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시·청각장애인이 차별 없이 영화를 관람할 수 있도록 영화관이 화면해설과 자막, 수신기기 등을 제공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시·청각장애인들이 영화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지 10년 7개월여 만에 나온 판결이다.
대법원 1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3일 오전 10시 시각장애인 2명과 청각·언어장애인 2명이 CJ CGV·롯데컬처웍스·메가박스중앙을 상대로 제기한 차별구제청구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를 일부 인용한 항소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 “서울고등법원, 영화관의 비용 부담 측면만 고려”
장애인들은 2016년 2월 17일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아래 장추련)를 비롯한 연대단체 및 법률대리인단과 함께 영화관 사업자들을 상대로 시·청각장애인의 영화관람권 보장을 위한 차별구제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장애인 역시 차별받지 않고 평등하게 영화를 관람할 권리가 있으며, 문화·예술 사업자는 이를 위해 정당한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2017년 12월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받아들였다. 화면해설과 자막을 제공하지 않은 것은 정당한 편의 제공을 거부한 차별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화면해설·자막·FM보청기기 제공은 물론 웹사이트를 통한 영화 관련 정보 제공, 영화상영관 내 점자자료·큰 활자 문서·한국수어 통역 제공까지 명했다. 그러나 피고들은 즉시 항소했다.
1심 판결이 나온 지 4년 만인 2021년 11월, 서울고등법원은 1심 판결을 변경했다. 항소심 역시 화면해설과 자막을 제공하지 않은 것이 장애인차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지만, 그 대상을 300석 이상 규모의 상영관 등으로 한정하고, 각 사업자의 전체 상영 횟수 가운데 3%에 해당하는 횟수만 편의를 제공하도록 그 범위를 축소했다.
그로부터 다시 5년이 흘렀다. 이날 대법원은 서울고등법원이 정한 차별 시정 방식이 장애인에게 편의를 매우 제한적으로만 제공하는 것이라고 명확히 지적했다. 자막과 화면해설 제공에 일정한 비용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장애인 역시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영화를 비롯한 사회적·문화적 생활을 충분히 누릴 권리가 헌법에 의해 보장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서울고등법원이 장애인이 자유롭게 영화를 관람할 권리와 영화관 사업자의 경영상 사정을 함께 고려하지 않고, 영화관의 비용 부담 측면을 지나치게 중시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이 같은 사안을 제대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측면에 대한 심리가 충분히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첫째는 영화관이 자막과 화면해설을 제공하는 데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지 여부다. 둘째는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함께 영화를 관람할 수 있도록 하면서도 영화관의 비용 부담을 합리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다. 대법원은 이 두 가지에 대한 충분한 심리 없이 서울고등법원이 차별 시정 범위를 정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장애인의 영화관람권, 당연한 권리… 원하는 영화를 원하는 방식으로”
장추련은 대법원 판결 직후 오전 10시 30분 대법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사건 법률대리인이자 시각장애인 당사자인 김재왕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공익법률센터 변호사는 “대법원 판결까지 10년이 걸렸다. 앞으로 또 몇 년의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을 것 같다”며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싶은 영화관에서, 보고 싶은 시간에 볼 수 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권리를 인정받는 데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현 사법제도의 한계가 아쉽다”고 말했다.
이어 “그럼에도 대법원이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의 문화향유권을 하나의 권리로 인정했다는 점, 영화관에 화면해설과 자막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오늘 판결은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김아람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인권센터 팀장은 “최근 영화 ‘오디세이’와 ‘스파이더맨’ 아이맥스 상영에 몰린 관객들의 열기를 다룬 기사를 봤다. 그 기사를 읽으며 이 소송의 원고들과 그 뒤에 있는 수많은 장애인 당사자들이 떠올랐다”며 “비장애인 관객들이 최고의 화질과 음향을 갖춘 명당에서 개봉 첫 주에 영화를 보기 위해 겪는, 연례행사와도 같은 열렬함과 아쉬움이 장애인에게는 애초에 선택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일상이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다가왔다”고 말했다.
김 팀장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난 10년간 법정에서 이어온 이 소송의 본질”이라며 “그저 옆자리 관객과 같은 시간, 같은 극장에서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보게 해달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영화관람권은 우리 법으로 보장된 기본권이자 일상이다. 영화관을 운영하는 대기업들은 장애인 관객이 동등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대법원은 법률대리인의 사법지원 요청에 따라 법정에서 문자통역과 수어통역을 제공하고, 판결 이유를 이지리드(easy-read, 이해하기 쉬운 방식)로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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