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보다칼럼

초대칼럼 상단 이미지

칼럼니스트들이 여러분들께 ‘발달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건네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시선으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 계시나요?
이 게시판은 보다센터에서 초대한 각 분야의 칼럼니스트들이 여러분들께 ‘발달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건네는 곳입니다. 발달장애와 관련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칼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또한 발달장애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의 일상이야기,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의 소박하지만 통렬한 이야기와도 공감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은 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게시물 총 61

  • 얼마 전 방영되었던 “우리들의 블루스”라는 드라마의 한 장면이 생각 난다.영옥과 해녀 삼촌의 대화 중 “내 손지도 좀 경해, 다들 말을 안해 그렇지 너영 나영 마냥 아니고 그런 집 서너 집 걸러 하나라 그 별거 아니라” 라는 대화가 나온다. 영옥의 동생이 다운중후군이라는 장애를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이었다. 제 아이(온유)를 키우면서 매번 경험했던 상황이라 많은 공감을 하면 보게 되었다.  지금 현재 11살 남자아이이고 지체 장애인이다. 현재 일반초등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고 일반학급으로 배치되어 생활하고 있다.태어날 때 뇌손상이나 특별한 이벤트도 없었고 만삭아로 정상분만을 했다. 6개월까지 정상 발달을 했지만 이후부터 발달이 더디고 18개월까지 보행이 되지 않아서 발달 검사를 했다.  검사 결과는 발달지연으로 재활 치료를 시작했고 치료를 하면서도 변화가 발달지연보다는 “장애”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19개월부터 “재활”이라는 치료를 시작하면서 생활은 많은 부분이 달라졌고 알지 못했던 부분들은 검색도 하고 상담도 하며 치료실 학부모님들을 통해서도 알게 되었다.19개월부터 시작한 재활치료는 다른 아이들이 시작한 것에 비해서 늦은 부분이 있다고 느껴 매일 2~3개의 치료실을 다니면서 영아기의 시기를 보냈다.그러다 24개월부터 시작한 언어치료가 1년 6개월만에 정상 범주 안에 들어왔고 주변에서 이야기를 듣고 가정순회교육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육청에 특수교육대상자로 신청을 하고 검사와 면담을 통해 선정이 되어 순회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아이가 어리고 언어로 전달이 잘 되지 않아서 제 아이지만 어느 정도의 인지 수준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순회 선생님이 처음 평가를 하신 뒤 이야기를 나누는데 생각보다 제 아이는 인지도 괜찮았고 집중을 잘하는 아이라고 이야기를 하셨다. 그 이후 바로 순회교육을 주 2회 2시간씩 수업을 했는데 그동안 치료실만 다니면서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하고 느끼고 만지면서 오감 자극을 많이 하다 보니 아이가 많이 즐거워했고 선생님과 헤어지면서 울기까지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매일 재활치료실을 다니던 스케쥴을 모두 수정하고 아이에게도 일상의 즐거움을 느끼면서 재활치료도 병행했다.영아기를 또래 아이들과는 조금은 다르게 지내다 보니 또래와의 사회성과 상호작용도 부족한 것 같아서 고민을 하던 때 순회교육 선생님이 5세가 되면 병설유치원 통합반(특수반)으로 입학을 권유하셔서 주변의 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을 알아보고 지원하여 다니게 될 수 있었다. 첫 사회 생활이었고 엄마와 처음 떨어지는 시간이어서 걱정도 두려움도 있었지만 아이는 잘 적응하였고 또래와의 어울림으로 인해 래와의 상호작용, 외부환경 자극, 선생님의 언어 자극, 다양한 활동으로 신체를 제외한 다른 부분들은 많이 발달 되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거나 의견을 나누는 부분,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부분들이 발달 되면서 재활치료에서도 더디게만 가던 시간들이 조금씩 달라졌다.영아기때는 치료에 집중을 했지만 유아기부터 사회생활이 시작되면서 치료의 양보다 질에 좀 더 집중을 했더니 움직임도 많아지고 다양하게 움직이는 아이로 변화되었다.하지만 선생님들이 장애에 유형은 알고 계셨지만 유형별 특징과 아이들의 개별화 교육은 잘 이루어지지 않아서 조금은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아이가 유아기를 지나 학령전기에 들어가면서 경험해야 할 부분도 해나가야 할 부분이 유치원에서 채워지지 않은 것은 가정에서 채워나가면서 3년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아이의 장애를 알게 되면서 많이 낙담하고 방법을 몰라서 걱정을 많이 했지만 주 양육자가 아이의 발달을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했고 시기에 맞게 적절한 치료와 교육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도 진행 중이고 어려움도 많이 있지만 하나씩 상황에 맞게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다.  ​ 

    게시일2022-06-23

  •     제목부터 희망적이다. 안 된다고 미리 포기하고 나는 못한다, 내 아이는 할 수 없다 손사래 치며 지나온 날이 얼마나 많았던가. 통합학급반에 있었던 아들을 생각하며 읽었다. 교실엄마에 복도엄마를 거쳐 운동장엄마에서 집엄마가 되기까지 매우 험난했던 초등 2년 반의 세월. 십 수 년이 지나고 보니 마음의 동요는 없다. 오랫동안 나를 아프게 했던 담임에 대한 서러움보다 장애가 무슨 죄인양 교사 앞에서 늘 전전긍긍하고 쪼그라들었던 내 자신의 부족함만 여전히 안타까울 뿐. 해맑은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은 아직도 선하다. 자신들의 도움으로 하진이가 오늘은 이것도 했고 저것도 했다며 신나게 얘기해 주던 예쁜 모습들...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초저학년까지 좀 길게는 초등6년을 통합학교에 다니다가 특수학교로 전학을 많이 했다. 전쟁 같았던 초등 시절보다는 좀 나은 중학교 통합은 그럼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그 어려움을 학생들과 교사들이 힘을 모아 줄여 나가는 과정이 저자 이수현의 책 “해 보니까 되더라고요” 속에 보물처럼 담겨 있다. 발달장애가 있는 두 남매의 엄마 이수현은 중학교 영어교사다. 그녀의 SNS에는 웃음과 눈물과 감동이 있다. 교사로서의 완벽함이 돋보이지만 엄마로서의 힘듦을 넋두리 하듯 쏟아내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위로하며 그녀에게 용기를 북돋워 준다. 이수현은 자녀를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삶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 같다. 어쩌면 자녀에게 장애가 없었다면 진정한 통합의 의미를 모른 체 영민한 영어교사로서의 삶에 만족하며 살았을지 모를 일이다. 배움의 나눔을 실천하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으니 그녀로선 힘든 삶이 우리로선 고마운 일이 되었다.  1부 "해 보니까 되더라고요!"에는 특수교육대상 학생들에게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지에 대해 학생들이 학급회의를 하면서 그 방안을 모색하는 내용이 있다.등교를 힘들어 하는 민주를 돕기 위해 반 친구들이 함께 등교하는 방법으로 성공하는걸 보면서 나는 울컥했다. 비록 어른들의 이기심과 그것을 인정하는 교감의 만류로 중도에 접었지만 이런 종류의 통합 방법들이 매우 구체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영어를 어려워하는 학생들에게 직접 교재를 만들어 제공하는 모습은 교사 이상의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란 걸 느끼게 했다. 쉽지 않은 걸 참 쉽게 접근하는 선생님의 교직 생활에 뜨거운 감동을 받았다.   김민진은 중학교 특수학급에 근무하는 특수교사다. 특수학교와 달리 일반학교의 특수교사는 설 자리가 없다고 한다. 부모와 원반학급의 담임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는 게 쉽지 않다 보니 그 어려움이 매우 크다고 들었다. 2부 "이게 뭐 별거라고요!"에는 김민진선생님이 특수학급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통합의 방식들이 제시되어 있다. 동아리 모임으로 모자뜨기, 텃밭가꾸기 등을 통해 특수교육 대상자들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자존감을 높이도록 지도한다. "장애이해교육"보다 "다양성 존중교육"이란 명칭으로 활동하는 선생님의 노력이 눈부시게 감사하다. 학급회의를 통한 규칙 정하기, 버츄 프로젝트(미덕 발견하기) 등의 구체적인 방법들은 가정교육으로도 훌륭한 목표로 삼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10여 년 전 중고등학교에서 ‘장애인식전환교육’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지고 강의를 하던 때가 있었다. 똘똘한 장애학생이 수업 후 한 시간 내내 ‘장애’라는 단어만 허공에 떠다니는 그런 수업 더 이상 받고 싶지 않다고 했을 때 충격 받았다. 그 후로 장애보다는 다름과 차이를 강조하며 수업 내용을 바꾸었더니 학생들의 소감문이 많이 달랐다. 이런 내용도 김민진선생님의 글 2부, ‘장애를 더 도드라지게 하는 장애이해 교육’편에 잘 담겨져 있어 반가웠다.   이 책이 교사들의 필독서로 선정되면 좋겠다. 교사 연수 때 교재로 활용하면 좋겠다. 학부모라면 이 책을 통해 자녀가 어떻게 학교생활을 하는지, 담임이나 교과 선생님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자녀를 이끌어 주면 좋을 지 생각하고 의논할 기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학교에 두 분의 선생님과 같은 교사가 많아진다면 물리적 통합이 아닌 진정한 통합의 의미가 잘 정착될 것 같은 희망이 보인다.    “안 해봐서 두렵다, 해 보지 않아서 어렵다는 생각 대신 해 보자. 해 보고 안 되면 또 다른 방법으로 해 보는 걸 멈추지 말자.” 이 책이 말하는 요지다.현장에서 학생들과 오늘도 머리 맞대고 좋은 통합 환경을 만들고자 애쓰는 두 분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 

    게시일2022-06-20

  •  “어머니, 하진씨 오늘 결석하나요? 평소 9시 40분 전후에 들어오는데 아직 안 왔어요.”   10시 1분을 지나고 있었다. 나는 아침 일찍 여의도에 일이 있어 나왔고 남편이 데려다 주기로 했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심각한줄 모르는 남편이 전화를 받으며 장난스럽게 ‘왜 그려?’하는 말투에 아들이 센터에 갔다는 확신이 섰다.   “하진이 몇 시에 데려다 줬어? 아직 안 왔다고 연락 왔는데...”   “9시 반에 1층에 내려주고 건물 안으로 드가는 거 보고 나는 천안 가는 길인데?”   선생님께 전화해서 1층 로비에 가봐 달랬더니 바로 전화가 왔다.   “어머니, 1층에 계셔서 같이 올라왔어요. 밖으로 안 나가서 정말 다행이에요.”  아들은 30여분 동안 왔다 갔다 하면서 뛰기도 하고 에어컨 아래서 바람 쐬며 서 있기도 하고 그랬단다.    가족대화방에서 오늘의 작은 해프닝에 대해 말했다. 나는 1층 안내대에 직원이 있는데 오랜 시간 혼자 있는 청년에게 왜 말 한마디 안 붙였을까 그것이 아쉽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눈에 멀쩡해 보였나 보지 뭐. 소리라도 지르고 뭔가 이상한 행동 했으면 누구라도 도움 주려고 하지 않았을까? 누굴 기다리나 보다 하고 그냥 보고만 있었나 보네. 우리 동생 멋지다!”  평소 동생 행동에 대해 냉정한 딸의 반응에 나는 기분이 좋았다. 추측컨대 혼자 로비에서 뛰어다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기가 어디? 계단이 안보이네’ 하면서 한쪽 귀퉁이에 서서 누군가 오길 기다린 것 같다.양쪽 출입문은 보이지만 계단실은 조금 안쪽으로 들어간 구조라 방향 감각을 잃고 멍한 상태이지 않았을까 싶다.    3년 전 다른 센터에 다닐 때 외부로 나가서 식겁한 적이 있었다. 건물 입구에 내려 주고 차를 돌려 집으로 가는 도중 신호 대기 중이었는데 반대편 도로변에서 낯익은 청년의 실루엣이 보였다. 두 팔을 들고 흔들며 제자리 뛰기를 열심히 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작은 눈이 저절로 커지며 다시 보니 아들이었다. 조금 더 내려가 유턴을 하고 올라 올 때까지 자신의 행동에 심취해 엄마 차가 옆에 서도 아랑 곳 하지 않았다. 창문을 내려서 아들을 불렀다. 화들짝 놀라며 ‘아니, 엄마 가는 걸 분명히 봤는데!’하는 표정이 내가 아들을 발견했을 때와 완전 똑같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더 있다 갈 거야? 그럼 지각인데 그만 들어가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들은 센터를 향해 줄행랑치기 시작했다. 내가 보지 못했다면 아들은 어디까지 갔을까 생각하니 아찔했다.그 후로도 몇 번 건물 주위를 배회하다가 내부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지만 가슴 쓸어내리는 일까지는 가지 않았다.   코로나로 센터를 띄엄띄엄 다니다가 올해 주5일 다니게 되었다. 3년여 동안 아들은 한 번도 주저하지 않고 지하 주차장에 내려 바로 계단으로 4층까지 혼자 올라갔다. 딱 한 번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내려 서성대는 걸 지나던 선생님이 4층으로 보내 준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 해프닝은 근 4년 만에 생긴 일이었다. 평소 엄마가 내려 주는 곳은 지하 주차장인데 아빠가 내려 준 1층 로비는 볼 것이 많았나 보다. 카페, 테라스, 휴게실, 물품판매대 등 볼거리가 제법 많으니 아들은 일탈을 꿈꿨던 걸까? 30여분 동안 아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신났을까?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디로 갈지 몰라 불안했을까?많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지만 아들 마음을 정확하게 읽을 순 없다. 이런저런 추측을 하다 보니 건물 밖으로 나기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몇 해 전 아들과 잠실 전철역에서 지나가는 할머니 짐을 들어 주느라 앞서가던 아들을 놓쳐 2시간 넘게 헤맨 일이 떠올랐다. 지하상가에서 아들 혼자 서성대니까 상점 주인이 관리실에 연락하여 경비아저씨가 노숙자인 줄 알고 외부로 쫓아냈던 일, 아들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밖으로 나가 어두운 잠실 사거리를 헤매다 경찰들이 발견했던 그 악몽 같았던 날. 나중에 아들이 남들 눈에 노숙인과 장애인 중 어떻게 보인 게 더 나은 걸까 농담하며 웃었던 그 날.    한강 둔치에서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몸을 흔들다가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데 그걸 모르고 엉뚱한 곳에서 찾아 헤맸던 일도 있었다. 크고 작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이제는 아들과의 숨바꼭질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멀리 가지 않고 주위에 머물러 준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감사함마저 들었다. 아들도 밖으로 나가봤자 엄마 만나는 일이 길어만 지고 불안한 마음이 생겼을 지도 모를 일이다.   누구의 간섭과 통제 없이 혼자 세상을 돌아본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아들이 겁먹지 않고 알아 가면 좋겠다. 함께 살면서 따로 사는 즐거움이 있는 평범한 일상이 아들의 미래이길 바란다.    아들아, 네가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아도 돼! 

    게시일2022-05-31

  • 망언으로 시작한 봄   2022년 4월 투쟁은 아마도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다. 코로나19의 끄트머리에, 지난 정권의 끄트머리에, 새 정권을 기대 없이 바라봐야 하는 출발지에서, 장애투쟁을 시민을 볼모로 한 비문명적 행동이라고 하는, 장애해방투쟁사에 길이 남을 망언을 뱉은 무모하고 무례한 젊은 당대표의 이름을 함께 기억하면서 말이다.   해마다 4월은, 세상을 향한 장애인차별철폐 투쟁의 외침과 드러내기의 한바탕 운동판이 펼쳐지는 때였으나, 올해는 유난스레 혼탁하고 힘겹다. 우리 전국장애인부모연대는 4월19일 거룩한 투쟁의 날에 발달장애인 가족과 당사자, 활동가, 지원인 등 556명이 삭발을 하고 투쟁결의대회를 했다.   삭발이 별거냐, 머리카락이야 곧 자란다고 하지만 그건 삭발의 부담을 떨치려고 애써 하는 말이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민머리가 되는 것은 몇 달 동안의 낯선 시선을 감당해야 하는 편치 않은 일이다. 더구나 엄마들의 삭발은 더 큰 용기와 결기가 필요한 일이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공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색함은 물론이고, 장애를 가진 아이에게도 그렇지 않은 아이에게도 엄마의 삭발이 주는 마음의 부담은 상당히 무겁다. 소리로 들리지 않아도 수시로 도처에서 주먹 쥐고 ‘투쟁!’을 외치는 셈이다. 때문에 누군가 삭발을 했다면, 더구나 엄마들이 삭발을 했다면 그 마음에 대해 누구나 예의를 갖춰서 대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다른 소리가 섞여들려 왔다. 물론 예전에도 못마땅해 하는 소리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보수정권 탄생에 따른 우려의 마음이 있다 보니 더욱 예민하게 들렸을 수 있다. 하지만 어쨌든 뭔가 기세등등한 다른 소리가 크게 들린 것은 사실이다. 556명이 삭발을 하고 인수위 근처로 행진을 시작했을 때 횡단보도를 건너는 우리의 행렬을 향해 멈춰서있던 차량 운전자들이 경적을 울려댔다. 누군가를 향해 응원과 지지의 뜻으로 경적을 울려주는 몇몇 남의 나라 매너가 그새 수입됐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그렇다면 그건 일종의 짜증, 욕설이었을 것이다. 예전에도 어쩌다 경적을 울리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그저 한 둘, 성질 급한(이라고 쓰고 ‘성질 더러운’이라고 읽는다) 이에 그쳤었는데, 이번에는 마치 빵빠레를 울리듯이 여럿이 신경질적으로 눌러댔다. “당신들 사정은 됐고! 왜 무고한 시민들의 교통을 방해하는가!” 이런 소리였을 게다.   556명의 삭발식 사진이 실린 언론보도에 달린 댓글도 마찬가지. 응원하는 글도 있었지만, 대충 흘깃 봐도 대놓고 하는 욕설이 주르르 달렸다. 하기야 댓글이 무슨 의미가 있어 억장 무너지자고 일부러 찾아가며 볼 일인가. 다만 이번에는 무슨 말들을 하나 어디 좀 보자 하는 심정으로 훑어봤는데, 역시나 흡입과 배설강이 한몸인 동물들의 토출을 보는 듯 했다. 삭발한다고 다 들어주나, 왜 국가가 발달장애인들을 24시간 책임져야 하나, 당신들만 힘들게 사나, 국가에 도움이 안 되면 조용히 입 닫고 살아라, 발달장애가 벼슬이냐, 24시간 놀고먹겠단다......   신음을 한다는 건 들어달라는 뜻이다. 사람뿐 아니라 세상 모든 숨 붙은 생명은 다 그렇다. 소리를 못 내는 생명은 몸부림을 쳐서 신음을 한다. 누군가 들어주지 않는다면 생명은 신음을 할 필요가 없다. 사람이 못 듣는 신음은, 누군가는 들어야겠기에 신이 듣고 관세음보살이 듣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고통의 신음을 듣는 것은 전지구적 생명의 기본 매너다. 남이 신음하는데, 그걸 들어주지는 못할망정 입으로 배설하는 놀이를 신이 나서 할 일인가.   그러던 차에 여의도 이룸센터 앞에 차린 전장연의 농성장 컨테이너 앞을 다른 컨테이너 두 개가 가로막고 설치되는 일이 있었다. 한 개는 한국교통장애인협회 이름으로 ‘장애인인식개선에 먹칠을 한 전장연은 과연 누구를 위한 단체인가. 각성하라.’라는 현수막이 걸렸고, 또다른 한 개는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이름으로 ‘계영배 하우스’(차면 넘치는 잔이라는 한자 작명의 치졸 유치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고-.)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장애인단체가 스스로 나서서 장애투쟁을 폄훼하고 가로막는 참담한 장면이었다. 이렇게 염치없는 훼방은, 세월호 때 피자치킨잔치 이후로 처음 봤다.   이준석 효과   전국장애인부모연대는 556명 삭발식 직후 대통령직 인수위 근처 지하철 경복궁역 지하에 천막을 치고 윤종술대표와 수도권 지부장 등 4인이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인수위의 면담과, 발달장애인 정책을 국정과제에 넣을 것을 요구하면서 매일 오전에 결의대회를 함께하고 있다.(이 글을 쓰는 5월1일까지도 단식은 열흘 넘게 계속되고 있다.) 지하철 역사에 자리잡은 농성장을 지나는 사람들의 표정은 대체로 무심하다. 더러는 주장이 적힌 피켓을 슬쩍 쳐다보며 지나가기도 한다. 그리고 뭐라 중얼거리면서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 않거나, 대놓고 욕을 하며 지나는 이들 또한 있다. 그런데 그들의 욕지거리에서 뭔가 당당함이 읽힐 때가 많다.   이걸 이준석 효과라고 한다면 왜 그러냐고, 정확한 근거자료, 통계가 있냐고, 따져 물을지도 모르겠다만, 나는 상당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는 남에게 불편을 주는 투쟁에 대해서는 불평을 해도, 욕을 해도 괜찮으니 마음껏 욕하시라, 라고 분명히 부추겼으니까. 그리고 대체로 투쟁은 불편함을 불편함으로 호소하는 것이니, 결국 그는 모든 투쟁에 대해 욕해도 된다는 신호를 준 셈이다.   예전에는 불평하기는 해도 대체로는 참아주는 게 매너인 줄은 알고들 있었다. 그런데 한창 젊은 사람이, 그것도 외국의 유수한 대학을 나왔다는 사람이 대놓고 비문명적 방식이라고 지적질을 해대니, 이제는 마음놓고 염치를 차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아니, 아예 장애인, 사회적 약자의 고달픈 투쟁을 참아주는 예의염치 따위는 애초부터 없는 거다.   그걸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 즉 협조적인 편과 비협조적인 편을 갈라서 협조적인 편으로 하여금 비협조적인 편을 공격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고약한 방식의 길들이기로 투쟁성을 왜곡시키고, 사회적 공감을 약화시키는 야비한 공작. 가장 저열한 공작을, 정당 대표가 저지르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가 대표로 있는 당의 구성원들은 그것을 굳이 막지 않는다. 몰염치는 승리한 자들의 배짱인가보다.   무례하라고 선동한 죄, 2022년 봄, 그들의 죄가 작지 않다. 우리는 무례한 그들과 우뚝하게 맞서 나갈 터이다. 우리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좋은 사람들이고 싶으니.   2022. 5. 1. 

    게시일2022-05-06

  • 따로 사는 딸이 집에 와서 네 식구가 외식을 했다. 남한산성 입구에 새로 생긴 넓은 식당은 맨 안쪽 테이블 하나에만 손님이 있었다. 조용하니까 우린 좋지만 주인으로선 참 안타까운 일이라며 자릴 잡고 앉았다. 갈비를 구워 젓가락을 서로 부딪치며 맛있게 먹고 냉면을 나눠 먹으며 지금이 코로나 시대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이상하다, 목이 칼칼하고 아프네...” 남편의 한 마디에 긴장했다. ‘혹시...’하는 눈빛이 재빠르게 오고갔다. 한기가 든다며 무릎담요를 뒤집어쓰는 남편, 다행히 열은 없었다. 본인 집으로 간 딸에게 연락했더니 역시나 목이 좀 아프다고 했다. 다들 자가키트검사를 했지만 빨간 줄은 모두 하나였다. 하지만 모두의 몸은 양성임을 말하고 있었다.다음 날 남편은 신속항원검사를 받으러 동네 병원으로 갔는데 역시나 양성이 나왔다. 선별진료서에서 PCR까지 한 결과 확진자가 되었다. 나도 증세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신속항원검사를 받았지만 음성이었다. 음성이면 뭐하나, 목이 아프고 잔기침이 나는 등 증상이 딱 오미크론인데...   나도 확진자가 되었다. 딸도 확진자로 일주일간 휴가를 받았다. 아픈 딸아이가 혼자 뭐라도 챙겨 먹을까 생각할 겨를 없이 자폐성장애인 아들이 걱정되었다. 외부에 나가 검사 받기를 거부하여 자가키트로 할 수밖에 없는데 음성으로 나오고 별다른 증상도 없어 보이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엄마 아빠가 집안에서 마스크를 하고 장갑을 끼고는 밥도 혼자 먹게 하는 등 여태껏 보지 못했던 낯선 상황들로 아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의아한 표정이었다. 흔들리는 눈빛과 얼어붙은 손동작은 불안에 떨고 있는 작은 새였다.  ‘제발, 너는 감염되지 말아라...’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나의 간절한 기도는 헛되지 않았다. 각자 다르게 나타나는 감염 증상으로 나는 계속 잠을 잤고 남편은 목을 컥컥거리며 힘들어 했다. 그런 속에서 아들은 점잖게 자기 방에서 책을 보거나 푸쉬팝(누르면 뽁뽁 소리나는 장난감)에 열중했다. 나와 다른 가족이 아픈 건 뒷전이고 증상 없는 아들에게 집중하며 혹시 불편해하는 기색이 없는지 살폈다. 생각해 보니 처음 증상이 있던 그 즈음, 잠을 많이 자고 먹는 것이 시원찮은 이삼일동안 아들은 약하게 감염 증세를 보였던 것 같다. 어디가 아프다고 표현을 못하니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 아들은 크게 나타나는 증상 없이 잘 넘기고 있음을 알아차리니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자신의 상황을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건 얼마나 애처롭고 그것을 바라보는 부모 마음은 많이 아프다.   목이 잠겨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딸과 통화할 때는 당장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하지만 자가격리 중에 나갈 수도 없거니와 쏟아지는 잠에 취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저 문자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일주일을 보냈다. 잘 먹어야 된다고들 하지만 몸이 아프니 음식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배달해서 먹는 것도 성에 차지 않았다.  어떻게 살았는지 일주일이 지나갔다. 힘들어 하던 딸은 출근했다가 기침이 너무 심해서 다시 이틀을 더 쉬었다. 남편 역시 목이 아프긴 해도 거래처와 통화하며 생업에 매진했다. 아들도 평생교육센터에 나가고 없으니 고요한 집이 썰렁하기까지 했다. 창문을 열자마자 건물 벽에 부딪쳐 갈 곳 잃은 봄바람이 무리지어 들어왔다. 아직은 몸이 시원찮아 자꾸 눕고 싶은 마음이지만 사르르 내 몸을 감싸는 바람의 부드러움이 엄마 숨결 같았다.    남들은 지겹다고 말하던 집 안에서의 일주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정신없이 잠에 빠져 들어 시간을 의식하지 못해서 그런 탓도 있지만 아들이 점잖게 잘 있어준 덕분에 힘들지 않았다. 아들의 성장이 뿌듯하게 느껴졌다.  살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일상들을 불평하고 거부하는 것보다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내 삶이 달라진다는 당연한 이치를 확인한 시간이었다.인구 3명 중 1명이 감염된 세상이다. 3차까지 접종하면 역병을 밀어내는 힘이 생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그나마 더 힘들게 감염 상태를 보낸 게 아니었음을 위안삼아야 하는 것인가. 1차 감염은 그런대로 넘길 수 있지만 2차 감염은 거의 죽음이라는 말을 들을 때 마다 표현언어 없는 아들이 걱정이다.    마스크를 제외하고 곧 일상이 다 풀린다고 하지만 불안감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웅크리고만 있을 순 없으니 조금 더 기운을 차려야겠다.  삼시 세 끼 밥하는 하루가 자유로운 외식으로 여유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요식업자와 자영업자들의 삶이 고통스럽지 않은 세상, 봄꽃 보는 즐거움과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평화로운 세상을 기대하며 오늘도 무사하길 간절히 바란다. 

    게시일2022-04-26

  • 즐거운 투쟁이라고 쓰고 보니 민망하다. 목숨을 걸고 벼랑끝에서 처절한 심정으로 삶의 투쟁을 하고 있는 숱한 투사들이 있으니.하지만 때론 즐거운 투쟁의 시간도 있다. 내 기억에 몇 개의 투쟁이 그러했다. 해방구가 열리고, 희망과 열망에 달떠서 노래하고 춤추고 외치고 어깨걸이를 하던 투쟁들이 있었다.   투쟁의 추억   2016년 서울시청 후문을 점거하고 깔았던 서울장애인부모연대의 42일 투쟁도 그러했다. 날마다 몰려드는 ‘동지’들로 농성장은 늘 북적였다. 음식이 차고 넘쳐서 함께 온 아이들은 농성비만자가 되어갔다. 새벽 청소차 소리를 들으며 선잠에서 깨어나 시청앞 광장에서 이슬 젖은 잔디를 밟으며 빌딩 사이로 떠오르는 일출을 보았다. 42일 내내 지나온 얘기, 사는 얘기, 살아갈 얘기, 남기고 죽을 얘기를 했다. 우리끼리 있는 편안함에 아이들도 즐겁고 엄마들도 즐거웠다. 크게 싸우고 오래 버티고 잘 이겨냈고 크게 성취했다. 2018년 4월 수천 명이 모여 흰 상복을 입고 삼보일배 행진을 할 때도 즐거웠다. 그에 앞서 209명이 삭발식을 했으니, 까까머리에 흰 상복 차림이 잘 어울렸다. 잘 봐, 이게 장애부모 투쟁이야~! 요새 식으로 하자면, 이런 거였다. 못난 건 세상이고, 우리는 그것에 맞서고 넘어서려는 사람들이니 슬퍼하거나 주눅들 일이 아니었다. 올해는 다큐영화 ‘학교 가는 길’이 즐거운 문화투쟁을 해 준 셈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진짜 우리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깊은 공감을 받았다. 구체적인 우리 이야기를 많은 사람이 아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일이다. 바야흐로 문화투쟁이 세상을 설득하는 썩 훌륭한 방식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즐겁고 흥겨운 일이라는 것도.   해마다 11월말이면 한바탕 난리를 치르는 내년 국가 예산 작업이 있다. 부모연대도 우리 예산을 얼마라도 더 올리려고 노심초사한다. 우리의 간절한 요구 요청은 무시당하거나 그 중 한두 개 만이 제한적으로 반영될 뿐이지만, 우리는 매번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또는 의사당 본관 앞을 가로막고 기습집회를 한다. 제일 두꺼운 바지와 두툼한 양말과 겹쳐입은 패딩점퍼로 팽귄이 된 채로 양 손에 발열팩을 쥐고 몸뚱이를 맞대로 앉아 “우리는 죽지 않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대체 국가는 어디에 있습니까!”(다큐 ‘학교 가는 길’에 보면 김남연 당시 서울지부장의 이 외침이 나온다.)라고 목놓아 외치던 순간들이 있었다. 국회의사당 높은 계단에서 바라본 여의도 쪽 도심의 반짝이는 밤 풍경은 마치 먼 세상 속 그림인 양 몹시 근사했고, 그래서 더 서러웠다. 그 서러운 가운데서도 우리는 너른 잔디광장 너머 빌딩숲을 배경으로 손팻말을 들고 깔깔거리며 기념사진들을 찍었다. 미세먼지와 황사와 겨울날의 차가운 수증기가 섞여서 뿌연 공기 속에 도시의 불빛들이 반딧불처럼 반짝이고, 그 앞에서는 그처럼 당당할 수 없는 포즈의 투사들이 우뚝우뚝 서서 인생샷을 찍었다. 올해는 대표단이 단식투쟁을 벌였다. 여의도 이룸센터 앞 컨테이너에 자리잡고 앉아 붙박이로 단식을 한 분들이 셋이고, 지역에서 단식을 이어간 분들이 있었다. 일박이일씩 동조단식에 참여한 이도 여럿이다. 국회의원들이 찾아와 미안해하며 최선을 다하겠노라 약속했다. 의지는 비장하나 투쟁은 따뜻한 법이라, 집 떠나면 즐거운 역마살이 낀 것도 아닐텐데, 컨테이너에 가 앉아있으면 즐거웠다. 다만 엄마아빠가 들어오지 않은 집 아들 딸들이 하루에도 여러번 전화를 걸어와 안부를 물었다. 엄마 언제 오냐고, 아빠 뭐하냐는 전화가 오고 또왔다. “좀 있어야 해”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는 아빠와 엄마들은, 오늘 뭐했니, 뭐 먹었니를 물으며 함께하지 않은 하루의 안부를 챙겼다. 투쟁은 따뜻하고 애틋하다.   여기서는 하루에도 여러 번 계란 한 판씩을 먹었다. 무슨 소린고 하니, 죽염 한 두 알을 입속에 털어넣고 녹여 먹으면 꼭 삶은 계란 냄새가 나서 그리 부른 것이다. 밤에 화장실 갈 데도 마땅찮다고 저녁부터는 물도 마시지 않고 버티는 독한 단식을 이어가는 동안 컨테이너는 여지없이 투쟁해방구가 되었다. 이불을 펴서 발을 덮고 기대 앉은 모습들을 보면, 단칸방에 모여앉아 시답잖은 놀이를 하거나 군입거리를 먹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뜨끈한 방구들에 앉아 서로의 발을 이리저리 밀쳐내며 놀던 저녁시간. 그러다가는 꼭 묻어놓은 아버지 밥그릇을 발로 건드려 엎어버렸고, 그때면 엄마가 들어와 등짝을 후려쳤다. 안타까운 건 엄마 일이고, 형제들은 키득거렸다.(물론 키득거린다고 또 한 대 얻어맞기 일쑤였다) 이불에 다리를 묻고 앉아 모두 비슷한 풍경으로 지나왔던 어린 시절 얘기를 하며 있자니, 진짜로 어른이 되어 뿔뿔이 흩어졌던 형제사촌들이 모여앉은 기분이 들었다. 군고구마나 귤 대신 소금 몇 알이라는 게 다르지만.   투쟁풍경   끼니를 해먹거나 먹으러 가는 일이 없으니 시간이 참 여유롭게 흘러갔다.(이래서 우리가 가끔 실없이 꿈꾸는 건가 보다, 한 알 삼키면 한 끼니가 때워지는 알약을.) 해도해도 끝이 없는 아이 키우던 얘기, 지금 살아가는 얘기, 앞으로 살아갈 얘기, 잘 떠나갈 얘기를 하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잠에 들었다. 내가 굳이 좁은 컨테이너에 끼어 잔 날은 밤새 비가 왔다. 비바람에 전원콘센트가 빠져 잠깐 바닥이 냉골이 되는 바람에 선잠에서 깨었다. 귀를 기울이니 금속이며, 천막이며, 플라스틱이며, 아스팔트며, 나무들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제각기 다른 질감을 갖고 들려왔다. 지구 온난화가 가속되어 빙하가 일시에 다 녹으면 이 컨테이너는 도시의 지붕 위를 둥둥 떠다니겠지,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을 보장하라는 우리의 구호는 세상 위에 둥둥 떠다닐 게다. 누군가는 그것을 보며 희망을 얻고 누군가는 그것을 보며 또 한 층의 계단을 올라설 게다, 이런 유치한 상상도 했다.(새벽엔 감성이 정돈되지 않아 매우 질퍽거리는 시간이기 십상이다.)   매일 집회마다 회원들이 많이 나왔다. 소리쳐 구호를 외치고, 팔뚝을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사진을 찍으며 웃었다. 투쟁은 기운이 펄펄 나는 일이다. 내가 내 아이를 위해 세상을 열심히 두드리고 바꿔나가고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거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 일인가. 내 아이에게 좋은 엄마 아빠가 되고, 세상에 좋은 사람이 되는 일이다, 그것도 여럿이서.   파란 염색과 안녕   아이가 사는 것을 본다. 내 아이가 스스로 많은 부분에서 납득되지 않는 세상을 납득해 보려고 애를 써가며 살고 있는 것을 본다. 불안하고 이상하고 때론 아프고 괴롭지만, 그것을 누가 낱낱이 잘 이해해주는 것 같지도 않고 심지어 가족도 건성으로 이해하는 척 할 때가 많은 걸 느끼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많은 이가 그렇겠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도 삶은 투쟁이다. 어미가 되어서 투쟁의 동지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일찍이 전우익 선생이 ‘혼자서만 잘 살면 무슨 재민겨’라고 일갈하셨다. 혼자서만 잘 사는 걸 재밌다 여기면 못 쓴다는 말씀이지만, 지금 세상은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민겨’라고 하는 인간과, ‘혼자서만 잘 사니 너무 재밌는겨’라고 하는 인간으로 나뉘어 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이번 생에는 우리 아이와 투쟁의 동지로 살아가기로 한 거다! 아들이 얼마 전에 머리카락을 파랗게 물들이고 싶다 했다. 외모에 전혀 무덤덤한 아들이 오직 하나 관심 있는 게 바로 머리인 것 같다. 파마를 하자거나 길러서 꽁지머리를 하자거나 해도 쉽게 따른다. 해보니 반응이 좋아서일 수도 있다. 남들이 멋있다 하니 내심 흡족한가보다. 이번에는 스스로 먼저 파란 염색하고 싶다 했다. 얼씨구나, 무지개색인들 어떠랴, 처음으로 뭔가 외모를 만들어보겠다 해왔으니 얼마든지 좋은 일이다. 파란 색 매니아인 아들은 마침 옷도 파란색이 많으니 글자 그대로 온통 새파란 청년이 되는 거다! 아들의 거룩한 뜻에 호응해서 나도 함께 파란물을 들였다. 좀 튀는 일도 별난 일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재미있는 상상을 시도하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아들도 나도 탈색까지 감행하고 파란 물을 들였다. 아들은 본인이 원하던 깊은 파란색보다는 조금 더 어둡게 나왔지만(그래서 한달 있다 한번 더 파랗게 하기로 했지만), 나는 엄청 체신없는 청보라 머리가 되었다. 몰론 알록달록 머리를 해보고 싶은 내 욕망이 기꺼이 춤추며 얹혀 따라간 거라 이미 체신머리 같은 건 눈 질끈 감았지만, 앞으로 당분간은 거울 앞에서도 눈을 질끈 감아야 한다.   좋은 일은 감행하라. 즐겁고도 좋은 일은 감행하라. 이번 생에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사는 우리 아이들이 즐겁고도 좋은 일을 마음껏 감행하고 살게 될 날을 만들어간다. 그게 우리의 삶이다. 평등세상, 그 새파랗게 활기차고 즐거운 세상을 꿈꾼다.   한 해를 마감하며, 못다 한 말, 못다 한 일들이 끝없는 모래사막처럼 펼쳐져 있지만, 투쟁의 새 날을 맞기를 희망하며 인사를 고한다. 그리고 이만총총.김종옥전국장애인부모연대 문화예술특별위원장 

    게시일2021-12-16

  • “아 시끄러워! 조용히 좀 해달라고 할까?” 여행 중 늦은 아침을 먹으려고 식당엘 갔다. 주방에서 큰 그릇들 부딪치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한 두 번은 실수려니 했는데 서너 번 계속 이어지니 짜증이 났다.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맛집이라는 별 다섯 개 평을 보고 갔는데 나는 별 한 개도 주고 싶지 않았다. 구겨진 인상의 나를 보고 남편은 그냥 웃었다. 결국 말은 하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아들과 눈이 마주치면서 그동안 잊고 살았던 우리 가족의 외식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아들이 점잖게 식당에서 밥 먹는 모습 보인지가.20대 초반까지도 아들은 식당에 들어서면 주문한 음식 기다리는 시간을 견디지 못했다. 더 어렸을 때는 수저를 식탁에 대고 두드리며 소리까지 심하게 질렀다. 집에서야 그래도 모른 척 하면 되었지만 밖에서는 남의 이목이 신경 쓰여 난감했다. 한동안 외식을 중단하고 집밥만 먹었다. 하지만 살면서 외식을 안 할 수는 없는 일, 자꾸 부딪혀 보기로 했다. 붐비는 시간대를 피하고 조금 이르거나 늦은 시간에 가급적 빨리 나오는 음식을 주문했다. 기다리는 동안 난리치면 바로 데리고 나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더 심한 발버둥으로 밥을 먹지 않고는 절대 나가지 않을 거라는 강한 고집을 부렸다. 그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남편이 먼저 식당에 들어가서 음식이 나올 때쯤 우리를 불렀다. 그러면서 대기 시간을 조금씩 늘려 나갔다. 몇 년에 걸쳐 아들은 기다리는 일에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했다.   아들이 난감한 행동을 할 때 우리 가족은 아들보다 우리를 빤히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이 더 불편했다. 애써 무시하려 해도 식당 안의 분위기는 우리에게 집중되어 있는 듯 느껴져 힘들었다. 오로지 밥 잘 먹고 이 공간을 나가는 것이 목표였기에 일절 대화도 없이 다급하게 먹기만 했다. 음식 나온 지 15분 만에 다 먹고는 빨리 먹는 대회 나가면 일등 하겠다며 웃는 여유도 생겼다. 그런 과정을 겪을 때는 다른 것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아들의 행동이 점점 나아지면서 식사 시간은 늘어났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는 즐거운 외식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차츰 주위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편안해야 세상이 보이는 당연함을 뒤늦게 알아 차렸다. 처음에는 좋은 것만 보이더니 점점 불편한 모습도 보였다.담소 나누며 식사를 즐기는 3대 가족의 행복한 모습은 보는 나도 좋았다. 아이가 주위를 산만하게 뛰어다녀도 무심한 보호자들은 아랑곳하지 않는 것도 보였다. 목소리가 너무 커서 알고 싶지 않은 그들의 가족사가 내 귀에 머물기도 했다. 인상을 쓰며 ‘저 애 좀 못 뛰게 잡지 않고 부모는 뭐하냐?’라든가 ‘저 사람은 좀 살살 말하면 안되나?’라는 말을 언짢게 했다. 물론 그들이 들리지 않게 했지만 내 기분도 좋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말했다. “우리 아들 참 점잖아졌제, 누구 닮아서 이리 과묵하노, 아부지 닮았제?” 남편의 너스레를 귓등으로 흘렸다.   살다보면 내가 고쳐야 할 부분이 있고 남이 고쳐야 할 문제가 분명히 있다. 자폐성장애 아들과 살다보니 남들이 무조건 이해해 주길 바랐던 적이 있었다. 이해와 배려를 강요하며 내 삶의 힘든 점만을 부각시키진 않았나 생각한다. 변할 것 같지 않던 아들이 세상에 나와 아직은 큰 무리 없이 살게 되니 야외 활동이 자유로워졌다. 지난 25년의 세월보다 올해 1년 사이, 아들은 더 많은 변화를 보여주었다.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백신 접종을 2차까지 완료했다. 어딜 가든 시선 모으던 행동들이 많이 줄어서 가족여행 횟수도 올해 유난히 많았다. 아들 때문에 속상했던 지난날과 달리 요즘은 아들 덕분에 웃는 일이 많아졌다. 암울했던 내 삶에 이런 날이 올 줄 예상 못했다.살아갈수록 식당이나 거리에서 아들의 시끄러운 행동에 주위의 눈총이 따가웠던 일들이 기억에서 멀어져 간다. 우리를 지켜봐 주었던 사람들이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이제는 내가 세상을 따뜻하게 감싸야 할 차례다.   우리만 있던 식당에서 주방의 소음으로 인상 쓰고 있을 때 그냥 웃고 있던 남편의 표정에서 나는 보았다. 우리 가족 외식 때 힘들었던 과거를.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나를 발견한 셈이었다. 겸연쩍어 하는 나를 향해 남편이 말했다. “손님이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식당에 불만 있으면 다음에 안 오면 그만이지, 굳이 인상 쓰면서 그럴 필요는 없는기라.”말은 그래놓고 결제를 마친 남편은 주인에게 말했다.“음식은 맛있고 좋았는데 주방 쪽이 소란해서 조금 불편했습니다.” 주인은 화들짝 놀라면서 미안하다며 다음에 꼭 다시 와달라는 말을 반복했다. 시끄럽다는 말로 조용해졌으면 서로 언짢을 수 있었지만 상황이 끝나고 조용히 얘기한 결과 아무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사실 그 날, 전복미역국은 엄청 맛있었다.   

    게시일2021-12-10

  • 화장실 바닥을 수놓은 핏자국에 깜짝 놀랐다. 휴지로 엉성하게 닦은 걸 보니 누구 소행인지 짐작이 갔다. 대체 어디서 난건지 왜 났는지 짐작이 안 가 얼른 아들 방으로 달려갔다. 이불도 피 칠갑이 되어 있었다. 입술에서는 연신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아, 또 시작이구나...”   발달장애 아들은 피부 어딘가가 가려우면 딱지가 앉을 때까지 계속 긁는다. 환절기마다 거치는 통과의례다. 딱지가 생기면 그걸 못 참고 긁어서 떼어낸다. 그러면 또 피가 나는 상황이 반복된다. 심할 때는 학교도 결석했고 특수교육 치료실의 수업도 다 빼먹었다. 약이라도 발라 주면 몸에 묻은 이질감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닦아낸다. 상처 부위를 긁거나 닦는 사이 피부가 벗겨져 피가 날 수밖에 없다. 피범벅 된 옷소매는 두꺼워지고 뻣뻣해진다. 그 어떤 처치가 허락되지 않았다. 자신의 몸에 뭔가 묻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자폐적 성향이 경구용 약은 가능해도 연고나 주사는 강하게 거부했다. 손 댈 수 없는 상황으로 피투성이 아들을 일주일 이상 바라보며 십 수 년을 살았다. 그저 자연 치유만을 바랄 뿐 속수무책이었다. 다른 것은 다 봐주고 모른 척 외면할 수 있었지만 피를 보는 것만은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몇 년 동안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기더니 이번에는 입 주위를 긁어 피부가 약한 입술에서 계속 피가 났다. 예전처럼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요즘 조금씩 나아지는 아들의 변화를 볼 때 적극적으로 뭔가를 시도하면 들어 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계속 흘러내리는 걸 놔두면 그걸 닦느라 밤새 잠도 못 잘 것 같았다. 차분하게 설명을 했다.“너 계속 입술 비비고 닦으면 피가 안 멈춰. 내가 수건으로 꼭 눌러 줄게. 우리 하나에서 열까지 열 번 세어 보자. 그러면 피가 멈출거야.” 아들은 눈을 껌벅이며 자신의 입술을 누르고 있는 커다란 수건을 바라보았다. 수건을 밀어내지 않을까 긴장했다. 본인도 자꾸 흐르는 피가 겁이 났는지 밀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열까지 세고 수건을 살짝 뗐다가 깨끗한 부분을 다시 입술에 갖다 댔다. 한 번 더 하자며 백 번까지 두 번을 셌다. 멈출 듯하면서도 계속 흐르는 핏방울이 야속했다. “어쩌지? 자꾸 나네, 숫자 세는 거 좀 더 해보자.”그렇게 백을 몇 번이나 세는 동안 아들은 얌전히 기다려 주었다.한 시간 반 동안 그러고 나니 피는 멎었고 눈에 새록새록 잠이 담긴 걸 보고 방을 나왔다. 내일 아침 어떤 몰골로 나올지 염려되었지만 입술을 건들지 않고 그냥 잘 자기만을 바랐다. 다음 날 아침, 말간 얼굴로 방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이게 기적이란 생각에 울컥했다. 피가 멎고 상처도 더 이상 커지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과거엔 작은 상처가 번져 일주일 이상 얼굴 전체가 벌건 걸 보면서 가슴이 아렸다. 단 하루 만에 말끔해 지다니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피부 빛이 좀 거무스름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돌아오니 잘 아문 상처가 정말 다행이었다.   올해 아들에게 제법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게 늘었다. 말로 소통하면 좋겠지만 아들은 여전히 말을 하지 않는다. 못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말을 하려고 입모양을 만드는 걸 보면 하고 싶은데 잘 안 되는 것 같다. 의사소통 수단으로 말이 일반적이긴 하지만 말을 못하니 온 몸으로 소통하려고 애쓴다. 그것을 보고 잘 알아차리려고 나도 노력한다. 가급적 스스로 뭔가를 요구하려고 기회를 많이 주고 있다. 아들은 본인이 원하는 걸 표현하기보다 눈에 띄면 보거나 만지고 먹었다. 하고 싶지 않은 건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랬던 아들이 어느 순간부터 뭔가 하려는 게 보였다. 지시나 부탁에 의해 겨우 움직이더니 내가 혼잣말 하는 것도 잘 알아들었다. ‘어두운데 거실 불 좀 켜야겠다’라든지 ‘소파에 있는 책 정리 좀 하지’등 작은 소리로 웅얼거려도 신기할 정도로 잘 알아듣고 반응했다. 뭐든 하길 바라고 채근했던 그간의 내 욕심을 내려놓으니 아들은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스스로 생각하고 망설이기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소한 것을 해 낼 때마다 예전처럼 요란스럽게 칭찬하지 않았다. 가볍게 칭찬해도 잘 알아차리고 표정이 밝았다.   “휴지를 조금만 썼네, 잘했다.”요즘 가장 많이 하는 칭찬이다. 화장실에 들어가면 휴지 풀어 헤치는 걸 즐겼는데 내가 밖에서 조금씩 떼어주며 이만큼만 쓰라고 가르쳤다. 두세 달 동안 하면서 본인도 짜증을 내고 나도 성가셨지만 꼭 해야 할 일이기에 멈추지 않았다. 뭔가를 시도해서 달라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그동안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들이 많았기에 최근에 보여주는 소소한 행동이 무척이나 고맙다.   ‘안될 것 같더니 이게 되는구나...’작은 변화에 기뻐하고 감동하는 순간이 끊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훗날 ‘엄마!’라고 부르는 아들에게 ‘응? 왜?’ 하고 대답하는 나를 상상해 본다. 아울러 피범벅 된 아들의 모습은 더 이상 안 봤으면 좋겠다, 제발.

    게시일2021-11-23

  • 가을이 깊어간다   가을이 깊어간다. 여름 끝이 길어져서 가을이 긴가민가 했는데 이른 추위가 김을 빼놓더니 어물쩡 겨울 분위기다. 여름이라 하기도 가을이라 하기도 이상한 계절이 지나고, 가을이라 하기도 겨울이라 하기도 억울한 계절이 슬슬 지나고 있다. 아무튼, 그래도 가을은 깊어만 간다.   비가 차가와지면 가을이었다. 9월말이면 비가 내릴 때 입술이 파래지며 한기가 들었다. 10월 25일 즈음이면 한 번씩 슬쩍 이른 추위가 들렀다 갔다. 곧 겨울이 올 테니 지금 가을날의 일들을 매조지하시라, 아니면 지금이라도 가을을 어여 즐기시라, 하듯이.(25일께라고 날짜를 기억하는 이유는, 해마다 그때 강릉에서 율곡선생을 기리는 율곡제 행사를 했었고, 그때마다 장롱 속에서 겨울 외투를 꺼내입고 다녀왔기 때문이다.)   1984년인가, 가을 단풍이 고왔던 해였는데, 11월 9일에 눈이 펑펑 왔다. 엉금엉금 성기게 짠 자주색 세타를 입고 느닷없는 눈이 신기하다며 사진을 찍었다. 이른 눈을 맞고 코끝이 언 얼굴 뒤로 창덕궁의 가을단풍이 바다처럼 구름처럼 펼쳐졌다. 알록달록한 단풍바다 앞으로 쏟아지는 눈발이 찍힌 사진 귀퉁이에 11월9일이라는 날짜가 박혔다. 그래서 두고두고 기억한다, 11월9일에 불붙은 단풍 숲으로 떨어지던 차사나운 눈발을.   살다보면 봄이면 봄이라 좋고, 가을이면 가을이라 좋았던 시절이 있기 마련이다. 좋았던 봄, 빛나던 가을을 찬찬히 꼽다보면 오후 차 한잔의 시간쯤은 흐뭇하게 훌쩍 넘어간다. 나도 물론이거니와 누구에게나 그 목록이 두툼하길 빌지만은-.   가을이 깊어간다. 가을엔 무거운 얘기를 나누기에 좋은 계절이다. 자신에게도 남과도, 누구랄 것도 없이. 그래서 오늘은 무겁고 무서운 이야기다.   불면보다 무서운 것   며칠 반짝 잠이 길었다. 여느 때보다 한 두 시간씩 더 잔 듯하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면 좀 더 자게 되는 것은, 서늘한 기운과 포근한 이불이 합쳐져서 그럴게다. 다만 그 시간만큼 에너지가 축적되어 기운이 돋았다기 보다는 그저 거칠고 엉성한 잠의 양이 한 두 시간 늘어버린 것뿐이라, 몸에 미안하기는 매한가지다. 몸에 미안하지 않으려면, 단풍이 찬란한 들판을 가을바람을 쐬어가며 싸돌아다니다가 따뜻한 물에 발 닦고 푸근히 잠들어야 하는 거다. 멍하니 담요 뒤집어쓰고 조는 듯 자는 듯 구겨져 있다가 잠들어 버리는 게 아니라.   불면증까지는 아니더라도 잠이 부실한 사람들이 주변에 차고 넘친다. 갱년기에 시작한 불면증은 삶의 고정값이 되어버린 지 오래라 새삼스런 화젯거리가 못 된다. 여든이 넘은 친정 엄마의 불면증 하소연도 삼십년 넘었으니 소리 나지 않아도 들리는 익숙한 노래 같다. - 엄마, 얼굴이 부스스하네. - 당췌 잠을 못 잤다, 잠을 자야 사람이 살 거 아니냐.- 한 숨도 못 주무셨소?- 한 숨도 못 자면 어떻게 사냐, 죽지. 잠깐 잤다가 새벽에 눈 떠지고 다시 잠들지 못하고 날을 새니 걱정이다. - 그냥 눈 감고 누워있으면 안 되려나. - 산 송장이냐, 눈 감고 누워있게. - 낮에 좀 몸을 움직여 보시든지. - 잠을 못 자서 몸이 천근만근인데 어떻게 낮에 움직이냐. - 어제 보니 낮잠 주무시던데, 낮잠을 참았다가 밤에 푹 자야. - 매정한 것 같으니라고. 밤에 한 숨도 못 자는데, 낮에 잠깐 눈 붙이는 것도 하지 말라면, 사람 죽으라는 거냐. - 억지로 자려고 하지 말고 편하게 생각하시는 게... - 고문이 따로 없는데 어떻게 편해지냐. 걱정하는 체 그만하고 불면증 없는 너나 잘 자고 살아라.   설핏 웃음이 난다. 불면증은 없지만 잠의 시간이 낡은 그물처럼 헤지고 구멍이 나버린 지는 오래 되었다. 나는 그 낡은 잠의 그물을 다독이지 않는다. 나는 나의 투정을 외면하는 오랜 버릇이 있다.  누구나 그렇듯이 아이 손을 잡고 이 치료실 저 조기교육실을 미친 듯이 다니는 시절이 끝나고 아이가 사춘기를 맞을 무렵이 되었을 때, ‘자다가 벌떡’ 증상이 시작되었다. 아이가 조금씩은 나아지겠지만 결국 범주 자체를 넘어서서 따라잡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고 나면, 아, 어찌 살 것이냐, 너를 어찌 살아가게 할 것이냐, 하는 날카로운 외침이 시도 때도 없이 나의 잠을 싹둑 끊어냈다. 어렴풋하게 슬슬 잠결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누가 불어댄 듯이 잠이 훅 달아나버리는 것이다. 자식의 성장을, 그 앞에 펼쳐질 미래를, 설레는 기대로 그려보는 게 아니라 그가 디딜 땅이 그만 풀썩 먼지를 내며 무너지는 장면이 떠오른다. 다음 발을 디딜 곳은 어디인가. 그 다음 발을 디딜 곳은 어디인가.   그 무서운 그림을 무시하고 다시 잠들 수는 없었다. 잠이 오느냐, 앞이 어둡고 해가 뜨지 않을지 모르는데 잠이 오느냐. 내면에서는 숱하게 어두운 음성이 들렸던 듯하다. 불면보다 무서운 것이 있었고, 그 두려움을 무시하고 잠이 들지는 못했다. 자다가 문득 가슴이 저며 화들짝 눈을 뜨고 나면, 무엇엔가 사무치는 슬픔의 구름 속에 파묻혀 있는 것 같았다. 자려다 가위 눌리고, 슬픔에 사무쳐 놀라 잠이 깨는 나날이 계속되면서 나는 나의 잠과 더 이상 친하게 지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나를 재우지 않으려는 어떤 의지가 있으니, 나는 그것에 순응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잠에 대해 애닯거나 안타깝지 않았다.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니 각별히 신경을 쓸 일도, 곁을 내 주고 마음에 걸리적거릴 일도 아니었다.   불면인들   독일에서 온 독일할머니를 만난 적이 있었다. 비행기로 먼 길을 왔으니 피곤하시겠다고, 좀 주무시라고 했더니 그 분 말이, ‘어차피 좀 살다가 길게길게 누워 깊은 잠에 빠질 텐데 뭐하러 지금 자느라 시간을 보내겠냐’는 거였다. 그 분의 낙천적 노년이 참 보기 좋았다.   돌아가신 지 한참 된 우리 할머니는 앉아서 깜박 조는 일은 있어도 절대 등을 대고 눕지 않았다. 졸고 계신 할머니에게 이불이라도 내어드릴라치면 손을 내저었다.     “놔둬라, 경을 칠. 낮에 등 대고 누워 자는 게 아니다.” 할머니는 중풍으로 쓰러지고 나서도 처음에는 밤에도 절대로 전등을 끄지 못하게 하셨다. 자는 게 죽는 것 같아 무서워 그랬다는 걸 얼마 뒤에 알았다. 그러던 할머니가 정신이 흐려지니 낮이건 밤이건 코를 골고 주무셨다.   아기들은 엉덩이를 높게 쳐들고 눈을 부비며 잠투정을 한다. 심리학자들 말로는 잠들기 싫은데 몸은 졸리니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빨리 자려고 투정하는 게 아니라 잠에 빠져드는 자신에게 맞서고 있다는 거다.   독일할머니도, 우리 할머니도, 아기들도 잠이 들기 싫었던 건 무엇일까. 삶의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아까워서, 다시는 삶의 시간으로 깨어나지 못할까봐 무서워서, 남들은 깨어있는데 나 혼자 어디론가 가는 게 까무러치는 것 같아 싫어서였을 터이니, 대체 달콤한 잠의 나라는 어디 있다는 걸까.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은 잠을 제대로 못 자거나 안 잔다. 방에서 잠들지 못하고 거실에서 자는 사람도 많다. 아이가 수면장애가 있어서 제대로 못 자니 덩달아 엄마도 못 잔다. 아이가 문득 현관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적도 있으니 현관에 이중자물쇠를 해놓고도 인기척이 날 때마다 화들짝 놀라 깬다. 깊이 잠들어 렘수면 상태가 되면 쉽게 각성되지 않을 테니 의식적으로 깊은 잠에 빠지지 않으려고 기를 쓴다.  지금은 문을 걸어 잠그고 자니 밤에 몸서리를 치며 자는지 누에벌레처럼 폭폭 달게 자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 아들도 어렸을 때 무언가에 놀란 듯 자다말고 방에서 튀어나올 때가 종종 있었다. 처음엔 아이를 붙잡았을 때 어딘가 까마득히 낯선 다른 세상을 쳐다보는 듯한 그 얼굴을 보고 무서워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몇 번 거듭하면서는 마음을 금세 진정시키는 요령을 찾았다. 깜짝 놀라 깨어나더라도 마치 얕은 잠에서 깨어난 듯 순식간에 각성할 것, 얼굴을 마주하지 말고 그저 안아주기만 할 것. 그리고 그 밤은 잠을 포기하고 그저 졸기만 할 것.   자다 뛰어나오는 일이 없어진 다음에도 아들의 잠은 달지 않고 거친 날이 많았던 듯 했다. 아침에 벗어놓은 옷을 보면 잡아당겨서 목과 소매가 늘어나거나 아코디언처럼 주름이 잔뜩 잡혀있기도 했다. 지금은 옷을 잡아늘이고 잠을 자는 것 같지는 않으니 아들 방에서 나는 기척에 귀를 세우고 밤잠을 설치지 않아도 된다마는, 아들의 잠을 괴롭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내내 궁금하다.   드림캐처   오로라를 보러 캐나다 옐로나이프에 간 적이 있다. 우주라는 영혼의 옷자락, 오로라는 내 버킷리스트 1번이었으니 기회가 되자 만사 제쳐두고 갔었다. 오로라를 보며 살던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영혼의 날개를 밟고서 살았을 거라고 느꼈다. 거기서 참으로 반가운 물건을 만났다. 드림캐처, 나쁜 꿈을 걸러내는 부적같은 물건이라 했다. 머리 맡에 놓고 자면 밤잠을 잘 자게 해준다던 그 물건을 보자마자 우리 식구들은 저마다 두어 개씩 집어들었다. 이건 엄마에게 꼭 필요해, 하면서.   식구들의 애정어린 기대에도 불구하고, 인디언의 영험한 기운이 깃든 드림캐처를 온 방 가득 주렁주렁 걸어두어도 나의 잠은 그리 푸근하지 않다. 그저 잠이 들어버린 시간은 여전히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그 시간에 했어야 하는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 같고, 그 시간에 깨어서 생각해야 할 어떤 것들이 있는 것 같다. 제대로 말하자면, 그 시간에 지켜야 할 어떤 삶이 있어서다. 그 삶이 놓일 자리가 마련되지 않았으니 나의 잠은 여전히 성글고 거칠다. 그러니 드림캐처는 임무를 다하지 못해 딱한 처지이다.  그뿐이랴, 문득 잠들었다 퍼뜩 깨어보면, 잠들지 않고 바라보아야 했던 별과 달이 있었던 것 같고, 허연 구름이 밤하늘을 스쳐 지나갔던 것 같고, 그 아래를 비행기가 날아갔던 것 같다. 기온이 떨어지는 밤마다 초록이 빠지고 단풍물이 들고 있었던 것 같고, 어떤 새는 까만 밤을 홀로 날았던 것 같다. 그 새가 내 방의 창문을 흘깃 보았었을 것 같고, 마른 번개가 쳤을 것도 같다. 오로라가 일렁이는 밤하늘을 북극여우가 한참을 쳐다보았을 것이다.   나는 자느라 놓친 그것들을 애석해 마지않으며 밤마다 떠나지 않았던 세상으로 돌아오고, 친정 엄마는 새벽도 되기 전에 지겹게 잠이 깨어서는 빈방에 홀로 앉아 있을 것이니, 모녀의 가을밤은 이래저래 깊어간다.김종옥전국장애인부모연대 문화예술특별위  

    게시일2021-10-31

  • 국회는 10월 초순~중순까지 정부 등의 국가기관이 잘하고 있나를 보며 사회적 문제에 대해 국가기관을 상대로 비판하는 국정감사 기간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 장애인 이슈에 대한 국회의원들의 질의와 국가기관들의 답변들도 오고 갔다.   자폐성 장애가 있는 필자로선 지적‧자폐성 장애인 관련 국정감사 소식을 인터넷을 통해 조금씩 챙겨봤는데, 그중에서도 필자의 관심을 끈 소식을 몇 가지 말해보겠다.   먼저 장애인 거주시설 인권지킴이단 관련 국정감사 결과 지킴이단 외부단원 과반수 이상 지정 조건을 지키지 못한 거주시설이 전국 767개소 중 78개소였고, 최소 구성 인원 등의 법적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 시설은 10개소였다고 한다.   인권지킴이단이란 ‘장애인복지법’에 따라 장애인 거주시설 장애인의 인권침해 발생 시 확인과 필요 조치를 통해 장애인 인권보장 및 인권침해 예방 목적으로 시설 내 설치‧운영하는 걸 말한다. 5인 이상 11인 이하로 인권지킴이단 단원을 구성하고, 단원 임기는 2년이되 연임 가능하며, 시설별 외부단원은 과반수 이상 지정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외부단원 과반수 이상 지정 조건을 지키지 못한 78개소 경우라면, 시설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사실에 대해 지적장애인이 말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외부단원들이 적고 그만큼 시설 측과 관계가 있는 단원들 구성이 많다는 것, 시설의 종사자들과 지적장애인 간 위계관계를 고려한다면 과연 인권침해 사실을 제대로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상황에서의 인권지킴이단은 요식행위이며, 인권침해 방지에 아무런 도움이 못 된다,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지적‧자폐성 장애인 당사자 몫이다. 물론 인권지킴이단 지침에 규정된 인원 수 및 구성 요건을 명확히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건 시설의 인권침해에 대한 외부의 독립적인 정기적 모니터링 체계가 갖추어지는 것임을 말이다.   장애인고용공단 관련 국정감사에선, 작년에 수면 위로 나온 대기업 사내카페 사건이 국감 테이블에 올라왔다. 공단 알선을 통해 고용된 장애인 바리스타들이 인권침해를 겪은 사건이었다. “웃는 게 바보 같다”, “여기가 어린이집이냐?”등 인격 모독적 말을 피해 장애인들은 들어야 했단다. 음료 제조 순서를 퀴즈로 내서 틀리면 공개질책을 당하는 등의 괴롭힘이 1년여 동안 계속돼, 심지어 약물치료를 받는 장애인까지 생겼다고 한다.   이 사건을 들으며, 지적장애인의 장애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들이 일하고 싶은 내적 동기가 생기게 하지 않는 표준사업장의 고압적 분위기가 결국 인권침해가 발생된 요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사자 의견이 반영된 체계적인 국가 차원의 지적‧자폐성 장애인 자기옹호 체계 부재가 상당히 아쉬웠던 대목이었다,   또한, 장애인복지법, 발달장애인법에선 장애인 학대 발생 시 고용주, 종사자들이 신고할 의무가 있는 사업장에 표준사업장이 포함돼 있지 않고, 설령 자발적 신고의 경우에도 소극적 대응으로 끝나기 일쑤란다. 이걸 보며, 장애인고용공단을 포함, 정부가 근로 장애인 인권에 상당히 무관심, 아니 무신경하다는 느낌마저 들게 만든다.   그래서 장애계에서 장애인 학대 시 신고의무대상에 표준사업장 사업주와 종사자, 근로지원인을 포함하도록 명시하라고 국회에 촉구했는데, 어떻게 될지는 추후 경과를 지켜보기로 하자. 또한, 장애인 당사자의 의견을 깊게 반영해 체계적인 자기옹호 체계를 마련하는 작업을 지금서부터 차근차근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한편, 국립민속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등 국립문화예술시설에서 장애인 관련 예산이 바닥 수준이라는 뉴스를 들었을 땐 장애인도 예술작품 감상 등을 통해 문화생활을 누릴 권리를 향유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에 조금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프랑스 항구도시 마르세유에 있는 지중해박물관에 필자가 유물을 보러 갔었던 걸로 기억한다. 불어로 설명되어 있어, 불어를 잘 모르는 필자로선 이 유물이 어떤 성격인지 이해가 쉽지 않았다. 가이드한테 물어봤더니 약간은 서투른 영어로 대답하긴 했다.   하지만 설명이 충분치 않았고 약간은 이해가 어려워 유물에 대해 제대로 음미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이해될 수 있게끔 영어를 잘하거나, 쉬운 말로 설명해줄 수 있는 가이드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긴 했다.   국민의 힘 김예지 의원에 따르면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국립민속박물관의 2021년 전체예산 대비 장애관련 예산이 각각 0.9%, 0.19%, 0.37%였다. 장애인 관람 지원인력도,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국립민속박물관의 경우 각각 1.8%, 1.3%. 1.2%였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경우, 장애 관련 예산, 지원인력 다 전무했다.   더군다나 국정감사에선 지적‧자폐성 장애인 지원인력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지적‧자폐성 장애인이 문화시설 관람할 수 있도록 차분한 분위기 조성하는 색감 등으로 마련한 시설, 쉬운 말 하는 문화관람 가이드 인력 등이 필요한데, 여기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이들의 문화생활 향유에 대해 과연 관심이 있기나 한 걸까 하는 의구심이 많이 들었다.   이외에도 국립장애인도서관에 발달장애인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이야기, 탈시설을 반대하는 시설 측과 부모들의 이야기 등 여러 국정감사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런 얘기들을 통해 아직도 국가는 지적‧자폐성 장애인의 삶과 권리 향유에 관심 없다는 걸 국정감사를 통해 새삼스레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지적‧자폐성 장애인도 대한민국의 엄연한 국민이요, 시민이다. 권리 객체가 아닌 주체다. 이들이 당당하게 권리의 주체로 자신의 삶과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장애인 당사자들을 필두로 장애계와 전문가, 시민단체 등이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 통해 나온 대안들을 국가, 지자체에 강력하게 요구해야 한다고 본다.   지적‧자폐성 장애인 삶에 관심 없는 정부와 지자체 이제는 그만 보고 싶다. 이들도 다른 사람과 당당하게 어울려 자신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세상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라며 2021년 남은 시간 동안이라도 이들의 삶에 신경과 관심을 쓰는 정부로 다시 거듭나길.  

    게시일2021-10-29

  • “지금도 자해를 하나요?”“아직도 혼자 울거나 웃기를 반복 하나요?”“여전히 식탐은 심하고요?” 아들이 받고 있는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를 점검하러 국민연금공단 직원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방에서 노래를 듣고 있던 아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거실로 나왔다.“아까 엄마가 얘기했지? 오늘 너 만나러 오신 분들이야, 인사하고 편하게 있으면 돼.” 불안함이 묻은 표정으로 입바람을 불며 아들은 조용히 소파에 앉았다.방문자의 질문을 듣고 답하면서 나는 비로소 아들의 변화를 알아 차렸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하기 싫은 것을 요구하면 스스로를 때리던 자해,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던 조울증, 하루에도 열두 번씩 냉장고를 열고 먹을 것을 찾던 행동들. 그 중에서도 제발 자해만 안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던 날이 있었다. 그것들이 서서히 사라진 걸 의식하지 못한 채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실사를 끝낸 그들이 돌아가고 나는 아들에게 한 번만 안아 보자고 했다. 아들은 뻣뻣한 몸짓으로 나의 포옹을 받아들였다. 고맙다고, 이렇게 달라져 줘서 고맙다고 나는 아들의 넓은 등짝을 토닥였다. 엄마의 칭찬에 기분이 좋은 아들은 금세 몸을 빼면서도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3년을 돌이켜 보면 아들보다 내가 달라진 걸 느낀다. 말이 안 나오는 아들에게 따라하라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작은 저지레나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보면 하지 말라고 얼마나 닦달했던가. 간단한 심부름조차도 눈을 마주 보고 또박또박 말하면서 지시하곤 했다. 굳이 그리 과하게 하지 않아도 아들은 자신이 들어야 할 말은 다 듣고 있다는 걸 늘 무시했다.아들은 자신의 표현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입술을 깨물면서 머리를 때리며 나에게 시위했다. 먹고 싶은 것을 살찐다는 이유로 못 먹게 하면 보란 듯이 나를 공격했다. 정말 배가 고파서라기보다 채워지지 않는 뭔가를 갈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3~4년 전까지 그러고 살았다.아들을 편하게 해 주려고 노력했다. 한없이 먹어대는 걸 볼 때마다 음식을 빼앗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아들에게 잔소리가 될 수 있는 말들은 가급적 삼갔다. 쉽지 않았다.자기결정권 연습을 시작하면서 나도 아들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주려고 노력했다. 억지로 바라보게 하면서 내 입을 보라며 채근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말을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것을 아들은 자신이 듣고 해야 할 일이면 알아서 움직였다. 때로는 뜸을 들이기도 하지만 내가 인내력을 가지고 기다리다보니 일상적인 생활은 순조로워졌다.자기결정 연습반 선생님은 아들의 마음 읽기에 주력했다. 마음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아들에게 큰 위안과 안정감을 주는 것 같았다. 선생님의 방법을 나도 배우면서 잘 안 되는 부분은 상담을 통해 연습하고 실행해 나갔다. 여전히 숙제가 남아있긴 하지만 3년 전과 비교하면 눈에 띄게 달라진 아들이 대견하다. 잊고 있던 행동들이 다시 나오더라도 그 전의 모습과는 또 다를 거라 생각한다. 막무가내로 했던 것과 소통하면서 하는 행동의 차이쯤으로 이해한다.이제 20대 중반의 아들이 조금만 더 점잖은 청년이면 좋겠다.흥이 많은 아들은 음악소리만 들리면 펄쩍펄쩍 뛰는 것으로 좋음을 표현한다. 흥에 흥분이 더해지면 표정이 심오해진다. 그 표정은 마냥 좋아서라기보다 다른 감정도 보인다. 근엄과 해맑음이 섞인 모습은 뭔가 쌓인 것을 과격한 몸짓으로 내보려는 발버둥처럼 느껴진다. 야외에서는 내 아들 아닌 척 시치미를 뗄 수 있지만 실내에선 참 곤란하다. 내버려 두기엔 아들 한 번 보고 바로 나에게 꽂히는 시선이 견디기 힘들다. 다른 사람들이 조용하게 음악 감상할 자유를 뺏는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 투명 칸막이로 우리만의 공간이 설치된다면 서로 맘 편하게 자신의 방식으로 음악회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바라건대 아들이 그 큰 덩치를 꿀렁거리며 뛰는 행동은 이제 좀 그만하면 좋겠다. 가끔 그런 행동을 보일 때마다 나보다 남편이나 딸의 표정이 너무 어둡다. 가족 나들이에 기분이 상해져 침묵하거나 말다툼을 하기도 한다. 나는 그냥 봐 주자고 하지만 부녀 둘은 그러지 못하니 옥신각신 한다. 어릴 때 비하면 정말 많이 좋아졌다. 바닥에 드러누워 울며 떼쓰기 선수였던 걸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그럼에도 아들의 행동이 좀 점잖아지고 한 번씩 과한 행동으로 민망할 때를 가족들이 잘 봐 넘겼으면 좋겠다.3년 후 다시 평가 하러 온 그들의 질문과 내 대답을 상상한다.“아직도 머리 꼬기와 입바람 부는 건 여전한가요?”“장소 불문하고 뛰는 행동은 그대론가요?”“아니요, 많이 줄었어요. 때와 장소 가리지 않고 뛰는 건 요즘 거의 하지 않아요.”엄마의 야무진 상상을 상상 못하는 아들은 행복해 보인다. 음악에 맞춰 머릴 꼬면서 입바람을 불며 몸을 흔든다. 눈이 마주치면서 엷은 미소를 나눈다. 조금 더 크게 웃는 미래를 꿈꾸는 건 신나는 일이다.  

    게시일2021-10-27

  • 대학 때 잘 놀았던 선배 중에 술자리 좋아하던 이가 있었다.(이렇게 얘기하자니 좀 우습다, 술자리 안 좋아하던 이가 없었으니.) 그때는 누구나 용돈이 궁해서 점심을 싼 것으로 대충 때우고 저녁엔 제일 싼 홍합탕이나 오뎅을 시켜놓고 소주를 마셨다. 사정이 그마저도 어려울 땐 볼품없이 담긴 김치쪼가리를 안주 삼기도 했다. 맥주를 마실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는 안주를 시키지 않고 기본으로 주는 팝콘을 눈칫밥과 같이 먹었다. 그 때 궁상맞은 버릇이 들어서인지 이후로도 술은 안주 없이 먹는 게 젤 맛있긴 하다. 물론 술 잘 먹던 얘기는 옛날옛적 얘기다. 그리고 지금 술 얘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술자리 좋아하던 선배 중 하나를 문득 떠올렸다는 얘기를 하려다가 알콜 냄새 나는 샛길로 잠시 혹해서 들어갔던 게다, 주책스럽게도.   아무튼, 술자리 좋아하던 선배가 있었다. 어느날 그 선배와 같이 학교 언덕을 내려오다가 문득 광장 너머 서쪽 하늘을 보았다. 시나브로 해거름에 붉은 놀이 장관이었다. 긴 숲 위로 넓게 펼쳐진 하늘이 술에 취한 듯(또, 술!) 붉었다. 지금은 하늘 가득 진홍빛의 바람꽃이 일어나듯 하던 그 광경이, 한 폭의 그림으로 기억나지 않고 단지 그랬었다는 사실로만 기억에 남아있지만(아나로그가 아니라 디지털데이터로만이라는 얘기다), 어쨌든 자주 보던 놀이 아니고 아주 특별하게 근사했던 것 같다. 나는 호들갑을 떨며(술 한 잔, 또?) 소리쳤다. “형, 저거, 저거 좀 봐요.”그러나 선배는 뜨악했다. “응, 뭐,,,,?”“저거, 저 놀 좀 보라고! 우와, 장엄하지 않아?!”“음....., 그러니?” 나는 그 미적지근한 반응에 기가 막혀서 선배의 어깨를 흔들어댔다. 보라고, 얼굴에 놀의 빛이 가는 화살처럼 와서 꽂히는 것 같지 않아? 일 년에 몇 번이나 이런 놀을 볼 수 있겠어, 이건 행운이지, 어쩌고 하면서. 선배는 그러나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뗐다. 나는 아쉬움에 조금 뒤쳐져서 고개를 외로 꼬고 놀을 좀더 쳐다보다가 다시 함께 걷기 시작했다. 선배는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근데, 몰랐구나. 나 적록색맹이라서 놀이 안 보여.”....! 붉었던 놀이 어서 지고 사위가 검기울기를 바라마지않던 그 날은, 아마도 저녁나절부터 뭔가 부실한 안주를 앞에 놓고 술을 마셨을 게다. 좀 많이 마셨을 수 있다. 내 얼굴은 저녁 내내 부끄러움인지 미안함인지 안타까움인지 범벅이 되어 붉었을 테고.   저거 좀 봐, 우와~! 산만하게 싸돌아다니는 걸 좋아한다. 어떤 목적지를 두고 쭈욱 걸어가는 것보다는 건들건들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우연히 마주치는 풍경을 누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어딘가 여행할 때, 나랑 같이 걸으려면 시간이 늘어져버린다. 우리 식구들은 이런 내 버릇을 참 못마땅해 한다. 특히 아들이 제일 싫어한다. 밖에 나갈 때부터 언제 몇 시에 어디로 가고, 무슨 일을 보고 몇 시에 어떤 경로로 집에 오는지가 명확해야 안심이 되는 아들은(자폐를 가진 이들의 특징이기도 하니), 내가 예고도 없이 멈춰서고 쓸데없이 옆길로 새는 것을 못견뎌한다. 특히나 더 질색하는 건 바로 이런 거다.   “우와, 00아, 저거 좀 봐, 너무 멋있지 않냐, 우와, 우와~!”   어렸을 때부터 손을 꼭 붙잡고 걷다가 멈춰서서 이렇게 소리지르며 아이에게 감탄을 강요할라치면 아이는 뜨악한 얼굴을 했다. 어딘가 엄마가 말하는 그 곳을 쳐다보기는 해야겠는데 대체 어디를 쳐다봐야 하는지 모르겠고, 더구나 감탄까지 하라니 난감하기도 이렇게 난감할 데가 없는 표정으로.   나는 마치 풍경에 감탄하는 방법을 가르쳐서 끄집어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 앞에서 집요하게 호들갑을 떨어댔었다. 그러다 어느날 문득 덤덤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저녁놀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선배 얼굴을 떠올렸다. 그 때 깨달았다. 저녁놀만큼이나 붉게 부끄럽던 그 날의 내가, 멈추지 않고 내내 아이에게 저것 좀 봐, 라면서 또 어깨를 잡아흔들고 있던 것이다.그렇게 문득 선배 얼굴을 떠올린 다음부터는 아이에게 어떤 풍경을 보고 멈춰서서 감탄하기를(감탄에 열렬히 동참하기를) 강요하지 않고 슬쩍 한번 소리 질러보고는 이내 그만둔다. 흥은 덜 나지만 고약한 에미가 될 수야 없지. 나중에 선배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러면 세상 풍경이 무슨 색으로 보이냐. 선배는 색맹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각기 자신이 느끼는 색깔의 미묘함이 다를 거라 했다. 내가 감탄해마지않는 깊은 푸른 색, 아스라한 청회색, 맑은 감청색, 품위있는 자주색이 정확히 어떤 색인지 잘 모르겠지만, 자기 나름대로 느끼는 색감이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때 내가 느끼는 회색이 선배가 느끼는 미묘한 여러 색깔의 결을 다 담고 있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가 보는 색깔들과 남이 보는 색깔들이 꼭 같다고 어떻게 자신할 수 있으랴. 그러면서 속으로 적이 안심했던 것도 같다. 다행이야, 내가 보는 것을 다 못 보는 것이 아니라, 좀 다른 것을 보고 있다는 말이지, 참 다행이야-.‘  다만 인간은 단일종족이라 인간들의 눈 구조도 한결같을 것이고, 물리적 작용 또한 한결같을 것이니 내가 느끼는 색깔의 감각이 78억이 느끼는 색깔의 감각과 크게 어긋나지 않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파란 눈의 외국인이 보는 파란 물빛이 혹시나 더 파랗지는 않을까, 그는 붉은 빛이 좀 덜 뜨겁지 않을까 하고 궁금했던 내 안의 아이는 여전히 어른이 되어서도 그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지만, 나는 나대로 내 눈의 세상 속 여러 결의 빛을 느끼고, 남은 남대로 자기 눈 속 여러 결의 빛을 느끼고 살아간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나를 안심시키기도 하고 자제시키기도 한다. 나는 때때로 자주 감정을 가라앉히고 주저 않아서, 똑같은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나, 누구나 나름대로 느끼고 살아간다는 것, 그러니 내가 보는 것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애태울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 그리고 내가 보고듣고 느끼는 것을 굳이 상대에게서 찾으려고 기를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아들의 항의와 즐거운 거래  얼마전에 아들 녀석이 이렇게 나에게 항의를 했다.  엄마는 거실에 앉아서 티비를 보다가 시도때도 없이 이것 좀 보라고 식구들을 불러제끼면서, 왜 내가 좋아하는 게임장면을 보라고 부르면 이따가, 나중에, 라고 하면서 안 봐주나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엄마도 봐야 해요.   아,이것은, 공평하게 주고받자는 거래의 기본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엄마의 이중적인 태도 - 아마도 권위적 판단을 지적하기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녀석 소견이 이렇게까지 큰 것이 충격적으로 놀랍고 대견하면서도, 한 대 얻어맞아서 정신을 못 차린 듯한 얼빠진 얼굴로 사과를 했다. 그리고 간사하게도 당장에 아들이 권하던 만화영화 ‘슈퍼소닉’을 얼른 다운받아 함께 보았다. 그랬는데, 재밌었다. 물론 며칠 전에 본 ‘샹치’만큼 재밌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보게 하려면 나 역시 걔가 좋아하는 것을 봐주면 된다. 우리 사이에는 이런 거래가 성립된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것처럼 훌륭한 공정거래가 없다. 어쨌든 우리는 각자 감격해마지않는 어떤 것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 그만큼 느끼거나 못 느끼거나간에 우리는 적어도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존중하는 태도를 통해서 우애를 돈독히 할 수 있을 것이고, 혹시나 그런 기회를 자주 갖다보면 각자 자기 세계에 있는 복잡미묘한 감각의 촉수들을 일정 부분 공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물론 공유가 목적은 아니나.)   아름다운 흑백영화  ‘자산어보’를 보면서 또 문득 그 선배 생각을 떠올렸었다. 그가 보는 세상이 이런 것일지 아닐지 모르지만, 혹시 그는 내가 자산어보를 보면서 아름답다 감탄하는 것의 열배, 백배만큼 느낄지도 모른다고. 마찬가지로 아들이 내가 가리키는 곳의 아름다움을 내가 부르짖는 방식으로 느끼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건성으로 대답하는 그 속에서 뭔가 다른 것을 움켜쥐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 일이다. 각자 자기 세상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게 또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지. 김종옥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문화예술특별위 

    게시일2021-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