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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칼럼

[새벽까페2_김종옥] 깁스에 관하여
글쓴이보다센터 게시일2020-07-02 조회수2,486

3주 전에 손목을 다쳤다. 그림작품들을 정리하는 일을 하다가 뭔 일로 서둘러 뛰다가 넘어지면서 다쳤다. 바닥에 주저앉아 포장을 하는 데 불편해서 신발을 벗어놓은 채 양말바람이었고, 바닥은 대리석 바닥인 양 미끄러웠고, 비닐이며 종이포장재가 어지러운 채 널려있었으니 미끄러져 넘어지기 딱 좋았다. 두어 발걸음 뛰다 쭉 미끄러지기 시작했는데, 그 순간이 얼마나 길던지 오만 생각을 다 했다.

 

, 왼발이 미끄러지는데 오른발이 미처 앞으로 오지 못하겠구나

이렇게 넘어지면 허리나 목이나 뒷통수를 다칠 수도 있겠구나

되도록 충격이 덜하게 옆구리로 돌면서 넘어져야겠구나

그런데 지금 이 모습이 좀 웃기겠구나...

 

그러다 어찌어찌 몸을 돌리면서 넘어지면서 뒷통수를 보호하는 데까지는 성공하고, 민망하게 넘어져 있는 채로 발목, 무릎, 허리, 엉치뼈를 살폈다. 살짝 아프기는 했으나 모두 무사하다! 그런데 일어나려고 손목을 바닥에 짚는 순간 손목에 탈이 난 걸 알았다. 통증이 슬슬 밀려오더니 집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아예 손목에 불이 난 듯 아팠다.

 

아침에 병원에 가니 다행히 손목골절은 아니고(손목은 골절되면 모두 수술해야 한단다), 인대가 늘어나고 연골이 부서졌고 염증이 심한 상태이니 반깁스를 하고 한달을 지내야 한다고 했다. 그 이후에도 손목에 힘을 주는 일은 제약이 많을 거라 했다.

 

그러고 3주째다. 오른손이라 불편한 것은 말도 못한다. 사람이 하는 일의 대부분이(머리만 굴리는 일 말고) 두 손이 합작해서 하는 일이란 걸 새삼 깨달았다. 왼손 혼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서 왼손과 오른팔뚝, 왼손과 이빨로 하는 협업 기술을 연마하는 중이다. 깁스를 만약 두어달 더 한다면 왼손과 오른발고락의 협업이 가능해질 것도 같다. 왼손으로 단추 끼우기는 하루만에 성공했고 매듭단추 끼는 것은 일주일만에 성공했다. 가위질만은 매일 시도했지만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왼손용 가위를 사는 건 좀 아깝다.

제일 안 된 것은, 서툰 능력으로 열 일 애쓰고 있는 왼 손을 보살펴 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왼손으로 낑낑거리며 샤워를 했는데, 정작 수고한 왼손은 닦아줄 수 없으니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다. 샤워를 마치고 대접만 받은 오른손에는 로숀을 발라주지 않는 것으로 응징했다.

내가 오른손에 깁스를 하고 나가니 세상이 조금 달랐다. 문 앞에 서면 사람들이 문을 잡고 기다려줬고, 엘리베이터를 타면 몇 층을 눌러줄까 물었다. 전철을 타면 사람들이 조금 거리를 두고 서줬고 물건을 사면 가게주인들이 내 가방을 열어 물건을 담아 줬다.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도 손목의 사연을 궁금해하며 물어왔고, 이전에 자기 경험을 얘기하며 걱정을 해주었다. 요컨대, 친절한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생겼다.

 

식구들은 불평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운명을 쉽게 받아들였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불러대도 군소리 없이 일을 도왔다.(다만 시간이 갈수록 불렀을 때 제 방에서 튀어나오는 시간이 늘어가기는 한다) 좀 안됐던 일은, 아마도 제대로 먹지 못해서 생긴 일 같기는 한데, 네 식구 중 셋이 가벼운 장염이 걸렸을 때 자기 병간호를 제 스스로 했어야 했다는 건데, 이 역시도 식구들은 별 군말없이 잘 해냈다.

 

그 중에서도 평소 엄마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 보듯하던 딸은 가족들을 진두지회하며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고, 평소 까칠하던 남편과 게으르던 아들은 딸의 말에 고분고분하다.(본인이 나서서 집안일을 건사하기 싫으니 부자가 모두 수동 복종형이 된 거다) 특히 아들은 흡사 엄마가 다쳐서 도움 줄 일이 생긴 것에 신이라도 난 듯했다. 처음엔 졸졸 따라다니며 내 팔목이 어디 스치기라도 할라치면 조심해욧!”을 연발했다. 내가 신문을 집어들 때도, 수건을 걸 때도, 가방을 들 때도, 물을 따라 마실 때도 아들은 내가 혹시라도 오른팔을 쓸까봐 감시하고 주의를 준다. 하루종일 조심해욧을 입에 달고 있으니 잔소리꾼도 이만한 잔소리꾼이 없다.

그러고보니 아들은 예전에도 나를 돌보는 일이 생기면 열심히 나섰다.(물론 길게 가지는 않았다. 이런 것도 루틴이 되면 참 좋겠으나..) 내가 자다가 가위에 눌리는 일이 잦은데, 어느날 식구들이 그게 좀 심해졌다며 걱정했다. 가위에 눌리면 온몸이 감전이 된 듯 찌릿찌릿하고 기운이 빠져나간다. 나는 식구들에게 빨리 와서 깨워주는 게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날 밤 설핏 잠이 들었는가 하다가 문득 머리맡에 누가 서있는 기운을 느껴 화들짝 놀라 깼다. 올려다보니 어두컴컴한 데서 아들놈이 스윽하고 서있는 거다. 왜 그러냐 했더니 엄마가 가위 눌리면 깨워달라 했다고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머리맡에 그렇게 서있으면 어쩌냐, 너 때문에 가위 눌릴 뻔 했다, 이놈아, 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시 잠이 들다가 좀 이상해서 다시 보니, 이번에는 아들이 살짝 열린 문 뒤에서 가만히 방에다 귀를 대고 있는 거다. 그 날 이후 나는 되도록 거실을 차지하고 잔다. 제각각의 이유로 올빼미 생활을 하는 식구 셋이서 언제라도 튀어나오기 쉽게 하려고 말이다. 그러니 나를 괴롭히려는 가위는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놈이다.

 

남을 돕는다는 것처럼 자존감을 높이는 일도 없다. 봉사도 중독된다는 말처럼 남을 돕는 건 기쁨이 넘치는 일이다. 누가 착하다고 머리를 쓰다듬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남을 위해 기꺼이 수고하고, 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듣지 못해도마음에 흡족하다. 내가 누군가를 도울 처지가 되었고, 내가 한 일이 스스로에게 기특했고, 제법 세상에 쓸모있었다는 기쁨이 있다. 누군가를 도왔다는 것,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 이 이타적 즐거움의 본질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연구를 해왔지만, 그래서 때론 참 냉정하고 야멸찬 분석을 내어놓기도 했지만, 나는 이 즐거움도 우리 본성 안에 들어있는 거라고 믿는다. 우리 아들놈에게 이토록 누군가를 보살피고 도와주고 싶어하는 열망이 들어있다는 것만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그게 상대의 나약함을 확인하는 우쭐함에서 비롯된 것이든 아니든, 어쨌든 우리는 남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다.

 

이렇게 남에게 좋은 사람이 될 기회를 내 깁스한 오른손이 제공하고 있으니, 이럭저럭 깁스 한 달도 할 만한 일인 것 같다. 그렇지만 어쨌든 지금 말년병장처럼 무사히 깁스를 풀 날짜를 세고 있기는 하다.

 

글쓴이 김종옥 

이런저런 인역과 삶의 엮임으로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서울지부장을 하고 있음.

워낙은 SF소설 쓰는 것이 소망이나 청소년 철학 도서 몇 권과 칼럼을 쓰다가 일시 작파 중.

삶의 모토인 즐김과 쓰임 사이에서 오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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