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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칼럼

초대칼럼 상단 이미지

칼럼니스트들이 여러분들께 ‘발달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건네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시선으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 계시나요?
이 게시판은 보다센터에서 초대한 각 분야의 칼럼니스트들이 여러분들께 ‘발달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건네는 곳입니다. 발달장애와 관련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칼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또한 발달장애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의 일상이야기,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의 소박하지만 통렬한 이야기와도 공감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은 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게시물 총 120

  •  여느 해와 다름없이 같이 가자는 남편을 뿌리쳤다. 몇 해 전부터 친정부모 기일은 내가 홀몸으로 움직이는 유일한 외박 여행이 되었다. 집안일에서 해방되는 게 좋고, 운전의 부담도, 누군가를 신경 써야 하는 눈치도 볼 것 없어 가장 홀가분한 자유다. 자폐인 아들을 남편에게 오롯이 맡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포기하면 내 삶이 너무 옹색해서 어느 날 머리에 꽃 달고 거리를 활보할 것 같았다. 남편이 직장인일 때는 감히 엄두를 못 냈는데 자영업으로 전환하고 집에 사무실을 꾸미고부터 가능했다. 아들을 맡기고 반나절부터 시작해서 하루로 늘렸고 이틀에서 사흘까지 이제 거리낌 없이 나 혼자 움직이게 되었다. 예전엔 반찬도 많이 준비해 뒀는데 이젠 그것도 하지 않는다. 밥은 해 먹고 매식하면 된다며 국만 두어 가지 끓여 달라니 참 편해졌다.그래도 나물 몇 개 해두면 먹을 것 같아서 봄동과 오이무침, 가지나물을 한 두 끼 양만 만들어 작은 반찬통에 담아 두고 나왔다.   코로나로 3년 만에 모인 남매들은 부모님 생전 얘기에 웃다가 울먹이며 고생 많이 하고 떠난 두 분을 그리워했다. 우리 세대는 이런 제사상도 받지 않을 거란 말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그렇게 헤어지고 자매들만 따로 모여 동생네 집에서 늦게까지 놀다 자고 거제로 이사한 둘째언니네로 이동했다. 태풍 매미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고자 홀몸으로 쌓았다는 매미성과 돔식물원의 웅장함도 좋았지만 역시 바다와 가까이한 시간이 가장 좋았다. 바위틈에 있는 고둥과 홍합, 파도에 밀려와 돌아가지 못한 해삼 두 마리를 잡으며 환호했다. 열 살 조카손주가 가장 신났다. 역시 아이들의 놀거리는 스마트폰이 아니라 자연이다. 우리 손으로 마련한 먹거리로 어스름한 바다 바라보며 먹는 저녁은 꿀맛이었다. 밤에 ‘불멍’ 시간도 좋았고 유호전망대에서 거가대교가 보여주는 빛의 향연도 멋졌다.   사흘 놀면서 집에 있는 부자는 잊었다. 가끔 문자와 전화로 ‘뭐한다고 가물치 콧구멍에 함흥차사냐’며 궁금해 하는 남편에게도 짧은 답변만 보냈다. 꿈같은 시간을 뒤로하고 집에 오는 날, 수서역까지 마중 나온 남편은 혼자였다.   “하진인 뭐해?”  “어, 노래 듣고 있어서 내만 나왔지.”  무심하게 말하는 남편이 놀라웠다. 자폐인 아들을 혼자 집에 있게 하는 건 방치, 학대라며 절대 용납하지 않던 남편이었다. 빈 집에서 혼자 있는 게 얼마나 편한지 아냐고 귀에 딱지가 붙도록 얘기해도 귓등으로만 듣더니 지난 달 모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있게 해 본 이후 남편이 달라졌다. 안 하면 불안하지만 해 보면 괜찮은 일이 이것 뿐 이겠는가.  집에 들어오니 내가 사흘간 비운 집이 맞나 싶을 정도로 깔끔했다. 아들은 씨익 웃고는 제 방으로 들어갔고, 남편은 자신이 살림 잘하고 살았다는 칭찬이 듣고 싶어 내 눈치를 보는 듯했다.   “이제 주부 다 됐구만, 살림하느라 애썼다요.” 아들과 똑같은 표정으로 씨익 웃는 남편, 이제 일주일 여행을 시도해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미리 겁 줄 필요는 없으니까.    다음 날, 아침을 먹으려고 냉장고를 열었더니 빈 반찬통이 나란히 들어 있었다.   “뭐야? 빈 통을 왜 다 넣어놨어? 설거지하기 싫어서 그런 거야?”   내 말에 갑자기 웃는 남편.   “어제 저녁 먹고 하진이한테 반찬통 뚜껑 닫으라 했더니 냉장고에 넣기까지 하더만 빈통이었나 보네, 허허허...”   표정이 확 바뀐 나는 아들을 바라보며   “아이고, 니가 그랬구나. 잘했다 정하진!”  ‘엄지척’ 해보였더니 아들은 ‘뭘 그정도 가지고’의 표정으로 거만한 자세를 취했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걸 자꾸 잊는다. 기회를 주지 않고 기다리지 못하는 성급한 버릇을 고쳐야 됨을 또 깨달았다. 뭔가 지시하고 잘 했나 슬쩍 살펴보는 나와 달리 남편은 아들 행동을 믿고 확인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아들의 달라진 점은 혼자 생각하고 고민하는 모습이다. 거창하게 표현해서 고민이지만 나름 생각하는 모습이 꽤 진지하다. 밥을 적당히 먹은 것 같은데 평소에는 더 먹고 싶으면 본인이 일어나 바로 밥을 떠오든지 엄마한테 빈 그릇 내밀며 더 달라고 했다. 요즘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있다. 밥그릇, 국그릇 빈 걸 뚫어져라 바라보며 ‘더 먹고 싶은데 말을 해? 말어?’ 고민하는 것 같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나 알아들을 수 없는 모음만을 나열한다.   “밥 더 먹고 싶어? 그럼 밥 한마디라도 해봐.”  그제야 ‘밥’을 말하는 아들에게 ‘그래, 네가 갖다 먹어’라 하면 신나게 주방으로 움직인다.   남편과 아들의 작은 변화에도 큰 기쁨을 얻는 나의 요즘은 평화롭다. 우리 가족의 삶이 예전처럼 고달프기만 한 건 아니라서 감사한 날들이다. 긴 세월 나의 언행으로 부자가 달라졌다는 자부심이, 남편에게 모든 걸 맡기고 혼자 여행하려는 이기심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적당한 수위 조절이 필요하다. 

    게시일2023-03-10

  • 마땅한 장소가 없어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하고 들뜬 마음으로 그날을 기다렸다. 젊은이들이 한다는 ‘파자마 파티’를 위해 똑같이 생긴 싸구려 원피스와 촌스러워 보이는 꽃무늬 손수건도 주문했다. 주먹밥과 샌드위치, 과일, 와인에 주전부리까지 각자 맡은 것들을 준비하는 과정도 즐거웠다.매월 한 번씩 만나는 8명의 지인들, 봉사단체에서 만난 아름다운 인연이 14년째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은 ‘독서모임’, 이번 달은 ‘푸드 테라피’를 한다. 각자 돌아가면서 자신의 취향대로 모임을 이끌어 가는데 다들 재주가 많아 늘 새롭고 행복한 시간이 기대된다.   갑자기 남편이 그날 약속이 잡았다고 했다. 내가 미리 말했는데도 지방에서 오는 거래처 사장의 일정에 맞추다보니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내 모임보다 먹고사는 일이 우선이니 난감했다. 자폐인 아들을 데리고 모임에 가려니 내키지 않았다. 늙은 엄마 모임에 가는 아들도 달갑지 않을 텐데 생각하다가 아들에게 물어봤다.“하진아, 오늘 엄마 모임 있는데 아빠 없어도 혼자 집에 있을래?”“네!”짧게 대답하는 아들의 표정이 밝았다. 그런 적 거의 없는 아들이 ‘혼집’을 하고 싶었나 보다.   그날이 되었다. 나는 모임 도중에 아들을 데리러 나왔다. 아들에게 한 번 더 얘길하며 집에 들어섰다. 혼자 있을 아들을 생각하니 나도 아들도 살짝 긴장했다. 식탁 위의 과일을 먹으라 했더니 싱긋이 웃기만 하는 아들이 평소와 달랐다. 집에 오면 씻고 냉장고 뒤져 먹거리 찾던 녀석이 점잖게 소파에 앉아 ‘엄마 빨리 나가’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유튜브 아이돌 공연을 틀어 주고 나중에 저녁은 같이 먹자 말하고 집을 나왔다. 아들을 잊고 나는 음식으로 마음을 표현해 보는 ‘푸드 테라피’에 집중했다. 사춘기 소녀처럼 크게 웃을 일도 아닌데 누군가의 발표에 까르르 넘어가고 울컥 감동하면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웃고 떠들면서도 내 안에 아들 생각은 없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더 안심이 되었나 보다. 게스트하우스는 우리 아파트에 있는 거라 아들이 혼자 있는 ‘모험’을 실행해 볼 수 있었다.   저녁 먹으러 가자고 집에 들렀다. 근 두 시간동안 계속 소파에만 있었는지 평소처럼 제 방에도 가서 책도 보고 푸쉬팝도 하고 그랬는지 알 순 없었지만 느긋한 자세로 엄마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아들이 편안해 보였다. 식탁 위의 과일도 먹지 않았다. 냉장고 그만 열라는 나의 잔소리가 없으니 그 좋은 먹성도 잠시 외출했나 보다. “우리 밥 먹으러 옆 동에 가자.”아들은 벌떡 일어나 점퍼와 마스크를 챙겼다. 엄마 지인들에게 고갤 끄덕이며 인사하고 잘 생겼다, 피부 좋다, 듬직하다 등 쏟아지는 칭찬에 아들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음식도 게걸스럽게 먹지 않고 자꾸 내 손에 있는 걸 먹으려고 했다. 녀석이 체면 차리나 싶은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예정했던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사람 좋아하는 아들은 우리 활동을 바라보며 연신 소리없는 웃음을 보였다.   그동안 아들의 ‘혼집’은 일부러 시도하지 않았다. 집에서 근무하는 남편과 시간을 맞춰 늘 빈 집에 아들만 있게 하지 않고 마트나 잠시의 볼 일을 볼 때도 30분을 거의 넘기지 않고 살았다. 과거에는 집에 아들만 둔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생각해 보면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문제될 게 없었는데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혼자 놔두면 큰 일 나는 줄 아는 나의 불안이 너무 컸었다. 코로나로 인해 긴 시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아들은 아들대로 혼자 지내는 법을 터득했다. 나는 아들을 개의치 않고 내 일을 하면서 같이 또 따로 사는 방법을 익힌 것 같다. 어쩌면 우리는 코로나라는 위기를 기회로 활용했기에 아들이 혼자 집에 있는 게 불안하지 않는 마음이 두꺼워진 게 아닌가 싶다.   함께 살면서 각자의 공간이 편안하고 서로 의식하지 않는 따로 사는 시간이 늘고 있다.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여하며 답답해하고 잔소리하는 엄마에서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사는 일상이 평화롭다.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되는 일인데 참으로 긴 세월이 필요했다. 다음 모임에도 혹시 남편이 일이 생긴다면 아들의 ‘혼집’ 시간을 늘여봐야겠다. 요원하게만 느껴졌던 아들의 독립이 한 발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가슴 뛴 날이었다. 

    게시일2023-02-22

  • 크게 다를 것 없는 일상이지만 새해가 밝았다. 살다보니 이제 달력 바뀌는 것에 무덤덤해졌다. 예전처럼 신년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작심삼일 될 것이 자명했고 딱히 뭔가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사실이 버거워졌다.   자폐인 아들이 피아노에 관심을 갖는 것 같아 디지털 피아노를 ‘덥석’ 들였다. 삶이 단조로운 아들이 뭔가 좋아하는 기색을 보이면 가급적 제공하려고 신경 쓰는 편이다. 생활비를 쪼개서 딴에는 큰 맘 먹고 샀는데 아들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아까웠다. 흉물스럽게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 이참에 내가 배우자’생각하고는 ‘피아노 왕초급’을 검색했더니 수많은 자료들이 좌르르 펼쳐졌다. 악기라고는 어렸을 때 언니들 어깨너머로 배웠던 리코더 외에 아무 것도 못하는 내 자신을 잘 알기에 채근하지 않았다. 배우는 과정을 즐기자고 다독였다. 부담과 스트레스로 다가오면 그만 두자 생각하며 ‘열심히’보다 ‘꾸준히’ 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20대 초반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피아노 악보를 가슴에 안고 다니는 선배가 있었다. 연주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가늘고 긴 손가락이 건반 위를 춤추는 상상만으로도 그녀는 멋져 보였다. 나도 배우고 싶었다. 동네 피아노 학원에 갔더니 초저학년과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아이들로 붐볐다. 조막만한 손들이 피아노 건반 위를 날아다녔다. 나도 저런 날 기대하며 등록했다. 바이엘 책을 끼고 다니려니 쑥스러워서 멋진 선배 흉내는 내지 않았다. 종이 가방에 넣어 다니면서 하루 한 시간 한 달 쯤 되었을 때 내게 피아노는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겨우 한 손 연습인데도 어려웠다. ‘포기는 빠를수록 좋다’며 바로 접었다. 기타를 기웃거렸다. 남들은 노래 부르며 쉽게 연주하는 듯 보였는데 세상에 쉬운 건 없음을 또 깨달았다. 하모니카가 나를 빤히 쳐다보던 날, 인연이 되려나 싶었지만 역시나 내겐 무리였다. 더 이상 도전하고픈 악기는 없었다. 부는 건 호흡이 달리고 손으로 하는 건 손목이 뻐근해서 내 몸은 악기와 친할 수 없는 구조라 생각했다.   아들 핑계로 우리 집에 들어 온 피아노는 서서히 접근하는 나를 내치지 않았다. 공짜 동영상이 나를 피아노 앞에 앉혔고 매일 한 시간 정도씩 몰입하게 만들었다. 바이엘은 한 손으로만 해서 재미가 없었는데 요즘은 흥미를 위하여 처음부터 양손으로 하도록 지도했다. 어설프지만 재미있었다. 하다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버려 깜짝 놀라는 날이 많아졌다. 당구를 처음 하면 잠자려고 누웠을 때 천장에 당구대가 보인다더니 집을 비우는 날이면 피아노가 아른거렸다. C와 G코드를 익히고 ‘도레미’만 뚱땅거리면 되는 동요 ‘비행기’를 자연스럽게 연주하던 날 나는 내가 대견스러웠다. 그렇게 어렵다고만 느끼던 피아노를 스스로 배우고 동요를 치다니 놀라웠다. ‘생일축하’를 더듬더듬 치고 귀에 익은 ‘모짜르트 소나타 11번’을 제법 흉내 낼 때는 뿌듯했다.영상을 오래 보다 보니 스마트폰의 데이터 소모가 상당했다. 계속 영상을 볼 필요는 없었기에 설명을 들은 후 악보만 캡처해서 인쇄했다. 폰 보는 것보다 종이 위의 악보가 더 보기 편했다. 이런 잔머리 굴리는 내가 영리한 편이라며 혼자 잘난 체도 했다. 초보들을 위해 쉽게 편곡한 악보를 영상으로 제공하는 유투버들이 고마웠다. 올해 계획이 생겼다. 피아노 연주를 SNS에 올리는 것이다. 동요보다 조금 더 난이도 있는 곡을 공개하여 ‘혼자 해 낸 것’이라 자랑하면 지인들이 칭찬하는 댓글에 답글 쓰는 나를 상상한다.그리고 내 연주에 반한 아들이 슬그머니 내 옆으로 와서 감상하는 모습도 그려본다. 굵고 짧은 손가락을 주무르며 이순을 넘긴 나이에 피아노 치는 여자를 꿈꾸는 나는 오늘도 디지털 피아노와 한 몸이 된다. 

    게시일2023-01-11

  • 수다를 떨다   나에게 올해는 대체로 우울했지만 한결같이 참담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여느 해보다 미소며 웃음소리의 총량이 줄었었고, 찌푸리고 핏대 올리고 한숨 쉬고 했던 시간이 많았던 것은 틀림없다. 마음의 무게를 그래프로 그려놓는다면 대체로 평정심의 기준선 아래에서만 선이 그어질 터이다. 그럼에도 일주일에 하루씩은 분명하게 마음을 끌어올려주는 시간이 있었다. 특별하고 귀한 시간이었다. 지난 6월부터 발달장애를 가진 청년들과 글쓰기 수업을 함께 했다. 예전에 마을공동체방송국에서 인터뷰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두어 번 발달장애를 가진 청년들과도 인터뷰를 할 일이 있었다. 그 때 그 청년들이 뭔가 맘껏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걸 봤다. 수줍고 자신없어하는 표정으로 내내 입을 꼭 다물었던 이가 있었는데, 남들이 저마다 얘기하는 것을 보고는 인터뷰 시간 말미에 가자 막혔던 말이 서둘러 나오기도 했다. 그런 기억이 선뜻 글쓰기 수업 제안을 받게 한 이유가 됐다.   발달장애를 가진 이들은 대화를 하고 싶으나 많은 경우 스스로 포기하고 만다. 당장 내 아들만 봐도 그랬다. 다섯 살에 처음 의미있는 음절을 내기 시작했지만, 그래서 제 때 근육운동이 되지 않은 발음기관이 어눌하지만(서른이 된 지금까지도 여전해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외국서 살다 오셨어요?’라고 묻기 일쑤다.), 일단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는 일방적인 자기 주제를 주저리주저리 끝도 없이 얘기했었다. 그러다 해가 갈수록 말수가 줄더니 지금은 매우 과묵한 청년이 되었다.상대의 말을 온전히 다 이해하지 못할 때, 상대가 내 말을 이해해 주지 못할 때, 서로 하는 말이 서로 흥미 없을 때, 대화란 얼마나 어렵고 고단한 일인가. 상대가 내 말을 미처 못 알아들은 채로 서둘러 끝내려고 건성으로 대답하는 것도 느끼고, 내가 못 알아들었을 때 알아들을 수 있게 성의 있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도 느낀다. 대화란 모름지기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죽죽 늘어나는 인절미 같아야 하는데, 고집스레 단단한 고무같이 느껴질 뿐이다. 그래서 아들은 말수가 줄었다. 그나마 대화에 알량한 성의를 보이는 엄마와도 대화의 폭은 날로 줄어갔던 것 같다.   그런데 아들은 몇 년째 블로그에 매우 분량이 긴 글을 올린다. 주제는 낯선 분야라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지만 그 글의 표현만큼은 상냥하고 의젓하고 친절해서 상대를 앞에 앉혀두고 조곤조곤 이야기해 주는 투이다.(심지어 한껏 노오오오력했음이 분명한 유모어까지 곳곳에 심어놓으셨다!) 나는 그 글들을 읽으며 미안하고 부끄럽다. 대화를 건성으로 보낸다는 것을 아들에게 몇 번이나 들켰을까.   우리가 누구나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필요하다. 고양이, 개, 화분, 인형, 로봇일지라도 무언가 얘기하고, 그것들에게서 분명한 반응을 듣는다(고 믿는다). 내 마음과 기분 털어놓기를 포기한 이들의 세상에는 미세먼지같이 만연한 우울이 있다. 그러니 우리는 발달장애를 가진 이들과 더 많은 대화를 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 노력해야 한다. 소통하기 쉬운 말들의 통로를 찾아서 함께 앉아서 한 마디 한 마디를 발견해내듯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어미부터 그리 하지 않으면 아이는 누구와 다정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까. 이런 이유로 나는 내 아들과 엇비슷한 나이 또래의 발달장애를 가진 청년들과 즐거운 수다시간, 진지한 글쓰기 수업을 갖게 되었고, 지난 몇 달 동안 참으로 귀한 시간을 보냈다.   몹시 기품있는 청년들   첫 시간부터 그들은 매우 상냥하고 친절했다. 기대와 호기심도 가득했다. 수업의 주제가 ‘나를 표현하는 글쓰기’이니 이 시간에는 오직 ‘나 자신’에 집중해서 내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고 엄숙하게 선포하고 시작했는데, 어려워하거나 싫은 내색이 없었다. 마치 준비하고 기다려왔던 일을 대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처음부터 몇 가지 원칙을 정하고 시작했다. 말을 많이 하자, 말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말하자, 혼자서만 말하지 말자, 남이 말할 때는 들으며 기다리자, 모든 것은 상의해서 정하자. 이에 따라 첫 시간에 우리가 한 일은, 제일 처음 자기 소개하는 인사말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한다면 누구부터 할 것인가, 앉은 자리 순서로 할 것인가, 나이 순서로 할 것인가, 이름의 가나다 순서로 할 것인가, 하고 싶은 사람이 먼저 손드는 순서로 할 것인가를 상의했다. 합의가 안 될 때는 거수로 할 것인가, 자기 의견을 양보할 것인가도 상의했다. 물론 재미삼아 더 시시콜콜한 것까지 상의하고 정하고 했던 것이지만, 기대보다도 더 즐거운 분위기가 만들어져서 첫 시간, 첫 대면의 부담이 가볍게 날아갔다.   무엇보다 첫 시간에 내가 깊이 감명 받은 것은, 이 청년들이 매우 좋은 태도, 좋은 매너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대를 ‘님’으로 부르는 것, 모두에게 존대하는 것, 상대가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 상대 말에 ‘그렇군요’라고 공감해 주는 것 등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한결같았다. 아마도 오랜 시간 서로 노력해서 몸에 밴 약속인듯 했다.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에 이르는 나이 폭을 가진 이 청년들은, 그래서 그 나이에 맞는 기품 있는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 결과 실제로 그래 보였다. 나는 이 기품 있는 청년들과 함께 일주일에 두 시간씩 수다를 떨며, 그들 삶의 기품 있는 시간을 함께 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는 중이다.   수다의 기록 1   - ‘맘에 걸린다’무슨 말 끝에 ‘맘에 걸린다’는 얘길 했다. A가(A,B,C는 특정인이 아니라 대화의 순서대로 붙임) 맘에 걸린다는 게 무엇일까 물었다. 청년들은, 생각이 사라지지 않고 자꾸 떠오르는 것이라는 훌륭한 정의를 내렸다. 맘에 걸리는 생각이 무엇이 있는가 물었더니, B가 “학교 다닐 때 아토피가 있던 친구가 있어서 도와주고 싶었는데 못 도와준 것이 맘에 걸린다”고 했다. C는, “지하철에 가면 시가 붙어있어요. 시를 보는데 마음에 걸렸습니다.”라고 했다. 시의 내용이 마음에 걸렸냐고 물으니, 그게 아니란다. “나도 시를 쓰고 싶은데 못 쓰고 사진만 찍었습니다.”라고 했다. 그 시를 낭독해 달라 했더니, ‘풀잎처럼’이라는 제목의 시를 낭독했다. “그 시가 왜 좋아요?” C의 대답은, “시가 귀여워요.”였다. C는 우리 글쓰기반의 두 시인 가운데 한 명이다. 둘은 글쓰기 시간에 시를 척척 써냈다. C는 산, 바다, 꽃, 자전거, 별에 대한 시를 썼고, 다른 한 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러 견종에 대한 시를 시리즈로 썼다. 나는 이들 마음 속에 가득한 시심(詩心)에 매번 마음이 울렁인다. 그러면서 내가 산문을 쓰는 사람인지라 시를 이끌 재주가 부족한 것이 몹시 ‘맘에 걸린다’.   - 텔레비전에 내가 나온다면 글쓰기팀은 영화 ‘니얼굴’을 보고와서는 기분들이 좋았다. ‘니얼굴’은 발달장애를 가진 화가이자 이제는 연기자까지 된 정은혜 씨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영화다. 영화를 보니 어땠냐고 물으니 D가 답한다. “좋았어요. 아는 사람이 나와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꼭 만나고 싶어요, 저는 팬이에요.” 그런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본 이가 없다. 드라마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가 보다. 그래도 화제가 된 것은 알고 있는 이들이 몇몇 있었다. 발달장애를 가진 이들이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가 많이 알려지니 어떤 기분이 드는지 물었더니 이런 대답들이 나온다. “드라마나 영화에 우리 발달장애 활동가들이 나오니까, 기분이 좋아져요. 사람들이 보고 좋아하니까 나도 좋아요.” “나도 내가 나오는 다큐를 찍고 싶습니다.” “나는 영화, 나는 드라마도 찍고 싶습니다.”   - 응원을 보낸다, We will Rock you!한번은 E가, 공연을 앞두고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 많이 떨린다고 했다. 정말로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잘 할 거라고 다독이니 너도나도 “잘 될 거에요!”를 외친다. 이때 가만히 있던 F가 갑자기 책상을 쿵, 쿵 두드렸다. 그러고는 이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쿵, 쿵, 짝! 쿵, 쿵, 짝!) We will, We will Rock you! 갑자기 분위기는 롹콘서트! 다같이 신나게 발을 구르고 책상을 두드리며 We will Rock you!를 외쳤다. 한참을 그러고 나서 E에게 이제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음, 아직도 떨려요.”그러자 다시 F가 We will Rock you!를 외쳤다. 다시 한 번 롹콘서트. E에게 어떠냐고 물었다."아직도 좀 떨립니다.“다시 다같이 We will Rock you! E가 외쳤다. “이제 그만! 잘 할 것 같습니다!”우리는 모두 배꼽을 잡았다.   수다의 기록 2   -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대체로 어떤 주제든 기분 좋은 얘기로 시작하려고, 좋아하는 느낌들, 좋았던 기억을 얘기할 때가 많다. 그런데 얘기를 하다보면 이내 나빴던 기억, 싫어하는 것들로 옮겨가기 일쑤다. 좋았던 것, 좋아하는 것들보다 나빴던 것에 대한 기억이나 느낌이 더욱 자세하다. 나도 그런가 하고 생각을 해보았는데, 그건 잘 모르겠다. 나는 나빴던 기억이나 싫어하는 것들의 목록은 조금씩 꺼내서 각자 마음의 손길로 툭툭 건드리고 슬슬 쓸어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햇볕과 바람에 말리는 건어물들처럼, 널어놓은 목록들의 생채기가 무뎌질 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그런데 귀퉁이마다 부서져 나오는 그 목록들은 굴러 떨어지면서 마음 벽을 긁었다.   한 번은 G가 좀 우울해 보였다. 왜 그러냐 했더니 예전에 기분 나빴던 기억이 떠올랐다. 했다. 말이 나온 김에, 기분 나빴던 일을 얘기하고 서로 위로해보자 했다. “차렷 열중쉬어를 계속 시켰어요.”“혼내면서 가르치는 거 싫어요.”“욕하면서 가르치는 거 싫어요.”“집에서 방문 열어놓으라고 잔소리하는 거 싫어요.”“사람 툭툭 치면서 그만하라고 할 때 기분 나쁩니다.”“애들이 내 새 신발을 계속 밟았어요. 빵셔틀도 시키고요.”“자꾸 돈 갚으라고 했어요.”......H는 학교 다닐 때 같은 반 애들이 왕따를 시켰단다. 수학을 몰라 물어보니 무시하고 왕따를 시켰다. I가 물었다. “근데, 왕따가 뭐에요?” H가 간결하게 대답했다. “혼자 노는 거에요.” 아무도 말 걸어주지 않고 아무도 놀이에 끼어주지 않는 것, 왕따.   J는 이런 기억을 떠올렸다. “초등학생 때 급식시간에 친구들이 내가 음식 먹는 모습이 꼴보기 싫다고 판자로 앞을 가렸어요.” J의 표정이 슬펐다. 다들 화가 났다. 누군가 지금이라도 그때 그 애들한테 욕해보라고 했다.(파이팅~!) J는 슬픈 얼굴로 웃으며 “친구들인데 어떻게 욕을 해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 때 친구들이 이제 잘못을 깨닫고 사과를 해온다면 어떻게 할래요, 라고 물었다가 대답을 듣고는 아연실색했다. 대답은, “나도 사과할래요.”였다.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대가 사과를 해올 때는 나도 사과해주는 게 좋은 거란다. J는 그때부터 내 마음 속에서 ‘천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나는 J가 즐거운 기억이 많은 천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설레지 않는다K는 장애와 인권에 대해 매우 많은 생각을 했고, 그 생각들이 잘 정리되어 있어서 대화를 하면서 배우는 것이 많은 활동가이다. 어느 날 그가 사람을 사귀는 일에 대해 했던 말들은 마음이 아렸다. 그는 ‘나는 포기와 체념을 습득하고 살아갑니다. 누군가 좋아하고 설레는 마음이 들까봐, 그런 마음이 들지 않게 합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자기 선택대로 살아가는데 나는 그러지 못하게 살겠구나 하는 마음에 기분이 나빠집니다. 또 장애를 인정해주고 다름을 인정하고 배려하려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어떤 사람이든 나의 장애에 거리를 둘 거고 그러다 결국에는 멀어질 것이라 누군가를 보아도 설레지 않습니다.’ 쉽게 포기하거나, 포기하지 않아도 될지 잘 몰라서 포기하거나, 포기하지 못할 것을 포기해서 못내 마음이 쓰리고 아쉽거나, 끝내 포기하지 못해 슬프거나. 발달장애를 가진 이들은 하루에도 수도 없는 순간 무언가를 포기하며 살고 있다. 나는 이들이 포기하고 만 목록보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의 목록이 점점 더 길어지기를 바란다. 포기했던 것을 찾아내어 끝내 이룬 행복한 목록이 점점 더 확장되기를 바란다.   - 우리 세상은우리 중 L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의 최다기록보유자인데, 그는 작은 글씨로 꼼꼼하게 자기가 좋아하는 목록을 적기 시작해서 글쓰기 시간마다 목록을 보태나갔다.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장소, 좋아하는 일들이 A4 두 장을 빼꼭하게 채우고도 넘쳤다. 그 덕에 우리는 L이 좋아하는 것들을 굉장히 많이 알게 됐고, 어쩌다 그 음식, 그 장소를 보게 되면 L을 떠올린다.모두에게 좋았던 시간, 좋았던 기억의 목록이 열 장, 백 장을 넘어 한권의 책, 칸막이가 많은 책장을 채우길 바란다. 우리 세상은 그것을 위해 있는 거다. (2022.12) ​

    게시일2022-12-26

  •  “하진아, 엄마야. 문 열어 줘.”   거제로 이사한 언니네 집에서 나는 함께 모인 자매들과 수다 떨며 놀다가 잠이 들었고 남편과 아들은 근처 숙소에서 밤을 보냈다. 아침밥을 같이 먹으려고 부자 데리러 숙소로 갔다. 벨을 눌렀으나 아무 기척이 없었다. 한 번 더 누르니까 아들인 듯 발소리가 들렸다. 문틈으로 아들을 불렀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가 생각나 웃음이 나왔다. 집에서는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초인종 소리에 문 여는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한 번 더 아들을 불렀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아들은 문을 열고 활짝 웃었다.   “오올, 하진이 덕분에 엄마 들어왔네. 고마워.”   호들갑 떠는 소리에 놀란 남편이 일어났다.   “언제 들어 왔노? 문은 우째 열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남편이 물었고 아들이 문 열어 줬다는 내 대답을 멀리 소파에 앉아 듣던 아들은 잘난 척하는 표정으로 우릴 바라보았다.  “하진이가 엄마 언제 오는 지 목 빼고 기다린 거 아나?”  남편의 너스레에 아들과 나는 눈 맞추며 웃었다.   남들은 자연스럽게 배우는 일상을 아들은 본인이 하고 싶거나 무심한 척 보고 습득하는 자폐인이다. 집을 떠나 다른 곳에서 보이는 아들의 행동을 나는 유심히 살피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가끔은 내 시선을 너무 신경 쓰는 것 같아 안 보는 척 하지만 눈치 빠른 아들은 그걸 놓치지 않는다. 그렇게 서로를 의식하며 살아온 모자 관계가 조금씩 달라지는 걸 느꼈다. 코로나로 외부 활동이 멈춘 시기에 나는 아들을 데리고 인적 없는 곳으로 많이 다녔다. 아들의 어떤 행동도 외면하려고 애썼다. 워낙 겁이 많아 위험한 일은 하지 않아 다행이었고 손이나 몸을 앞뒤로 흔드는 상동행동은 말리지 않았다. 예전에 사람 많은 곳에서는 우릴 바라보는 남들의 이상한 시선이 싫어서 못하게 막았다. 그러면 아들은 더 심하게 하거나 소릴 지르며 뛰어다녀서 난감했다. 보는 눈이 없는 곳에서는 우선 내 마음이 편했고 아들은 본인이 어쩔 수 없는 상동행동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스트레스를 덜 받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서로 편한 외출이 잦다 보니 아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있었다. 아들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엄마의 눈이 다른 곳에 머무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상동행동의 강도와 횟수가 낮아지고 줄었다. 말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아들의 눈은 많은 것을 읽어내게 한다. 그것을 읽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아들의 삶이 좀 더 행복하려면 그 눈빛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소통 가능함을 주변인들은 잘 안다. 눈맞춤을 어려워하는 자폐인이 있지만 눈으로 말하려는 아들같은 자폐인도 있다.   한해의 끄트머리다. 여느 해와 달리 올해 아들은 그동안 보여 주지 않았던 모습을 많이 보여 주었다. 어쩌면 꼭꼭 숨기고 있던 것들을 이제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고 자신도 모르게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유아적 질문이라고 못하게 말려도 장난삼아 하는 남편의 ‘아빠가 좋아? 비가 좋아?’라는 질문에 아들은 귀찮은 듯 ‘아바!’라고 답한다. 유일하게 또렷이 발음하는 단어가 ‘비’라서 남편은 자신과 비를 동일선상에 놓고 있다.휴일 점심, 아들이 국수를 다 먹고는 누구한테 좀 얻어먹을까 둘러보다가 양이 많이 남아있는 누나에게 빈 그릇을 내밀었다. ‘먹고 싶은 만큼 가져가라’는 누나의 말에 조금 덜어 와서는 맛있게 먹었다. 갑자기 남편이 ‘아빠가 좋아, 누나가 좋아?’라고 물었더니 어설픈 발음으로 ‘누우나’ 하던 바람에 우린 또 까르르 웃음꽃을 피웠다.원형 식탁에서 음식 차리는 분에게 걸리적거릴까봐 스스로 의자를 뒤로 빼서 잠시 기다리더니 셋팅 끝나자 의자를 당겨 바로 앉는 일은 생각지도 못했다. 시켜도 멀뚱멀뚱 바라만 보던 때가 엊그제였기에.머리를 감고 드라이기를 직접 사용하다니, 이발 후 미용사가 드라이기 대는 것조차 못 견뎌 가만있지 못하던 아들이었기에 ‘점점 사람 꼴 난다’며 아들 덕에 많이 웃은 한 해였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지만 사회적 약자들이 사는 세상의 속도는 여전히 느리고 더디다. 아들도 자신만의 치열한 노력으로 느리지만 20대 중반의 시간들을 그냥 보내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나쁜 행동이 고착되고 잘 하던 일들이 퇴행하는 것 같아도 여전히 아들과 아들을 지원하는 주변인들은 애쓰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우리의 노력이 모두의 행복으로 다가갈 수 있는 세상, 갈망한다. 

    게시일2022-12-19

  • “정말 그지같은 2022년이었어.” 12월이 시작될 때 제일 친한 사촌동생에게 이렇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누군가에게는 나처럼 엉망진창인 한 해였을 테고, 누군가에게는 환호작약하는 한 해였을 것이다. 나는, 대체로 어두웠던 한 해로 기억하는 이가 많았으리라 생각한다.(환호작약했던 이들과는 상종하기 싫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도 집안 어른들이 여럿 돌아가셨고, 큰 병을 앓거나 앓고 있는 친척도 여럿이었다. 우리 가족에게도 코로나19에 모두 걸렸던 일 말고도 어려움이 좀 있었다.부모연대 회원으로서도 몹시 어두운 한 해였다. 코로나19 시기에 가족참사에 대한 뉴스가 잦았지만 올해는 유난히 더 그랬다. 보도되어 알려진 것만 올해 열 건이 넘는다. 더 이상 희망을 품지 못해서, 죽음보다 고통의 무게가 더 커서, 우울의 깊이가 더 깊어서 세상을 뜨면서, 끝까지 책임지지 못한 생명을 스스로 거둬가는 모질고 잘못된 일을 저질렀다. 자신도, 자녀도 소멸시켜 버리는 무서운 슬픔. 우리는 거의 일 년 내내 검은 옷을 입고 지낸 것 같다. 뜨거운 여름, 집중된 가족참사에 우리는 햇볕에 벌건 얼굴에 눈물을 흘려가며 추모제를 지내고 또 지냈다. 그러다 여름의 끝에서는 기어코 들이치는 흙탕물에 장애를 가진 이와 그 가족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희생되기까지 했다. 반짝이는 구둣발로 나타나 반지하 창살 밖에 쭈그리고 앉아서 남의 일 묻듯 하던 그 무례함을 지금도 용서치 못한다.   그러다 그러다 가을의 끝에서는 축제에 나섰던 젊은이들이 압사를 당했다. 우리는 낱낱의 이름도, 얼굴도 없는, 그저 ‘사망자를 추모합니다’라는 글자 앞에 추모의 국화를 헌화하는 희한한 일을 보았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두고 다른 속계산으로 어이없는 일을 저지르는 몰염치한 장면을 보았다. 우리는 한참이 지나서야 그 어이없는 추모의 장면을 그대로 보아넘겨준 우리가 얼마나 생각없고 비겁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모멸감과 함께 왔다. 대통령과 총리의 조화를 내동댕이친 유족이 우리의 부끄럼을 일깨워주었다. 2014년부터 달아 온 노란 리본 옆에 이제는 검은 리본 하나가 더 보태졌다. 2022년은 검은 리본의 해이다. 많은 사람에게 참혹했던 해.   우리 사회가 아직 그렇다. 숨기고 왜곡시키고 피하고 거짓을 말해서 그 참혹을 가릴 수는 있다. 분칠을 하고 포장을 해서 그 저열과 저급함을 가릴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안에 한 줌의 진심과 일말의 인류애와 생명에의 연민이 부재함을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을 들춰내는 것은 누구의 힘일까. 슬픔은 힘이 세다. 우리를 무기력하게 가둬버릴 때가 많지만, 낱낱의 슬흠이 모이면 숭고한 힘이 생길 때가 있다. 저무는 2022년이 끝내 ‘그지같은’ 해로 남지 않으려면 그 슬픔의 위안 정도는 남겨두고 가야한다. 그렇게 생각한다.  올해는 임인년, 호랑이의 해였다. 호랑이를 좋아하는 나는 호랑이의 해가 이렇게 참혹하게 지나가는 것이 못내 억울하다. 호랑이 꼬리털의 끝, 그 가장 끝이 사라지는 날까지 나는 호랑이의 명예스런 퇴장을 기원한다. 퇴장과 함께 그것이 어떤 것의 조짐, 그 미세한 발단이기를 바라마지 않는 것이다. 나는 올해 동짓날 팥죽을 퍼먹으며 오직 그것을 빌 터이다.(12.10)   - 김종옥(전국장애인부모연대 문화예술위원장)  ​ 

    게시일2022-12-13

  • 제 이야기입니다.   기억이 잘나지 않습니다만 천천히 쓰겠습니다.   저는 3살 때부터 초등학교 6학년을 졸업할 때까지 보육원에서 살았습니다.   보육원에서의 삶은 좋지 못했습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항상 싸움으로 승자를 가릅니다. 잘하면 1등이고 아니면 모두 2등입니다. 왜싸우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저 보육원에서는 형들이 법입니다. 그곳에서 저는 약자였습니다. 심심해서 퍽... 짜증난다고 퍽퍽....또 푹푹....입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가다 잡히게 되면 2배는 더 맞았습니다. 또한 벌도 받았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과 다르기 때문인 걸까요? 항상 궁금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식 전에 저는 보육원에서 나와 기쁜우리 복지관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저는 외쳤습니다.   “ 아~ 저는 장애인 구재희입니다!”   장애인이라서 차별받으면서 자라 왔지만 졸업한 제가 대견스러웠습니다. 졸업하고 나서 지금까지도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요. 하지만 장애인을 대하는 차별들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차별을 받을 때면 어릴 적 보육원에서 같이 지낸 그 형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럴 때 마다 화도 나고 복수도 하고 싶지만 불가능하겠지요. 지금은 어릴 적과 다르게 알고 있습니다. 차별하는 사람이 나쁘고 저는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요.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멈춰야 합니다.​ 지금은 번듯한 직장도 다니고 자립해서 혼자 잘살고 있습니다. 장애인도 차별받지 않고 지역사회에서 같이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차별받지 않아야 하고 커서는 자립할 수 있는 지원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이 제일 좋습니다.   저는 장애인 구재희 입니다!  

    게시일2022-12-05

  • 2022년이 되었다며 새해 다짐을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22년이 마무리 되어간다. 온유도 8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1살을 지나 이제 곧 5학년인 고학년을 준비하게 되었다.온유가 성장하면서 학교생활도 중요했고 학교생활에 불편함이 그리고 어려움이 없도록 준비해야 할 것 도 많았고 온유의 재활 치료도 학령기에 맞춰서 변화가 필요했다. 영아기 때는 치료사가 중심이 되어서 온유가 직접 배우고 익혀나가는 시기였다면 유아기 때는 영아기 때와는 조금 다르게 치료사의 중재를 최소화하여 움직임을 스스로 많이 늘려나가는 치료로 이루어졌다. 유아기 때는 스스로 움직임에 재미를 많이 느끼고 치료의 주도권이 온유에게로 서서히 바뀌었고 하고 싫고 힘든 치료가 아닌 운동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운동을 하다 보니 온유의 자존감도 더 높아졌고 몸을 움직이는 방법을 자신의 방법으로 터득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움직임이 변화 되었다. 물론 단독보행이 힘들기 때문에 학교에서 쓸 이동식 책상도 준비를 해서 학교 내에서의 이동에 어려움이 없도록 준비를 해 두었다. 이것 또한 일상재활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여러 종류의 쓰기도구와 연필(홈있는 연필, 얇은 연필, 삼각 연필...), 길이, 연필심의 굵기(B,2B,4B,6B) 중에 온유가 직접 오랜 시간 써보고 사용한 뒤 최적화된 것으로 준비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많이 경험해 보지 못한 곳을 조금씩 다녀보기도 했다. 유치원과는 달리 학교는 더 많은 사람과 비장애 학생들에게 대부분 맞춰진 시설이라서 치료실에서 운동했던 것을 중심으로 주변의 공원, 과학관, 미술관, 공연장, 백화점, 마트, 놀이공원, 재래시장, 고궁, 언덕길, 흙길, 돌길, 바다, 산, 계곡......그리고 자동차로 긴 이동을 하며 전라도 여행, 비행기를 타고 여름과 겨울 제주도 여행(장애인 서비스로 받아보고), 기차를 타고 서울 여행을 다니며 다양한 형태의 환경에 적응을 했다. 또한 공공 장소에서의 예절과 장소에 따른 어려움, 그리고 그곳에서의 대처방법을 직접 경험하며 유아기 때와는 또 다른 재미를 경험했다. 1년, 2년, 3년, 4년이 지난 지금은 온유가 다녀왔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방학이나 휴일을 기다리며 재미난 일을 계획하고 또 가고 싶거나 궁금한 곳은 구글 지도를 보며 살펴보는 아이로 성장했다. 아이가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성장 할 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지만 어쩌면 지체장애 아이라는 이유와 엄마만의 생각으로 아이를 계속 치료실을 전전하며 다녔다면 어땠을까? 라고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아직은 미성숙한 부분이 많이 알려 주고 싶은 것도 많지만 지금 현재 어떤 상황 속에서도 당당하고 재미도 느끼고 궁금증이 많이 아이로 성장 중이다. 토끼 같은 딸과 거북이 같은 아들 온유가 있는 우리 가정은 토끼와 거북이의 동화를 더 재미있고 다음 이야기가 기대가 되는 가정으로 거듭나고 있다. 내년의 거북이, 몇 년의 지난 뒤의 거북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가 되고 변화가 있을지 기대가 된다.

    게시일2022-11-30

  • 안동 봉정사 매표소 앞, 아들의 복지카드와 내 신분증을 보여줬다. 직원이 앉은 채로 힐끗 아들을 바라보더니 벌떡 일어나 다리를 훑어보았다. 그분은 발달장애에 대해 잘 모르고 신체장애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진이가 장애인 같지 않았나 봐, 하하하...” 일주문이 보일 때까지 곱게 물든 단풍을 보며 나는 크게 웃었다. “그러게, 저렇게 대놓고 스캔하는 건 또 처음이네.” 가족들도 짧게 웃으며 가을 속으로 들어갔다.   20대 자폐인 아들은 가끔 야무지게 입 다물고 있으면 평범한 청년으로 보인다. 어렸을 때는 티 나지 않는 외모로 오해도 많이 받았다. ‘자식을 버릇없이 키운다’느니 ‘무슨 애가 저렇게 산만하냐’는 등 어른들의 호된 말을 많이 들었다. 울기는 또 왜 그렇게 많이 울었는지 땅바닥에 드러누워 사지 흔들며 발버둥 칠 때는 정말 난감했다. 외모에 대해 별 관심 없는 아들이 묘한 표정을 지을 때면 보는 사람들이 ‘왜 저래?’하며 힐끔거리지만 정작 본인은 얼굴 찡그리는 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이름을 불러 표정이 바뀌도록 했지만 나도 궁금하다, 그럴 땐 무슨 생각을 하는 지.수용언어에 비해 표현언어가 서툴다 보니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하면 탠트럼(분노 표출)으로 답답함을 호소했다. 사람들의 힐끗거림이 불편해서 외출이 두렵던 시절이었지만 숨어 살 순 없었기에 많이 나돌아 다녔다. 한적한 곳에서는 행복한 표정으로 잘 걷고 뛰어 다녔지만 사람 많은 곳에서는 뭐가 불만인지 자주 떼를 쓰고 울었다. 사람들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가 있나 생각해 봐도 수긍할 만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자주 경험하다 보니 원인은 내게 있음을 알았다. 아들의 장애가 보이지 않게 하려고 알게 모르게 나는 아들을 강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소리를 내면 입을 막았고 두 손을 허공에 대고 흔들면 잡아서 멈추게 했다. 한적한 곳에서 허용하던 것들을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 억제하니 아들은 엄마의 통제를 힘들어 하고 있었다. 내가 견뎌야 할 타인의 시선만 생각하고 아들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던 시절이었다. 주 양육자인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걸 알았고 실행해 나갔다. 떼쓰고 우는 행동이 과할 때 양해를 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웃으며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아들에게 집착하면서 같이 흥분하고 그만하라 다그칠 때보다 빈도와 강도가 줄어들고 약해졌다. 주위 사람들에게 요청한 나의 말 한마디에 생각보다 사람들의 반응은 꽤 너그러웠다.   태어날 때는 몰랐던 자폐와 달리 다운증후군 엄마는 어딜 가도 장애가 먼저 보이니 대놓고 바라보는 게 너무 싫다고 했다. ‘멀쩡하게’ 생긴 아이가 눈에 띄는 행동하면 뒤늦게 검지 손가락을 허공에 대고 동그라미 그리는 사람이 나는 미웠다. ‘난 사람들이 바로 알아보니 차라리 더 낫다’는 말을 주고받던 어린 시절 엄마들이 떠오른다. 이래저래 아이 어렸을 때의 젊은 엄마들은 자녀들의 장애를 부정하고 싶었고 힘들었다. 자녀 양육보다 우릴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에 더 신경 쓰느라 마음고생이 심했다. 우린 늘 총 맞으며 살아간다고 씁쓸해 했다. 사람들의 ‘눈총’.많이 익숙해졌지만 아직도 누군가의 반응에 웃거나 서운하기도 한 걸 보면 아들의 장애를 온전히 수용하는 게 내게는 영원한 숙제인 것 같다.   ‘장애인 같지 않아요’라는 말에 반색하고 내 눈에도 의젓해 보이는 아들을 흡족해 할 때면 딸이 말한다. “엄마 기분 나쁘라고 하는 말은 아닌데 그런 말 자체에 당신 아들 장애인이란 게 내포되어 있는 거야. 엄마 눈에 멋진 아들이지만 누가 봐도 장애는 보여, 뭐 어때? 내 동생은 그냥 내 동생이지.”“어허이, 티 나면 어떻고 안 나면 어떻노? 이래도 저래도 우리 아들인데!”남편도 거들면서 나를 나무라듯 한 마디 던진다. 두 사람 말을 수긍하면서도 가끔 아들을 보는 시선에 내 기분이 달라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살면서 타인의 말이나 행동에 가볍게 기분 좋거나 나쁠 수 있는 그런 사소한 감정이라 생각한다. 어찌 보면 아들에게 가장 많이 매달렸던 나와 달리 남편이나 딸은 자식과 동생이라는 혈연에 대한 생각이 나와 좀 다른 것 같다. 덜 집착하거나 있는 그대로를 보려는 마음의 눈이 나보다는 한 수 위라는 생각이 든다. ‘뭐 어때?’하는 표정들을 보면 나도 아들에 대해 좀 더 객관적이고 너그러워야겠다.보이는 게 다가 아님을 알면서도 행동과 외모에 신경 쓰며 살다보니 아들이 겪었을 통제와 억압이 많이 미안하다. 그러면서도 늘 만삭인 배를 보며 한숨 쉬는 것은 ‘비만이 건강의 적’이라고 포장된 말을 하면서도 입을 옷 사는 게 힘들고 옷태가 나지 않는다는 속내를 감추고 산다. 자해를 하고 알 수 없는 이유로 크게 웃거나 울던 시절엔 거기에 매몰되어 다른 건 잊고 살았다. 힘들었을 때를 생각하며 지금 보이는 것이 내 맘에 들지 않아도 건강한 하루를 잘 살아내고 있는 아들을 고맙게 생각해야겠다.   내년엔 봄 봉정사의 풍경을 보러가야겠다. 아들을 뚫어져라 보던 그 직원의 어떤 반응에도 나는 무심하리라. 

    게시일2022-11-18

  • 얼마 전 서울 한 구청에서 발달장애에 관한 이해교육을 하게 되었다. 공무원들이 봉사활동을 나가기 전에 사전교육으로 요청한 것인데, 이런 경우가 흔치 않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미리 알고 가겠다는 건, 봉사활동을 건성으로 하지 않겠다는 뜻이니 말이다.그런데 교육 장소에 가는 전철 안에서 문득 고래를 보았다. 이렇게 말하면, 이 무슨 우영우 같은 소리인가 하겠지만, 전철 출입문 위 화면에서 느긋하게 유영하는 고래를 봤다는 말이다. 교육방송의 ‘지식채널e’에 나왔던 한 장면이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 52 헤르츠 고래’ 이야기였다. 갈아타느라 한 정거장을 걸치는 바람에 지켜보지 못하고 제목만 기억하고 내렸는데, 발달장애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날 아침에 마주친 우연이 무척 반갑기도 해서 이동하는 동안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았다.    -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 52헤르츠 고래   52헤르츠 고래(52-Hertz Whale, 속칭 52 Blue)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로 알려져 있다. 이 고래는 냉전 말기였던 1989년, 미국 해군이 소련의 잠수함 탐지 목적으로 만든 수중음향감시체계(SOSUS)에 처음으로 포착되었고 이후 여러 지역에서 정기적으로 관찰되었는데, 미국 해군은 고래가 내는 음향주파수인 52헤르츠에서 착안해 고래의 이름을 ‘52헤르츠’라고 불렀다. (사실 이 고래는 ‘미확인된 종의 고래로 추정되는 무언가’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울음소리를 수중청음기Hyhone로 들은 사례가 전부이며 실물을 발견한 적은 없다고 한다.)고래는 보통 12~25헤르츠 사이의 주파수로 의사소통을 하고, 대왕고래는 30헤르츠 주파수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이 고래는 52헤르츠, 정확히는 51.75헤르츠의 고음으로 운다. 다른 고래들과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해군은 이 음역대의 소리를 내는 다른 고래가 있는지 조사했는데 오직 한 개체의 소리만 포착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52헤르츠 고래를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라고 부른다.   52헤르츠 고래 이야기는 그림책으로, 노랫말로, 다큐멘터리 영화로, 소설로 쓰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방탄소년단의 곡 ‘Whalien 52’의 노랫말이 이 고래 이야기이고,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주인공 우영우의 핸드폰 뒷자리 번호가 이 고래를 상징하는 5252라고 한다. 고래와 외계인의 합성어라는 ‘Whalien 52’ 노랫말은 이렇다.(일부)   이 넓은 바다 그 한가운데 / 한 마리 고래가 나즈막히 외롭게 말을 해 / 아무리 소리쳐도 닿지 않는 게 / 사무치게 외로워 조용히 입 다무네 ...... Lonely lonely lonely Whale 이렇게 혼자 노래불러 / 외딴 섬 같은 나도 / 밝게 빛날 수 있을까 이렇게 또 한 번 불러봐 / 대답 없는 이 노래가 / 내일에 닿을 때까지 끝없는 무전 하나 / 언젠가 닿을 거야 / 저기 지구 반대편까지 다 ......(생략)   고래들의 울음은 넓고 깊은 바다 속을 울리며 나아가며 지구 반대편에 있는 동족에게까지 닿는다고 알려져 있으니, 어떤 고래든 소리를 내면 지구 어디에 있든 누군가 그 소리를 듣는 고래가 틀림없이 있기 마련이다. 반드시 가닿는 소리를 내는 고래들의 노래는 신비롭고 아름답다. 그런데 그 누구에게도 포착될 수 없는 주파수로 노래하는 고래라니, 그 고래가 깊고 푸른 바닷속을 천천히 유영하며 지구 반대편에라도 혹시나 있을지 모를 동족에게 보내는 혼자만의 노래를 부른다니, 이 외톨이 고래의 외로움은 얼마나 깊고 푸른가. 52헤르츠 고래의 외로움은 세상의 외톨이들에게 감정이입의 대상이 되고 있고, 그 외로운 자기만의 노래는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전철을 내릴 때쯤 52헤르츠 고래의 먹먹한 외로움의 이야기로 오늘 강의를 시작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서둘러 가다보니 좀 이른 시간에 강의 장소에 도착하는 바람에 52헤르츠 고래 이야기를 좀더 찾아볼 시간이 되었는데, 뜻밖에도 먹먹함을 넘어서는 이야기들이 이어서 눈에 띄었다.   - 세상에서 가장 외롭지는 않을지도 모르는 52헤르츠 고래   두 번째 52헤르츠 고래에 대한 기록이나, 동시에 여러 지역에서, 또는 여러 차례 비슷한 신호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고, 1992년 이후 고래 울음소리의 주파수가 약간 낮아졌다는 보고(고래가 성장, 성숙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는 보고)도 있었다. 북쪽으로 알류샨 열도와 코디액 군도에서 남쪽으로 캘리포니아주 해안까지 이동한다는 보고, 이동거리에 관한 기록도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 어떤 해양학 과학자들의 견해인데, 이 고래가 선천성 장애를 가졌을지 모른다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어찌되었든 이 고래는 혼자만의 울음소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 살고 있다는 얘기다. 다큐멘터리 ‘가장 외로운 고래: 52를 찾아서’(2021, 감독 조지 지먼)에서는, 이 고래가 대왕고래의 이동경로와 함께 다니고 있는 것을 근거로, 소통할 수 있는 주파수는 다르지만 ‘무리’ 안에서 지내고 있다는 추정을 하기도 한다.   52헤르츠의 울음소리가 한 마리 이상 발견되었든, 또는 아직도 유일한 한 마리가 소통의 어려움은 있겠지만 ‘무리’ 안에서 살고 있든, 어쨌든 52헤르츠 고래가 더 이상 외톨이가 아닐 수 있다는 소식을 보고 있자니, 마치 드라마 속에서 어떤 순간 우영우의 머리 위로 반짝이는 고래들이 폭죽처럼 빛나며 유영하듯, 내 머리 속으로도 더 이상 외롭지 않은 52헤르츠 고래가 묵직하니 헤엄을 쳤다.   이 아름답고 기쁜 이야기를 알리며 강의를 시작했다. 좋은 날이었다.  (2022.11.02.)   (* 참고 : 위키백과, 이데일리 2022.07.14. 기사 ‘우영우와 BTS에 담긴 52헤르츠 고래 이야기’)  ​ 

    게시일2022-11-02

  • 복지관에서 프로그램 끝나고 복지관 쉬는 시간에 놀러 갔는데 사회복지사가 화를 내면서 속상했다고 그래서 내가 가든지 말든지 화내는거였갔데 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프로그램 마치고 어딜 가든지 내 자유인데 사회복지사가 짜증나게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동내 친한 형님이 이야기할 때 어깨나 가슴을 두드리면서 이야기해서 기분이 나쁜적 있었다.그래서 형님한테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물어보고 해야 하는데 막 만지면 경찰한테 신고 할 수 있다고 몇 번씩 말했다 00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사람들이 막 대하는 것 같다. 장애인이라고 우리한테 짜증내고 우리 사진도 마음대로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고 몸도 함부로 만진다. 내가 생각하기엔 분명 차별이다. 우리한테 물어보고 만지거나 이야기 해야지 안 그러면 폭행으로 간주하고 경찰에 신고하겠다.​ 

    게시일2022-11-01

  •  시월엔 여행 가자는 말에 모두가 박수치며 환호했다. 스터디 모임으로 휴일 하루를 공부 반 수다 반으로 만난 지 6개월 남짓, 자녀들의 미래를 생각하며 심각하다가도 까르르 웃을 때가 많던 우리들에게 영암 2박3일의 여행이 그렇게 결정되었다. 제이네 외가의 별장으로 우리가 양껏 떠들어도 괜찮은 시골 마을이라 생각만으로도 들떴다. 자폐청년과 엄마들 총 8명이 함께 했다. 기차와 대중교통을 이용하자는 제안에 다들 흔쾌히 동의했다. 영암을 찾는 관광객이 아닌 숙소에서 쉬면서 자녀들은 그들끼리 우리는 우리끼리 편안한 시간을 갖자는 게 이번 여행의 목적이었다. 엄마들 중 전문가 한 명이 있기에 그동안 살면서 자녀들의 ‘종’ 노릇 하는 우리를 관찰하고 지향해야 할 것과 지양해야 할 행동들을 서로 나누는 시간이 되고자 했다.    수서역 가까이 사는 나는 아들에게 이번 여행에 대해 얘길 했다. 걸어서 역까지 간다 했더니 눈을 껌벅이며 엘리베이터 앞에서 계단으로 이동했다. 1층에서 현관 쪽으로 가는 나를 잡아끌더니 지하 주차장으로 가자고 했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계단으로 내려가 나를 바라보는 아들이 황당했다.   “오늘은 우리 차 안 타고 수서역까지 걸어가서 기차 탈거야. 어여 올라와라!”   싫다는 표현을 그리 확실하게 하는 건 병원 들어가지 않겠다는 태도와 똑같았다.   “기차 타면 우리 차 둘 데 없어 걸어가야 해. 잘 생각해 봐, 엄마 기다릴게.”   아들은 1층과 2층 계단 사이에서 나는 공동 현관 앞에서 서로 채근하지 않고 서로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일찍 도착하려고 넉넉하게 시간 배정하고 나온 터라 여유가 있어 다행이었다. 20여분의 시간이 흘렀고 아들에게 가서 다시 말했다.   “걷기 싫으면 버스 타고 가자, 더 지체하면 우리 기차 못 탄다.”  차분하게 혼잣말하듯 중얼거리고는 바로 몸을 돌려 현관으로 나왔다. 어느 새 내 뒤를 따라오는 아들이 느껴지면서 더 오래 고집 부리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에 아들이 고맙게 느껴졌다. 그래도 우리 차 타겠다는 자신의 의견이 묵살된 것에 대한 분함으로 계속 심통난 표정과 웅얼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출발부터 불협화음이 있었기에 이번 여행이 순조롭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행동에 엄마가 화난 걸 인지한 아들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경직된 내 뒤를 따르며 불안한 표정이 역력했다.  일행을 만나 기차에 오르니 드디어 우리가 먼 곳으로 떠난다는 게 실감났다. 각자의 취향대로 창밖을 보거나 폰에 몰입하는 등 청년들의 모습이 매우 점잖았다. 유독 내 아들만 머리카락을 꼬며 후후 입바람을 불었다. 나의 불안감이 올라와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들 앞좌석의 승객에게 맨 뒷좌석의 나와 자리를 바꾸자고 했더니 ‘아, 자폐인가 보네’라며 얼른 일어나 주었다. 자폐라는 단어를 쉽게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이게 우영우 효과구나 싶었다. 그 분의 관심은 부담스럽지 않았다. 아들이 답답해서 그래 보인다며 객실 밖으로 나가 보라고 권했는데 아들 표정이 나쁘지 않아 조금 그러다 말 것 같았다. 역시 평정심을 되찾아 잘 도착했다.  나주역에서 저녁을 먹고 버스를 이용하려 했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택시 두 대를 불렀다. 타지에서 온 우리를 알아보고는 기사의 친절한 설명이 과했다. 대답을 줄였더니 눈치 빠른 분이라 바로 조용해졌다. 초승달의 진노랑 빛깔이 유난히 뜨거워 보였고 손 뻗으면 잡힐 듯 가까이 있었다. 아들 넷은 자폐인답게 서로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아도 함께 모여 있었고 엄마들은 한 자리에 모여 앉아 담소 나누며 자신의 아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상생활에서 엄마라 잊기 쉬운, 고쳐야 할 행동들을 우리가 교재로 활용하는 책 ‘TEACCH 자폐와 더불어 사는 법’의 내용을 상기하며 여행지에서의 스터디가 이어졌다. 스스로 하는 공부는 재밌으면서도 자녀들에게 적용하는 건 역시 쉽진 않다. 청년들과 전문가 엄마가 아침 준비를 하고 엄마 셋이 산책을 하면서 느낀 점은 우리 자녀들의 조력자가 적절한 지원을 한다면 지역사회 안에서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발달장애인들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자원은 사람이다. 무조건 도와주고 대신 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조력자가 필요한 것이다.   첫 여행으로 서로의 자녀에 대해 알았고 무엇보다 마음 맞는 엄마들 조합이라 행복한 시간이었다. 관광이 아니라 집에서 어떻게 지내는지에 초점을 둔 여행이었다. ‘가족과 함께 평범한 일상을 즐겁게 사는 것’이 실현되어야 지역사회 안에서 이웃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여행의 맛은 달디 달았으니 다음을 또 기약한다. 

    게시일2022-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