 도움을 준 것에 대해서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에서도 온유는 친구들과의 관계도 걱정할 일이 없다고 하시면서 평소 온유를 많이 관찰하시고 잘 알고 계신 부분이 많아서 더 감사했다. 가끔 온유가 혼자 있을 때는 “얘들아, 온유 혼자 있으니 심심하잖아. 같이 놀아.”라고 이야기를 하시거나 온유 자리로 오셔서 온유와 이런 저건 대화를 많이 하시는 걸 온유를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처음 1학년이 되었을 때는 학교만 잘 적응하기만을 바랬던 마음이 해가 갈수록 사회성, 학업, 담임 선생님에 대한 욕심이 생겼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온유와 함께 발맞춰 나가다 보니 어느덧 4학년 2학기가 되었고 분기별 성적표와 행동발달을 보면서 잘하고 있음을 더 깊이 공감했지만 유일하게 체육 성적만이 “보통”이라고 속상해하는 모습마저도 엄마를 뭉클하게 하고 흐뭇한 웃음을 짓게 한다. 온유가 학교생활을 하면서 매년 마다 행복함이 더해지는 것 같아서 우리 가족도 모두 행복하다. 중간 중간 시련과 좌절도 있었지만 좋았던 경험들이 더 많아서 좋았던 경험들로 인해 온유는 매일 성장 중이고 앞으로의 무한한 성장이 더 기다려진다.  ​ 

    게시일2022-10-04

  • 이제 내게 화요일은 특별한 날이다. 나는 매주 화요일마다 오전과 오후에 발달장애를 가진 이의 가족, 발달장애를 가진 청년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오전에는 화요집회를 하고 오후에는 청년들과 만나는 수업이 있다. 에너지를 상당히 쏟는 일이기도 하고 에너지를 받는 일이기도 하다. 하루 사이에 쏟아내기도 하고 채우기도 하려니 마음노동이 여간이 아니다. 하루종일 골똘히 생각하는 게 많아서 화요일에는 종종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서있곤 한다.   - 긴 이야기의 시작, 화요집회   부모연대는 얼마 전부터 화요집회를 시작했다. 화요일마다 모여서 우리들의 이야기와 결의를 나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려고 했으나 눈이 너무 많이 오거나 비가 너무 많이 오면 한 주 쉬어갈 터이다. 다음 주에, 그 다음 주에 이어가면 되니까.(^^) 그렇게 거듭하다 보면 화요집회는 이 나라 발달장애 가족의 상징과도 같은 행사가 될 것이다.    코로나19의 긴 터널을 지나며 발달장애를 가진 이와 그 가족의 죽음이 유난히 많은 차에, 우영우(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와 정은혜(우리들의 블루스)가 세상의 관심을 끌면서 발달장애인 가족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기자들이 많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궁금하시면 화요집회에 오세요. 우리들의 사연과 분노와 희망의 이야기를 들려줄게요.  기자뿐 아니라 누구라도 화요집회에 나오면 듣게 된다.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와 이 세상에서 만난 인연, 같이 살아가는 이야기, 엄마투사 아빠투사가 된 사연, 세상에 대한 꾸짖음, 내가 원하는 자녀의 일상, 아직 다 못한 내 삶의 과제까지 마이크를 잡고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왕 시작을 했으니 앞으로 우리들의 집회가 더욱 풍성해졌으면 좋겠어서 여러 가지 상상을 해본다. 이야기도 하고, 때론 노래도 공연도 춤도 추었으면 좋겠다. 짧은 교육도 듣고 누굴 불러다 궁금한 것도 묻고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다 점점 더 커져서 어쩌다 한 번씩은 행진하면서 시내를 한 바퀴 돌기도 하고, 깃발을 세운 텐트도 수십 채씩 치고 밤샘도 하고 그랬으면 좋겠다. 지나가던 이가 가만히 뒷자리에 와 앉았기도 하고, 먼 데서 일부러 찾아와서 기타니 하모니카 연주 선물도 해 주었으면 좋겠다. 모델 수업을 받는다는 형제자매가 제 친구들과 함께 와서 근사한 패션쇼도 벌여줬으면 좋겠고, 시 짓기를 좋아한다는 이가 시를 읊조리고 갔으면 또 좋겠다.  발달장애를 갖고 있는 아름다운 청년이 와서 미국서 사는 누가 그랬던 것처럼 ‘나 때문에 슬퍼하지 말라’며 단호하게 일갈해줬으면 좋겠고, 하루 일과를 어떻게 꾸미고 싶은지, 어디로 여행을 다녀오고 싶은지도 살짝 들떠서 얘기해줬으면 좋겠다. 장애를 가진 이들의 형제자매들도 와서 일찍 철이 든 얘기며 아직 철이 안 든 얘기도 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모든 우리들의 이야기가 그저 슬픔과 연민을 나누는 것만이 아니라 바르지 못한 세상에 대한 당연한 분노와, 평등한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희망과, 삶의 결단과 의지를 다지는 뜨겁고 즐거운 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자녀가 이제 일곱 살, 아홉 살이라는 이의 얘길 들으면 그가 걸어가야 할 길이 그려져서 탄식이 나온다. 청년이 되었다는 얘길 들으면 걸어온 험한 길이 단숨에 그려져서 또 탄식이다. 어느 하루 얘길 들으면 그의 나머지 364일이 눈에 보인다. 우리는 비슷비슷하면서도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들으며 오만가지 상념에 잠긴다.   두 아이가 모두 장애를 가진 이도 있고, 엄마가 또는 아빠가 암 투병 중인 경우도 있다.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이도 많았고, 홀로 키우다시피 하는 이도 많다. 많이 지쳐 보이는 이도 있었고, 그럼에도 힘을 내겠다는 말을 하며 하얗게 웃는 이도 있다.   저 슬픔을 어찌하나, 저 바다와 같은 슬픔을 어찌할 것인가. 내가 저 입장이면 어땠을까. 듣는 이들은 다들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저 이였으면 저렇게 잘 버텨낼 수 있을까. 아니면 저 이는 그 때의 나처럼 단지 비명을 지르지 않을 뿐, 모진 세월과 싸우느라 많이 지쳐있는 건 아닐까. 혹시 그 때의 나처럼 절벽 앞에 서서 바람을 맞으며 울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 당장 그의 등 뒤로 살며시 다가가 손목을 잡고 비탈길을 다시 내려와 줘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데 이야기를 들려주는 우리 ‘동지’가 먼저 우리 손을 잡는다. 나는 이렇게 버텨낼 테니 우리 함께 갑시다-. 대개는 이렇게 말을 맺는다. 그러면 모두는 또 하나의 위안과 또 하나의 결의를 가슴에 담게 된다. 우리들의 이야기판은 슬픔과 위로에서 그치자고 연 게 아니다. 우리들은 동지적 연민에서 힘을 얻어서 함께 견뎌내고 함께 밀어내며 세상을 바꿔나갈 것이다.    - 오후의 수다   화요일 오전에는 이렇게 가슴 저미는 사연을 듣고 울먹이다가, 우리가 이 세상에 할 일이 너무 많다고 주먹을 불끈불끈 쥐다가 오후에는 마음이 훨훨 난다. 발달장애를 가진 청년들을 만나는 일은, 얼마나 좋은 인연인지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청년들은 특별히 에너지가 넘쳐 보인다. 그래서 그들과 나누는 대화는 참 즐겁다. 그들은 모든 대화에 무척 성의가 있다. 눈동자에 힘을 주고 자신의 말을 천천히 또박또박 전달하기 위해 애를 쓴다. 남의 말이 끝나기 전에 끊어버리는 무례를 범하지도 않고, 남의 말을 비난하지도 않는다,(물론 몇몇은 수시로 자신의 핸드폰을 들여다 보는 데 열중한다) 이들 중 몇몇은 남의 말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딴청을 피우지만 다음 시간에 물어보면 남이 뭐라 했는지 잘 기억해내고, 몇몇은 자기가 했던 말도 안 한 것처럼 능청을 떨기도 한다.     자주, 그들이 하는 말에 마음이 뭉클하다. 즐거운 기억, 나빴던 기억, 치열한 생각, 곰곰 따져보는 고민이 모두 저마다 갖고 있는 큰 이야기보따리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온다. 대체로 즐거웠던 기억을 얘기할 때면 저마다의 에너지가 합쳐져서 햇빛 속 새들처럼 명랑해진다. 반대로 속상했던 기억을 누군가 얘기하면 모두 다 자기 기억을 끄집어내며 침울해진다. 어떤 이는 좋은 기억과 앞으로의 희망을 얘기하다가도 되돌이표를 만난 듯 속상했던 기억으로 기어코 돌아가버리곤 한다. 모두는 그의 슬픔과 우울에 공감하고 저마다의 표정으로 깊이 위로해준다. 분노에 공감할 때에도 대체로 점잖게 위로한다. 나는 내 아들과 다하지 못한 대화를 이들과 나누기도 하고, 내 아들에게서 미처 듣지 못한 이야기를 이들에게서 듣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이들은 서로에게 무척 예의바르다. 상대를 존중하고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애쓴다. 결국 이해가 되지 않아도 상대를 비난하거나 고치려고 들지 않고 낮은 소리로 “00님, 잠깐만 기다려주실래요?”라고 말한다. 극도로 절제된 이 태도는, 바로 그들이 남들에게서 받고 싶었던 대접, 보고 싶었던 태도이리라. 이들은 남이 내게 하는 행동 중에서 ‘서두르는 것, 재촉하는 것’이 가장 싫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을 보고 있으면, 자신들은 결코 동료들을 재촉하지 않으리라고 굳게 결심한 사람들 같다. 나는 화요일 오후마다 그들에게서 남을 대접하는 귀한 태도에 대해 배운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피플퍼스트 동료활동가에 대한 얘기가 나왔었다. 추모식에 다녀왔다고들 했다. 한 사람이 “00 님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고 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었더니,“이 다음에 만나게 될 때, 00님 전화번호를 알고 있으면 거기서 전화를 걸어서 만나자고 할 수 있으니까요.” 라고 했다.  나는 얼결에 “이 다음에, 어디서요?”라고 물었다. 그는 손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만나고 싶은 마음, 만나서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이리라. 그의 세상 속에서는 인연이 버려지지 않고 늘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정말 열심히 사는 청년들이다. 이들이 열심히 사는 것 자체가 장애운동이다. 장애에 관해 많은 생각을 쌓아가고 있으며, 내가 아니라 상대가, 내가 아니라 세상이 잘못한 부분에 대해 이미 잘 알거나 잘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좋은 이웃이 있는 사회 속에서 무언가 하고 무언가 즐기며 살고 싶은 그들은 참 멋있는 장애운동 동지들이다. 그리고 나는 이 동지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염탐해낼 작정이다.  - 그래서, 화요일은 참 좋은 요일이다.*   김종옥(전국장애인부모연대 문화예술위원회) 

    게시일2022-09-27

  •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화요집회가 시작된다.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체계 구축을 위해 556명이 삭발을 했고 단식도 했고 집회와 투쟁도 했다. 정권이 바뀌면서 더 홀대받는 복지는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도 국민이라고 피 토하는 심정으로 부르짖어도 들으려는 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부모이기에, 부모라서 포기할 수 없다.   매주 화요일 오전 11시 여의도 이룸센터 앞에서 화요집회를 하고 있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회원들의 열의는 대단하다. 버스를 대절하고 새벽에 길을 나서서 긴 시간 차를 타고 서울로 온다. 투쟁가를 부르고 투쟁 구호를 외치면서 우리는 비슷한 듯 서로 다른 자녀 이야기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당사자의 고무된 발언을 들으며 손뼉을 치고 그의 미래를 온 마음으로 응원한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서울지부 25개 지회는 매주 2개 지회씩 당번을 정해서 화요집회에 참석한다. 내가 사는 곳에서 여의도까지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지방에서 오는 분들에 비하면 같은 서울이니 불평없이 나는 매주 집회에 참석하고자 애쓴다. 머릿수 하나 더하는 거지만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과 함께 같은 곳을 보고 가는 길에 우리가 함께 한다는 걸 확인함과 동시에 불확실한 미래의 두려움을 덜어낸다.   아들 조기교실 다닐 때 수업 끝나길 기다리던 놀이터에서 한 엄마를 만난 적이 있었다. 모래를 가지고 노는 자기 아이를 흐뭇한 표정으로 보던 그 엄마가 부러웠다. 저렇게 ‘건강한’ 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얼마나 좋을까. 나의 부러움을 느꼈는지 그녀는 내게 말을 걸었다. “아까 아들 들여보내는 거 봤어요.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근데 걱정보다 신체 건강한 게 어디냐 생각하고 기운 내세요. 저는 독실한 기독교인인데요, 저 아이 임신하고 정기검진 받으러 갔더니 아이가 다운증후군이라고 하대요. 남편은 인공유산을 하자했지만 저는 반대했어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제가 함부로 없앨 수는 없었죠. 아이 만날 날 기다리며 늘 기도했어요. 출산하고 보니 다운증후군이 아니었어요. 건강한 아이라는 기쁨에 의사 원망은 나중에 조금 했어요.” 그 상황이 그려져 눈물을 글썽이면서 나도 모르게 ‘아, 정말 좋았겠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 시절 아들의 다동과 울음 떼로 너무 힘들었기에 다운증후군인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얼마나 좋았을지 남의 일이 내 일처럼 기뻤던 일이 생각났다.   유이(가명)엄마의 자녀 이야기를 듣다보니 20년도 훨씬 지난 그 엄마가 떠올랐다. 병원에서 1년 남짓 살 거라는 다운증후군 딸이 20대 청년으로 잘 성장하고 있다는 유이엄마의 말에 놀이터에서 만났던 그 엄마 때보다 더 큰 안도와 기쁨이 밀려왔다. 돈이 없어 퇴원해야 했는데 온갖 약물과 의료기기에 의존하던 병원보다 집에 와서 더 좋아졌다는 말에 우리 몸을 살리려는 약이 때로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또 느꼈다. 잘 써야 약이지 독이 될 줄 모르고 남용, 오용하는 경우가 있다. 학령기 아들에게 아빌리파이와 토파맥스를 먹인 적이 있었다. 산만함과 감정기복이 심해서 아빌리파이를 먹였고 식탐이 과해서 토파맥스를 먹였다. 토파맥스는 뇌전증 약인데 부작용으로 식욕저하가 있어 그것을 기대했다. 효과가 전혀 없진 않았지만 약으로 식욕까지 조절한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고 별다른 변화가 없어 보일 때쯤 1년여 먹다 그만뒀다. 자폐인들이 가장 많이 복용하는 아빌리파이는 7년 정도 먹었는데 학령기 이후 아들의 변화에 약이 도움되는 것 같진 않았다. 아들의 일상을 편안하게 해 주면서 통제를 멈추고 허용 분위기로 환경을 바꿨더니 아들이 변하는 걸 느꼈다. 약의 용량을 줄이면서 결국 끊었을 때 몇 달 동안 불안했다. 감사하게도 예전의 천방지축 아들로 되돌아가지 않았고 누구나 보이는 가끔의 행동(불면, 산만함 등)은 눈감아 주었다. 내 곁의 멘토들이 함께 고민하고 관찰해 준 덕분이었다.   화요집회에서 아들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그동안 워낙 많이 노출했기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매주 화요집회에 참여한다. 그 참여가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체계를 하루빨리 구축하는 데 작은 힘이 되길 바라는 마음은 더 간절하다. 우리의 작은 이야기들이 모여 큰 울림으로 퍼져 나가고 그것이 우리 자녀들과 사회적 약자들의 밝은 미래에 주춧돌 역할을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게시일2022-09-26

  •  이제는 입 밖으로 잘 꺼내지 않는, ‘천형’이라는 단어를 기억하는가. 장애아를 낳아 양육하는 삶 자체를 하늘에서 내린 무거운 형벌쯤으로만 여기던 시절, 장애는 사회가 만들어내는 장벽이라 말하지도 못했던 시절, 장애를 가진 개개인 당사자와 가족·주변인들이 세상 속에서 부딪히는 모든 문제들을 다 떠안고 살아가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절조차도 당사자들은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당사자와 가족들, 뜻이 있는 사람들은 함께 모여 문제로 정의되어 오던 우리들이 다시금, 대체 어떤 것이 문제인가를 묻고 문제 자체를 재정의하자고 외쳤다. 이는 장애 운동의 핵심적 의제이기도 하다.    그러한 권리 운동의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애인들은 여전히 죽음과 가까이 있다. 한국의 발달장애인 평균 기대수명을 조사한 결과 지적 장애인은 56.3세, 자폐성 장애인은 23.8세로 장애인들 중 가장 낮았다. 특히 ‘참사’라 호명되는 발달장애인 존속살해는 끔찍하고도 불행하게 지속되고 있다. 발달장애인을 살해한 가족들이 자기마저 죽거나 죽음에 실패하여 법정에 간다 하더라도 가벼이 처벌된 사례는 그간 부지기수였다. 발달장애인에 대한 지원과 돌봄은 사적 영역으로만 남겨두고서 이들을 죽이는 것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죽임의 형태, 이 잔인한 모순을 그간 사회는 용인해왔다. 개인이 저지른 살해이긴 하지만, 근저에는 통상 사회 제도적인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는 걸 상기해 보면 (발달)장애인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이 사라지는 것 이상이 아닌 것이다. 물론 발달장애인들에 대한 지원과 네트워크들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가족들이 져야 할 부담이 상당한 것은 사실이다. 당사자와 물질적·정서적 환경, 주변인들, 이를 바라보는 나의 상태까지 끝없이 살피고 관리하는 삼중 사중의 노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사건들이 날 때마다 추모만 하지 말고 심리적·사회적 부검을 하자고 말한다. 타당한 지적인데, 대체 무엇이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는가에 대한 공통된 진단을 내리기에 사건들의 맥락은 제각각이다. 그간 기록된 존속 살해 사건들 중에서 장애라는 진단만으로 사람을 죽였을지, 장애에 대한 배제와 소외, 여러 돌봄 노동에 지치고 소진돼 자신도 죽음을 선택했을지, 산 자가 섣부르게 판단할 수는 없는 몫이다. 다만 이것 하나는 짐작해 볼 수 있다. 사람이 가진 속성에 불과한 발달장애라는 것이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공포스럽고 절망적인 것인가 하는 것. 힘듦, 불가능, 고통, 죽음 이런 서사들 말고 발달장애인들은 다른 삶의 서사들을 써 내려갈 수는 없는가라는 간절한 질문.   최근 진행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발달장애를 발견한 연령은 평균 7세, 등록된 연령은 평균 17세라고 한다. 장애를 등록하기까지 통상 10년의 시간이 걸리는 것은 무엇을 방증하는가. 장애에 대한 낙인은 개개인마다 다른 수준과 형태로 내재화되었을지 모르지만, 이를 강화하는 가장 강력한 기제는 사실 사회적·구조적 낙인과 배제다. 장애인들은 사회를 유지하는 거의 모든 구조와 제도 등에서 배제되어 있다. 노동력을 팔아 자기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애를 노동력 손실로 보는 관점은, 자연히 장애를 가진 노동자를 현장에서 보기 어렵게 만들었다. 국가의 생활 보조나 지원도 극히 미미한 상태다. 장애와 가난은 불가분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기후 위기에 따라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있는 때, 폭우의 강수량을 견딜 수 없는 집에서 가장 먼저 죽음을 맞이해야 할 정도로.  체제가 낳은 기후위기 속에서 가장 먼저 죽는 사회적 소수자, 그들 중에서도 발달장애인은 가장 먼저 호명된다. 가족에 의해 살해되는 발달장애인의 사건을 두고도 ‘참사’라는 단어 말고 다른 말들이 들리지 않는 것 역시 문제적이다. 나조차 발달장애 당사자의 가족으로서 숱하게 절망하고 죽음에 가까운 절망감들을 여전히 한 편에서는 갖고 있다. 그러나 그런 서사들만 알려지는 것은 장애에 대한 사회적 억압을 은폐하며, 편견만 강화하는데 일조한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예컨대 가정폭력으로 죽은 여성들을 생각해보면 남성 생계부양 모델이 근본 원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그 모델 속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가장으로 대표되는 남성 하나에 의존해 무능력하게 살아야 하고, 부양되어야 하는 존재로 그려졌던 것처럼. 그렇기에 한때 가장의 폭력은 쉽게 묵인되거나 정당화되었다. 양육자나 형제자매 등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발달장애인들의 현실이 과연 이와 다르다 말할 수 있을까. 신경 발달의 차이로 인한 다른 삶의 양태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것은 발전, 정상성, 속도만을 중시하는 사회다. 발달장애인들이 나름의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는 다양한 환경들을 구성하고 조직해 내는 것은 전체 사회의 몫이지만 지금까지는 개별 가정에게만 맡겨 왔다. 노력의 지분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이들은 당연히 가까이 있는 가족들일 테지만, 이 가족들이 할 수 없는 것들까지 끝없이 요구하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는 방치되어 있다. 우리가 고민하는 것들은 대체로 우리 스스로만 노력해서는 할 수 없는 것들이다. 발달장애를 이해하고 발달장애를 가진 구성원들을 어떻게 사회화할 것인가에 대한 노력들을 역으로, 사회에 국가에 요구하자. 실제 장애관련 단체들에서는 신경 다양성이라는 개념의 확산을 위해 연구와 교육에 매진하고 있으며, 교육권, 노동권, 주거권, 건강권 등 삶에서 누려야 할 각종 기본권과 24시간 지원을 요구하는 발달장애 국가책임제를 부모 단체를 비롯한 여러 장애인 단체 및 시민사회단체에서 요구하고 싸워나가고 있는 중이다.   한 꺼풀 벗겨보면 장애는 그 자체로 총체적인 삶의 형태다. 산다는 것 자체를 긍정이든 부정이든 어떤 특정한 의미로 정의할 수 없듯이 장애와 함께하는 삶은 마냥 힘들고 외롭고 고립되어 있지 않다. 어쩌면 깊은 파고를 건너야만 하는 운명이라도 서로의 삶을 함께 견뎌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분명히 있다는 것만큼은 어쭙잖은 양육자에 불과한 나도 전할 수 있다. SNS를 하지 않는 양육자들이 있다면 해보고, 발달장애 관련 여러 이슈들을 팔로우업 해보시라, 발달장애에 대해 연구하거나 조력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도처에 있다. 네트워크를 맺을 수 있고, 심리·정서적 임파워링도 얻을 수 있다. 지역의 장애인 부모 조직을 찾아가 상담도 지원받고 활동도 해보시라. 이해받을 수 있고 함께 일궈가는 공동체의 기쁨도 느낄 수 있다.    희망은 장밋빛 미래가 아니다. 무엇이든 낙관할 수 있고 긍정적이고 좋은 방향으로 상호작용해야만 삶이 온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무수한 절망들을 반복하는 것, 그러나 반복되는 절망 안에 갇히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닥쳐 있는 문제들은 절대적이지만 동시에 충분히 상대화할 수 있는 힘 역시 우리에게 있다는 것. 우리 삶을 견딜 수 있을만한 것으로 만들고 또 여러 우여곡절들을 거쳐 익숙해지는 과정 역시나 소중한 삶의 부분이라는 것. 고통 한가운데에서 무너질 때마다 내게 반복해서 외는 주문이다.부디 글을 읽는 양육자들에게도 전해지기를. 

    게시일2022-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