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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칼럼

[왁자지껄 가족 13_조미영] 엄마 말고 친구들과 어울리기
글쓴이관리자 게시일2021-04-19 조회수1,787

책로인 줄 잘 못 알고 들어선 등산로가 걷기 쉽지 않았다. 중간중간 데크길이 있었지만, 흙길은 폭신해서 좋은 반면 돌을 박아서 더 울퉁불퉁한 길에선 자주 발목을 삐끗했다. 무장애 길(걷기 쉬운 길)은 휠체어나 유아차만 편리한 게 아니다. 발이 불편한 모두에게 좋은 길이다.

코로나19로 사람들의 나들이가 줄어든 탓도 있지만, 평일 등산길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가다 서서 가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는 여유를 즐겼다. 힘차게 내려가는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조심스레 올라가던 중 뒤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상의가 같은 오렌지색의 옷을 입은 남녀가 저만치서 올라오고 있었다. 먼저 지나가라고 우리 가족은 한쪽으로 비껴섰다. 중년 여인과 청년이었고 모자관계로 보였다. 곁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청년에게서 아들의 향기가 느껴졌다. 멀어져가는 그들을 유심히 보던 우리 가족의 상상력이 날개를 달았다.

  “청년이 발달장애인 거 같은데.”

  “어허이! 당신은 아무한테나 장애인이라고 하면 안 돼!”

  “엄마와 성인 아들이 같은 옷을 입고 등산하는 거 낯설지 않아?”

내가 말하자 남편이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아빠! 나나 되니까 가족여행에 잘 따라다니지, 다른 성인 자녀들은 같이 안 다니거든!”

딸아이는 발끈했다.

  “등산 즐기는 거래도 가족끼리 사회적 거리두기 하는 건 좀 어색해 보이구만.”

아무래도 내 눈에 보이는 두 사람은 마치 나와 내 아들의 모습 같아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우리 앞을 지나간 두 사람을 두고, 남의 말을 함부로 한 게 미안하다며 화제를 돌렸다.

정된 목적지까지 올라가니 그들은 내려오고 있었다. 여전히 조용한 그들, 여성은 우리를 보고는 먼저 올라가라는 듯 좁은 길 한쪽으로 몸을 돌려 섰다.

감사합니다.”

내가 말했으나 반응이 없었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삶의 고단함이 내게로 와 닿았다. 청년은 다시 한번 나를 힐끗 보더니 팔을 앞으로 저으며 여성의 뒤를 따라 내려갔다. 나의 짐작은 확신으로 바뀌었고 청년을 다시 본 가족들도 이내 수긍하는 눈치였다.

폐인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집중력에 좋다는 등산을 많이 했다. 험한 길을 올라가려면 땅을 잘 보고 가야 하니 그럴 것 같았다. 등산 자체가 돈 안 드는 좋은 운동이기도 했다. 아들 치료와 교육비로 거금을 할애하던 시기인지라 나만 부지런하면 더없이 좋을 것 같았다. 물불 가리지 않고 남들이 좋다면 무조건 해보는 것들이 많았다. 말을 못 하는 건 혀가 굳어서 그렇다며 혀에 침을 놓기도 했다. 몸에 수은이 많아 그런 거라며 한약을 먹기도 했다. 나도 힘들었지만, 당사자인 아들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산은 쉽지 않았다. 날다람쥐 아들은 오르막 산길을 날아다녔다. 불러도 못 들은 척 직진 본능만 발휘하는 아들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이러다 필경 아들을 잃어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들 때쯤 결국 등산을 포기했다. 아들에게 아무리 좋은 치료교육이라도 최악의 경우가 예상되는 건 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남편과 셋이 다시 등산했다. 잘 다니던 길도 아들은 오르막길에서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힘든 걸 경험했기에 더 이상 가지 않겠다는 무언의 의사 표현이었다.

  “힘들구나, 그럼, 저기 저 나무까지만 갔다 오자.”

싫은 티 내면서도 아들은 그런대로 잘 따라 주었다. 일주일 내내 아들과 씨름하는 나를 위해 남편은 아들만 데리고 등산을 했다. 둘만의 등산은 시간이 더 빨라졌고 온몸이 땀으로 젖어 들어오는 똑같이 생긴 아빠와 아들을 보면 흐뭇했다.


족여행 중에 만난 엄마와 아들을 보며 장애 자녀를 오롯이 엄마만 책임지는 경우가 많음을 생각해 보았다. 나 역시 남편이 직장을 다닐 때는 혼자의 몫이었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가능하다는 주말 부부도 했었다.

남편은 아들에 대해 잘 몰랐다. 일주일에 하루 보는 아들이 고집을 피우고 힘들게 하면 화를 내며 아들을 채근했다. 하지만 자기 사업을 시작하면서 집에 사무실 공간을 마련한 후로는 아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늘었다. 남편은 아들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엄마인 내가 얼마나 고생하는지도 알아주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아들은 26세의 청년이 되었다. 화장실에서 장난치다가 막힌 변기를 뚫어보겠다고 용쓰는 걸 보면 다시 청소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잊고 웃음이 나온다. 때로는 화를 내면서도 어릴 때의 모습 생각하면 지금은 양반이라고 봐주는 아량이 가족 모두에게 생겼다.


족들에게 사랑받고 사는 발달장애인들이 존재를 인정받고 지역사회 안에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늙어가는 엄마가 성인 장애 자녀에게 매달려 사는 고된 일상은 멈춰야 한다. 그러려면 보다 촘촘한 복지 체계가 필요하다. 의미 있는 낮 활동 시간이 더 늘어나고 개인에게 맞는 복시 서비스가 제공되어야 한다. 그래서 평일의 등산이 엄마 뒤를 쫓아가는 게 아니라 조력자의 지원 아래 이뤄져야 한다. 다른 자조 모임 활동이 활성화되어야 발달장애인의 삶이 풍요로워지지 않겠는가.

가족이 없더라도 존중받으며 한 인간으로 사는 삶을 평범하게 살 수 있는 세상, 부모는 그것이 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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