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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칼럼

초대칼럼 상단 이미지

칼럼니스트들이 여러분들께 ‘발달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건네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시선으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 계시나요?
이 게시판은 보다센터에서 초대한 각 분야의 칼럼니스트들이 여러분들께 ‘발달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건네는 곳입니다. 발달장애와 관련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칼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또한 발달장애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의 일상이야기,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의 소박하지만 통렬한 이야기와도 공감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은 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게시물 총 50

  • 대학 때 잘 놀았던 선배 중에 술자리 좋아하던 이가 있었다.(이렇게 얘기하자니 좀 우습다, 술자리 안 좋아하던 이가 없었으니.) 그때는 누구나 용돈이 궁해서 점심을 싼 것으로 대충 때우고 저녁엔 제일 싼 홍합탕이나 오뎅을 시켜놓고 소주를 마셨다. 사정이 그마저도 어려울 땐 볼품없이 담긴 김치쪼가리를 안주 삼기도 했다. 맥주를 마실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는 안주를 시키지 않고 기본으로 주는 팝콘을 눈칫밥과 같이 먹었다. 그 때 궁상맞은 버릇이 들어서인지 이후로도 술은 안주 없이 먹는 게 젤 맛있긴 하다. 물론 술 잘 먹던 얘기는 옛날옛적 얘기다. 그리고 지금 술 얘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술자리 좋아하던 선배 중 하나를 문득 떠올렸다는 얘기를 하려다가 알콜 냄새 나는 샛길로 잠시 혹해서 들어갔던 게다, 주책스럽게도.   아무튼, 술자리 좋아하던 선배가 있었다. 어느날 그 선배와 같이 학교 언덕을 내려오다가 문득 광장 너머 서쪽 하늘을 보았다. 시나브로 해거름에 붉은 놀이 장관이었다. 긴 숲 위로 넓게 펼쳐진 하늘이 술에 취한 듯(또, 술!) 붉었다. 지금은 하늘 가득 진홍빛의 바람꽃이 일어나듯 하던 그 광경이, 한 폭의 그림으로 기억나지 않고 단지 그랬었다는 사실로만 기억에 남아있지만(아나로그가 아니라 디지털데이터로만이라는 얘기다), 어쨌든 자주 보던 놀이 아니고 아주 특별하게 근사했던 것 같다. 나는 호들갑을 떨며(술 한 잔, 또?) 소리쳤다. “형, 저거, 저거 좀 봐요.”그러나 선배는 뜨악했다. “응, 뭐,,,,?”“저거, 저 놀 좀 보라고! 우와, 장엄하지 않아?!”“음....., 그러니?” 나는 그 미적지근한 반응에 기가 막혀서 선배의 어깨를 흔들어댔다. 보라고, 얼굴에 놀의 빛이 가는 화살처럼 와서 꽂히는 것 같지 않아? 일 년에 몇 번이나 이런 놀을 볼 수 있겠어, 이건 행운이지, 어쩌고 하면서. 선배는 그러나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뗐다. 나는 아쉬움에 조금 뒤쳐져서 고개를 외로 꼬고 놀을 좀더 쳐다보다가 다시 함께 걷기 시작했다. 선배는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근데, 몰랐구나. 나 적록색맹이라서 놀이 안 보여.”....! 붉었던 놀이 어서 지고 사위가 검기울기를 바라마지않던 그 날은, 아마도 저녁나절부터 뭔가 부실한 안주를 앞에 놓고 술을 마셨을 게다. 좀 많이 마셨을 수 있다. 내 얼굴은 저녁 내내 부끄러움인지 미안함인지 안타까움인지 범벅이 되어 붉었을 테고.   저거 좀 봐, 우와~! 산만하게 싸돌아다니는 걸 좋아한다. 어떤 목적지를 두고 쭈욱 걸어가는 것보다는 건들건들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우연히 마주치는 풍경을 누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어딘가 여행할 때, 나랑 같이 걸으려면 시간이 늘어져버린다. 우리 식구들은 이런 내 버릇을 참 못마땅해 한다. 특히 아들이 제일 싫어한다. 밖에 나갈 때부터 언제 몇 시에 어디로 가고, 무슨 일을 보고 몇 시에 어떤 경로로 집에 오는지가 명확해야 안심이 되는 아들은(자폐를 가진 이들의 특징이기도 하니), 내가 예고도 없이 멈춰서고 쓸데없이 옆길로 새는 것을 못견뎌한다. 특히나 더 질색하는 건 바로 이런 거다.   “우와, 00아, 저거 좀 봐, 너무 멋있지 않냐, 우와, 우와~!”   어렸을 때부터 손을 꼭 붙잡고 걷다가 멈춰서서 이렇게 소리지르며 아이에게 감탄을 강요할라치면 아이는 뜨악한 얼굴을 했다. 어딘가 엄마가 말하는 그 곳을 쳐다보기는 해야겠는데 대체 어디를 쳐다봐야 하는지 모르겠고, 더구나 감탄까지 하라니 난감하기도 이렇게 난감할 데가 없는 표정으로.   나는 마치 풍경에 감탄하는 방법을 가르쳐서 끄집어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 앞에서 집요하게 호들갑을 떨어댔었다. 그러다 어느날 문득 덤덤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저녁놀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선배 얼굴을 떠올렸다. 그 때 깨달았다. 저녁놀만큼이나 붉게 부끄럽던 그 날의 내가, 멈추지 않고 내내 아이에게 저것 좀 봐, 라면서 또 어깨를 잡아흔들고 있던 것이다.그렇게 문득 선배 얼굴을 떠올린 다음부터는 아이에게 어떤 풍경을 보고 멈춰서서 감탄하기를(감탄에 열렬히 동참하기를) 강요하지 않고 슬쩍 한번 소리 질러보고는 이내 그만둔다. 흥은 덜 나지만 고약한 에미가 될 수야 없지. 나중에 선배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러면 세상 풍경이 무슨 색으로 보이냐. 선배는 색맹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각기 자신이 느끼는 색깔의 미묘함이 다를 거라 했다. 내가 감탄해마지않는 깊은 푸른 색, 아스라한 청회색, 맑은 감청색, 품위있는 자주색이 정확히 어떤 색인지 잘 모르겠지만, 자기 나름대로 느끼는 색감이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때 내가 느끼는 회색이 선배가 느끼는 미묘한 여러 색깔의 결을 다 담고 있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가 보는 색깔들과 남이 보는 색깔들이 꼭 같다고 어떻게 자신할 수 있으랴. 그러면서 속으로 적이 안심했던 것도 같다. 다행이야, 내가 보는 것을 다 못 보는 것이 아니라, 좀 다른 것을 보고 있다는 말이지, 참 다행이야-.‘  다만 인간은 단일종족이라 인간들의 눈 구조도 한결같을 것이고, 물리적 작용 또한 한결같을 것이니 내가 느끼는 색깔의 감각이 78억이 느끼는 색깔의 감각과 크게 어긋나지 않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파란 눈의 외국인이 보는 파란 물빛이 혹시나 더 파랗지는 않을까, 그는 붉은 빛이 좀 덜 뜨겁지 않을까 하고 궁금했던 내 안의 아이는 여전히 어른이 되어서도 그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지만, 나는 나대로 내 눈의 세상 속 여러 결의 빛을 느끼고, 남은 남대로 자기 눈 속 여러 결의 빛을 느끼고 살아간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나를 안심시키기도 하고 자제시키기도 한다. 나는 때때로 자주 감정을 가라앉히고 주저 않아서, 똑같은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나, 누구나 나름대로 느끼고 살아간다는 것, 그러니 내가 보는 것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애태울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 그리고 내가 보고듣고 느끼는 것을 굳이 상대에게서 찾으려고 기를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아들의 항의와 즐거운 거래  얼마전에 아들 녀석이 이렇게 나에게 항의를 했다.  엄마는 거실에 앉아서 티비를 보다가 시도때도 없이 이것 좀 보라고 식구들을 불러제끼면서, 왜 내가 좋아하는 게임장면을 보라고 부르면 이따가, 나중에, 라고 하면서 안 봐주나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엄마도 봐야 해요.   아,이것은, 공평하게 주고받자는 거래의 기본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엄마의 이중적인 태도 - 아마도 권위적 판단을 지적하기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녀석 소견이 이렇게까지 큰 것이 충격적으로 놀랍고 대견하면서도, 한 대 얻어맞아서 정신을 못 차린 듯한 얼빠진 얼굴로 사과를 했다. 그리고 간사하게도 당장에 아들이 권하던 만화영화 ‘슈퍼소닉’을 얼른 다운받아 함께 보았다. 그랬는데, 재밌었다. 물론 며칠 전에 본 ‘샹치’만큼 재밌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보게 하려면 나 역시 걔가 좋아하는 것을 봐주면 된다. 우리 사이에는 이런 거래가 성립된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것처럼 훌륭한 공정거래가 없다. 어쨌든 우리는 각자 감격해마지않는 어떤 것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 그만큼 느끼거나 못 느끼거나간에 우리는 적어도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존중하는 태도를 통해서 우애를 돈독히 할 수 있을 것이고, 혹시나 그런 기회를 자주 갖다보면 각자 자기 세계에 있는 복잡미묘한 감각의 촉수들을 일정 부분 공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물론 공유가 목적은 아니나.)   아름다운 흑백영화  ‘자산어보’를 보면서 또 문득 그 선배 생각을 떠올렸었다. 그가 보는 세상이 이런 것일지 아닐지 모르지만, 혹시 그는 내가 자산어보를 보면서 아름답다 감탄하는 것의 열배, 백배만큼 느낄지도 모른다고. 마찬가지로 아들이 내가 가리키는 곳의 아름다움을 내가 부르짖는 방식으로 느끼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건성으로 대답하는 그 속에서 뭔가 다른 것을 움켜쥐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 일이다. 각자 자기 세상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게 또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지. 김종옥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문화예술특별위 

    게시일2021-10-05

  • 지인과 점심 약속을 잡았다. 코로나로 인해 ‘집콕’중인 자폐성장애 아들을 혼자 둘 수 없어 같이 나갔다. 지인이 좀 늦는다는 연락에 혹시 아들이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소란을 피우면 어쩌나 살짝 불안했다. 예전처럼 수저를 번갈아 흔들거나 식탁을 치는 요란한 행동은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갑자기 보이는 돌발행동은 예측불허라 아들 표정을 살폈다. 불만을 표현하는 아들 특유의 표정이 나오려고 했다. 미간을 찡그리면서 혀를 조금 내밀어 깨무는 행동. 배가 고픈 것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음식을 먹고 있는데 우린 왜 계속 기다리기만 하느냐는 불만이 얼굴에 묻어 있다.“우리 오징어순대 먼저 주문해서 먹을까?”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아들. 마침 샐러드가 나와서 아들은 그것을 먹으며 오징어순대도 맛있게 먹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까지 식당에 들어선 지 30여분의 시간 동안 동요하지 않은 아들, 얼굴 붉히지 않고 별 일 없이 식사를 끝낸 아들이 나는 또 기특하다.   지인과 한강변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부모 마음대로 자녀를 휘두르는 일, 이들의 미래를 위해 부모가 해야 할 일과 연대해야 되는 것 등,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나눴다. 아들은 우리 뒤에서 마스크를 벗었다 썼다 반복하며 따라 왔다. 가끔 우리 앞으로 뛰어와 겅중겅중 걷는 모습이 우스워 대화가 끊어지곤 했다.   강변의 넓은 잔디밭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아들도 우리 옆의 바위에 앉는가 싶더니 이내 잔디밭을 뛰어다녔다. 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길 바라며 얘기를 계속 이어가던 중, 아들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일어서서 아들을 불러 더 멀리 가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지인의 이야기가 귓등으로 들렸다. 아들의 직진 본능이 발동하여 먼 곳으로 뛰다가 우리 있는 곳을 모르면 어쩌나 불안했다. 아들을 믿어 보자고 엉덩이를 들지 않았다. 대화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아들이 내가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엄마 있는 곳으로 되돌아오길 바랐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내겐 꽤 길게 느껴졌다. 얼굴에 함박웃음을 머금고 상체를 흔들며 돌아오는 모습에 나는 ‘감격’했다.   아들은 밖에 나가면 무조건 뛰는 걸 즐겼다. 놀이터에서 그네나 미끄럼틀을 타는 모습을 나는 벤치에 앉아 흐뭇하게 웃으며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들은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아이들이 없는 놀이터 구석에서 혼자 풀이나 모래를 입에 넣고 뱉기를 반복했다. 늘 바로 옆에서 아들에게 시선을 고정시켜야만 했다. 잠시 한 눈이라도 팔면 아들은 달릴 수 있는 곳까지 무조건 달렸다. 아들과 둘이 외출할 때 예쁜 신발은 그림의 떡이었다. 항상 뛰기 편한 운동화를 신었다. 몸집이 커가면서 아들의 가벼운 발걸음은 내가 전력 질주하는 것 보다 빨랐다. 더 멀리 가버리면 내가 힘이 드니까 가급적 아들을 불러 세웠다. 다행히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지 않고 멈춰서 되돌아 와주면 그게 고맙게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다.   한동안 나는 아들이 내 주위에서 놀다가 엄마 있는 곳으로 돌아오기만 해도 참 좋겠다는 작은 소망을 품고 살았다. 점점 체력이 좋아지는 아들에 비해 노쇠해가는 나의 체력이 아들의 질주를 막는 건 불가능해지면서.그러다보니 외출이 꺼려졌고 승용차로 움직였다. 하지만 그게 능사는 아니었다. 아들의 체력과 몸은 점점 더 커져만 가는데 내가 힘들다고 아들을 통제하며 살 수는 없었다. 아들과 둘 만의 ‘뚜벅이 여행’을 시작했다. 전철을 타고 이동했고 한강공원에서 산책을 했다. 앞서 가던 아들이 갑자기 보이지 않아 실종 신고를 해서 찾기도 하면서 아들과 나는 서로의 동선을 예측하기 시작했다. 몇 번의 길 엇갈림으로 고생을 하면서 아들은 엄마 곁을 떠나지 않고 주위를 맴도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아들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에 이름을 불러 더 이상 먼 곳으로 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어쩌면 그동안 아들은 충분히 본인 하고픈 걸 하고 내게 돌아 올 수도 있었다. 다만 내가 아들을 기다리지 못하고 불러들인 건 아니었는지 생각해 본다. 워낙 실종 사고가 많은 것에 대한 불안감이 아들을 믿지 못하게 했다고 변명해 본다. 성인 대접을 해야 한다고 말을 한 건 가슴이 아닌 머리에서 나와 입으로만 한 거였다. 어떤 일이 닥쳐서 내가 의기소침해지더라도 아들을 믿고 세상을 더 활보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 잊지 말아야겠다.   남들에겐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우리에겐 고비가 많다. 그런 고비를 잘 넘어줄 때마다 아들이 고맙다. 당연하고 사소한 일이라도 장애인이라는 이름으로 인한 긴장과 안도의 한숨은 우리 일상을 흔들기도 하고 감사하게도 한다.아들이 식당에서 잘 기다려 준 것도, 혼자 뛰어다니다 내게로 돌아와 준 것도 아들의 결정이었다. 앞으로도 그런 결정 하도록 계속 기회를 줄 것이며 아들의 선택과 결정에 응원의 박수를 보낼 것이다.  

    게시일2021-09-24

  • 1. 구봉서  구봉서라는 코미디언이 있었다. 우리나라 코미디언 1세대라고 할 만한 분인데 2016년에 89세로 돌아가셨다. 이 분이 어떤 인터뷰 중에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하고 살 수 있으면 그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았다. 기억이 까마득한데, 내가 아마도 중고등학교 학생 때였던 것 같다.(오래 되었다는 뜻이다, 참고로.) 이 말을 듣고 여러 가지로 감동을 받았다. 어수룩하고 눙치고 웃긴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웃기던 분이, 행복한 삶에 대한 정의를 그토록 간명하게 하고 있지 않은가. 희극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이 행복하다는, 자긍심 넘치는 말이었겠지만, 삶에 대한 깊고 오랜 생각 속에서 나온 중간 결론처럼 느껴졌다. 그때부터 진정 행복한 삶이란 바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보면 맨 먼저 저 이는 저 일을 하면서 사는 게 행복한 일이 될까, 하고 생각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물론, 많지 않았다, 자기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실컷 하면서, 더구나 그 일로 넉넉히 밥 먹고 살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이. ‘   자기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밥벌이는 다른 일로 하는 사람도 있고, 밥벌이 때문에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뒷전으로 미뤄놓는 사람도 있고, 아예 밥벌이와 좋아하는 일 사리에서 헤매다 밥벌이를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그도저도 다 못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 숫자가 더 많은지는 잘 모르겠다. 하기야, 세상엔 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다양한가. 직업하고 연결되지 않는 ‘하고 싶은 일’들은 얼마나 많겠는가. 하고 싶은 일과 직업이 같은 경우가 최상위일 테지만 그런 행운은 드문 일이겠고,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그 일을 할 만한 형편이 된다면 그게 또한 대단한 행운이지 싶다. 나는 어떤가 생각해보면, 가장 좋아하는 일이 무엇일까를 놓고서 이리 재고 저리 망설이고 하다가 기회를 놓친 경우에 가깝겠다.   하고 싶은 일이란 무엇인가. 요컨대 내가 나를 거기에 써먹어도 아깝지 않은 일이다. 요샛말로 하면 내가 나를 거기에 ‘갈아넣어도’ 아깝지 않은 일, 기꺼이 나를 바치는 일이겠다. 그런 일이 있다는 것 자체도 행운이다.(있긴 하되 그리 못해서 애닯은 이들에게는 불행일까.... 잘 모르겠다.) 직업이 되었든, 직업으로 뒷받침하든, 어쨌거나 하고 싶은 일은 하는 편이 행복에 가까울 것이다. 행복한 삶을 얘기하려던 게 아닌데, 앞머리가 길어졌다. 정작 하려던 얘기는,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사는 연예인의 말에서 무한 감동을 받은 때가 많다는 것이었다.(글이 아니라 말하는 도중이었으면 겸연쩍게 실실 웃고 다시 말줄기를 찾아가는 타이밍이다.)   2. 싸이   누군가 싸이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 당신은 도대체 왜 무대마다 죽을 듯이 그렇게 열심히 하는가. 싸이의 대답은 이랬다. 예전에 군대를 ‘재차(!)’ 가게 되었을 때, 다른 것은 모르겠는데 그 직전의 무대가 떠올랐다. 혹시나 내가 앞으로 무대에 설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럴 줄 알았으면 그것이 마지막 무대였을텐데, 아, 그랬으면 더 했어야 했는데, 그 무대에 내 모든 것을 남김없이 쏟아넣었어야 했는데-. 그래서 싸이는 그 이후엔 모든 무대가 마치 다시없을 마지막 무대가 될 수 있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선다고 했다. 그 비장함의 극단 덕에, 우리는 싸이가 소리도 잘 나지 않는 쉰 목소리로 우리에게 뛰라고 명령하고, 셔츠 앞단추가 터져나가라고 몸뚱이를 흔들고, 땀으로 범벅이 되어 번질거리는 얼굴로 미친 듯이 웃어가면서 한바탕 잘 놀아주는 모습을 본다. 굿판에서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고 남은 힘의 바닥까지 그러모아 뒷전굿을 하고는 풀썩 바닥에 쓰러져버리는 무당, 마치 그하고 같이 펄펄 뛴 듯, 우리는 그의 무대를 함께하고 나면 개운하다못해 탈피한 곤충들마냥 새로워지는 것이다.   다시없는 순간일지도 모르기에 나는 지금 여기에 최선을 다하겠다. 싸이의 무대를 볼 때마다 그 말을 떠올린다. 어영부영 재고 따지고 하다가 슬쩍 다음으로 미뤄버린 일이 얼마나 많은가. 대충 얼버무리고 다음에 잘하자 했던 일은 얼마나 많은가. 늘 있는 일이니, 내일도 있을 일이니 이름 없이 넘겼던 날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오늘 여기 있으니, 내일도 근처에 있겠지 하고 흘려보낸 사람은, 그와의 시간은 또 얼마나, 얼마나 많은가. 3. 마이클 잭슨   마이클 잭슨이 지금까지 살았다면, 우리는 그 덕에 실험적이고 강렬하고 엄청난 무언가를 어마무시하게 즐길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두고두고 슬프다. 그가 재기하면서 마련했던 런던공연의 준비과정을 찍은 ‘디스 이즈 잇’(This is it)이라는 다큐영화가 있다. 마이클 잭슨은 공연 마지막 리허설을 하면서 이번 공연이 그의 마지막 공연이 될 거라고 얘기한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지만, 그저 해보는 말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더 이상의 최고의 공연은 이제 없을 거라고 한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끝내 그 공연을 하지 못하고 죽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이 마지막 리허설 장면에서 그가 마지막 공연 운운할 때부터 관객들이 펑펑 울었었다. 아, 런던 공연은 열렸어야 했다! 그 아쉬움은 이루 다 말하기 어렵다. 그 공연이 얼마나 엄청난 공연이 되었을지 리허설만으로도 짐작하고 남는다. 대중문화사에 있어 기록될만한 대단한 공연이 되었을 게 틀림없다. 그와 우리는 이걸 놓치고 말았다.   그 때 알았다, 우리는 살면서 마지막을 할 기회를 놓칠 때가 많다는 것을. 이번이 마지막이야, 했다가 그것이 마지막이 아닌 게 되는 일도 많고, 마지막으로 이것만은 해내고 끝내야지 했다가 결국 마치지 못하기도 일쑤다. 마지막으로 하려 했다가 마음에 안 들어 마지막이 아니라고 우기다가 그저 포기하고 만 일은 또 오죽 많은가. 그 일들은 아직도 마지막을 맺지 못한 채로 어정쩡하게 남아 있으니, 엉킨 실타래를 풀다가 다 못 풀고 깨어난 사나운 꿈자리들은 다 그것들의 작당짓거리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인 줄 모르고 있다가 졸지에 그것이 마지막이 되어버렸을 때의 허망함을 안다. 삶에 있어서 그것만큼 헛헛하고 큰 구멍이 있을까. 일만 그런 게 아니다. 사람도 그러하니, 작별인사를 못하고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은 얼마나 많을까. 내가 보낸 인사를 그가 받기 전에, 그가 보낸 인사를 내가 받기 전에 자리를 뜬 일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니, 살다보면 예정된 마지막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으므로 마지막인가 싶으면 너무 벼르지말고 얼른 해치워야 할 일이다. 또한 결코 마지막이기를 예측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았지만, 하다 만 숙제 같은 이것이 결국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 끝내 허망하지 않으려면 마지막인 듯 준비를 해야한다. 뒤돌아보면 매번 아쉬운 일 천지이고, 미련한 마음을 오갈 데 없이 길섶에 슬며시 놓아두고 떠나온 일이 태반이다. 이러다 정말로 마지막에 이르도록 마지막인 줄 모르다가 마지막을 맺지 못한 일들을 가슴에 쌓아두고 사라질까 걱정이다.(쓰기는 이렇게 쓴다만, 걱정은 무슨! 삶이란 누구나에게 대체로 이렇게 흘러가기 마련인 걸. 풋!)   일년하고도 여덟 달을, 세계테마여행을 반복해서 보고 또 보고 하면서 식구들과 옴지락꼼지락 지내면서 보니, 이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목구멍 넘어 귓구멍 관자노리께까지 차오른다. 무언가 일년하고도 여덟달을 미뤄온 것이 있는가 하고 곰곰 생각해 본다. 아니면 무언가 예전에 미뤘던 새로운 어떤 것을 지난 시간동안 담아온 것이 있던가 하고 애써 생각해 본다. 뭔가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내 기억이 날 위안하지 못한다. 그러나 여전히 다행스럽게 건넌방에서 아들이 두드리는 게임소리, 딸이 또각거리는 자판 소리가 들린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그건 바로 지금이다. 시간이란, 지금이 늘 마지막이므로.   * 추신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우연찮게도 8월 29일, 58년 개띠 마이클 잭슨이 태어난 날이다. 잭슨에게 인사를 건넨다. 이틀 전인 8월 27일에 돌아가신 구봉서 님에게도 안부를 드린다.   김종옥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문화예술특위)​

    게시일2021-08-31

  • 자폐인 관점에서 본 도쿄올림픽 소회작년에 개최하기로 예정했지만 코로나19 팬더믹(세계적 전염병)으로 인해 1년 연기된 도쿄올림픽이 우여곡절 끝에 지난 7월 23일 무관중 속에 개회식을 진행했다. 16일 동안 각 나라의 선수들은 조국의 명예를 위해 서로 치고받는 싸움을 전개한 후 8월 8일 파리에서 다시 만날 걸 약속하고, 도쿄에서의 올림픽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필자도 올림픽 경기 보는 것을 좋아하는지라, 관심 있는 경기를 즐겨봤다. 박태환 이후로 수영에 조금씩 관심이 생기게 되었고, 올해 국가대표선발전 남자 자유형 200m에서 1분 44초대에 터치패드를 찍은 황선우의 기록이 메달권이기도 하는 등, 겸사겸사 이 선수의 경기를 보게 되었다.   처음 올림픽에 출전한 것 치고는, 결선에서 7위를 차지하고 예선에서 한국 신기록을 수립하는 등 앞으로 다가올 파리올림픽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게 되었다. 24년 동안 묵힌 한국 높이뛰기 기록을 경신한 아름다운 4위 우상혁 선수 경기도 마찬가지로 다음 올림픽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키게 만들었다.   수영, 승마, 펜싱, 사격, 육상 3200m 달리기 등 5종목을 잘해야 하는 근대5종 경기에서 메달을 거머쥔 전웅태 선수의 최선을 다한 경기 모습도 필자의 마음에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모두 우리나라를 위해 수고해준 선수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고, 다음 파리올림픽에도 멋진 활약을 기대한다.   이번 올림픽을 주관하는 국제올림픽위원회 IOC 제9대 토마스 바흐 위원장이 내세운 모토는 ‘Unity in Diversity(다양성 속의 통합)’이다.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에서 그 부분에 신경이라도 쓰듯 이번 올림픽 개회식 때 진행한 성화 점화식에서 그런 모습이 상징적으로 보였다.   격투기 종목, 야구에서 활약했던 전 운동선수들과 일본 내 코로나 방역을 위해 힘쓴 의사들이 먼저 성화주자로 뛰었다. 그다음엔 휠체어 사용인인 와카코 츠치다 선수가 성화주자로 나섰고 이어 일본 스포츠의 미래인 청소년 선수들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청소년 주자가 든 성화는 최종 점화자인 일본의 테니스 스타 오사카 나오미에게 전달되었고, 그녀는 구처럼 생긴 모양의 성화 점화대에 불을 붙였다. 참고로 오사카 나오미는 아이티 국적의 아버지와 일본 국적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혼혈 출신이다.   장애, 연령, 국적, 인종에 상관없이 모두가 하나로 어우러진 성화 점화식이었기에, 그 부분에서 다양성을 강조하려는 것이 느껴졌다. 이처럼 장애, 연령, 국적, 인종, 성적 지향에 상관없이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라면 서로가 어울리며 사회통합을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세계랭킹 2위인 오사카 나오미가 도쿄올림픽 여자 테니스 단식 16강에서 탈락하자, 일본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오사카는 일본인이나 일본어 못하고, 그녀가 왜 성화 최종주자가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단다. 이 말을 들으며 성화 점화식 때 전했던 다양성의 메시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인종 차별 및 혐오 분위기가 느껴졌다.   세계랭킹 2위라고 해서 경기를 다 잘하는 건 아니다. 2위도 경기하는 날의 몸 상태에 따라 실력이 달라지기도 하고, 때로는 상대에 따라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날의 경기 모습만 가지고 말하면 되는 건데도, 그걸 인종과 연결해 비하하는 의미로 얘기하니 선수 입장선 얼마나 모욕감이 들겠는가?   또한, 오사카 나오미에게 우울증이 있었을 때, 일본 누리꾼들이 성차별적 이유까지 곁들여,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처럼 일본 사회에서는 정신건강 문제를 드러내는 걸 금기시하기까지 한단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일본 사회가 겉으로는 다양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배타적인 사회라는 생각이 든다. 다양성을 ‘실체’가 아닌 ‘정치적 수사(Rhetoric)’로만 여기지 않나 의심까지 든다.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배타적인 사회의 모습은 우리 사회에도 존재한다. 지적장애, 자폐성 장애 등 정신적 장애에 대한 혐오와 차별로 자신의 장애를 드러내지 못하는 장애인이 많은 등 장애를 이유로 한 차별이 우리 사회에선 정말 흔하다.   자폐인, 정신장애인에게는 장애를 이유로 교육대학 입학이 원천적으로 불허된다. 정신장애를 이유로 의사, 변호사 등의 직업을 제한하는 결격조항이 대한민국 법령에 아직도 버젓이 있다. 이러한 정신장애인 차별 법령을 철폐할 것을 정신장애계에선 요구하고 있지만, 아직도 철폐되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다.   또한, 국가인권위원회의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에선 한국 사회에 있는 트랜스젠더(출생 시 지정된 성별과 다른 성별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65.3%가 최근 1년 동안 본인의 성별표현으로 인해 차별을 겪었다고 답했다. 성적 지향에 따라서도 차별하는 대한민국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성적 지향, 장애, 연령 등에 따른 차별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만연한 현상을 철폐하기 위한 목적으로 국회를 비롯해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논의가 최근 분주했지만, 지금은 입법기관인 국회에서 오히려 잠잠하다. 차별금지법 제정보다 당들이 정략적인 궁리를 한다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이러다 다양성이 실체가 없는 ‘정치적 수사’로 끝나진 않을지 두렵기만 하다.   물론 차별금지법 제정을 한다고 해서 차별이 만연한 현실을 바로 없앨 수 있다는 건 거짓말일 것이다. 하물며 자신의 가치관을 바꾸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데, 차별에 길들여진 더 큰 단위의 사회에서 차별철폐를 하는 게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러기에 어려서부터 장애인, 성 소수자 등 자신과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도록 하는 문화가 형성될 수 있도록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다양성이 ‘정치적 수사’가 아닌 ‘실체’, 현실로서의 모습을 지닐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럴 때 서로를 존중하는 분위기 속에 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질은 높아지고 구성원들이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게시일2021-08-31

  • 병원 근처만 봐도 겁을 먹고 후다닥 뛰어가는 자폐성장애 아들에게 백신 접종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냥 안 맞고 감염병에 걸리지 않기를 바랄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건 꽤나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주사 맞는 연습을 해보기로 했다. 반팔 옷의 소매를 올리면 바로 내려버리는 아들에게 우선 민소매티를 구입해서 입혔다. 소매 올릴 필요 없이 바로 알콜스왑으로 팔을 소독하고 코바늘로 꾹 눌러 5초간 견디는 연습을 했다. 처음엔 인상을 쓰며 내켜 하지 않다가 계속 반복하다보니 반소매를 입은 날도 스스로 소매를 걷어 올려 주사 놀이가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정하진씨, 주사 맞읍시다.”라고 말하면 바로 달려와서 팔을 내밀었다. 무사히 잘 맞을 수 있을 거란 기대와 한바탕 전쟁을 일으키고 정작 주사는 구경도 못하고 돌아올 수 있겠다는 절망감이 수시로 찾아왔다. 누군가는 잘 맞았다고 좋아하는 소식이 들렸다. 부러웠다. 또 누구는 소란만 피우고 끝내 접종하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고도 했다. 아들도 그럴 것 같아 심란했다. 그래도 열심히 연습을 했고 드디어 접종 당일이 되었다. 열 체크와 예진표를 작성하고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아들의 표정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의사와의 문진은 순조로왔다. 선생님을 바라보며 얌전하게 앉아 약물에 대한 이상 반응과 접종 후의 주의할 점에 대해 잘 들었다. 대기실로 나와 마지막 관문을 기다렸다. 부스에 들어가 주사만 맞으면 끝인데 아들이 겁을 먹기 시작했다. 주사기를 들고 있는 간호사를 보자마자 냅다 뒤돌아서 대기실 의자에 도로 앉았다. 불안한 눈빛과 빠른 손놀림으로 머리카락을 꼬기 시작했다. 나는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괜찮다느니, 안 아프다느니, 넌 할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게 무의미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냥 조용히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집에서 연습할 때랑 분위기가 달라서 당황했구나. 기다려 줄게.” 의사와 간호사들이 부스에서 나와 한 마디씩 했다. 다들 걱정스런 마음인 걸 알지만 아들에게는 소용없는 조언들이었다.“과자로 유인해서 들어오게 하면 될텐데...”아들은 식탐이 있긴 해도 상황에 따라 먹거리를 포기한다. 까짓 거 안 먹으면 되는 걸 너무 잘 안다.“엄마가 안고 아빠가 아들 못 움직이게 꽉 잡으면 되는데...”아들은 안기는 걸 거부한다. 설사 내가 안는다 해도 바로 빠져나가는데 아들의 덩치를 감당할 수 없다. 남편 역시 아들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을 수 없다. 아들이 몇 번을 부스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걸 본 접종센터장이 진심으로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고민해 주었다. 차 안에서 맞고 간 경우가 있다며 우리도 그래 보자고 했다. 넓은 공간에서 마치 큰 죄를 지은 사람 생포하듯 건장한 남자들이 아들의 사지를 잡고 뭔가를 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차라리 예방 접종을 포기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에 그나마 차 안의 좁은 공간에서는 시도할 만했다. 엄마와 아빠가 자신의 몸을 잡고 있는 걸 불편해 하는 사이 간호사는 재빠르게 아들의 팔에 주사기를 꽂았다. 팔을 움직이는 바람에 주사 바늘이 아들의 팔을 길게 스쳐가서 피가 났다. 통증으로 그랬을까? 아들이 멈칫하는 사이 간호사는 접종을 마쳤다. 반창고를 붙이려 했으나 얼마나 긴장했는지 온 몸이 땀에 젖어 반창고가 미끄러져 붙지 않았다. 15분 동안 대기하면서 아들은 자신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예방 주사 맞은 거야. 수고 했다.”나는 덤덤하게 말했고 남편은 고생했다며 아들을 칭찬했다.   주사 맞는 연습은 사실 무의미한 것이었다. 주사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분위기가 문제였다. 낯선 사람이 자신의 팔을 잡는 자체가 아들에겐 공포였다. 본인이 두렵다고 결정한 이상 그 어떤 설명도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아들을 힘으로 제압하고 주사를 맞게 하는 건 하고 싶지 않았다. 본인 스스로 점잖게 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가지고 대했으나 아들은 두려운 분위기와의 싸움을 견디지 못했다. 그나마 어릴 때처럼 바닥에 누워 뒹굴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사는 게 늘 고비다. 앞으로 어떤 고비가 우리 앞에 나타날지 생각하면 암담하다. 하지만 또 이렇게 넘어갈 수 있음이 다행이다. 미리 겁먹지 말고 평소에 내공을 잘 쌓아 현명하게 대처하며 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병원만 보면 피하던 아들이 병원 안까지는 잘 들어가고 있으니 예방주사쯤 아무렇지 않게 맞고 나올 날도 오지 않겠는가.  

    게시일2021-08-20

  • 1. 자랑질은 부끄럽다   자랑하는 일은 많이 부끄럽다. (안다, 이렇게 말하면, 나로부터 자랑질을 들어왔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쓰나미같은 반론, 태산같은 반증을 들이댈 사람들이 있는 것을. 하지만 뭐 어쨌든 자랑하는 일은 몹시 부끄럽다는 말이다.) 언제부터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니 꽤 오래전부터 몸에 밴 정서인 것 같다. 또한 내가 나를 자랑하는 것을 부끄럽다는 말은, 남들이 스스로를 자랑하는 것도 못마땅하다는 뜻이겠다. 생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내 머릿속 거울뉴런이 유난히 극성스러워서, 내가 나를 자랑할 때 남이 나를 부러워하거나, 속으로 욕하거나 할 것이 분명하다는 판단으로(내가 그러하므로 남도 틀림없이 그럴 것이므로), 이런 마음 속 병통이 생겼으리라. 자기의 장점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씩씩한 사람들을 보면 설핏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것이 더 건강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뭐 어쩌랴, 이렇게 생겨먹은 것을. 뭔가 이런 정서적 태도가 나름 합당한 이유가 있고 사회적으로도 긍정적인 것이라면, 자랑을 부끄러워하는 일을 자랑할 수도 있겠으나, 뭐 그렇게까지나~~.   어렸을 때(굉장히 오래 전 일이라는 뜻이다!) 학교에서는 온갖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가정환경조사라든가 하는 게 있었다. 조사서에 자기 집의 사는 형편을 낱낱이 기록해 제출했는데, 이도 모자라 선생님을 이것들을 통계까지 냈었다. 일일이 조사서를 들춰가며 통계 내기 귀찮았던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한 항목씩 불러가며 손을 들라 했다. - 집이 자기 집인 사람 손들어봐. (집이 우리집이지 우리 집이 아닌 것도 있어요?) - 집주인이 엄마아빠가 아니고 다른 사람인 사람 손들어봐. (아, 그렇군요~)- 집에 텔레비전 있는 사람 손들어봐. (으쓱~) - 집에 냉장고 있는 사람 손들어봐. (우와)- 집에 라디오 있는 사람, 아니 라디오 없는 사람 손들어봐. (!) - 집에 자가용 있는 사람 손들어봐. (......)   모두 비슷비슷하게 가난했던 우리들은 손도 비슷비슷하게 들었고, 간혹 ‘~ 없는 사람 손들어봐’가 나올 때마다 유난히 주눅들어 하는 아이들 속에 자기가 포함될까봐 조마조마 했었다. 그러다보면 꼭 ‘~있는 사람’에 계속 손을 들고 있으려니까 팔이 아프다며 투정을 부리는 것들이 생긴다. 그것들의 자랑질이 얼마나 무례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나, 부잣집 아이야, 너희들은 이런 거 없지? 그러니 나를 무한히 부러워하고, 너희의 가난을 부끄러워하렴. .... 걔들의 도시락 반찬을 절대 힐긋거리지 않는다. 알록달록하고 폭신해서 절대 연필심이 부러지지 않는 걔들의 필통을 절대 부러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절대 부럽지만 티를 내지 않겠다. 그리고 나는 절대 부자가 되어도 자랑하지 않겠다.   2. 칭찬과 자랑 사이 마음의 가시   이후로 티를 낼만큼 부자가 되지 못했으니, 절대 부자를 자랑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매우 쉽게 지켜졌다. 대신 그 욕망을 다른 방식으로 풀긴 했다. 잘 달린다, 더 높이 뛴다, 아이들을 웃기게 해준다, 더 많이 읽었다...... 내가 자랑질하지 않고도 남들의 칭찬을 들을 수 있었으니, 이것이 가장 윗길의 전략이었을 게다. 칭찬은 듣되 부러움(시기, 질투 포함)의 대상이 되지는 말자.   그런데 차츰 느끼는 것은, 칭찬을 듣고 싶어하는 인정욕구라는 것 역시 자랑질과 다를 것 없는 비슷한 류의 괴물이지 않은가. 하는 사실이다. 내가 뭔가를 공들여 하거나 우연히 잘 하게 된 것을 남들이 알아주지 못할까 안달이 나서 드러내고 과시하려 한다면, 그것이 자랑질이 아니고 무엇이랴. 가족이 아닌 타인에 대해 부러움 없는 칭찬이 가능할까. 나도 힘든데, 남들에게 부러움 없는 칭찬을 듣겠다는 욕심이 가당키나 한 걸까.   그러니 자랑질을 미워하는 것은, 남들의 자랑질에 동요되는 얄팍한 내 정서를 가리기 위해 이도저도 모두 포기하자는 비겁한 태도가 아니었던가, 하는 지적질을 스스로에게 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또 어쩌랴. 어쨌든 자랑질이든, 칭찬받기 구걸이든, 남을 심사를 괴롭히는 일은 하지 말자는 결단은 칭찬받을 만한 태도가 아닌가. 다만 극복해야 하는 병통은, 내가 이러할진대 너는 대체 왜 그러냐, 내가 이렇게 자랑질 하지 않으려 하는데, 너는 대체 왜 자랑질이냐, 하는 마음의 가시를 다스리는 일이다.(물론 이놈의 가시는 거대하고 끈질기다!)   3. 엄마의 자랑질 우리 엄마는 사람은 편식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에 투철하신 분이다. 편식을 한다는 것은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을 잊어먹은 자들의 교만이고, 음식을 해준 사람에 대한 무례이고, 나아가 외면당하는 콩과 고등어, 고기와 미꾸라지, 우거지와, 당근, 오이에 대해 매우 미안한 일이라고 했다.(그러면서 고기를 한참 거르면 어지럼증이 생긴다고 하신다.) 그렇기에 자식들에게도 편식을 몹시 나무라셨는데, 막내동생은 대체로 엄마의 뜻에 따라 편식하지 않고 두루 잘 먹지만 오빠와 나의 고집스런 편식과는 지금까지도 평생 싸우고 있는 중이다.   나는 내가 하필 싫어하는 음식을 기어코 먹이려는 엄마와 맞선 싸움이 참 싫었기에, 우리 식구들의 편식은 절대 허용이다. 그러다보니 우리 식구들은 희한하게도 누가 좋아하면 누군가는 싫어하고, 누가 싫어하면 누군가는 좋아하는 이상 식욕들이 강화되었다. 물냉과 비냉을 함께 차려야 하고, 콩국수와 볶음국수를 함께 차려야 하고, 고기와 생선을 각기 차려야 한다. 내가 자초한 것이니 불만은 없다. 좀 불편할 뿐이다. 이 얘기를 꺼낸 이유는, 엄마의 편식무시의 원칙이 참 싫었는데, 이것 말고 또 하나 내가 싫어하는 것이 있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다. (이러고보니 참 고약한 딸이다. 엄마 흉을 보기 위해 이것저것 들이민다는 말이니.)   엄마는 동네 아주머니들(할머니들이겠으나, 내가 우리 엄마를 할머니라고 하지 않으니 엄마의 동료들도 할머니라고 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나서, 가끔 내게 그 말들을 전하는데, 그 속에 꼭 남들이 했던 자랑들이 어김없이 들어있다. 누구 아들이 진급을 해서 뭐가 됐다더라, 하던 자랑들은 그 아들들이 은퇴하는 나이가 넘어서고 보니 사그라들었다. 그 자리를 이젠 취직 잘한 손주들이 차지했다.   - 누구 손주가 취직했다고 인사를 왔다더라, 유명한 회사인데 월급을 많이 준다더라. - 누구 손주며느리가 어디 다니느라 바쁜데, 할머니 선물을 사왔다더라. - 누구 손주가 생일이라고 할머니 모시고 나가 근사한 곳에서 밥을 샀다더라. - 누구 손주가 할머니랑 자고 싶다고 가방 싸들고 와서 일주일 있다 갔다더라.   이 중에서 많은 부분이 과장되어 있거나, 가상의 희망이 섞인 픽션으로 윤색된 것이리라. 그리고 이런 많은 자랑들을 듣고 있을 때 시새움이 없을 리 없는 우리 엄마라고 가만 있었겠나. 엄마도 똑같았겠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 아주머니들의 자랑들에는 과장이 있고, 그것을 스스로 모를 리 없다. 한 번 온 것은 세 번 온 것이 되고, 한 번 밥 먹은 것은 세 번 밥 먹은 것이 되는 것을 누가 모르랴. 그러니 이 아주머니들은 뭔가 자식 손주들이 자신들이 나가서 자랑을 할 만한 거리들을 만들어주기만을 바라고 또 바란다. 그분들과 다르지 않아, 뭔가 자랑거리가 생기지 않을까 호시탐탐 탐색을 하는 우리 엄마와 나의 대화도 늘상 이렇다. - 누구 손주가 뭐 어쨌다더라. - ....... - 누구 손주가 결혼을 한다더라. - ...... - 누구 손주가 초밥을 사왔다더라. - ......- 00이는 인턴 사원으로 잘 다니고 있니? - 격주로 다녀. - 하루 네 시간 근무면 월급은 얼마나 나오니? - 근무한 만큼 나오지.- ...... - 짜증 안 부리고 잘 다녀. - ...... 기특하구나. - 00이가 우리 집에서 제일 착해. - ...... 그렇겠지. 걔가 뭐 악한 마음을 갖겠냐. - @#$%^&*&^%$#~! (이건 속으로 쏴올린 속사포다)   4. 자랑스러워 하기   자랑은 나쁘다. 그건 염치없고 유치한 짓거리일 때가 많다. 나보다 많이 가진 상대 앞에서 내 것을 자랑하는 것은, 열등해 보이지 않으려는 서글픈 몸짓이며 나를 과장하고 포장하려는 거짓이다. 듣고 있는 상대가 내가 가진 것만큼 못 가졌을 때 자랑하는 것은 상대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것이고, 상대가 나를 부러워하는 것을 보면서 즐기려는 못된 취미이다. 사실 내가 가진 것만큼 그가 못 가졌다는 건, 그에게 참 미안한 일이 아닌가. 그가 못 누리는 것을 내가 누린다는 것은 참 미안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불쑥불쑥 자랑질 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 내 마음이 참 밉고 싫으며, 누군가 내가 하는 수법이랑 비슷하게 안 그런 척 하면서 자랑질을 할 때 온 마음을 다 해서 그가 밉다. 제일 윗길은, 역시 내가 내 입으로 자랑하지 않는 거다. 남들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말이다.   자랑질은 하지 않되, 자랑스럽기만 하면 된다. 자랑스러워 하기에는 참 많은 조건이 붙는다. 남들이 보기에도 좋아야 하고,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줄 만 해야 한다. 남들이 못 갖는 행운을 눈치 빠르게 얻어낸 것이 아니어야 하고, 자기가 하지 않고 남의 덕에 얻은 성취가 아니어야 한다.   그러니 나는 내 아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남을 넘어서려는 마음이 없고, 남을 괴롭히려는 마음도 없다. 스스로 조금씩 자가발전을 해가며 구사할 수 있는 어휘가 늘고 이해할 수 있는 말의 범위도 넓혀간다. 정확히 얘기해주면 그만큼은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편식은 하지만 반 점은 먹어달라 하면 먹어주고, 제 방문을 고집스레 닫아놓긴 하지만 밤새 닫아두진 말고 새벽에는 열어놓으라 하면 무거운 책을 받쳐놓고 십센티쯤은 열어준다. 요컨대 남의 마음을 헤아려준다는 말이다. 아빠와 여동생이 서로 의견차이로 대립하면 ‘누구나 일리는 있다’는 말로 점잖게 중재를 선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좋아요를 눌러주는 이가 열 명이 채 안 되어도 절대 실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약속이었기에 상관 없다고 하면서(!).   내 주변에는 자식자랑질을 하지 않는 이들이 참 많다. 나도 그렇거니와 그들은 대체로 자랑질은 하지 않고, 다만 자랑스러워 한다.   이뻐서, 이쁘게 웃어서, 착해서, 잘 먹어서, 좋은 습관이 있어서, 어제 못했던 것을 오늘은 할 수 있게 되어서.... 그리고 내 옆에 있어서.   나는 이런 이들이 참 좋다. 미안해서 자랑하지 못하는 병통이 있는 이들이.                                                                                         김종옥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문화예술특위) 

    게시일2021-08-02

  • “엄마 친구들 만나는데 동생이 같이 가서 뭐 하게? 그냥 집에서 나랑 같이 있을 테니 엄마만 다녀오세요.”월1회 ‘문화나눔’이라는 주제로 영화를 보거나 독서모임을 하는 지인들의 모임이 있다. 몹쓸 코로나로 인해 1년 넘게 만나질 못했다. 여주에 세컨하우스를 마련한 지인이 있어 겨우 날을 잡아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자폐성아들이 다니는 평생교육센터는 코로나 때문에 인원 조정을 하느라 주2회만 나가고 있는데 하필 쉬는 날이었다. 아들 등원하는 날로 내 편의대로만 날짜를 잡을 순 없었기에 나는 아들과 동행하려고 했다. 집에만 있는 것보다 여주를 돌아보고 남한강변을 걷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남편과 딸은 말렸다. 20대 청년이 50대 아줌마들 사이에서 뭘 하겠냐는 것이다. 아들에게 묻기로 했다.“하진아, 엄마 친구들 만나는데 같이 여주 갈래?”아들의 표정이 밝아지면서 ‘네!’라며 좋아했다.“하진아, 누나랑 집에 있을래?”“따아!!!”함께 가겠다는 아들의 단호함에 나는 기분이 좋았다. 생활 속 언어는 거의 다 알아듣지만 말로 의사 표현이 잘 되지 않는 아들이다. 그럼에도 긴 시간 함께 살면서 아들의 여러 가지 반응과 표정으로 소통이 가능하다. 혹시 노래를 통해 말이 튀어 나오지 않을까 싶어 동요를 함께 부르다 보니 불분명하지만 입모양이 잡히고 작은 소리도 나오는 걸 보며 언젠간 말을 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영원히 말을 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지금 이 정도로도 사는 데 크게 지장은 없다. 아플 때 표현하지 못하는 게 가장 안타깝지만 어쩌겠는가.   외곽고속도로에 들어서서 뒷좌석 아들을 보니 창 밖 경치에 표정이 밝아 보였다. 엄마 노래 부른다며 동요 ‘내 동생’을 불렀다. 박자를 맞춰 열심히 따라 부르는 아들이 달라보였다. 발음이 아직도 정확하진 않지만 제법 비슷한 소리를 내는 것이 얼마 전까지와 다른 모습이었다. 몇 가지 노래를 더 부르며 아들보다 내가 더 신이 났다. 어느 순간 단어 하나가 툭 튀어나와 나를 까무러치게 할 것 같았다.아들은 평소 집에서는 아이돌의 댄스곡을 즐겨 듣는다. 음량을 크게, 작게 조절하며 때로는 겅중겅중 뛰면서 춤까지 춘다. 빠른 템포의 노래 가사를 흉내는 못 내고 ‘으으으...’ 소리를 내며 나름 따라 부르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처음엔 그게 안쓰럽고 안타까웠는데 그런 마음을 접은 지는 오래 전이다. 살아보니 스트레스 잔뜩 받으며 해도 잘 안 되는 부분은 너무 애쓰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는 게 차라리 현명한 삶의 태도였다. 나름의 즐기기 방법으로 ‘집콕’ 생활을 하며 큰 소란 없이 지내주는 아들이 고마울 뿐이다.   평일 고속도로는 한산해서 좋았다. 적당한 속도감을 느끼며 한 시간여 달리다 보니 낯익은 시골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좁은 외길을 따라 비슷한 모양의 집들을 보면서 목적지에 닿았다. 사진으로만 보던 아들을 직접 본 지인들의 표정은 모두 밝았다. 잘 생겼다, 배우 누구 닮았다, 의젓하다 등...좋은 말을 쏟아내니 아들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들은 자신이 정한 의자에 앉아 우리 얘기에 귀를 기울이며 간간이 미소를 띠기도 했다. 심심하거나 뭔가 맘에 안 들으면 머리카락을 꼰다든가 손을 입에 대고 후후 부는 행동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장소가, 거기 모인 사람들이 자신을 편하게 해 주는 걸 느끼는 것 같았다. 낯선 것을 싫어하는 아들은 특히 움직이는 놀이기구 타는 걸 겁내는 편인데 해먹에 앉아 보라니 처음엔 거부하다가 바로 걸터앉았다. 모두가 자신을 주시하며 재밌겠다, 한 번 앉아 봐 등으로 관심을 보였더니 바로 앉아 주었다. 누워 보라고 하니 또 엉그적거리며 눕기도 했다. 뭐든 처음 할 때의 저항이 심한 아들은 우리가 자신에게 거는 기대를 알아차린 듯 잘 응해 주었다.  아들이 해먹에 누워있는 사이 우리는 장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경계선급 장애인 경우 혼자 잘 할 수 있는 게 많다보니 여러 상황에 노출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들을 이용해서 금전적 이득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는 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옆에서 계속 함께 하는 건 그를 구속하는 게 되니 방법이 아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 제도적 장치가 물론 필요하겠지만 사람들의 인성이 더 중요함에 우리는 입을 모았다. 어렸을 때부터 통합을 하면서 장애인과 늘 함께 해 온 아이들은 커서도 거부감이 생기지 않는다. 낯설어서 거부하고 자신과 달라서 배제하는 일은 어려서부터 몸으로 배우지 못해서이다. 다양한 모습으로 서로 부대껴 사는 세상에서 우리는 모두 귀한 존재임을 몸으로 알고 배우는 교육이 중요하다. 말로만 하는 장애인식교육은 허울이다.아들을 통해 지인들이 생각하는 장애에 대해 얘기 나눌 수 있음이 참 좋았다. 오늘도 우리 모자는 함께 사는 세상에 작은 깃발 하나를 꽂은 기분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장애를 알고 장애인과 그 가족의 삶에, 예민하지도 외면하지도 않는 세상이라면 우리 삶이 더 행복할 것 같은 날이었다.   부녀가 모자의 동행을 끝까지 반대하지 않은 건 아들의 의견을 존중해서다. 호불호를 우리가 잘 알아차릴 수만 있어도 아들의 삶은 불행하진 않을 것 같다.​  

    게시일2021-07-28

  • 1. 오래된 시장이 있는 동네에 산다   우리 집은 꽤 나이 먹은 아파트인데, 나는 이사 오는 첫날부터 지금까지 이 집의 낡음을 타박하며 쭈욱 살고 있다. 어떤 물건을 대할 때 그것의 표정이 보이는 이상한 병통이 있는지라, 내가 타박할 때마다 이 집이 듣고서 상심하거나 심통을 부릴까 슬며시 걱정스럽다. 사는 집은 이렇게 투덜대면서 사는 동네만큼은 유치하게 자랑질 만발이다. 우리 동네엔 오래된 시장이 있다는 것이다! (쓰고보니 희한하다. 왜 오래된 시장은 자랑하면서 오래된 집은 구박일까...)   우리 집과 전철역 사이에 크고 긴 시장길이 있는데, 여길 오가는 재미가 참 각별하다. 수십 년째 그대로인 가게가 있는가 하면 자꾸만 바뀌는 가게도 있다. 점포도 없이 길가에 푸성귀 몇 가지 놓고 좌판을 열었던 분이 한참 뒤에 작은 가게를 장만해서 산뜻하게 장사를 시작하기도 하고, 장사도 별로 안 되는 것 같은데 매번 근사하게 인테리어를 하고 개업했다가 정리하고 바로 근처에 또 개업하고 또 정리하고 또 개업하고를 반복하는 집도 있다.   이 곳이 최근 몇 년 새에는 나도 즐겨보는 TV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바람에 더 유명해져서 코로나19에도 서로의 어깨를 스치지 않고는 걷기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어주부가 과일과 채소를 사면서 매번 남성시장에서 샀다 자랑하고(심지어 이 시장에서는 아보카도가 한 개 5백원 하는 것도 있다며), 이정현이 끌수레를 끌고 와서 호떡을 먹고, 이영자가 신기하다며 떡집 앞에서 떡을 사서 돌리기도 하는 그 시장이 바로 우리 동네 시장이니, 자랑질을 할밖에—. 시사주간지에 난 어묵집도 있고, 숨은 맛집 고수들이 찾아낸 메밀국수 집도 있고, 비빔국수와 물국수 딱 두 가지만 파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행복한 국숫집도 있다.(이 두 집은 절대 안 가르쳐 줄란다. 지금도 땡볕에 이십 분씩 줄을 섰다 먹는데, 더 알려지면 정말 큰일이다!)   2. 선을 넘는 가게들   그런데 이 시장길을 오가는 것이 대체로는 매우 각별한 즐거움이지만 또한 동시에 고질적인 고통이기도 하다. 이른 점심때부터 매일 고주망태가 되어서는 시장 어귀에 서서 오가며 눈을 마주치는 모든 이에게 욕을 퍼붓는 할아버지 때문이 아니다. 이미 그 할아버지는 늘 그러한 풍경 속의 정물이 되어서 누구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저 멀찌감치 떨어져 잰걸음만 떼면 그뿐이니까. 오히려 건강을 잃고 한참 출근하지 못하셨을 때 동네사람들이 얼마나 은근 걱정들을 했었는지. 그렇다고 또 거의 날마다 시장길 초입(고주망태 할아버지와 대략 이삼십 미터 거리를 두고)에서 상품권 다발을 내밀며 여러 일간지 구독을 권하는(심지어 조선일보와 한겨레를 함께) 아저씨의 한결같은 속삭임(“신문보세요, 신문”)이 부담스러워서도 아니다. 내게 고통을 주는 건 선을 지키지 않는 가게들이다.   시장의 가게들은 사람이 다니는 길가에 잇따라 있기에 길을 표시하는 선이 쭉 그어져 있다. 가게의 영역은 딱 거기까지라는 표시이다. 칼같이 이 금을 지키는 오래된 뚝심의 가게도 있지만, 많은 가게들이 슬금슬금 그 선을 침범하고 물건들을 내놓는다. 많이 내놓은 곳도 있고 소심하게 조금 선을 밟는 정도로 내놓는 곳도 있다. 나란히 있는 어떤 집들은 서로 눈치를 보아가며 물건 내놓기 경쟁을 하기도 한다. 제일 고약한 집은, 물건을 내어놓는 것만도 모자라 물건을 실은 오토바이를 턱하니 가게 앞에 대놓는다. 마치 물건을 싣고 나르기 위한 것인 양 짐짓 끈도 내려놓고 위장했지만, 시장을 오가는 사람들은 그게 길 가는 사람들을 가로막고 자기 가게로 억지로 들이기 위한 꼼수라는 것을 다 안다. 심지어 길가에 과일과 채소 상자를 잔뜩 내어놓은 어떤 집은, 정작 가게 안 진열대는 휑하니 비어 있는 때도 많다.   가끔가다 어쩐 일인지 일제히 금 안으로 물건들을 들여놓을 때도 있는데, 아마도 민원으로 단속을 하거나 상인회에서 자체결의를 하거나 했겠지만, 얼마 가지 않아 가게의 영역은 고무줄처럼 또 늘어난다. 조금 내놓는 집은 조금 얄밉고 많이 내놓은 집은 많이 밉다.   3. 시장의 반칙   나는 날마다 시장길을 따라 오가며 양 옆의 가게를 살핀다. 오늘은 이 가게가 더 내밀었군, 오늘은 저 가게가 더 들이밀었군, 하고 ‘속으로’ 화를 내며 걷는다. 아마도, ‘속으로’가 아닐 것이다. 인상도 잔뜩 쓰고 걷는다.(요새는 마스크 속에서 소리내어 구시렁거리기까지 한다.) 이 아저씨는 안 그러셨는데 왜 반칙 대열에 합류하셨나, 아니 저 아주머니는 언제 그릇 하나를 더 내놓으셨나—. 나는 참으로 별스럽게도 이십 년도 더되는 세월을 날마다 오가는 길에 어느 가게 물건이 튀어나와 있는가를 꼬나보고 화를 내며 다닌다. 그러면서 금을 넘어 상품을 내어놓는 가게 물건은 절대로 사지 않는다는 소심하고도 단호한 응징을 한다. 이게 나의 공정(公正)이다, 이러면서. 어쩌다 시장길에 동행하는 딸은, 내가 언제나 같은 소리로 투덜거리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지겹기도 하단다. 그렇지만 나는 도대체 너무나 한결같이 화가 나는 거다. 이 화는 지치지도 않는다.   그들의 반칙이 너무 싫다. 한 집에서 반칙을 쓰면, 그것은 곧 전염이 된다. 점점 더 많은 물건을 앞으로 내밀어 놓게 되고, 급기야는 오토바이를 가게 앞에 세우게 된다. 선을 지키던 사람들은 갈등하게 되고 이윽고 반칙을 경쟁하게 된다. 그야말로 악화가 양화를 걷어차 버리는 고약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야외에서 무언가를 볼 때 모두가 앉으면 누구나 볼 수 있지만, 누군가 더 잘 보겠다고 일어서버리면 제일 앞에 있거나 제일 키 큰 사람 빼고는 누구도 볼 수 없게 되는 것과 같다. 모두를 망치는 경쟁이다. 굳이 경쟁에서 룰을 지키지 않는 것만이 반칙이 아니다. 어떤 경쟁은 경쟁 자체가 반칙이다! 내가 아껴 자랑해 마지않는 이 시장길에서, 반칙하는 가게들 때문에 나는 날마다 또한 괴롭다. 괴롭기는 하되 그럭저럭 어떤 행동을 하지 않고 견뎌온 것을 보면, 이 못된 경쟁을 미워하는 마음이 나를 말려죽일 정도는 아니었던가 보다. 그래도 오랜 세월동안 한결같이 째려보고 욕하면서 오갔으니 참 엔간히도 밉고 싫은 마음이 고집스레 쌓였다. 날마다 더케로 쌓이는 미움이다. 4. 어떤 경쟁은 그 자체로 반칙이다   예전에 가족오락관이라는 인기 프로그램이 있었다. 나도 즐겨 봤는데, 내가 재밌어 한 부분은 바로 그 프로그램의 게임에는 반칙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누구의 의지였는지 모르지만 그 게임들에는 반칙이 용납되지 않았다. 어차피 오락이고 웃자고 하는 게임인데도 누군가 슬쩍 반칙을 쓰면 여지없이 점수가 인정되지 않았다. 떼를 써도 소용없고 속이고 넘어가려 해도 반드시 적발이 되었다. 보는 내내 얼마나 마음이 편하든지—.   그러고보니 이 병통은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듯싶다. 경쟁하는 놀이가 참 싫었다. 일테면 의자뺏기, 모둠짓기 놀이들이 그랬다. 누군가 낙오시켜야 하는 놀이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 약빠르게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서는 의자를 놓치고 낙오된 아이들을 볼라치면 그 눈을 마주하기 어려웠다. 내가 그 입장이 되었을 때 그 낭패, 허망함, 약오름이 마치 한 동이 물을 뒤집어 쓰는 듯 그대로 느껴졌다. 게다가 그 경쟁이 반칙을 동반해서 결과가 바뀌었을 때, 마음 속에 가시뭉텅이가 콱 박혀서는 두고두고 분했다. 그러다 그러다 어느 때인가부터 어떤 경쟁들은 그 자체로 반칙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많은 경쟁이 불평등한 출발을 하고, 공평하지 않은 조건에서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출발선이 반듯하면 공정하다 하고, 같은 도구를 주면 공평하다 한다. 그 출발선에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불평등하고 누구나 세워놓는 그 반듯한 출발선이 불공정할 수 있는데도 그것이 공정하다고 말한다.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출발로 경쟁하고, 그 결과 차지한 것이 천지 차이가 나는데도 그것은 공정한 경쟁의 산물이라고 착각한다. 노력한 것보다 더 많이 차지하고 누리고 사는데도 그것이 경쟁의 산물이면 공정하다고 우긴다. 불평등한 사회 속에서 살아오면서 스스로 불평등한 욕망의 괴물들이 되어버린 걸까. “네가 일한 만큼만 처먹고 살아!”라는 영화 대사를 들으며 속이 후련했던 것은, 대개는 일한 것보다 더 부풀린 댓가를 바라고 일하며, 그런 일은 대체로 경쟁이라는 속성을 갖는다는 이유에서였을 게다.   경쟁이라는 것이 무언가를 획득하기 위한 겨룸이고 보면, 그것은 누군가 무언가를 획득한 것에 대해 정당한 획득으로 승인을 해주는 과정일 수 있다. 경쟁했니? 아, 경쟁하느라 노력했겠구나, 그럼 네가 차지한 것은 공정한 승리의 전리품이다, 땅,땅,땅. 하지만 우리는 안다. 링에 오를 수 있고없고부터도 이미 경쟁을 치룬 결과이고, 그 때의 경쟁은 그런 자들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특권이며, 그로써 얻어지는 것은 많은 이들의 욕망이 덧씌워진 도박판의 판돈이 올라간 과장된 전리품이라는 것을. 우리의 불평등한 욕망은, 혹시라도 내가 차지할 수도 있는 것이기에 음흉하게도 그 판돈을 올려놓은 채로 그냥 놔둔다는 것을.   평평하지도 않은 땅바닥에다, 보이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입구를 가진 운동장에서 승자를 위한 룰을 가지고 경쟁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공정한 것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유리한 조건이 만들어지는 무수한 우연과 행운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 운동장이 평평하다고 말하면 안 된다. 그건 거짓이다. 그 사기에 동참하면 안 되며, 스스로에게 그 욕망을 허용하면 안 된다. 결단해야 하고 스스로를 꾸짖어야 한다.   5. 결단   그래서 나는 시장에서 가게자리의 선을 넘어서 물건을 내어놓는 얍삽한 마음이 참 싫다. 못된 경쟁에 애먼 사람들까지 가담하게 만들고는, 마치 그것이 누구나 갖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욕망이라고 말하는 뻔뻔함이 너무 싫다. 그런 욕망에 솔직한 것이 공정한 세상을 만드는 일이고 그것이 공정한 경쟁이라고 눙치는 게 너무 싫다. 느닷없이 능력있는 자가 많이 차지하고 살면서 그렇지 못한 자에게 베풀고 사는 것이 공정한 세상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이 주목받는 정치인이 되었다. 내 아들하고 나이차가 많이도 나지 않는 그의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나훈아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내 아이가 그가 등판하는 운동장에 서기 어려워 휘청거리거나 그늘에 앉아있을 게 분명해서 그의 말이 싫은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공정이, 숱한 반칙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기 십상이라 그렇다. 운동장에 서기 전에 자신을 포함하여 그 운동장에 설 사람들의 삶에 대해 성찰해야 하며, 그 운동장에서 겨뤄서 차지할 것들이 공정한 댓가인지에 대해서도 살펴야 한다. 그 때 비추어볼 세상에는 자신의 욕망은 제외시켜 놓아야 한다. 그래야 공정할 수 있다. 자신의 욕망을 제외한 세상에 비추어 살펴보고, 공정하지 않다면 그 운동장에 들어서지 않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런 자기 결단을 할 자신이 없는 자가 운동장에 들어서는 것을, ‘위험하다’ 말한다.  .... 아, 경쟁하지 않는 우리 아이들에게, 위험한 세상의 목록이 도대체 줄지를 않는다, 날마다 내미는 점포의 물건들처럼—.                                              김종옥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문화예술특위)​

    게시일2021-06-30

  • 당당한 사회구성원이자 권리 주체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며 자폐 긍지 깃발 ⓒWikipedia    매년 4월 2일이면 어김없이 유엔이 정한 ‘자폐인의 날’을 맞는다. 올해는 코로나 영향으로 인해 인터넷으로 행사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2년 전과 4년 전 행사 갔을 때 별로 마음은 좋지 않았다. ‘자폐인의 날’이라면 자폐인이 주인공이어야 하는데, 자폐인을 키운 부모님들과 고위 관계자들이 그날의 주인공이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부모님들의 노고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며 존경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이어야 할 자폐인들은 들러리 역할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는 자폐 인식만 되어 있지, 이해‧수용은 하지 않으려는 우리나라 사회 분위기와 맞닿아 있다.   우리나라 사회에서 자폐성 장애인들은 이런 소식들을 종종 접한다. 자폐인에게 폭력을 가했지만, 훈육의 목적이기에 죄를 감경했다든지, 자폐인과 관련한 취업 알선은 거의 드물다든지, 자폐인, 정신장애인 등은 교육대학 입학에서 제외된다든지 하는 것 등등 말이다. 우리나라의 자폐인은 권리의 주체가 아닌 객체라는 것을 상기시키기라도 하듯.   자폐(이 말 자체도 부정적이라 나중에 바꿔야 할 필요는 있지만)라는 정체성은 폭력적이고 폐쇄적이라는 것으로 낙인찍는 것 또한, 우리나라 현실이다. 하지만 특성이자, 신경 다양성의 일종이 자폐며, 자폐인들도 장애인이기 이전에 사람이고 권리 주체다.   또한, 한 번 꽂힌 것이 있으면 지루해하지 않고 집중하면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자폐인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기후문제에 전문적인 식견을 소유하며 전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스웨덴의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 동물의 이동 경로에 가장 적합한 가축 시설을 설계한 미국의 탬플 그랜딘(Temple Grandin) 등...   이렇게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자폐인의 역할을 상기함은 물론, 자폐인을 치료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자폐인 정체성을 긍정하기 위한 날이 바로 자폐인 긍지의 날(Autistic Pride Day)로 전 세계적으로 매년 6월 18일을 기념일로 한다.   이날은 보통 가족들과 함께 산책, 피크닉을 하거나 자폐인들이 몸짓하는 것 등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자긍심을 갖는다고 한다. 호주, 영국 등지에서는 자폐인 당사자의 입장을 존중하는 이 날을 더욱 소중하게 여긴다.   자폐인 긍지의 날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폐 당사자들 시각엔, 신경 다양성이 있는 자폐인들이 겪는 어려움은 대부분 자폐성 장애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태도와 이들에 대한 지원 및 합리적 조정(우리나라의 경우 정당한 편의)이 부족해서라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경우도, 자폐성 장애를 질병으로 바라보는 태도, 장차법에 자폐인과 관련된 합리적 조정이 없는 등 자폐인을 대상화하고 차별하는 정책을 취해왔다. 권리 주체로 보는 정책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거의 드물 정도다. 그런 사회에서 사는 자폐인들의 자존감은 바닥으로 내려갈 게 뻔하다. 나도 그랬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폐 정체성을 긍정하고 자폐인들이 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힘이 솟는다. 자폐인을 권리의 객체가 아닌 진정한 주체로 보기 때문이리라. 이를 통해 나도 사회에서 소중한 존재요, 당당한 사회구성원임을 다시 한번 상기할 수 있겠지.   사실 올해 내가 소속된 모임에서 나를 포함한 자폐인들이 6월 18일 공식행사를 하려 했다. 하지만 당시 코로나19로 인한 5인 이상 모임 제한 때문에 올해는 한국 자폐인의 현실에 대해 보도자료를 내는 식으로 ‘자폐인 긍지의 날’ 행사를 대신했다,   3일 후엔 클럽하우스란 공간에서 ‘자폐인 긍지의 날’에 대한 부모, 전문가, 자폐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시간도 있었다. 지인의 초대로 듣게 되었는데, 나는 자폐인과 그 가족 관련 정책이 욕구와 권리에 기반한 정책이어야 한다고 그 공간에서 말했다. 자폐인과 그 가족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바람에서 말이다.   자폐인들끼리 소소한 일상을 자연스럽게 나누며,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는 분위기와 리더십을 키우는 자조모임을 만들면, 그런 모임에 함께 싶은 자폐인들은 점점 많아져 단결해 가겠지. 자폐에 대한 정의를 자폐인 당사자들이 내리고, 전문가와 의사가 아니라 자폐인들이 헤게모니를 쥘 때, 자폐인의 인간다운 삶이 현실이 다가오겠지. 물론 기득권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겠지만 말이다.    자폐성 장애 정체성을 긍정하는 ‘자폐인 긍지의 날’을 생각하며, 작지만 하루하루를 권리를 행사하는 주체이자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살아갈 것을 용기 내어 다짐해본다. 이런 다짐이 그날만이 아닌 1년 365일 이어지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그리고 그런 자폐인들이 많아질 때, 세상은 자폐인들이 인간다운 삶과 행복의 권리를 누리는 아름다운 곳으로 자리 잡아가게 될 것을 말이다.       

    게시일2021-06-29

  •     가족 외식 후 딸이 종종 간다는 카페에 들어갔다. 점잖게 밥을 먹은 후라 우리는 아들의 돌발행동을 예측하지 못했다. 하긴 돌발행동이 항상 평온한 상황에서 보이는 거라 무방비 상태의 혼란스러움에 당황하기 마련이다. 자리에 앉아 있던 아들이 갑자기 빠른 속도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두 손을 흔들고 고개를 끄덕이며 겅중겅중 카페 안을 걷는 듯 뛰는 모습에 사람들의 놀란 시선이 아들에게 꽂혔다. 어차피 벌어진 상황이고 한 바퀴 돌면 자리에 앉는 걸 아는지라 나는 가만히 보고 있었다. 남편은 빠르게 아들을 쫓아갔고 딸은 굳은 표정으로 얼음땡이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더 심하게 소리까지 지르며 한 바퀴 더 돌았을텐데 이제 아들도 그쯤에서 멈추고 점잖아지니 다행이다.“아 진짜! 정하진! 넌 잘 하다가 한 번씩 그러더라. 매너 좀 지키고 살자, 응?”딸은 그걸로 끝낸 동생을 보며 한 마디 했지만 귓등으로 듣는 아들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 딸이 안쓰러우면서 아직도 동생의 행동을 불안하게 보는 게 안타까웠다. 나 역시 그런 게 아무렇지 않게 봐 지진 않아도 태연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같이 움직이면 아들의 행동은 더 커지고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총이 정말 싫어서다. 부모와 누나 입장이 다르겠지만 나의 바람은 딸도 그냥 동생을 봐주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다. 그건 내가 이래라저래라해서 될 일은 아니고 딸이 스스로 그런 마음이어야 됨을 알기에 채근하진 않는다.   첫 월급 탔다고 딸내미가 거한 밥을 산다고 했다. 휴일이라선지 딸 직장 부근의 근사한 식당은 주차장 입구부터 붐볐다. 차 안에서 그림같이 앉아 있던 아들이 발렛 주차를 하려고 차를 세우자 갑자기 차문을 덜컥 열고는 뛰쳐나갔다. 혼비백산한 딸이 바로 아들 뒤를 쫓아갔다. 남편도 딸 뒤를 따라 갔다. 그 셋을 바라보며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덩치 큰 아들이 투스텝을 밟으며 겅중겅중 뛰어가니 주차장 입구는 모세가 지나가는 홍해가 되었다. 순식간이었지만 우리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왜 저래?’로 대동단결되어 보였다. 겨우 아들을 진정시키고 예약된 곳으로 가니 룸이었다. 우리만 있으니 아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했다. 딸이 자꾸 아들을 못마땅해 했다. “넌 아직도 동생 행동이 그리 불편하냐? 잠깐 뛴 걸로 그렇게 인상 쓰고 눈치 주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딸은 그제서야 자신이 좀 과했나 싶었는지 움찔했다.“하진아, 미안. 누나가 요새 일이 많아서 좀 예민했어.”하면서도 완전 미안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너스레 잘 떠는 남편 덕에 분위기는 금방 달라졌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과 차단된 공간이 편하고 좋았다. 딸내미가 장소를 고심하고 정한 흔적이 보였다.   한 때 나는 아들과 동행하면 총 맞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의 차갑고 따가운 눈총. 얼굴 잘 빨개지는 나는 무엇으로도 감출 수 없는 빨간 표정을 보이는 게 너무 싫었다.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해 행동으로 나타내는 아들이기에 얌전하다가도 갑자기 두 손을 흔들거나 손을 입에 대고 후후 분다. 어쩌면 아들의 이런 행동은 평생 가져 갈 수도 있다는 전문가의 말에 좌절 한 적이 있다. 하지 말라고 하면 잠시 멈췄다가 더 심하게 하는 아들이었기에 무서운 인내심을 발휘하여 모른 척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같은 행동을 보이긴 해도 빈도와 강도는 줄어들고 약해졌다. 가족들은 한 번씩 못마땅한 속내를 아들에게 말하지만 그것도 나는 내버려뒀다. 가끔 아들은 ‘나 이거 하는데 엄마 왜 하지 말라고 안 해?’라는 표정으로 내 곁을 서성댔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시선을 피해 외면했다. 그게 얼마나 큰 인내가 필요한 지, 자식 키우는 일이 때로는 면벽수행이란 생각이 든다.   여전히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은 외출이다. 하지만 나는 그 시선을 수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바꿀 수 없는 일은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다는 말을 실천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의 시선이 내가 생각한 만큼 우릴 향해 있는 건 아니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일로 바쁘다. 소리가 나니까 한 번 쳐다본 것 뿐이었다. 그걸 내가 눈총으로 받은 건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물론 노골적으로 바라보면서 동정이나 불편함을 느끼게도 하지만 그래서? 한 번 보고 말 사람들에게 ‘우리 아들이 자폐라서 이래요 저래요’ 말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냥 그러라고 관두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주는 것보다 내가 느끼는 게 더 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마음을 조금 내려놓으면서 나는 아들과의 외출을 즐기고 있다. 때로는 아들에게 길을 묻는 행인도 있다. 아들이 대답해 줄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이 나는 기쁘다.   코로나로 많은 사람들이 ‘집콕’을 하는 가운데 나는 아들과 인적 드문 곳으로 나들이를 많이 다닌다. 점잖게 동행해 주는 아들을 보면 엉덩이라도 툭툭 쳐주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 하지만 성인 된 아들에게 그런 행동하면 안 될 것 같아 마음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머금는다.외출 힘들었던 시절이여, 이젠 안녕!   

    게시일2021-06-16

  • 단상 1 - 문화는 힘이 세다두어 달 동안 다큐영화 <학교 가는 길>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학교 가는 길>은 2017년 서울 강서특수학교 건립을 막아서는 사람들 앞에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서울지부 회원 수십 명이 무릎을 꿇고 호소했던, 이른바 ‘강서무릎사건’에 관한 영화이다. 당시에 이 장면이 찍힌 사진이 보도되면서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고, 이 일은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말대로 ‘한 장의 사진이 사회를 거대하게 바꾸었던’ 사건이 되었다. 강서 서진학교는 서울지부의 소원처럼 ‘떡벌어진 큰 잔치’는 하지 못한 채 2020년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조촐하게 개교를 했다.  그리고 올해 5월 5일, 무릎 사건 그 이전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학교 건립까지의 모든 갈등과 깊은 서사를 담아낸 김정인 감독의 다큐 영화 <학교 가는 길>이 개봉되었다. 이미 지난해부터 여러 영화제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던 터라 영화에 대한 기대가 크긴 했지만, 보란 듯이 전국 개봉관에 걸렸으니 뜻하지 않은 선물더미를 받은 듯 벅차기만 하다.   이 영화는 특수학교 설립에 관한 단순한 싸움의 기록물이 아니다.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이 사는 이야기, 세상의 편견이나 오만과 싸워가는 용감한 엄마들의 이야기, 평범한 사람들의 왜곡된 욕망의 이야기, 그리고 세상이 변해가(야만 하)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가 두루 담겨있으니,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보아 주었으면 하는 기대로, 영화 참여자들은 두어 달이 넘도록 영화 알리기에 매달리고 있다.   우리들의 극성(이 말 말고 달리 표현한 길이 없다, 또한 여기서 ‘우리’란 부모연대를 말한다)과 영화 자체의 탄탄한 작품성과 배급사의 노력으로 무척 많은 매체에서 영화를 소개해 주었고 영화를 본 사람들도 각자의 방법으로 소문을 내준 덕에, 영화는 개봉 열흘만에 유료관객 1만명을 넘었다.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특정 소재를 다룬 다큐영화가 1만을 넘긴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하루에 1만씩 들었으면 하고 바란다.   다큐 중간에 ‘강서4인방’의 한 명인 이은자 씨가 “우린 투쟁이여~!”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날마다 투쟁이다. 이미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게, 부모연대 회원인 것이, 우리가 세상을 설득하고 변화시키려는 모든 행위가 투쟁인데, 지금 우리는 문화운동으로 격렬히 투쟁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이 매우 품위 있으면서 효과적이라고 느낀다.(다른 투쟁이 품위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고 투쟁이 꼭 품위 있어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문화는 투쟁의 선동물로서 도구적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뛰어난 투쟁방식이다. 우리는 1만명을 붙잡고 낱낱의 사람마다 99분씩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미안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응원하겠다고 말한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삶의 어떤 순간에 이 영화를 떠올릴 것이다.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을 위한 어떤 정책을 만들거나 검토할 때, 이 다큐 속에서 생생하게 기쁨과 사랑과 슬픔을 말하던 엄마들을 떠올릴 것이다. 길을 걷다가 어떤 이를 보면서 혹시 다큐 속에서 본 이들처럼 저 이도 발달장애를 가진 이라서 도움이 필요한가를 생각하며 잠시 발걸음을 멈출 것이다.   다큐 속에서 우리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 아이는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게 만들어 주었고, 다음 생에도 그 다음 생에도 내 아이로 태어나 주어야 하는 귀한 존재이다. 그리고 참 미안하다.이 마음을 1만 명에게 전하고 보니, 10만에게, 100만에게 전하지 못해 아쉽다. 그리 되면 세상을 설득하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할 테니.   단상 2- 우리 엄마가 달라졌다 여든넷 된 친정엄마에게 이 영화를 보여드렸다. ‘데모하는 것들’은 국가(보수정권이든 아니든 어느 쪽을 향하든 상관없이)에 위해를 끼친다고 생각하는 엄마에게 영화를 보여주는 것은 선동투쟁이 아닌 모험이었다.(영화 속에서 내가 구호를 외치거나 머리를 밀거나 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으니 그리 큰 모험은 아니되, 내가 몸담은 조직이 이런 무시무시한 곳이라는 것은 노출될 가능성이 분명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나서 ‘우리 엄마가 달라졌다!’. 영화를 보고나서 자식들에게 분부한 제일성은, “너희하고 너희 아이들 꼭 다 봐라”였다. 그러면서 직계자손들의 영화비를 지원하고, 딸의 아들 통장에 용돈을 쓱-, 넣어주셨다. 통화를 하다가 “바쁠 텐데 통화를 길게 해서 미안하구나.” 라는, 내가 태어나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대사를 듣기도 했다.영화를 보고난 뒤에 친정식구들이 모였던 적이 한 번도 없으니 친정식구들이 어찌 변했는지 아직 알 수는 없다. 다만 가족 톡방에서 내가 하는 말에 좀더 빨리, 좀더 상냥하게 답문자를 남기는 것을 보면서 ‘다큐 효과’를 실감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기대어 살고 있으니, 가장 가까이 기대는 사람들부터 이 영화를 보게 해야 하지 않을까. 기대는 어깨가 단단해져야 우리는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큐 효과’가 이 세상에 가득하기를 바란다.    단상 3 - 무릎을 꿇는다는 것 여러 한 고백을 다시 반복하자면, 나는 그 날 그 현장에서 무릎을 꿇려고 나가는 ‘동지’들을 붙잡고 말렸었다. 영화 속, 그들이 무릎을 꿇느라 비어버린 의자들 사이에서 망연자실 서있는 게 바로 나다. 반대쪽 주민들이 소리 지르고 욕하고 행패를 부리는 것을 긴 시간 보면서, 사람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린 자들의 패악질을 어떻게 응징할 것인가에 몰두해 있는데, 동지들이 우르르 나가더니 무릎을 꿇었다. 저런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다니, 저런 무례한 자들 앞에 무릎을 꿇다니, 나는 도저히 무릎을 꿇을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옜다, 까짓 무릎, 나도 꿇어줄 수 있다’는 식으로 맞무릎까지 꿇은 어떤 자 앞에서 당장 일어서라고 고래고래 악쓰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알았다. 우리가 무릎을 꿇은 것은 단지 그 무례한 사람들에게 뭔가를 호소하기 위함이 아니었고, 세상에 불쌍한 표정으로 사정하기 위함도 아니었다는 것을. 새끼를 위해 한 순간 모욕을 당하는 것쯤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는 결기의 표현이고, 그 때의 모욕은 이미 모욕이 아니라는 것을. 정작 수치스럽게 느껴야 했던 것은, 말 아닌 말들이 난무하는 강당에서 엄마들이 무릎을 꿇는 장면을 기어코 만들어내게 했던 세상이다.   세상의 낮은 곳에서 더 낮은 곳을 향해 꿇었던 무릎이었다. 굴욕이 아니라 오히려 수치를 상대에게 되돌리는 행동이었고, 더 낮춤으로써 낮추려는 상대를 낮추어버리는 대단한 저항의 행동이었다는 것을 그날 밤에 깨달았다. 하지만 어쩌랴, 도저히 저들 앞에 무릎을 꿇는 게 너무 싫어서 덩그마니 서있던 사람이 한 명쯤은 있었다 한들 투쟁에 큰 흠집이 나는 건 아닐 테니,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좀 머쓱한 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퉁치고 넘어가려 한다.   그래서 한참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이렇게 적었다.아이야, 무릎을 꿇은 어미를 보고 슬퍼하지 말아라. 이것은 슬픈 싸움의 기록이 아니라, 즐거운 싸움, 승리의 기록이란다. 그리고 어미들은 너희들을 위해 늘 승리할 것이니-.     단상 4- 간절함에 대하여 얼마 전에 우연히 <다시 태어나도 우리>라는 몇 년 전 다큐 영화를 봤다. 티베트의 자기 사원을 찾아가려는 린포체와 그의 스승의 이야기다. 눈보라가 가득한 산 속에서 린포체 앙뚜가 뿔소라를 꺼내 분다. 멀리 있는 그의 제자들이 듣기를 바라며 힘껏 부는 뿔소라 소리는 눈보라와 함께 온 산에 가득하다.    간절함이란 이런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 중에 간절함을 갖는 일이 있다면, 이 또한 차가운 산 속 눈보라 속에서 뿔소라를 부는 것처럼 할 일이다. 먼지와 욕지거리가 난무한 체육관 속에서 무릎을 꿇는 일처럼 할 일이다. 때로는 이 일들이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어쨌거나 상관없다. 이미 그 일 자체가 기적이다. 우리의 단단한 내면의 투쟁, 승리의 기록. 그리고 단상 5 - 김정인을 위하여 (* 진작에 한 식구처럼 된 김정인 감독에 대한 찬사를 기록해두지 않을 수 없어, 이 글에 붙여 놓는다.)   2017년 가을, 먼 데 있는 특수학교에 힘들게 다니는 장애자녀를 둔 엄마들이 욕하고 달구치는 이들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선 토론회가 거칠고 찢겨진 고함으로 세 시간이 지나간 때였다. 동정을 구해서도, 굴복의 표시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대로 단단하게 구축한 진지였다. 오늘만큼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야, 라는 꺽진 항거의 진지. 그 장소에 한 다큐 감독 지망생이 있었다. 그는 장애 쪽도 반대 쪽에도, 어떤 인연이 있어 온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 대한 관심에서 온 것이라 했다. 그 날 그 자리에서 그는 강서 특수학교의 개교까지를 영상에 담기로 결심하고, 이후 카메라를 짊어지고 그 엄마들의 투쟁을 따라다녔다.   젊은 감독의 일은 생각보다 긴 여정이 되고 말았다. ‘한 장의 사진으로 사회를 바꾸었다’는 이 사건으로 학교 설립까지 단숨에 달려갈 줄 알았지만,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 동안에 그는 그의 카메라에 담기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 그들의 투쟁의 여정을 보게 되었고, 그것을 차곡차곡 기록하게 되었다.   무려 5년이 걸린 제작기간 동안 그는 다큐 감독으로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가장 바른 균형감을 갖기 위해 강서 특수학교 이슈의 모든 배경을 취재하고 수집하고 정리하고 분석하였으며, 그 자신의 말대로 ‘작품의 톤앤매너 (Tone & Manner)를 정하는 데 무수한 고심을 해’왔다. 토론회 이후 이 사건을 다룬 수많은 언론보도와 온오프라인의 숱한 매체에 나왔던 모든 콘텐츠를 망라하여, ‘대한민국 영토 안에서 만들어진 모든 관련 콘텐츠를 빠짐없이 모니터링’ 하면서 치우치지 않은 작업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이 다큐는 특수학교를 세우려는 측과 막으려는 측의 대립이 단선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정책 결정으로 인한 폐해, 모순된 사회 구조 속에서 오랜 기간 고통을 당한 주민들의 애환 등 말 그대로 가양동의 역사성, 특수성’을 충실하게 담은 작품이 되었다. 이걸 만든 김정인, 그는 선하면서 결기가 독한 감독이다.   우리 앞에 선물처럼 당도한 다큐 ‘학교 가는 길’은 이렇게 시작되고 만들어졌다. 이 작품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강서 특수학교 설립 투쟁의 주인공들이 정작 자신의 자녀들은 이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나이였다는 것에 감동하면서, 감독이 담아낸, 울림이 깊은 서사에 박수를 보낸다. ​‘우리’가 만들어낸 ‘우리’의 이야기 안에 감동의 지점들이 이토록 다채롭다니-, 영화를 볼 때마다 감동한다. 단지 내 일이라서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일이라서, 삶의 동지들의 일이라서,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귀한 인연으로 빚어낸 일이라서 감격한다.  김종옥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문화예술특위)​ 

    게시일2021-05-24

  • 아들 입술에서 피가 난다. 환절기만 되면 건조한 입 주위를 비비는 아들. 얇은 피부는 금세 빨개지고 급기야 피가 보인다. 딱지가 생겨 이제 나으려나 보다 생각하면 그걸 떼 내고 다시 비비기를 반복하니 상처 부위가 커지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연고나 크림을 발라주면, 살갗에 뭐라도 묻으면 큰일 나는 줄 아는 아들은 그게 없어질 때까지 더 세게 닦아댄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관심을 끊고 아들 스스로 참아서 끝내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상처 주위를 소매로 쓰윽 닦을 때마다 내 몸에 전류가 흐른다. 아들보다 내가 더 아프다. 해마다 이삼월에 그러더니 최근 몇 년간은 잘 넘어갔다. 이제 그 참혹한 모습은 졸업했구나 싶었는데 다시 보게 되니 더 암울했다.   4월 20일 ‘장애인차별 철폐의 날’, 세종시 보건복지부 앞에서 ‘발달장애국가책임제 도입 촉구 전국 집중 결의대회’가 있었다. 나는 장애인 부모라서 우리 자녀들의 권리를 위한 기자회견이나 집회는 대부분 참석한다. 버스와 기차를 번갈아 타고 세종시로 향했다. 지자체에서 장애인의 날 기념식을 중계한다고 보라는 문자가 왔다. 기차 안에서 복지 시설의 이용자들이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을 작은 화면을 통해 보니 오늘이 ‘장애인 고문의 날’이란 생각이 들었다. 해마다 반복되는 이런 행사들, 누가 무엇을 기념하는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평소에 관심 가지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말이다.   정부 청사 도로변에는 오늘 대규모 집회가 있으니 우회하라는 안내문이 여기저기 적혀 있었다. 순간, 실종 사건이 잦은 발달장애인 소식을 이렇게 발빠르게 전해 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절차로 골든타임을 놓쳐 버리는 일이 좀 많은가.전국에서 장애인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활동지원사, 장애 자녀들의 부모 단체인 ‘전국장애인부모연대’ 회원들이 복지부 옆 도로를 메웠다. 발달장애인의 노동권, 교육권, 주거권을 보장하라는 외침이 서글펐다. 우리들의 간절함이 허공으로 분해되는 느낌이라 안타깝다가 나중엔 화가 났다. 듣지 않으려 하고 모른 척 외면하는 건 국회나 정부 부처나 다르지 않으니 사회적 약자로 살아가는 이들의 앞날은 어둡기만 하다. 그럼에도 줄기차게 연대하여 외치는 방법 말고 달리 할 게 없는 현실이다. 집회는 민중가수들과 프랑스 ‘레미제라블’ 오리지널팀, 발달장애 청년들의 공연으로 활기차게 진행되었다. 나는 부모라서, 당사자는 본인 일이라서 온몸으로 투쟁한다지만 장애 운동 활동가들의 모습을 보면 언제나 감사하다. 내 일을 우리 일로 여기고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그들의 일상이 덜 힘들었으면 좋겠다.   아침에 보니 아들 입 주변에 딱지와 피가 엉겨서 마스크를 쓰면 더 따가울 것 같았다. 코로나로 인해 일주일에 겨우 두 번 나가는 평생센터인데 아쉽지만 결석했다. 아들이 집에 있으면 우리 가족의 개인 삶이 없다. 집이 사무실인 남편의 서재에 아들은 거침없이 들어가 업무를 방해한다. 누나 방에 들어가 끌리는 책을 빼서 모퉁이를 찢어 놓는가 하면 서랍을 뒤져 헝클어 놓기도 한다. 작은 상처 때문에 두문불출해야 하는 일은 아들 인생에 적지 않았다. 그러면 가족 누군가도 ‘집콕’하면서 아들과 함께 있어야만 한다. 집에서 일을 하는 남편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누나인 딸 찬스도 많이 쓰고 있다. 장애인 가족은 국가의 테두리 밖에서 가족의 ‘돌려막기’로 살아가고 있다. 가족 없는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 그래서 나는 세종시 집회를 취소하지 않고 참석해야만 했다. 평소에는 아들을 집에 두고 혼자 외출할 때 나는 아들의 존재를 잊고 내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시도 때도 없이 자꾸 아들 생각이 났다. ‘입가 상처가 더 번지지 않았을까?’‘속이 불편한 것 같았는데 괜찮아졌나?’ 자꾸 떠오르는 생각을 애써 지워도 계속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몸과 마음이 서로 다른 곳에서 방황했지만, 일정을 끝내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은 아이돌 공연을 보며 허밍을 하고 있었고 딸은 TV를 보고 있었다. 남편은 외출 중이었다. 오전엔 딸아이가 서점을 다녀왔단다. 남편과 딸이 교대로 집에 있어서 그나마 각자의 볼 일은 볼 수 있었다. 우린 이렇게 아들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아들이 아프기라도 하면 내가 아들 곁에 있어줘야 한다. 급하게 외출이 약속된 날은 취소하거나 다른 가족이 내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 산만한 아들은 집에 있으면서 넘치는 에너지를 감당 못 하고 부산스럽다. 그래도 왔다갔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게 낫다. 힘없이 앉아있거나 누워있는 걸 보는 건 짠하다. 어디가 아프거나 불편한 걸 말이 아닌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니 그걸 잘 알아차려야만 한다.   피범벅 된 입 주위 상처로 마스크를 할 수 없어 열흘 정도 집에만 있던 아들이 드디어 센터를 나갔다. 간만의 여유를 즐겨볼까 하다가 아직도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청와대 앞 ‘세월호’ 엄마들의 피켓팅을 연대하고 왔다. 드러나서 잘 보이는 아들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문다.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삶이 황망해진 부모들의 보이지 않는 상처는 어쩌란 말인가. 사라지지 않을 상처에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진다면 이웃의 삶이 좀 달라지지 않겠는가.사회 문제를 인식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사람들의 연대는 분명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어 약자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치료제가 될 것이다. ​  

    게시일2021-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