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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석⑦] 나에게로 돌아가는 길 / 홍은전
분류비마이너뉴스 글쓴이홍은전 게시일2021-12-03 조회수182

첫 번째 인터뷰가 너무 재밌었다. 풋풋한 첫사랑과 장발을 사수하기 위한 투쟁과 맞아도 맞아도 너무 맞는 그런 이야기. 한마디로 줄이자면 개김과 응징의 역사라고 할까. 경석은 장애인운동을 시작하기 전 스스로를 ‘엄마 말을 듣지 않아 장애인이 된 죄인’으로 여겼다는 말을 무수히 해왔는데, 그 뜻을 이번에야 제대로 이해했다. 그건 그저 사고 당일 교회에 가자는 엄마의 손을 뿌리친 자신의 운명을 자조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인생 전반전 이야기를 듣는다면 누구든지 세상에 뭐 이렇게 이상한 사람이 다 있지? 싶어 물개박수 치며 깔깔대다가도 한편으론 ‘경석이 엄마’를 걱정하며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어머니께 무척 죄송하게도 나는 인터뷰 대박을 예감하며 몹시 흡족해했다.

하지만 내 인생이 그렇게 잘 풀릴 리가 없는 것이다. 두 번째 만났을 때 경석에게 노들야학 이후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들을 읊어달라고 했다. 이동권 투쟁, 활동지원서비스 투쟁, 탈시설 투쟁, 장애등급제 폐지 투쟁이라고 경석이 대답했다. 세상에. 인터뷰는 한 차례 대차게 흥한 뒤 곧바로 망하려는 중이었다.

- 요즘 화두는 뭐예요?

- 최중증 발달장애인의 탈시설 문제 어떻게 할 것인가.

- ......

- 죽기 전에 이것만은 꼭 하고 싶다 하는 것이 있다면?

-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1만 개 쟁취!

- ......

- 아니, 개인적인 욕망 같은 거 없어요?

- 이게 다 내 개인적인 욕망이야. 권리중심 공공일자리 1만 개 만드는 거.

- ......

2018년 4월 19일, 장애인활동가 77명이 문재인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광화문사거리에서 효자동 입구까지 2시간 30분 동안 오체투지 투쟁을 했다. 오체투지 도중 박경석 대표가 쉬고 있다. 바닥에는 “문재인 대통령님, 만나주십시오.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 1만 개 보장, 중증장애인 최저임금 제외 조항 삭제”라고 적힌 피켓이 놓여 있다. 사진 강혜민
2018년 4월 19일, 장애인활동가 77명이 문재인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광화문사거리에서 효자동 입구까지 2시간 30분 동안 오체투지 투쟁을 했다. 오체투지 도중 박경석 대표가 쉬고 있다. 바닥에는 “문재인 대통령님, 만나주십시오.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 1만 개 보장, 중증장애인 최저임금 제외 조항 삭제”라고 적힌 피켓이 놓여 있다. 사진 강혜민

대화는 수제비처럼 뚝뚝 끊어졌다. 모든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오로지 장애인운동을 향하고 있었고 그 얘기를 얼른 하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결코 원치 않는 방향인 데다 일단 시작하면 한나절도 모자랄 것이었다. 나는 장애인운동사를 들으려는 게 아니라 박경석의 역사를 들으려는 거였다. 그런데 경석의 인생 후반전엔 개인적 공간이라는 게 아예 없는 것 같았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변하지? 엄마와 학교, 군대의 통제를 미꾸라지처럼 빠져 달아나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개인적 욕망에 충실하던 낭만주의자는 어쩌다 이런 조직주의자가 되었나. 나는 어떻게든 이 망해가는 인터뷰를 살려야 했다.

- 그런 거 말고... 뭐 재밌는 이야기 없으세요?

천장을 향해 한숨을 쉬었다가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가 하는 나를 보며 경석이 입을 쭉 내민 채 시무룩하게 말했다.

- 첫사랑 이야기 같은 거 해야 돼? 난 이제 그런 거 재미없는데…

저녁 7시에 시작한 인터뷰가 12시를 넘어가는데도 대화는 계속 헛돌기만 하는 느낌이었다. 무슨 얘길 해도 자꾸만 재미없다고 말하는 진상 인터뷰어에게 다섯 시간을 시달린 경석은 5년쯤 더 늙어 보였고 집으로 돌아갈 땐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얼굴로 쓸쓸하게 말했다.

- 생각해보니까 나는 한 번도 휴가를 쓴 적이 없어. 나는 왜 그렇게 재미없게 살았을까?

집으로 돌아와 밤새 ‘이불킥’을 했다. 인터뷰를 하는 사람으로서 절대 하면 안 되는 일을 가지가지로 하고 돌아온 밤이었다. 경석이 하고 싶은 말을 죄다 가로막고 내가 듣고 싶은 것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다 끝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자 남의 귀한 인생에다가 “사람들은 그런 얘기 재미없어 해욧!” 칼침을 놓는 만행까지 저지른 것이다. 생각할수록 낯이 뜨거워 새벽에 사과의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이 운동의 역사가 그의 인생이라는 것을, 나에겐 재미없는 그것이 그에겐 세상 무엇보다 재밌는 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세 번째 인터뷰는 10월의 어느 대체휴일에 노들야학에서 했다. 휴일이 아니면 긴 시간을 낼 수 없다는 그의 캘린더엔 다음날 하루에만 무려 열다섯 개의 일정이 적혀있었다. 나는 지난번의 무례를 사죄하는 마음으로 한껏 정중하게 말했다.

- 오늘은 교장선생님이 하고 싶은 이야기 마음껏 하세요. 이동권 투쟁부터 시작할까요?

2002년 9월, 박경석 대표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서울시에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39일간 단식농성을 했다. 왼쪽부터 박현 활동가, 박경석 대표, 박종필 감독. 박종필 감독은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장애인 이동권 투쟁보고서 - 버스를 타자’를 만들었다. 사진 제공 장애인이동권연대
2002년 9월, 박경석 대표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서울시에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39일간 단식농성을 했다. 왼쪽부터 박현 활동가, 박경석 대표, 박종필 감독. 박종필 감독은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장애인 이동권 투쟁보고서 - 버스를 타자’를 만들었다. 사진 제공 장애인이동권연대

*             *             *           

경석은 진지하고 신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동권 투쟁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활동지원서비스를 건너 탈시설 권리를 딛고 장애등급제 폐지를 통과해 최중증 장애인의 노동권에 이르렀다. 세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마지막까지 경석은 자신이 꿈꾸는 혁명과 준비 중인 전쟁에 대해 지치지 않고 설명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아주 재밌는 이야기였다! 귀는 활짝 열어두고 입은 꽉 다문 채 시종 잘 들으려고 애를 쓰는 착한 인터뷰어만 맛볼 수 있는 그런 유기농 비건빵 같은 재미. 전사들은 콧줄을 낀 최중증장애인이고, 무기는 발달장애인들이 제멋대로 추는 춤과 알아듣기 힘든 노래, 전선의 이름은 ‘누구도 남겨두지 마라’인 그 전장을 상상한 나는 너무 좋아서 비실비실 웃었다.

긴 이야기 끝에 그가 ‘이 싸움이 향하는 것은 자본주의’라고 말했을 때 나는 문득 여기가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근거지인 멕시코 치아파스 같다고 생각했다. 1994년 멕시코 치아파스주의 라칸돈 밀림에서 검은 스키 마스크를 뒤집어쓴 채 말을 타고 총을 든 사람들이 세상 속으로 달려 나왔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무장봉기한 원주민들이었다. 새장 속에 갇힌 새가 되어버린 북아메리카 인디언처럼 되지 않기 위해 저항을 선택한 그들은 원주민을 차별하는 멕시코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저항하고 인간의 삶을 한 가지 질서로 몰아가는 신자유주의에 맞서 투쟁했다. “우리가 무기를 든 이유는 세상을 정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제안하려는 것”이라는 사파티스타의 존재를 알게 된 건 20년 전 노들야학을 처음 만났을 때였고 나는 아직도 그들이 했던 아름다운 말들을 가슴에 품고 산다. 그들은 2021년에도 여전히 싸우고 있다.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곳은 분명 내가 오랫동안 일했던 노들야학인데 나는 마치 먼 이국에서 싸우는 사람들의 진지 안에 들어와 있다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서 야학 교실을 눈으로 둘러보았다. 내 앞에는 이곳에서 20년째 이 싸움을 지휘하고 있는 야전사령관이 앉아 있었다. 그는 이 삭막한 세상에서 여전히 혁명을 꿈꾸는 낭만주의자처럼 보였다.

2001년 9월, 장애인 버스 타기 투쟁을 하는 박경석 대표. 그의 손에 쇠사슬이 감겨 있다. 사진 제공 장애인이동권연대
2001년 9월, 장애인 버스 타기 투쟁을 하는 박경석 대표. 그의 손에 쇠사슬이 감겨 있다. 사진 제공 장애인이동권연대

이야기를 마치고 교실을 나설 때 경석은 놀이터에서 힘껏 뛰어논 뒤 집으로 돌아가는 어린 애처럼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늦은 밤까지 클래식 기타를 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열아홉 살의 경석이도 그런 얼굴이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가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지금 당장 담을 넘으면 곧바로 신나고 재밌는 세계가 펼쳐진다는 걸 아는 열아홉 살의 박경석처럼 육십이세의 경석에게 혁명은 꿈이 아니라 그의 눈앞에서 매일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최중증 발달장애인들이 거리에 나와 춤추고 노래하고 싸울 수 있는 것이 바로 혁명이니까.

장애를 입은 후 그의 삶은 온통 변했지만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바뀐 건 방향이었다. 억압과 통제가 싫어서 제도 바깥으로 끊임없이 달아나던 그는 이제 방향을 바꿔 제도 안으로 난입한다. 철로로 내려가 지하철을 막고 도로로 뛰어들어 버스를 세운다. 세상 속으로 불청객처럼 들이닥친다. 전반전의 생존 기술이 담치기였다면 후반전의 그것은 점거와 농성이다. 경석은 그런 방식으로 많은 제도들을 만들어왔지만 그가 정말로 원하는 건 제도 안의 한자리가 아니라 해적처럼 경계를 마구 넘나드는 것, 경계를 무너뜨리고 지우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친구와 음악과 바다와 하늘의 그 경계 없는 자유를 사랑하는 낭만주의자였다.

*             *             *    

살면서 제일 잘한 선택 세 가지를 꼽아보라고 하자 경석은 노들야학을 선택한 것, 현장 투쟁의 노선을 버린 조직(전장협)과 단절한 것, 그리고 정치의 기회를 포기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셋 중 하나엔 당연히 이동권 투쟁을 시작한 일이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조직한 것이 들어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의외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 ‘정치를 하지 않은 것’이 들어간 것은 더 의외였다. 의아해하는 나를 보며 경석이 “정치 안 하길 잘했지”라고 말하지 않고 “나도 정치하고 싶었어”라고 말했을 때 나는 마치 엄마의 젊은 시절 꿈이라도 들은 것처럼 멍해졌다. 그가 생각보다 야심가여서 놀란 게 아니라,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내가 그에게 그런 욕망이 있었다는 걸 전혀 몰랐다는 게 놀라웠다.

짐작이 어긋났기 때문에 나는 내가 던진 질문을 다시 보았다. 그제야 내가 물은 것이 ‘잘한 일’이 아니라 ‘잘한 선택’이었음을 깨달았고, 선택이란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게 아니라 다른 하나를 버리는 일이라는 사실도 함께 떠올랐다. 그러니까 잘한 선택이란 무언가 매우 버리기 아까운 것을 그가 오랫동안 손에 쥐고 갈등했다는 뜻이었다. 거기에 생각이 이르자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버렸던 그의 첫 번째 선택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노들야학 말이다. 이것을 선택하면서 경석이 버렸던 것, 아니 버리기 힘들었던 그건 무엇일까. 나는 갑자기 그가 살아오면서 버리기로 한 것들이 궁금해졌다. 내가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일들일 거라고 짐작했던 것들은 모두 그 포기와 연결된 것이었다.

11월 12일 국회 앞 장애인권리보장법·탈시설지원법 제정을 요구하는 농성장에서 3대 법안 제·개정을 요구하는 결의대회가 열렸다. 박경석 대표가 2층 높이의 농성장 옥상에서 발언하고 있다. 그의 뒤로 깃발들이 나부낀다. 사진 강혜민
11월 12일 국회 앞 장애인권리보장법·탈시설지원법 제정을 요구하는 농성장에서 3대 법안 제·개정을 요구하는 결의대회가 열렸다. 박경석 대표가 2층 높이의 농성장 옥상에서 발언하고 있다. 그의 뒤로 깃발들이 나부낀다. 사진 강혜민

경석은 장애를 입은 뒤 5년간 집에만 있었다. 무덤 속의 시체 같은 시간을 보낸 뒤 다시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복지관 직업훈련과정에 들어갔다. 경석은 ‘엄마 말을 듣지 않은 죄로 장애인이 되었다’고 여겼고 그런 경석에게 장애란 철저히 지난 삶을 회개하고 피나는 노력을 통해 극복해야 할 문제였다. 경석은 거기서 장애를 다르게 바라보는 태수와 흥수를 만났다. 그들은 장애인이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은 장애인의 탓이 아니라 사회의 탓이라고, 자본주의가 장애인을 사회 바깥으로 내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장애인이 주체가 되어 세상을 변혁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경석은 그 말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진심으로 믿지는 않았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경석은 대학생이 되었다. 가난한 장애인 운동가보다 폼나는 사회복지 전문가가 되고 싶었다. 태수의 부탁으로 야학 교사가 되었지만 그저 자신을 돋보이게 할 경력쯤으로 여겼다. 그는 좋은 성적이라든가 안정된 직장, 상급자의 인정 같은 것들을 얻기 위해 분투했다. 그것은 다치기 전의 경석이 전혀 욕심내지 않았던 것들이었고 오히려 달아나기 위해 발로 차버렸던 것들이었다. 경석은 그것들을 붙들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했고 노력하면 가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것이 장애를 입은 후 그가 잃어버린 삶을 조금이라도 회복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 세계는 그를 밀어내고 발로 차버렸다. 장애인고용촉진공단도, 장애인 직업훈련소도, 장애인 복지관도, 모두 장애인 박경석을 동료로 받아주지 않았다. 슬펐고 분노했고 절망했다. 그때 노들야학 사람들과 ‘나쁜 장애인’들이 그를 위로했다. 그는 현장의 사람냄새에 블랙홀처럼 빠져들었고 거리에서 분노를 표현하며 싸우는 희열을 알아갔다.

그 후 취업의 기회가 찾아와 경석은 복지관 총무과장으로 취직했다. 거기서 1년쯤 일했던 어느 날 그는 야학과 직장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기로에 놓였다. 번듯한 직장에서 고정적인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안정적인 삶과 사람들과 어울려 놀고 데모하는 가난하지만 즐거운 삶 사이에서 갈등하던 경석은 야학을 선택했다. 경석은 그것이 매우 어려운 선택이었다고 언제나 말해왔지만 나는 사실 그 말을 믿지 않았던 것 같다. 경석만큼 놀고 데모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치기 전 그의 삶과 다친 후 5년의 시간 위에서 그 말을 곱씹으니, 그가 포기한 것이 단순히 돈이나 안정적인 삶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복지관 직업훈련생 시절에도, 대학생 시절에도, 언제나 자신이 열심히 노력했던 이유가 ‘엄마에게 취업 선물을 드리기 위해서’라고 했다. 다니던 직장을 포기하기 어려웠던 이유도 매일 아침 출근하는 아들을 문 앞까지 배웅하며 손 흔들어주던 어머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라고 말했다. 그가 자살하는 법을 찾기 위해 교회에 가기 시작한 것도 집에서 죽으면 엄마가 슬퍼하니까, 였다. 그 시절 그는 마치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것의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인 사람처럼 살았다.

2002년 8월, 노들야학 상반기 졸업식에 참석한 박경석 대표. 97년 노들야학 교장이 된 그는 2021년 24년간의 교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평교사가 되었다. 사진 제공 노들야학
2002년 8월, 노들야학 상반기 졸업식에 참석한 박경석 대표. 97년 노들야학 교장이 된 그는 2021년 24년간의 교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평교사가 되었다. 사진 제공 노들야학

시퍼런 청춘의 5년을 방구석에 누워서 보낸 자신과, 그 곁을 지키며 아들의 마비된 다리를 주무르며 매일 눈물로 기도하던 어머니, 세상에 오직 둘밖에 없었던 그 시간 동안 경석은 얼마나 후회했을까. 그때 교회에 갔더라면, 그때 행글라이딩을 안 했더라면, 더 성실했더라면, 더 조심했더라면, 착하게 살았더라면, 엄마 말을 잘 들었더라면, 그랬다면 이 고통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엄마에게 이런 고통을 안 주지 않았을까. 그 둘의 고통에 경석은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나는 엄마 말을 듣지 않아 장애인이 되었다’는 그 자조 섞인 말이 나는 그저 농담이라 여겼는데 그것이 그에겐 정말 아픈 말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날 고갯길에서 그가 돈이 아니라 야학을, 어머니의 기쁨이 아니라 자신의 기쁨을 택하고 어머니에게 죄송하다고 말씀드린 순간은 바로 그가 ‘장애인의 열악한 삶은 개인의 탓이 아니라 세상 탓’이라던 태수와 흥수의 말을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삶으로 받아들인 순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이 정말로 중요한 건, 그때가 바로 그가 ‘엄마 말 안 듣던’ 예전의 경석으로 돌아가기로 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야학 사람들과 술 마시고 노래 부르던 그 무수한 하루하루 동안, 밤새 기타 치고 다음 날 학교엔 지각하던 꼴통 박경석으로 조금씩 조금씩 돌아가고 있었다. 야학의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일일이 전화해 일일호프 티켓을 사달라고 조르고는 장부를 꼼꼼히 정리할 때마다 그는 교복 집을 돌며 실을 팔아 용돈을 쓰던 장사꾼의 아들로 조금씩 조금씩 돌아가고 있었다. 현장 투쟁 노선을 버린 조직이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을 초대해 축하연을 벌이던 날, 불청객처럼 나타나 찬물을 끼얹고 돌아 나왔을 때도 경석은 예전의 자기 자신으로 성큼 돌아왔다. 상급자에게 개겨서 턱뼈가 두 번 부서진 고문관 박경석으로.

나는 삶이란 것이 일직선의 화살표처럼 생긴 거라고 생각했다. 싸우는 인간의 탄생이란 문제를 깨닫고 서서히 변해가던 사람이 어떤 계기를 만나 변신하고 폭발적으로 전진하는 순간이라고. 그런데 경석을 보면서 그것은 한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하는 순간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변신하는 순간이 아니라 변신하지 않기로 하는 순간, 그러니까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기로 결심하는 순간. 그리하여 2001년 그가 지하철을 가로막으면서 등장한 그 순간은 마치 개인적 욕망에 충실하던 한 사람이 사회적 정의에 눈뜨고 저항하는 인간으로 변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엄마 말 안 듣던 그 꼴통 경석이가 세상으로 다시 돌아왔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지하철 경적소리와 함께 후반전이 재개되기까지, 그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18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 모든 고통이 장애인의 탓이 아니라 사회 탓이라고, 자본주의가 장애인을 이 사회 바깥으로 내몰기 때문이라고, 그러니 장애인이 주체가 되어 세상을 변혁해야 한다는 태수와 흥수의 말을 경석이 진심으로 믿기까지 걸린 시간일지도 모른다.

2001년, 광화문역에서 “장애인 이동권 보장하라–장애인이동권연대”라고 적힌 몸피켓을 입고 발언하는 박경석 대표. 사진 제공 장애인이동권연대
2001년, 광화문역에서 “장애인 이동권 보장하라–장애인이동권연대”라고 적힌 몸피켓을 입고 발언하는 박경석 대표. 사진 제공 장애인이동권연대

[참고]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 박경석, 책으로 여는 세상, 2013.

《노란들판의 꿈》, 홍은전 지음. 봄날의 책, 2016.

《유언을 만난 세계-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 정창조 외, 오월의 봄, 2021.

[자문] 박경석(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이사장)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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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마이너뉴스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2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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