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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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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들이 여러분들께 ‘발달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건네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시선으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 계시나요?
이 게시판은 보다센터에서 초대한 각 분야의 칼럼니스트들이 여러분들께 ‘발달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건네는 곳입니다. 발달장애와 관련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칼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또한 발달장애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의 일상이야기,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의 소박하지만 통렬한 이야기와도 공감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은 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게시물 총 120

  • [너와 나의 시간들 09_김명희]​:사고는 한순간4월24일딸과 함께  잠시 회사에 나갔다가볼일이 있어서  외츨을 했었는데 찰라에 남편이 전화를 했다아들이 뛰어 가다가 넘어져서 발목을 접질렀다는 통보였다그래서지금 병원을 가는중이라고 했고나도 뭐 발목을 접질러 본적이 있었던 터라 크게 걱정을 하지않고여기 저기 밀려있던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그런데남편은 진료중인 정형외과에서  X-RAY 초음파 그리고 CT까지 찍었는데 발목 인대가 파열되었고 수술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MRI까지 촬영을 하라고 한다고 했다일반적으로 X-RAY 초음파 CT까지 찍었으면 어느정도  진단이 가능할테고 그러인해 수술 여부도 알수 있을텐데 라는생각에 앞서 혹여 요즘 병원들이 괜히 과잉 진료들을  많이 하는곳들도 있다는 소식을 매스컴이나 주위에서 겪어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들었던 터라 내심 고개를 갸우뚱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남편이 전해주는 말 한마디가 과잉진료 라는걸  확실하게  느끼게 되었는데 그말은실비보험을 들었냐는 간호사의 물음이였고  그로인해 조금생겼던 불신은 더 불신이  깊어져사실 기분도 상하고 지금까지 한 검사가  있는데  구지 MRI까지 찍자는 의도가 과잉진료 때문이라고 생각되고 부터는남편에게 그냥 할수있는 처치만 해 달라고 해서  그냥 오라고 전했다그후저녘에 돌아온 아들은 그정도라면 통깁스라도 할줄 알았는데  신발처럼 생긴 보조기구와 약을 받았다며 ᆢ보조기를 끼고 걷는 걸음은  무겁고 몹시 불편해 보였다슬슬더워지는 기온도 그렇고  씻고 닦는것도 그러했지만 조금 의지해서 걸으면 그닥 심해보이지는 않았다그리고 보조기를 끼고 한달쯤 생활을 했을까?힘들면 출근은 하지말고 병가를 내라고 조언해도 구지 괜잖다며 출근을 하고 약은 꼬박 꼬박 챙겨 먹었고그래고 한달이 지났는데 괜잖아 지려나 했는데    짧지않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처음과 큰차도 없이 여전히 절뚝거리는것은 물론 발을 한쪽 방면으로 착지해서 걸으면서가끔은 허벅지까지 그리고 엉덩이까지 아프다는 말을 하곤했다우리아이들이 일반적인 의사 전달과 일상생활에서의  필요한 언어구사는 별 문제없이  소통이 되지만 이렇게 구체적으로자세히 통증을 표현하기에는 쉽지가 않았다평소에 내가 쓰는 언어의 모방으로 "쿡쿡 쓔셔오"또는"시큰시큰거려요""잘 못걷겠어요 걸으면 아파요"라던가어디가 아프냐는  부위도  여긴가 저긴가 자세히 알수없을 정도로 여기라고 했다가 저기라고 하니때로는 심하게 아프지는 않는데 관심을 받으려고 또는  좀 아프다고 응석인가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그렇지만 그기간이 오래여서과잉진료라고 여겼던 그정형외과에서의 진료는 배제하고 다른 정형외과에 진료를 다시 해 보았다지금까지의 있었던 일과 검사와 보조기를  한달정도 한 상태라고 했더니 우선 또 X-RAY를 찍어보자고 했고결과는 딩연히 뼈가 금이 가고 그런것 같지는 않은데 보조기를 벗고 3~4일 뒤에 다시 오라고 했다 보조기는벗고  3~4일 뒤에 혹시 뼈에 작게 생긴 금은 그때 보일수도 있다는 설명 이었다그래서  그 3일이 지난 오후시간에  또 병원에 다시 들렀는데 환자 너무 많아서 벌써 진료 마감이라고 했다그래서  간 걸음에 옆에 통증의학에 가서 지금까지 아프다고 하니 통증이라도 줄며볼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싶어서 진료를 보기로했다다친 과정과 앞에서 진료를 받은병원에서 한 여러가지 검사와 그래서 과잉 진료인듯 했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거기서는 또우선 초음파를 다시 보자고 했고 초음파를 보는 도중 의사 선생님은 이런 이런 하시면서 보는 내내 긴장감을  주시더니하시는 말이 지금 초음파를 보니 인대 파열이 맞고 이전병원에서 과잉진료는 아닌듯 하다고 했다부연설명으로 인체해부학 책을 펼치고 발목의 인대를 보여 주시며 절대  파열될수 없는 인대까지 상한것 같으니 큰병원으로 이동해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의뢰서를 써 주었다그래서 상급병원을 가기로 결정했고아들은수술이라는 단어를 들은 뒤부터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고 긴장감에 엄마 엄마  계속해서 부르며 평소에  심리적으로 가장 불안하고 초조한때  하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일단 진료 마감이 될지도 모르고 예약이 안된 상태라서 더구나 진료를 못할수도 있어서 병원에  전화를  했더니  지금 곧바로 오면 진료가 가능하다고 하셨다부랴부랴  도착을 해서 진료를 하고 타의원에서 수술을 해야한다고도 전했다수술결과는 MRI를 찍어 본 후에야 결정을 해야했고 MRI를 저녘시간에 찍을수 있어서 입원을 하기로 했다수술이나 입원 이라는 말은 들어는 봤고 또 드라마를 같은곳에서  본 수술과 입원이라는 걸 보고 알고 있었는지 입원하고 수술을 언급할때 부터는더 심각해져서 안절부절 못했다입원해서 기다리다가드디어 MR I촬영시간이 다가 왔고 무엇이라고 설명을 해도 보지도 못했던  생소한 검사에  대한 긴장감을 내려놓지 못했다내심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잘모르는 상황이라 엉겁결에  할수있을거라 믿었다그래서 어찌하던 촬영을 해야 진료를 할수 있으니 시작을 위해 영상의학과에 도착하니 혹시나 폐쇄공포증이 있냐는 질문에 한번도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는 대답을 했고 폐쇄공포이라는  말을 아들이 듣고는 대충은 그게 어떤것이라는걸 알았는지 더 불안해 하며 촬영실에 들어가는데눈물을 흘리며 내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잠깐만  이어폰끼고  있으면 되고그리고 누구나 다 할수있고 너도 할수 있다고 하고 나와서 기다라는데 마음이 짠하고 몹시 기분도 그러했다얼마를 지나 아니나 다를까보호자를 찾았다결국에는  답답해서 못 견디겠다 고 해서  촬영 실패를 했다고 했다병실에 들어와서 저녘밥이 나왔는데도 밥맛이 없다며 먹지를 못하고 밤새 조마조마하며 다음진료를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한번수면 촬영을 하는거로  결정이 났고다음날 오후에 시간이 정해졌다다음날 오전시간 동안 기다림은 지루하고 또 아들의 흔들리는모습이  혹시라도 또 실패를한다면 진료 잔체가 불가 인가? 하는 불안감이 들면서  내가 경험한  공횡장애의 공포가 스물스물 올라 오려고  해서 긴장감을  놓칠수 없었다아들은 그사이 그래도 아는 지인들에게 입원이니 수술이니 하며 불안감을 전달 하고 위로 받기도 했고 그중에는 친한 여사친 두명은  그소식을 듣고 또 병문안을 온다고도 했다그사이 재 촬영시간이 되었고 진정제를 투여후 시도 한다고  설명을 듣고 아들도 나도초조하고 긴장되고  불안한  마음을 꾹꾹 누르며 아들은 촬영실로 나는 대기실 벤치에 앉아서  기도를 했다한참을 기다렸는데 또 다시 보호자를 찾았다어쩐지 쉽게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런것이 아니라 그게 진정제를 투여한 후  재 시도 에서도 수면상태가유지 되지않고 너무 많이 움직여서 또 다시 실패라고 했다더이상은 약물은 용량이 과다여서 예를 들어서 설명하면서 위험할수도 있다고 했다처음에 실패한 자체도 그랬지만또 MRI결과가 없으면 수술이 불가능 할텐데  그후가  사뭇 걱정이 되니 조금 참고 할수도 있을텐데 그리고 왜?또 수면이 되지를 않았는지 ᆢ등등 잡다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촬영에 실패하고 나오는 아들이 안스럽기도 했지만 조금 원망 섞인 투로 좀 참을성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하는 욕심과 차후 또 어떻게 해야하는 건지도 걱정이 되었다그사이 여사친 두명이 서울에서 찾아왔다 두사람 언젠가 같은 알바를 하는곳에서  알게 된 친구들인데케잌과 음료를  사서   대중교통ㅈ으로는 2시간 이상 걸리는 그 먼길을  그것도 오전 근무시간을 마치고 찾아왔다니 너무 고마웠다그리고 서로 위로해 주고 격려하며 걱정해주는 따틋한 마음을 보면서 가득차 있던 걱정들이 그시간 만큼은  줄어드는듯 했다결국 수술은 하지못하고 통깁스를 하는것으로  모든것을 대신했는데 통깁스후에는 목발을 보조도구로 사용해야 했지만   혹시나 어설프게 사용하다 넘어지기도 한다면 더 큰 불상사가 생길것 같아서 며칠간은 힐체어를 임대해서 사용하기로 했다집에서와서 힐체어를 사용하려니불편한게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가장큰 불편함이 화장실 사용이였는데  화장실 갈때도 입구까지는 힐체어에 앉아 가서 그후에는 아빠가 업던지 부축을 해서  겨우 겨우 사용하는듯 일상의 리듬들이 깡그리 어긋나 버리는 현실에 마주하게  되는 등  사소한것에도 어려움이 따라 다녔다3주를 사용해보자고 했지만  1주일은 힐체어의 힘을 빌렸고 그후에는 1주일은  불편해도 그낭 깁스를 한 발을  디디면서 생활해도 된다고 해서 그방법에 도전을 해 보았지만이또한 무겁고 무릎까지 고정해 놓은 깁스는  그 무게만큼 또다른 통증을 호소 했고  2주를 보내고 났는데도 아프다는  말을 달고 살아  너무도 걱정이 되는 매일이였다 그래서 도저히  그냥 볼수가 없어 또다시 찾은 병원에서 그럼  이번에는 깁스를 벗어 보자고 했다 그래서 그날부터는 또다른 시도로 깁스는  떼어내고  보조 신발을 신고 생활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나 아프다고  하는 말들이 잦아들지 않았다또다시 진료를 하면서 수술을 하라고 했는데 깁스를 해서 아직도 이렇듯 걷지도 못하고 통증이 있으니 혹여 잘못되어   영구 장애로 남는것은 아닌지?마음속에 쌓여있던 걱정을 말했더니 절대 그렇지는 않다며 물리치료를 권유했고   영구장애는 절대 안된다기에 안심을 하며지금 까지 물리치료와 굳은 인대를 부드럽게 하는 재활 치료를 열심히 받았다4월24일 사고 이후 어느새 8월 이 다 지나가고 있다그동인 불편하고 힘든 과정을 그래도 잘 견뎌내어 조금씩완전하지는 않지만 거의 정상에 가까운 걸음거리와  통증의 호소도 훨씬 적어졌다그러면서 몸이 불편해서 잘걷지못하는 외삼촌 생각이 났다고 얼마나 불편하고 힘든지 알것 같다고 해서  그경험으로 또다른  사람의 입장이나 마음 하나를  읽을수 있게된것 같아서 한걸음또 성숙해지는 시간이 된것 같았다그리고지난주에는  몇달만에 처음으로 식구들과 스크린을 쳤는데  버디도  두개를 잡고  처음 이글도 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서 그동안의 시름을 말끔하게 씻겨 주었다잠깐의 잘못과 실수로 일어난 순간 의 사고가 얼마나 오래동안  일상에서의 힘듬과 고통이 되었는지 새삼 느꼈고  건강이 중요함을 온가족이  크게 느낀그래서 힘들었지만 그 또한 귀한 경험을  할수있는 시간이였다 

    게시일2024-09-26

  • [너와 나의 시간들 08_김명희]가족과 함께 운동을 하며 ᆢ 가족이 함께 무엇을 공유할수 다는것은 서로에게 더 친밀감이 깊어지게 하고 서로 더 알게 되고 그러면서 가족의 소중 함을 깊이 있게 느끼게 한다는 사실을 언제부턴가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발달장애인을 비롯한 평범하지 못한 아들은  그래서 가족을 벗어나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유대감을 가지고 지속적인 관계형성이 어려우니 어찌하던 가족들과 가장 많은 시간을 가지고 그  경험을 통해 조금씩 성장하고 또 느리지만 발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더구나 어렸을때부터  4살 아래 여동생과 지내온 시간이 많아서인지 유독 여동생에 대한 애정의 깊이가 누구보다도 애틋해 보이는게 사실이다그 가족이라는 울타리안에서  생활하면서 느끼는 의미있고 더불어 함께 라는 생각을 더  기억하게 하고 끈끈함으로 이어지게 하는것들이 있는데그것이 운동이다운동중에서 또 첫번째로 우리가족은 산책을 줄겨한다더구나 위례신도시에 살다가 출퇴근에 소요되는 시간이 너무 길고 힘들어 김포로 이사를 했다그후 김포에 사는 딸과 사위와 가까운 거리에 살게되면서 여러가지 함께 할수있는게 늘어간것 중에 가장 먼저 손꼽을게 있다면 저녘식후   우리와 함께 살고있는 반려견 아지와 딸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몽실이 앵두를 데리고 도 가족이 각자 집에서 출발한후  중간 지점에서  만나 같이 엎치락 뒤치락하며 김포 특유의  특례가 되는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즐거움에 빠지게 된다가마지천을 따라 우측을 따라 걸으면 구래 마산동이  김포 신도시로 형성되어 즐비한 아파트며 김포 호수공원이 잘 다듬어져  있는 반면에  가마지천 좌측을 따라 걸으면 논밭이 즐비해서  봄이면  냉이  쑥을 비롯한 봄나물을 뜯는 즐거움과 주말농장이 넓게  자리해 아기자기한 푸성귀들이 자라는 모습도 개구리 소리와 함게 농촌의 사계가 주는 아름다움이 편안한 농촌에서의 정서를 느끼게한다그래서 우리 두 가족은그렇게  만나서 논밭 사이로 생겨난 농로을 걷는 즐거움에 빠지곤한다해거름이 만들어주는  아름다움도서쪽하늘이 시간차로 변하는  노을의 경이로움도 논사이 한가로이  거니는 백로 떼도  보는 색다른 여유를 만나게 되기도 한다한적한 농로를  우리들의 반려견인 아지 몽실이 앵두와  뛰다가 걷다가 두식구  합쳐 다섯명이 함께 하다 보면 농로가 비좁고  처음에는 말없이 걸었는데 가다 보면 어느새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하게되고 서로들의 일상을 이야기하며 어린시절이야기를 나누다게 된다 그러다보니빨라진 걸음에 숨도 가쁘고 함께 따라나선 아지몽실이 앵두는 힘이들어 혀를 내밀며 헐턱이고  그에못지 않게 우리 모두도 숨이 차기 일쑤지만  그안에서 웃음이 넘치는 우리가 있음을 보게 된다.그후에 또 가끔은 함께 저녘도 먹게 되면 어느새 성인이라고 아들도 맥주 한잔을 받아들고 아빠 와 매제랑 건배를 하는걸 보면 늘 어리기만 하고 그리고 늘 그자리에서 멈춰있는든 해서 조바심을 내고 조금더 빨리 걸어가라고 밀어대기도 했던 지난난들도 생각이 나고  또 어느새 이렇게 자라 때로는 장성해서 함께 모인자리에서 매제에게 동생을 잘챙겨라고하는 말도 전하고 가끔은 유머스런 말로 우리를 박장대소 하게 하는 아들이 있음이 새로운 감사가 되기도 한다그리고가족의 정을 돈독하게 해주는 운동중 그하나는  우리가족에게는 골프라고 생각을 한다아빠 엄마가가 골프를 하고아들이 우연히  골프를 시작해서 골프대학을 가고  졸업을 하면서실력이 일반인들과 라운딩을  즐기며 함께 할 수준까지 되고 때로는  잘못된 스웡을 교정해주기도  하면서 필드에 나가기도 하고 주말이면 셋이서 스크린골프도 즐기는 중이였는데 여동생이 결혼을 하고 아들에게  매제가 생겨나니  관심이 옮겨가 아빠가 아닌 같은 성의  형같은 매제에게서 비슷한 또래의 정서적 교감을 느끼는것 같아서 좋았는데딸 내외가  골프를  시작해 레슨을 받고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관심도과 공통분모가  있어지니아들은 더 신나하고 밝아짐이 눈에 띄게 느껴졌다그리고여동생이나 매제도 평소와는 다르게 자기들은 겨우 입문한 수준에서 바라보는 아들의 골프실력을 보면서 대단하다는 칭찬과 박수를 받으니 으쓱해지며 자신감이 넘쳐나기도 했다평소에는 손 많이 가는  관심을 많이 가지고 지켜봐야 했던 오빠가골프에서는 자신들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실력을 보이며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니 또 다른 느낌을 받으며 한수 가르켜 달라며  더 살가운 행동으로 다가가니 아들도 내심 흐뭇한 표정을 버리지 못했다 언제부턴가주말에는 우리  다섯명이 다같이 모며 스크린골프로 게임을 즐기며 느끼는 즐거움에 빠지게 되었다게임을 하며 자장면도 시켜먹고때로는 벌칙금을 정해 벌금을 내기도 하며 사소한 즐거움으로 하루의 행복이 두배가 되고서로에게 느끼는 정도 새삼 깊어지는 기회가 되어서 운동이 주는 즐거움을 다시 한번 되내게 된다그리고스페셜한  아들이 세상밖으로 알을깨고 나온 계기는 등산이였다초등학교 저학년일때 서울 도봉구에 살면서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학부모와 우연한 기회로 친해지면서 주말이면 도시락을 싸서 산에 함께  오르는 기회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사실 누구와도  교류가 없는  어쩔수없는 외톨이로 누군가를  만나고 함께 무엇인가를  공유한다는건 꿈도 꿀수가 없었다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갑자기 생떼(?)를 쓰거나 특별한 행동으로 이목이 집중될까 두려워 해었던게 사실이였다  하지만 그 가족을  만나고 같은반 친구로 그친구의 부모님과 얼굴을 익히면서 시작된 처음의 만남이 그렇게 세상을 향햔 첫 출발이였다산에 오르면  힘든 순간에  떼를 쓰기도 하고 했지만  순간순간 채찍과 당근을 잘이용해서  때로는 컵라면의 위력을  때로는 혼자보다 함께가 덜 외롭고 덜힘들다는 사실들을스스로 느끼는 시간이 였다  그렇기 되기까지 모든것을 이해하면서 우리보다도 더 부모처럼 아들에게 정성을 보였던 그가족이 감사했다 그후 아파트안에 등산 동호회를 가입 하면서 도봉산 북한산 불암산을 오가며 수십명의 산악 동호회원 분들의 관심과 정성으로 처음과는 몰라보게 사람들과 친해지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손잡고  이끌어주고 응원해ㅈᆢ며 나눠주신 과자 음료  많은 분들의 애씀과 감사한 날들이 쌓여  사람과 사람사이에서의 느끼는 희노애락의 감저믈 언어로 표현하고 끈기와 인내력도  그안에서 얼마나 크게 자라서 차곡 차곡 자리를 잡았는지 돌아보면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게 된다그래서 돌이켜  운동이 주는 의미를 되내며 그중요성을 느껴서골프도 하게 되어된 계기가 되었다지금은 사회일원으로 조금은 삐걱 거리고 느리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최선을 다하고 한걸음 한걸을  자기 걸음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느낀다이번주말에는또  게임에서 어떤 벌칙으로 누가 벌칙을  받게될지 기대되는것도기다림중의 하나가 된다앞으로도 운동을 함께 하며드라이버샷의 경쾌한 소리처럼 아들의 앞날이 쭈~~욱힘차게 펼치지기를 마음으로 기원한다  

    게시일2024-08-20

  •  1. 아스퍼거라고요? 발달장애 중에서 자폐는 자폐스펙트럼장애라 한다. 대체로 자폐라는 범주에 묶는 게 가능하긴 하지만, 그 안에 워낙 다양한 양상이 있다. 영화 ‘레인맨’으로 알려진 서번트가 있는가 하면 아스퍼거도 ‘있었다’. 왜 ‘있었다’라고 썼느냐면 이제는 더 이상 아스퍼거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고기능자폐라고들 하지만, 뭐 이것도 썩 좋은 명명은 아닌 것 같다. 아스퍼거라는 이름을 쓰지 않게 된 데는 극적인 배경이 있다. <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존 돈반, 캐런 저커 지음) 라는 책은 미국의 자폐 운동을 정리한 책이다. 자폐와 관련된 사건과 인물들의 이야기를 매우 상세하게 기록해 놓은 두툼한 분량의 책인데, 여기에 아스퍼거에 관한 사연이 실려있다. 이것을 읽은 다음부터는 절대 아스퍼거라는 단어를 쓰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다. 지금도 아스퍼거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당사자 또는 가족들은 흔히 ‘자폐를 가졌어요’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아스퍼거에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대체로 자폐 중에서도 구분되는 특징들을 가졌으니 그렇게 말하는 것이 정확한 소개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게 좀 불편하다. 자신을, 또는 자녀를 소개하면서 1급이에요, 2급이에요 라고 소개하는 것이 불편한 것처럼. 아스퍼거라는 범주를 만들어낸 작업자의 과정과 의도, 그리고 그 행적을 생각한다면 더 이상 아스퍼거라는 단어를 쓰지 말아야 한다. 우리도 통용하는 미국정신의학협회의 DSM(미국 정신의학회의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에서도 2013년부터는 진단분류표(DSM-5)에서 아스퍼거 장애라는 진단명을 삭제하면서 아스퍼거를 포함해서 모든 자폐적인 행동 조합은 자폐스펙트럼 장애라는 진단명으로 통합했다. 아스퍼거가 특별하게 주목받았던 이름에서 더 이상 쓰지 않게 된 이름이 된 데는 다음과 같은 극적인 사연이 있다. 이제부터는 대체로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에 소개되어 있는 것을 정리한 것이다. 2. 한스 아스퍼거 아스퍼거는 아스퍼거 유형의 자폐를 갖고 있던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그 분류를 만들었던 의사의 이름, 한스 아스퍼거에서 왔다. 한스 아스퍼거(1906-1980)는 오스트리아에서 소아과 의사가 된 후 1932년부터 비엔나 대학병원에서 정신 및 인격장애를 치료하는 프로그램을 이끌었다. 1939년에 오스트리아가 제3제국에 합병되어 나치 치하에 들어갔을 때, 나치는 장애를 가진 유아, 어린이, 청소년을 죽여야 한다는 캠페인을 벌였다. 물론 강하고 우수한 인종만을 남겨야 한다는 우생학적 폭력이었다. 이 때 ‘장애’ 속에는 신체질환은 물론 정신질환도 포함되었다.이 캠페인이 ‘안락사 프로그램’, T4계획이었다. 그 계획에서는 장애 자체의 이유로 죽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비용편익분석을 했을 때 살려둘만한 가치가 있는지 아닌지로 삶과 죽음을 판단했다. 장애아이 하나를 ‘구제’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장애가 없는 아이를 교육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보다 많다면, 세계를 위해 장애는 안락사하여 없애는 게 낫다는 얘기다. 의료인들은 아이를 앞에 놓고 치료와 교육으로 구제될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해야만 했다. 구제될 수 없다면 ‘무가치한’ 것이고, 그렇게 판단되면 안락사라는 이름으로 죽였다.이런 집단살인이 진행될 무렵 한스 아스퍼거는 자신이 ‘자폐성 정신병자’라고 불렀던 일단의 무리에 관한 연구를 지속하고 발표하면서, 조현병과는 다른 이 소년들을 ‘자폐증적’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1944년 박사학위 논문에서 비슷한 성향을 보이는 소년 200명을 관찰한 연구를 발표했는데, 그 성향은 이렇게 표현되었다. ‘대부분 다른 사람, 특히 성인과 교류하기 위해 몹시 애를 쓰지만 관계는 불안으로 가득 차있으며, 따뜻함과 이해를 허용하지 않는 독특하고 까다로운 성격 때문에 관계맺기에 어려움을 겪는 것 같았다. ... 대부분 극히 장황하게 말하며,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성인에 가까운 말투를 구사했다. 또한 철로의 배열 등 어느 누구도 관심이 없는 한두 가지 주제에 푹 빠져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억양 없는 말투로 거의 자동적으로 그 주제에 대한 말만 끝없이 늘어놓으며 주위 사람을 지루하거나 짜증나게 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휘에 대한 타고난 재능이 오히려 사회적 관계에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발견하고 규정한 이 소년들이 정신적 장애를 지닌 것도 아니며, ‘남다른 사고의 독창성과 행동의 자발성을 지닌 매우 지적인 어린이들’이었다고 주장했다. 아스퍼거는 전쟁 시기는 물론 전쟁 이후에도 의사와 연구자로서 성공한 삶을 살았고, 대학교수를 거쳐 1963년에는 비엔나 대학 어린이병원장을 지냈다가 1980년 74세로 숨을 거두었다. 3. 나치와 아스퍼거 아스퍼거가 알려진 것은 1980년에서 1990년대 사이에 ‘자폐스펙트럼’이란 개념을 도입하고 알렸던 로나 윙이라는 미국인 학자이다. 윙은 아스퍼거의 1944년 논문을 발견하고는, 마침 자신이 해오던 연구와 비교하여 같은 집단의 어린이에 대한 연구임을 확신하고 스스로 그 집단에 대해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용어를 쓰자고 주장했다. 별도로 부르고자 했던 이유는 자신이 제시한 스펙트럼이란 개념을 강화하려는 의도에서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증상이 가벼워 자폐증이라는 진단을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 진단명이 자폐스펙트럼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이 진단명은 이미 널리 사용되었고, 1992년 세계보건기구는 아스퍼거 증후군을 국제질병분류 체계에 등재했다. 미국정신의학협회는 1994년에 아스퍼거 장애를 DSM(미국 정신의학회의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에 넣었다. 이렇게 아스퍼거는 그 연구의 업적과 권위를 인정받는 이름이 되었다. 그런데 2010년 5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린 한스 아스퍼거 기념 심포지엄에서 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 심포지엄 자리에는 위에서 언급한 로나 윙을 포함해 자폐 연구의 이른바 권위자들이 한스 아스퍼거의 연구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모였고, 특별히 아스퍼거의 딸과 손주들도 자리했다. 이 자리에서 헤르비히 크체히라(헤르비그 체흐)는 젊은 의료사학자가 충격적인 고발을했다. 그는 ‘한스 아스퍼거 박사와 비엔나에서 나치의 어린이 안락사 프로그램-잠재적 관련성’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면서, 한스 아스퍼거가 나치에게 협조한 구체적 증명들을 폭로했다. 수많은 어린이가 죽어갔던 슈피겔그룬트로 아이를 보내라는 평가서 문서에 한스 아스퍼거의 서명이 있었으며, 한 정신병원의 어린이 210명의 건강상태를 검토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 중 일부는 격리해야 한다는 평가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히틀러 만세’라고 적은 편지도, 자필로 자신이 나치의사엽합 후보자라고 소개한 구직신청서도 나왔다. 이 심포지엄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충격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들이 대단한 연구자라고 기리던, 그래서 자폐증 분류에서 특별한 이름까지 부여했던 한스 아스퍼거가, 사실은 자신의 연구를 갖고서 나치의 학살에 부역했던 인물이었다는 것이 그의 딸과 손주가 있는 자리에서 폭로가 된 것이다. 게다가 한스 아스퍼거는 생전에 자신은 나치에 부역한 사실이 없다고 말했었다. 이 사건이 있은 뒤 2013년 아스퍼거 장애라는 진단명은 DSM-5에서 삭제되고, 아스퍼거는 자폐스펙트럼 장애라는 진단명으로 통합되었다. 4. 다른 게 뭐라고 이 사연을 알고서도 아스퍼거라는 단어를 쓸 수는 없다. 이는 단순히 분류체계의 명칭 변경에 얽힌 에피소드가 아니다. 사람을 나누고 가르는 일은 그 의도에 따라 폭력이 되기 쉬우며,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고 무례한 ‘짓’이 된다는 증거이다. 아스퍼거가 살려둘 가치가 있는 아이들과 그럴 가치가 없는 아이들을 구분하면서, 그가 발견한 독특한 소년들은 어떤 분류에 넣었을지 짐작하는 것도 끔찍한 일이다. 사람은 저마다 다르다. 저마다 한 세상이고 저마다 한 세계이고 저마다 하나의 우주이니, 얼마나 다른가. 비슷한 사람이 내 옆에 있다한들, 그와 나는 다른 스토리를 엮어가는 다른 세계 사람이다. 그 차이와, 무슨무슨 장애인, 무슨무슨 소수자로 분류되는 그 차이는 어느 것이 더 큰가. 어느 것이 의미 있는 차이인가.우리가 보는 거울에는 그저 나와 타인, 나와 내가 보는 사람, 그것만 있을 뿐이다. 다르다고? 다 다르고, 다 비슷한데, 그래서 뭐가 대수라고~?! (2024. 08) 

    게시일2024-08-05

  • 1. 거울을 보다   철학이란 자기 자신에 대한 근심이다, 라고 어떤 철학자가 말했다고 하거니와, 사람이 제일 관심 많은 분야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동물과 사람이 구분되는 지표 가운데 하나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란다. 그래서 거울을 보고 거울 속 사람이 자기인 줄 아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의미라 했다. (그렇지만 나이 먹어가면서 거울 보는 게 참 싫어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거울 속에 보이는 그 순간의 내가 바로 남이 아닌 내가 맞다는 게 참 싫어서 거울을 잘 안 보게 된 나는, 나에 대한 관심도 식어버려 그러는 걸까, 하고 실없는 생각도 자주 하긴 한다.)   거울 속에 비친 게 자신이라는 것을 아는 동물이 꽤 있다고 한다. 원숭이는 물론이고 몇 종류의 새도,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고래도 그렇다고 한다. 문어가 그렇다는 얘기도 어디선가 들었다. 걔들은 거울 속 자신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남의 살 먹는 게 무서워진다. 이렇게 ‘나’를 안다는 건 아주 복잡하고 거창한 일이다. 남의 삶(단지 ‘살’이 아니라)을 빼앗는 행위는,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탐닉할 일은 분명 아니다. 얘기를 시작하다보니 채식찬양 비슷한 데까지 갔다. 그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라, 오늘은 사람을 규정하는 일에 대한 얘기를 하려는 거다.   2. 나누어 보자   내가 어렸을 때는 혈액형에 따라 사람 성격이 다르다 하기도 하고, 별자리에 따라 다르다 하기도 했다. 태어난 띠에 따라 분류하기도 하고, 사상체질에 따른 분류도 했다. 무언가 무리에서 분류하는 것은 그 개체를 이해하는 데 기본이 되는 일이니,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자꾸만 분류하는 건 자연스런 시작일 수 있겠다. 다만 그 기준이나 도구라는 게 비과학적이거나 억지스러운 게 많아서 탈이지.   언젠가부터는 MBTI 로 사람의 성격을 재고 판단하는 게 유행이다. 80억 인구를,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세상에 나타난 이래 모든 인류를 고작 열여섯 가지의 유형으로 판단한다는 건가, 하며 뜨악해 했는데 막상 해보니 ‘고것참 신통하네’ 소리가 나온다. 딸내미는 내 결과표를 조목조목 읽어가며 까르륵까르륵 웃어댔다.   사람을 단순하게 판단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리 보기만 할 것도 아닌 게, 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일정한 도움을 주기도 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 평소 내가 자기를 전혀 공감해주지 않는다고 불만이던 딸내미가 “엄마는 역시 T 야” 하면서 나를 이해(라고 쓰고 ‘포기’라고 읽는다)하는 듯한 말을 하는 것을 보니 과연 그렇다. 딸의 말은, 엄마는 T 형 인간이니 공감능력이 좀 부족하겠구나, 하는 이해의 말이니까 말이다. 물론 나의 T 스러움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은 아닐 게다. “T 가 훈장이 아니니 부족한 줄 알면 고치려고 노력해”라는 살벌한 지적이 들어가 있는 말이기도 한 것을, 나는 ‘논리적’으로 판단해 알고 있다.   3. “나는 발달장애를 가졌어요” 라는 말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 예로부터 다양한 분류를 해왔지만 어쨌든 사람은 그 분류들보다 훨씬 더 다양하다. 그 말은, 어떤 사람 하나는 모든 사람의 개체수보다도 더 복잡다단한 것들이 그 안에 들어있다는 뜻이다. 수십억년 동안이나 얽히고 설킨 조합이니 그렇지 않겠는가. 그래서 사람을 나누고 분석하는 것이 그 사람을 이해하는 데 편하긴 하겠지만, 한 개체 인간을 놓고 보면 끝에 가서는 늘 허망해지기 마련이다. 분류에서 벗어나는 편차가 커서 그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거나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장애’를 놓고 보면 그런 생각을 더욱 많이 하게 된다. 애초에 장애의 판단은 기계적 분류였다. 어떤 표준상태(정상상태)를 상정해 두고, 그것에 미치지 못하면 장애라 했다. 그러나 사람을 함부로 규정하는 건 위험하고 무례한 일이다. 다름을 비정상이라고 말하며 ‘정상화’를 강요하는 것은 예의 없는 짓이다. 누군가 다르기는 하되 그 때문에 불편하지는 않아야 한다. 그를 계속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나, 그를 불편하게 여기는 것 모두 그 사회가 인간에 대한 존중이란 점에서 매우 저열하다는 뜻이다.   발달장애도 그렇다. 나는 우리 아들이 “나는 발달장애를 가졌어요.”라고 말할 때, 그 속에 들어있는 느낌과 의미가 그에게 어떤 것인지 무척 알고 싶다. 그저 나는 당신들과 달라요 라는 걸까, 나는 당신들에게 미치지 못하고 부족해요 라는 걸까, 나는 당신들이 당신들에게 맞춰서 발전시켜놓은 세상과 좀 맞지않는 부분을 갖고 태어났어요 라는 걸까, 궁금하다. 나는 발달장애가 있어서 좀 다른 내면과 좀 다른 감각과 좀 다른 언어를 갖고 있기도 해요, 라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나는 당신들끼리 하는 유창한 언어와 당신들끼리의 공감 감각을 잘 이해할 수 없는데, 당신들은 나의 이런 면을 가리켜 발달장애인이라고 부르지요, 라는 걸까. 이렇게 말할 때 아들이 갖는 느낌은 어떤 걸까. 나는 당신들에게 맞춤한 세상에서는 좀 예외적 존재라서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아야 하는 걸 알고 있어요 라는 말을 담고 있을까.   그렇지만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 두 개를 동원해서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아들을 보니 스스로 심각하게 애석하다 여길 만큼 뭔가 대단히 많은 것을 포기한 표정이 아닌 것 같아 참 알쏭달쏭하다. 내가 그 속까지 앞질러 가서 엉뚱한 감정스위치를 지레 눌러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감정을 논리적으로 재단해서 매번 핀트가 어긋나는 판단을 하는 나는, 정말 T인가 보다. 어쨌든 장애를 가진 이가 ‘나는 장애를 가졌어요’라고 말할 때, 표준형이 아니라거나 규격품이 아니라는 게 아니라, ‘나의 불편함을 덜기 위해 당신들이 내게 해줄 것이 좀더 있다, 그뿐이다’는 것으로 상호간에 온전히 이해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 아들이 “나는 발달장애를 가졌어요.”라고 말할 때 가슴이 아려오지 않을 것 같다. (2024.07)    

    게시일2024-08-05

  • < 아이를 책으로 읽다 2 >   김종옥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문화예술특별위원회)     자폐성 발달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은 각자 다르기도 하고 모두 비슷하기도 해서, 이웃행성의 익숙한 손님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지금의 지구 생물은 모두 38억년 전 우연의 순간, 단 한 방울의 세포에서 시작한 종족(!)들이고,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 차이는 1.23% 밖에 안 나는 형제들인지라, 그 중에서도 단일종족인 80억 인간들 사이의 차이란 적어도 생물의 범위에서는 그야말로 별 것 아닐 테니, 자폐를 갖고 있다 해서 먼 이웃행성의 손님이라고까지 느낄 일은 아니겠다.   그러나 어쨌든 우주에 똑같은 개체란 건 있지 않고, 우리는 인간이라서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생물이라고는 인간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온전히 이해해 본 적도, 이해할 수도 없는 타자의 개체들일 뿐이니, 서로의 ‘다름’은 지구행성 안 부족의 차이라 한들, 이웃행성의 손님 같은 사이라 한들 대체로 틀린 말은 아니다(고 우겨본다).   다르고, 같고, 외로운   어느 시인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고 읊었거니와 우리는 그 섬에서 누군가를 만날 때조차도 서로 낯설어서 외롭다고 느낀다. 자폐를 갖고 있는 이들이 느끼는 낯설음과 외로움은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증은 뭍에서 섬을 바라보는 마음, 섬에서 뭍을 바라보는 마음과도 같다. 섬이란 게 애초엔 옹긋하게 솟은 산봉우리였을 테니, 산으로 서로 연결된 산맥이었는데 그 사이로 물이 들어와서 산봉우리가 섬이 된 것일 테니, 뿌리에서는 서로 한 바닥의 땅으로 단단히 이어져 있는 섬을 보면서 외롭다 애처로워하지는 않아도 될 일이긴 하다. 그러나 굳이 거기 붙들려 있는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입장을 생각해 외로움에 연민하는 이유는, 그렇다, 외로움이 인간의 본질이라서 그렇다.   나는 나의 외로움이 나의 본질이라서 본질적으로 청승맞다. 나뿐만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 청승을 벗어나보려고 섬에도 가보고 뭍에도 가보고 산꼭대기에도 가보고 하는 것인가 보다. 아무튼 외로움과 본질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데, 자폐를 가진 이들을 볼 때면 더욱 그렇다. 우리는 어느 주소지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눌 것인가.   어쩌다 자폐를 가진 이들이 스스로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참으로 반갑다. 그 이야기를 글로 만나면 더욱 반갑다. 대화에는 너무 많은 주변 정보가 있어서 집중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은데, 글로 적어놓으면 오직 글씨만 보면 되니까 이해가 명료해진다. 글을 쓴다는 건 그래서 어려운 작업인데, 그 어려운 작업을 해주는 그들이 고맙다.   우리는 그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통로를 하나 얻는 셈이다. 통로라는 것은 양쪽이 뚫려 있는 것이니, 또한 우리는 그것을 통해 서로의 마음이 오가는 것을 보게 된다. 글을 써주는 이들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갖고 있는 다른 발달장애인들의 마음까지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좋은 대변자들, 아니 대독자들(대신 읽어주는 자)을 잘 찾아냈으면 좋겠다. 연결되어 있으나 따로 떨어져 있는 섬들을 만나서 그 섬에는 어떤 나뭇가지, 어떤 풀이 흔들리며 자라 어떤 꽃이 피고 있는지 자꾸만 듣게 되면, 우리들이 갖는 차이란 기껏해야 취향의 차이쯤 되는 거라고 생각하게도 되지 않을까.   < 나는 괜찮은 사람입니다. >   사람들은 대체로 너는 어떤 사람이냐고 물을 때, 나는 좀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요, 라고 답하며 살아갈까? 아마 그럴 것 같다. 이 책 제목을 보고, 몇몇 사람에게 너는 좀 괜찮은 사람인 것 같으냐고 물어봤더니, 대체로 그렇다고들 했다. (물론 내게도 물어봤지만, 아직 답을 다 하지 못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답을 하기에 앞서 붙여야 하는 사설이 너무 길어서다. 나는 괜찮기는 한데 좀 번거로운 사람인가보다.) 그런데 우리말에서 ‘괜찮다’는 말은 품종이 괜찮다는 평가와 함께, 별 탈이 없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로 너는 괜찮으냐고 묻는다면 나는 절대 안 괜찮은데 그냥저냥 꾹꾹 눌러 참고 있는 사람이야, 라고 울분에 찬 대답을 할 사람들이 많을 게다. 물론 언제나 평정을 유지하는 괜찮은 마음의, 썩 괜찮은 사람도 많겠지만. 이 글을 쓴 일본인 청년 히가시다 나오키는 일곱 살에 자폐 진단을 받았다. 그는 남과 대화하기는 어렵지만 글자판의 글자를 가리키며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그는 자기를 설명하는 여러 권의 책을 썼고, 그 중 <나는 왜 팔짝팔짝 뛸까?>라는 책은 같은 이름의 다큐멘터리로도 만들어졌다. 이 다큐필름은 작년에 여러 곳에서 공동체상영을 했었는데, 나도 가서 보았다. 히가시다 나오키는 현재 일본에서 강연도 많이 다니며 자폐장애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왜 팔짝팔짝 뛸까?>는 몇 해 전 우리나라에서도 출간되었지만 지금은 절판되어 구할 수 없어 아쉽다. 다만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한 글들이 있어서 그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았다.   히가시다 나오키의 글을 읽으면, 자기의 어떤 의식과 행동이 비장애인들의 그것과 다른지를 꼼꼼히 관찰하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감탄하게 된다. 자폐를 가진 모두가 똑같은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서 주변의 여러 사람이 떠올라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성의 있게, 이렇게 곡진하게 자기를 설명하는 글을 만나는 건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자기 의지로 자기 행동을 통제하기 어려워 마치 ‘고장 난 로봇 같다’. 또 그에게 기억은 선이 아니라 점 같은 것이어서, 10년 전 기억이나 어제의 기억이나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나는 이 소개를 읽고서 비로소 멀고 가까운 차이가 없이 바로 어제 겪은 일로 어떤 기억이 호명되어 나오는 이유를 짐작하게 되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선이라면 먼 데 있는 것은 그 거리만큼 작거나 흐려지기 마련인데, 점이라면 퐁퐁 솟아나는 거품처럼 갑자기 득달같이 달려들어 눈앞에서 터질 수 있는 거다.) 그는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온 세상이 한꺼번에 말을 거는 것처럼 느껴져 인사하는 사람을 못 알아볼 때가 있다’고도 했다. 누군가 인사를 해올 때 곤혹스러워 눈길을 피하는 일도 많았을 게다. 그런 당황스런 순간을 그는 이렇게 적었다.   “... 나는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말을 잘 못하는 탓입니다. 아는 사람에게도 인사를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게는 인사가 몹시 어려운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사람을 만나면 ‘안녕하세요’하고 한마디 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여러분은 이상하게 여기겠지요. 내게는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내 눈에는 사람도 풍경의 일부로 보일 뿐입니다. 산과 나무, 건물과 새, 모든 것이 한꺼번에 내게 말을 거는 듯한 느낌입니다. 물론 그것들 전부를 상대할 수 없으니까, 그때 가장 내 관심을 끄는 것에 마음이 움직입니다. ...인사를 하기 위해서 사람만을 구별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그는 슬픔이 많다. 어렸을 때부터 눈물과 슬픔이 많았고, 그 기억의 보따리가 크다. 그의 표현대로 그가 안고 있는 ‘마음의 어둠은 어떤 마법을 걸어도 사라지지 않는’ 것인가 보다. 잘못 들어온 다른 세계 속에 있는 것 같은 이질감이 그를 슬프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아마도 본질적인 외로움일텐데, 그걸 이질감으로 느끼게 하는 이 세상은 그에게 무례하기 짝이 없다. 예전에 보았던 애니메이션 ‘매리와 맥스’에서 발달장애가 있던 주인공 맥스는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나 아닌 게 되는 게 소원이었어.” 자신이 보기에 스스로 ‘괜찮은 사람’인 히가시다 나오키, 그도 이런 외로움과 이질감이 뒤섞인 슬픔의 그늘 속에 웅크리고 앉아있을 때가 많은 것이다. “... 나는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에 허둥댑니다.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습니다. 모두 바늘 같은 시선으로 나를 보기 때문입니다. .... 이성으로 감성을 통제하고 대화로 생각을 전달하는 현대사회를, 나는 발을 잘못 들이민 다른 차원의 세계처럼 느낍니다. ... 사람들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칠지, 그런 상상만 해도 나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어집니다. 내가 안고 있는 마음의 어둠은 어떤 마법을 걸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 여러분은 할 수 있는 것을, 나는 하지 못하기 때문에 몇 번이나 내 자신이 싫어졌습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처지를 누구 탓으로 돌리거나 언젠가는 평범해지리라는 희망에 매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 나는 어렸을 때, 늘 울기만 했습니다.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몸속의 수분이 전부 눈물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하염없이 흘러나왔습니다. 뭐가 그렇게 슬펐는지, 지금은 그 이유 하나하나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다만 나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심정과 있는 그대로의 나로 있을 수 있는 곳을 원했던 기억만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 그가 ‘괜찮아지는’ 일은 가능할 것인가. 본질적 외로움과 이질감으로 슬픈 그가 그늘 속에 앉아있으면서도 춥지 않은 날은 가능할 것인가.   “... 옛날의 나는 출구가 없는 캄캄한 터널 속에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때 내가 얼마나 고뇌했는지, 얼마나 난감했는지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내가 원한 것은 그저 꼭 안고서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그렇게 해준 후에야 비로소 인간으로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습니다. 행복한 어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가족 덕분입니다. 내가 흘린 눈물만큼이나 가족도 울어주었다는 것을 나는 잊지 않습니다.”   담벼락 아래 그늘이 있고 거기에 우리 아이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다. 나도 그 그늘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이다. 엄마들은 늘 그래왔다. (<나는 괜찮은 사람입니다> 히가시다 나오키, 흐름출판 )   <뒤바뀐 세계 >   이 책은 빅토리아 그롱댕이라는 프랑스 청년이 쓴 소설인데, 그는 비장애인이다. 다만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자폐인의 세상 속에 있는 소수자 비자폐인의 이야기라는 독특한 구조 속에서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에 대한 큰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무척, 엄청 재미있다.   그는 열 네살 때 장애인과 함께 하는 캠프에서 자폐장애인들을 만나 관심을 갖게 되어 자폐에 관한 공부를 하고는 열 여섯에 첫 소설을 쓰고 열 여덟에 출간했다. 이 소설 속 배경은 자폐인의 세상이다.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만 태어나는 그 세계는 자폐에 맞게 짜이고 계획된 세상이다. 그 세상 속에 단 9명의 극소수 비자폐인이 있는데, 소설 속 주인공은 바로 그 비자폐인이다. 그러니까 그 세계 속에서는 비자폐인이 소수자이고 약자이다. 이 세상에서 비자폐인인 주인공은 ‘정상인’이 아니라 ‘장애인’이 되어 몹시 외롭고, 자신이 비자폐인이라 자폐인 맞춤한 세상에서 ‘쓸모없는’ 존재라서 슬프고 혼란스럽다.   자폐를 갖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서 관심을 갖고,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고 싶어서 관찰과 공부를 하고는, 정상과 비정상, 장애와 비장애를 전복시킨 이야기를 만들어낸 이 기특하고 아름다운 젊은 청년의 소설은 매우 통쾌하고 재밌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폐 관련 소재들이 이야기 속에 들어가 있어서, 그 익숙한 장치들을 보면서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일테면 ‘엄마아빠는 어떻게든 나를 치료하고 싶어했다’ 같은 대목들이다. 실제 치료실 얘기가 이어진다.)   자폐인의 세계에서 주인공이 겪는 혼란은 바로 여기 비자폐인의 세계에서 자폐인이 겪는 혼란과 마치 거울을 마주한 것처럼 기묘하게 같다. 왼쪽 오른쪽이 바뀐 거울 속의 상처럼 말이다. 성의 있는 관찰, 공들인 묘사, 수줍지만 통쾌한 풍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푸릇한 사랑. 참으로 사랑스런 소설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빅토리아 그롱댕의 팬이 되기로 결심했다. 어서 빨리 소설을 자꾸만 써대기를.   “나에게는 미래가 없다. 아무도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장애인’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과소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그것은 편안한 고통이었다.“   “내 인생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 인생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아픈데, 그것을 읽는 나는 자꾸만 웃음이 나오고, 그러다 발달장애를 가진 친구들에게 주는 그의 이 선물이 고마워 여기저기 열심히 소문을 냈다. 다만 이 글을 아들에게 읽히는 데는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전복된 세상 이야기라는 걸 아이는 상상하기 버거워했다. 아니 귀찮아했다. 귀찮은 건지, 버거운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게임에 쓸 시간을 할애할 정도로 당기지는 않는 눈치였다. 수많은 게임 속 설계된 가상의 세계를 오가고, 그 세계관들마다 갖고 있는 구조를 나름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들에게, 장애와 비장애, 정상과 비정상이 전복된 이 세계 이야기가 충분히 이해되고 흥미로울 거라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이 소설의 당사자 반응이 궁금했던 내 소망은 아직도 실패 중이다. (<뒤바뀐 세계> 빅토리아 그롱댕 지음, 한울림스페셜) 

    게시일2024-03-06

  • < 아이를 책으로 읽다 >   김종옥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문화예술특별위원회 위원장)     - 더 누리는 것의 고마움 때로 옛날 사람들보다 지금의 내가 훨씬 더 좋은 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입고 먹고 자는 일에 덜 불편하고 아플 때 치료받을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으니 복지 수준이야 말할 것도 없이 더 좋다. 먹고 자는 일 말고, 예전 사람들보다 훨씬 더 좋은 건 또 무엇일까. 아마도 세상을 읽어낼 도구를 더 많이 갖게 되었고, 이에 보태서 보고 듣고 누릴 기회가 더 많다는 것이겠다.   물론 내가 누리는 것을 80억 인류 모두가 누리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누리는 것을 내가 모두 누리는 것도 아니어서, 누린다는 행위는 참으로 불평등하고 미안한 일이거니와 그 점에 있어서는 마냥 예나 지금이나 훨씬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 요컨대 ‘누린다’는 것이 일정 부분 호사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상당 부분 미안한 마음을 동반해야 마땅하다는 말이다. 그렇다, 그저 좋다고 하려니 미안해서 하는 말이다.   서두가 거창하지만 실은 무엇보다 책에 대해 고맙다고 말하려는 참이다. 서점에 가서 바닥부터 천정까지 가득 꽂힌 책을 볼 때 나는 수백만 년 전 원인류에서 달려와 현생인류에 이르러 내가 지금 인간역사의 가장 끝에 도달해 있는 것이 감사하다.(물론 어떤 인간도 그가 태어난 곳이 역사의 가장 끝일 테니, 끝이라는 사실에 특별히 감사할 일은 아니나, 이만큼이나 쌓인 지금에 내가 도착한 이 행운에 소박하게 감격해서 하는 말이다. 오십년 후, 백년 후에 태어나지 못한 것은 애석하지 않느냐고 누군가 멱살 잡고 묻는다면 슬며시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른다만.)   책을 읽는 마음   어쟀든 나고 죽고 함께 살고 있는 그 모든 인간들이 해주는 이야기가 책에 그득하니 이처럼 고마울 데가 없다. 그 중에서도 우연히 내 손 안에 포착된 책들로부터 얻은 즐거움과 경이로움, 반성과 웅숭깊은 위로는 각별한 가운데서도 더 각별하다. 책들은 책꽂이에 그저 꽂혀있는 게 아니라 어깨를 이어 도열해 서서 내게 다정한 말을 건네는 얼굴들 같다.   연애를 책으로 배웠다, 고 하면 현실 경험 없이 글로 배운 일반론이 다인 줄 아는 헛똑똑이에 대한 조롱이지만, 우리는 내가 맞닥뜨렸으나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책에서라도 답을 찾아보려고 애쓰기 마련이다. 그 책 속에서 꼭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조언과 질책과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으니 어찌 고맙지 않으랴. 게다가 책을 읽는다는 행위 자체, 그 시간 자체가 내 안의 얼룩과 상처를 닦아주는 일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내가 아이를 낳고 서툰 어미가 되어 아이의 눈을 바라보았을 때 번번이 아이의 눈길은 내 눈동자에 멈추어 맺어지지 않고 그 너머 어떤 심연으로 달려갔다. 그것이 신비롭고 경이로왔으나 한편으로는 불안하였다. 아이의 발달에 관한 책들을 이것저것 손에 잡히는 대로 사보는데 자꾸 한 대목에 가면 마음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나며 멈추게 되었다. 숱한 의심과 회의와 확신과 미련이 오고가던 끝에 발달장애 진단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한동안 발달장애 관련한 책들을 뒤지며 매달렸을 때 내 마음은 아마 한 가지 기대를 품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사례와 우리 아이는 어딘가 다르지 않을까, 그 다른 점이 우리 아이를 발달장애와 매우 흡사했으나 그 비슷한 길을 돌아서 결국 조금 특이했던 ‘보통 아이’로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을 게다. 그리고 그 때 내가 읽었던 책들은 대개 처절한 실패담이 아니고, 성공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더라도 어쨌든 어지간히 제법 좀 살아낼 수 있었다는 우쭐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랬으니 그 책들을 통해 애초에 기대했던 목적을 이룰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우연히든 뒤져서든 잡아 올린 책들은 내게 적잖은 위안이 되었다. 그 위안이란, 몰랐던 것을 알게 된 위안, 막연한 불안감을 떨치게 된 것에 따른 위안이다. 그리고 책이란 것이 늘 그렇듯 또다른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은 언제나 깊은 위로가 되었다. 특히 장애의 역사, 자폐장애부모 운동의 역사 같은 책들은 우리가 지나오거나 겪고 있는 일들을 일정한 흐름 속에서 보게 해 주었으니, 우리 운동의 방향성을 잡는 데 도움이 되었다.   엄마, 이 책은 내가 쓴 거에요   그런데 무엇보다도 내가 감명을 받은 건 당사자가 쓴 책들이었다. 나는 당사자가 쓴 글을 통해서 내 아이, 우리 아이들과 비로소 말을 건넬 수 있었고 말을 들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대화라는 것이, 똑같은 기술을 가진 쌍방간에서 가장 쉬운 일이고 보면, 발달장애를 가진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대화란 서로 엇나가기 일쑤이고 속깊은 마음을 주고받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게 틀림없다. 그 사이에는 그저 열심히 듣고 열심히 말해서 서로의 언어를 더 많이 이해하는 것 말고 다른 게 없다. 사실 세상 모든 사람과의 대화가 마찬가지일 테지만.   발달장애를 가진 이 가운데 누군가 자기 얘기를 많이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통해 나는 그 세계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행운을 얻는다. 남이 대신해 짐작으로 해 준 이야기 말고, 스스로가 하는 말이란 얼마나 귀한가. 나는 커다란 벽에 난 작은 틈 같은 그 귀한 글들에 감사한다. 그러나 그 귀한 글들을 만날 기회는 애석하게도 많지 않다. 책을 꾸려낼 정도로 자기기술이 가능한 발달장애인이 많지 않고, 그들의 서술이 가능하도록 도와서 잘 끌어내는 경우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발달장애의 스펙트럼이 넓은데다가 글을 쓸 정도의 능력은 템플 그랜딘 쯤 되는 고기능자폐나 장애 정도가 가벼운 이만 가능한 특별한 경우이니 그들의 글을 통해 보통의 발달장애를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훌륭한 통로가 되어준다고 믿는다. 그나마 열려있는 작은 통로, 그나마 들여다 볼 가느다란 틈이 곧 시작이다. 커다란 실꾸러미에서 한 가닥 풀려나온 실마리가 바로 그들 자신이 쓴 글들이다. 저마다 갖고 있는 통로와 틈을 모으고 쌓으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보게 될 게다. 게다가 그 통로와 틈은 일방이 아닌 쌍방이니 우리의 행복한 소통은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발달장애를 가진 이가 직접 쓴 글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그리고 세상에 이미 나와 있는 그 글들을 더 많이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발달장애를 가진 청년(소년에 가까운)이 쓴 ‘별종 괴짜 그리고 아스퍼거’라는 책을 발견했을 때 우리 아이를 이해하는 꼭 맞춤한 망원경이라도 만난 듯해서 몹시 기뻤다. 바로 내 아이가 들려주는 말을 읽는 것 같았다. 아이에게 권했더니 단박에 훌렁 읽고는 기쁜 표정으로 내게 책을 내밀며 말했다. “오, 엄마, 이건 제가 쓴 책이에요.” 나는 그 책을 통해 아들의 많은 것을 이해했고, 아들은 자신의 많은 것을 엄마에게 이해시켰다. 발달장애를 가진 이가 쓴 글들이 꽤 있을 테고, 그것들은 그들이 갖는 다양함만큼이나 다양한 발달장애인들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유용한 통로가 되어줄 것이다. 남의 세계를 이해하는 건 너무 어렵고 불가능해 보인다. 물론 내가 내 세계를 이해하는 것 역시 어렵고 힘들다. 그러나 누구라도 자기 세계를 정성껏 들려준다면, 그리고 그걸 포착하는 성의가 있다면 나를 제외한 숱한 세계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별종 괴짜..’를 만난 이후 아들은 인터넷에서 발달장애와 관련한 텍스트들을 종종 채집해서 본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자기정체성에 관한 생각들을 쌓아가고 있다. 나는 언젠가는 아들도 자기 이야기를 기술할 거라고 기대한다. 곁에서 그 작업을 행복하게 도울 참이다.   * 붙이는 말 : 작년 가을에 아주 재미있게 읽은 책이 두 권 있다. 하나는 발달장애를 가진 청년이 쓴 자기 이야기이고, 하나는 발달장애를 이해하려는 청년(소년에 가깝다)이 쓴 소설이다. 다음 칼럼에서는 이 두 책을 소개하려 한다. 그 전에, 장애는 물론이고 모든 이의 인권에 관심 있다면(마땅히 누구나 그래야 하고) 우리는 모두 이 책을 기본서로 먼저 읽고 시작해야 한다. <선량한 차별주의자>(김지혜, 창비)가 그것이다. 

    게시일2024-01-29

  • 아들과의 만남      내가 장애 부모로 사는 건 순전히 나의 입방정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날 내가 했던 생각이 내 인생의 복선이 될 줄 몰랐다. 학교에서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데 대여섯 살 되는 아이와 엄마가 나왔다. 자폐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고, 그로 인해 엄마가 눈물 바람으로 사는 걸 보았다. 시청자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었던 걸까? 마지막 장면에 아이는 두 팔을 벌리고 날아가는 포즈를 취했고 엄마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그래, 네가 날고 싶은 곳 잘 갈 수 있게 엄마가 최선을 다할게.”먹던 밥을 오물거리며 ‘내게 저런 아이가 오면 난 잘 키울 수 있을 거야.’라고 중얼거렸다.특별한 아이를 보낼 때 신들이 모여 회의를 한다고 들었다. 그 신들은 겨우 중학생 아이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독백을 잊지 않았다.결혼하면 그만둔다던 직장을 아이 낳을 때까지로 미뤘다. 첫아이를 친정 엄마에게 맡기고, 둘째 생기면 전업주부가 되려고 했다. 하지만 6년 터울의 아들이 내게 왔을 때도 나는 직장을 놓지 못했다. 제법 높은 연봉을 포기하고 남편의 월급만으로 서울에서 사는 건 빠듯했다. 두 아이를 키우며 나는 직장 생활을 이어 갔다. 첫 아이를 친정 엄마가 키웠기에 둘째인 아들이 내게는 첫 육아 경험이었다. 서툰 엄마로 10개월을 보내고 복직을 했다. 딸은 어린이집에, 아들은 이웃 할머니에게 맡기면서 힘겨운 날들이 이어졌다. 저녁 6시가 되면 아들이 엉금엉금 기어 현관 앞으로 간다는 할머니 말에 제법 똘똘한 아이라 생각했다. 벌써 엄마 퇴근 시간을 감지하다니….어느 날 일찍 퇴근해서 갔더니 할머니는 화장실 청소 중이었고 아들은 TV 화면을 손으로 닦고 있었다. 저 전자파를 어쩌나 싶어 찜찜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색은 하지 못했다. 마침 자영업 하던 동생이 잠시 쉬는 사이 나를 도와주러 서울로 왔다. 한결 수월해진 일상 속에서 아들은 설거지하는 내게 포대기를 가져와 ‘어부바’를 말하며 엄마에게 치근대는 일이 잦았다. 출근하는 내 옷을 붙잡고 못 가게 하는 날도 있었고 심지어 울기까지 했다. 나는 아들이 방에서 노는 사이 몰래 집을 빠져나오며 우는 아이를 외면했다.“언니야, 아침에 언니 출근하고 하진이가 안 보여서 찾았는데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서 울고 있더라.”동생의 말에 심장이 내려앉았지만, 며칠 고민만 하다가 명퇴 기회라도 잡고 싶어 계속 다녔다. 동생이 아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서 본인 일을 알아보던 한 달여간, 아들 없는 일상은 평화로웠다. 보고 싶은 마음보다 편안함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다가 동생이 새 일을 시작하면서 아들만 내게 왔다. 부산에서의 그 한 달 동안 아들을 유심히 관찰했던 형부가 내게 말했다.“느그 아들 좀 이상하다. 불러도 대답을 안 해서 못 듣나 싶었는데 TV 광고 소리 나면 쏜살같이 와서 보더라. 눈맞춤도 잘 안되고….”사내아이라 유별난 거랑은 다르니 병원을 가 보라고 했다. 걱정스런 마음으로 아들을 유심히 보니 돌 무렵에 했던 행동을 하지 않았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물으면 내게 뛰어와서 안기던 아들은 사라졌고 잘 울고 떼쓰기가 늘었다는 걸 형부 말을 듣고서야 알았다.간호사 친구가 특수교사인 지인을 우리 집에 보냈다. 둘이 얘기하는 동안 혼자 노는 아들의 움직임을 살피더니, “자폐라고 하기엔 성급하고요, 자폐 성향이 있어 보이네요. 이제 17개월 된 아이라 병원에서도 쉽게 진단은 못할 겁니다.”바로 퇴직을 했고 아들과 함께 병원 쇼핑이 시작되었다. 지인에게 소개받은 병원에서 그럴듯한 말을 들었다. “자폐인지 지적장애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교육 방향이 정해져요.”그랬다. 두통인데 지사제를 먹으면 안 되는 거였다. 하지만 발달장애로 묶인 자폐성장애와 지적장애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았다. 많은 아이들이 자폐와 지적장애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자폐 성향으로 인해 지적장애를 동반하는 경우를 지적장애로 진단하는 것을 아들이 성인 되고서야 알았다. 교육 방향이 다르다고 말한 의사 말처럼 다르게 교육하는 기관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남들 하는 것을 따라 하면서 아들을 들볶았다. 아들은 도에 지나친 온갖 치료와 교육으로 학습된 무기력감과 나름의 백일몽으로 견뎌 내고 있었다. 아들이 내 치마폭을 붙들며 함께 있어 달라는 신호를 보냈을 때 직장을 그만두고 아들 곁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전혀 연관성이 없다는 전문가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때 그랬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TV 보며 했던 중학생 철부지의 독백도 주워 담고 싶었다. 지난한 과거를 뒤적이며 아들과의 혹독했던 동거를 떠올리려 한다. 과도한 치료와 교육으로 아들을 더 힘들게 했던 후회와 반성보다는 지금 행복하기에 집중한다. 밝은 표정의 아들을 보면 이렇게 살다 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목표는 ‘따로 또 같이’ 사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 #작은책_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게시일2023-12-04

  • [슬기로운 청년생활 06_박창택]   평등한 가치     누구나 수상해서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존재할 겁니다.   그건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마찬가집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칭찬받고자 대회에 참가 의사를 밝힌 적이 있기에 직접 공모전에 나가본 경험이 있었는데, 적어도 입상 후보쯤은 되리라 생각했지만, 설마 대상을 받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습니다.   그렇게 장애인인 저도 생각지 못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비장애인이라고 다르지 않겠죠, 대상을 받은 것도 그렇지만, 전 발가락이 부러진 적이 있어선지, 항상 주의를 기울이게 됐습니다.   애초에 발가락이 부러진 건 완전한 방심이었기에 진심으로 깜짝 놀랐지만,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모두 일상에서 주의를 기울여야겠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윽고 발가락이 완치되며, 일상을 보내던 중 주변 놀이터에 있는 미끄럼틀과 벤치에 테이프가 감겨져 있자 밖에서 있을 곳이 없어서 마음이 그리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발가락이 제대로 완치된 것만큼은 확실한 사실인지라 늘 하던 것처럼, 업무를 수행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제가 근무하는 곳에서 쓰레기를 버리는 곳에 있던 아저씨가 여 직원들에게 손찌검을 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모두 소중한 사람인 만큼 부디 손찌검만은 참아주셨음 합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자신이 소중한 사람인 걸 자각하고, 스스로에게 당당해지길 바랍니다. 

    게시일2023-11-30

  • [너와 나의 시간들 08_김명희] 아! 옛날이여~~   어느새 아들이 29살 청년이 되었지만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면서 가장 긴장되고 기대하고 설렘으로 가득했던 그 시간을, 그때 써놓은 글을 통해서 추억으로 회상해 보려고 한다.   #1. 어느새 1학년나뭇가지에 뾰족이 연둣빛 새싹이 돋아날 때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했지. 학교 가기 전부터 선생님은 어떤 분일까? 또 친구들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고 언제나 조그만 아기로만 있을 것 같았던 아들이 이렇게 멋있게 자라서 어느 틈에 초등학생이 된다는 그 사실 만으로도 며칠 밤을 잠 못 이루고, "콩닥콩닥" 가슴이 뛰는 소리를 들어야 했단다. 그런데 어느새 훌쩍 한 학기를 마치고 창밖으로 초록으로 무성하던 그 나뭇잎들은 가을볕에 노오랗게 빨갛게 가을 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구나.지금은 지각 하면 안 된다고 부랴부랴 옷을 입고 태권도장에 간 시간, 잠시 이렇게 아들에게 글을 써본다. 아들이 태어나던 날 손톱까지도 너무도 예쁘고 앙증맞은 모습에 가슴이 떨렸던 벅찬 그날의 환희가 지금도 기억에서 가시질 않는다. 지금은 엄마 곁에서 참새처럼 재잘재잘 이야기꽃도 피우고 또 때로는 동생과 또닥또닥 싸우는 그 모습까지도 생각하면 입가에 먼저 미소가 피어오른다.그러면서 우리 아들은 공부도 참 중요하지만, 마음속에 언제나 예쁘고 고운 웃음이 고여있어서, 누군가에게 웃음 하나를 나눠 줄 수 있는 "사랑"을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 또 커가면서 힘들 때도 지칠 때도 있겠지만 힘과 용기를 가지고 넓은 하늘을 한 번 더 쳐다볼 줄 아는 여유로운 사람, 그래서 하늘 같은 넓은 마음에 꿈을 가득 그려 넣을 수 있는 꿈이 많은 소년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제나 어디서나 아들을 제일 사랑하는 엄마 아빠가 박수도 쳐 주며 응원하는 소리를 항상 기억해서 끝까지 참아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더욱 좋겠다. 우리에게는 제일 보배로운 사람이지만 누구에게든 보배로운 사람 향기로운 사람으로 커갈 줄 엄마는 깊이 믿는다. 문득 네 목소리가 가슴 가득 울린다. 엄마는 네 목소리 숨소리 하나까지도 너무 귀하고 사랑스럽다.우리 멋진 아들!!! 이제 맛있는 저녁 준비도 하고, 앞에 공원까지 마중이라도 나가봐야겠다. 우리 아들!!! 엄마는 하늘만큼, 땅만큼 널 사랑한단다. 그리고 엄마 사랑이 가슴에도 마음에도 머리에도…. 가득 넘쳐나길 바라본다. 힘내라!!! 우리 아들.   #2. 첫 체험학습가까이 살면서도 수락산에는 아직 가본 경험이 없어서… 선생님 말씀처럼 날짜 선택을 정말 가마니깔(점쟁이) 수준으로 잘 잡으셔서 조금은 더웠지만 그래도 모두 용감 무쌍(?)하게 잘 갔다 왔다. 속으로 하늘이 축하 이벤트로 한바탕 소나기라도 훑고 지나가길 바랬지만 그러면 역시 아직은 중구난방이 될 줄 미리 짐작했던지 교문에 들어서자,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용케도 지금까지 잘도 참아낸다. 계곡이 가까워져 오자 멀리서 들리던 매미 소리가 아이들 재잘재잘 까르르…. 그 소리에 묻혀 버리고, 도착하자마자 힘들었으니 간식 좀 먹고 물놀이하라는 선생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물가에는 물총으로 날아온다. 탄알들이 쏟아지고 무엇인가 잡아 보겠다고 통이며 페트병이며 엄청나게 큰 채집통을 끼고 물속을 가르며 이상하고 징그러운 생긴 집게벌레 꿈틀거리는 벌레(?)만 잡아내면서 딴에는 살아있는 생물을 채집하는 거라며 신나 했다. 아이들의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까닭에 또 그 모습에 동화되어 바지 걷어 올리고, 혜지가 빌려주는 모래 장난 삽 하나로 눈 비비며 요리조리 잘도 피해 가는 송사리를 잡아 보기로 했다. 빨리 잡아달라는 아이들의 아우성을 "조용히 해야 해, 도망가니까"라는 말로 겨우 잠재우고 조심조심 한 마리씩 잡아 주겠다는 약속으로 시작한 송사리 잡기 작전은 뜰채처럼 삽이 제구실을 잘해주어서 한 마리 한 마리씩 은빛으로 팔딱거리며 잡혀 올라올 때 제대로 아이들의 마음을 읽었다고 회심의 미소를 띨 만큼 아들이 질러대는 환호는 대단했고 누구를 먼저 주느냐는 원성도 그만큼 컸다. 아이들이 질러대는 소리가 커질수록 재미와 흥미로움은 배가되고 옆에서 아들은 "우리 엄마는 박사다~~"엄마가 친구들을 위해 조그만 고기며 소금쟁이를 잡아 올리는 모습이 엄청 대단한 모습으로 비쳤나 보다. 그 말에 힘입어서 "그래, 줄 서 줄 서 차례로 잡아 줄게.", "그 엄마의 그 아들"이란 말을 맞춤처럼 엮어내기 위해 아이들이 첨벙대며 튀겨 오르는 물로 엉덩이 적셔가며 열심히 어부(?) 노릇을 했다. 아들이 조금 다쳐서 피가 나는 바람에 줄 서 있던 친구들에게 한 마리씩 잡아 주겠다던 그 약속을 못 지켜서 그 친구들 속상했을 테고, 또 상대적으로 또 자기만 안 잡아 주었나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못내 섭섭해서 최현수는 지하철 타고 오는 동안 연신 "고기 잡아 준다고 그랬잖아요~~"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아이들의 마음은 똑같기에 미안한 마음 하나가 생겨나기도 하고… 한쪽에선 계곡 아래 물로 물장난, 물총놀이로 잦은 트러블도 생겨나고, 처음에는 물총으로 조금만 옷이 적셔도 "선생님~~" 소리가 끊이지 않더니, 하나둘씩 조금 더 결국에는 물속에 옷 몽땅 적신 채로 잠수까지 하는 친구도 있고… 물놀이로 늦어진 튼튼반 점심시간… 오손도손 과자며 김밥이며 나눠 먹는 예쁜 모습도 아이들이 저마다 김밥 방울토마토 한 알 과자 하나 내미는데 그 손길 그 마음들에서 제법 이제는 어른스러움이 묻어났다. 덕분에 아이들 이름도 한 번 더 불러보고, 얼굴도 한 번 더 익히고 또 평소에 내 아이가 누군가에게 조금 개구쟁이 짓을 했나 귀 기울여 들어 볼 수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아들과 나는 체력을 길러야겠다고… 거기 조금 걸었다고, 아들은 지쳐서 곯아떨어졌고 나는 정말 피곤해서 한숨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질 않았다. 쭈그려 앉은 탓인지 고관절이 자꾸 어긋나려고 하고…(이런~~~) 남편은 어디 공동묘지에 쓸만한 것 있는지 뒤져보라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하여튼 오늘 하루 그래도 정말 신났다. 내 생각만 그렇지 않고, 우리 튼튼반 친구 모두에게서 오늘의 그런 추억들이 신났던 기억으로… 다시 한번 그곳에 가고파서 뭔가 미련이 남아있는 그런 현장학습이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3. 가을 소풍오호통재라~~ 현장학습-가을 소풍이 아침부터 쏟아지는 비로 망가지더니, 또 어제는 일기예보에서 극성스럽게 떠들어대는 올해 들어 최고 추위(?) 체감온도는 영하를 느낄 만큼 추워지겠다는… 그 탓으로 모두 완전무장에, 보온병에 담아온 따뜻한 물까지… 그렇게 시작된 현장학습은 쌀쌀한 기온도 항상 열기 끓어 넘치는 우리 튼튼반 친구들에게 다만 시원했을 따름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우리 친구들은 어찌나 신명 나 하던지요.[놀이기구 타기] 맨 먼저 바이킹, 체구에 맞지 않게 슬금슬금 꼬리를 감추며 거부 반응을 보이는 남자친구들에게서 지금껏 보지 못한 이상한 풍경(?)도 있었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참맛을 일깨워 주기라도 하듯이 이서윤을 비롯한 우리 반 꼬마 아가씨들이 손 흔들고 춤까지 추는듯한 모습까지 연출하는 모습과는 다르게, 영원한 카리스마로 우리 반을 압도하는 윤기의 시종일관 두 눈 꼭 감고 아니 죽을힘을 다해 감고 있는듯한 그 모습이 함께 교차하며 아이들이란 이렇듯 상반된 모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가져본다. 또 열차 타는 곳에서는 예쁜 미소로 아저씨를 유혹(?)해서 두 번도 아닌 세 번까지 타보는 모둠도 있었다.[벌 떼의 습격] 점심시간 유난히 우리 반이 꽃(?)다워서인지 벌 떼들이 윙윙해서 아이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 들었다. 급기야 용감무쌍함을 항상 보여주며 볼거리를 제공하는 정재가 기습적으로 맨손으로 벌을 잡으려다 결국에는 손가락을 벌에게 물리게 되고, 여기저기서 "빨아야 독이 없어진다"라는 웅성거림이 들렸다. 엄마들이 재기 엄마에게 빨아내 주기를 권했지만, 또 언제나 고상한(?) 재기 엄마는 거부했고 "재기야! 선생님이 해줄까?" 엄마도 거부하는 그 마당에… 아니 선생님께서 마음속으로 ‘역시 선생님은 달라야 하는구나, 항상 아이들 사랑 하는 마음이 곳곳에서 묻어 나와’ 우리 엄마들은 새로운 찬사를 보내보기도 했다. 조금 지나서일까 결국은 꽃미남(?) 김민혁이 벌에게 목을 물리게 되고, 어디서 날아 오셨는지 김민혁 엄마(바른반 선생님)는 흡혈귀처럼 민혁이 목에 입을 대고 독을 훔쳐내는 모습이 또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선생님이기 전에 그저 우리 모습과 흡사한 엄마라는데 괜한 동질감도 느껴본다. "이거 먹으세요?" 드세요도 아닌 먹으세요하는 모습도 어쩜 그렇게 예쁘고 귀엽든지. 수진이가 주는 초콜릿 누군가 건네주던 과자들을 주머니 뒤져 함께 나눠 먹으면서 아이들의 맑고 천진함이 잠깐이나마 마음에 담아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 참 좋았다.[나뭇잎 줍기] 비닐봉지 가득가득 담아오는 친구도 있고 빈 봉지를 뎅그렁거리면서 어떤 게 예쁜 건지 모르겠다고 하는 친구도 있다. 색색의 나뭇잎을 주워다가 코 밑에 갖다 대며 이건 어때요? 또 이건 어때요? 또 예쁘다면 "선물"이라고 건네주는 친구들의 마음을 가득 담아내고 보니 마음이 온통 단풍처럼 물들어 버린 듯도 했다. 산기슭 낙엽이 쌓여있는… 그래서 아이들보다도 더, 홀로이 잠깐 이나마 센치멘탈해 져보는 마음의 여유도 부려보았다. [밤 줍기] 뒤에 가려진 수작(?) (실은 이벤트를 고려해 먼저 밤을 뿌려 놓은 것)도 모른 채, 밤을 주워 내려오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천하를 얻은 듯한 뿌듯함이 완연하게 눈에 띄었다. 연신 고개를 숙여 봉지를 훔쳐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정말 어떤 친구들은 비닐봉지 가득 주워 온 친구들도 있다. 집에 돌아가서 주워 온 밤을 삶아 먹으며 온 식구가 어제는 현장학습 이야기로 가득하지 않았을까?가을, 낙엽, 가을 소풍… 어느새 이렇게 1학년 행사들이 마무리로 접어드는 기분이 들어서 쌀쌀한 바람 기운처럼 마음 한 자락이 스산해진다. 낙엽이 지고 수북이 쌓인 낙엽 위로 또다시 눈이 내리고, 가고 오는 계절이지만 유난히 계절이 가고 오는 그 그림자는 마음에 긴 그림자를 남기게 하나 보다. 추워지는 날씨에 모두 건강 조심하고 아이들이 소풍 다녀온 이야기는 재잘재잘 다 엮어내겠지만 그저 한번 적어 보았다.지금은 다들 30살을 바라고는 젊은이들로 자라 어디서 무엇이 되었을지ᆢ. 그 시절 그 얼굴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그리고 모두 건강하며 사회일원으로 소중한 사람들로 자리를 지켜갈 줄 믿는다.  

    게시일2023-11-20

  •  불안 즐기기     ​부재중 전화 두 통이 같은 번호였다. 평생교육센터 다니는 아들 담당 교사는 주로 문자로 소통하는데 두 번이나 전화를 했다는 건 뭔 일이 있다는 거다. 얼른 전화를 했더니 연수중이니 문자하라는 문자에 그냥 알겠다고 답을 보냈다. 잠시 후 문자 알람에 휴대폰을 열어보니 장문의 글이 있었다. 오전에는 아들 컨디션이 좋았는데 오후에 뭐가 마음에 걸렸는지 자해를 심하게 했다는 내용이었다. 땀이 나서 흥분한 건지 흥분해서 땀이 난 건지를 궁금해 했다. 아들의 돌발 행동 원인을 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내가 봐왔던 아들은 흥분하면 땀을 뻘뻘 흘리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직접 보지 않았기에 나도 아들이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자폐인의 흥분지수가 높아져서 자해나 타해로 이어지면 주변인들의 당혹스러움은 잘 알고 있다. 너무 평탄한 날들이 이어져서 이제 아들의 일상이 잘 자리 잡힌 것 같아 안도하며 지냈는데 오랜만에 다시 나타난 아들의 행동에 마음이 심란했다.    ​매일매일이 살얼음판이었던 때가 있었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웃음과 울음이 시작되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웃는 아들 보며 겉으론 따라 웃었지만 속으론 울었다. 그나마 서럽게 우는 것 보다는 웃는 게 낫다 생각하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을 당한 양 눈물을 뚝뚝 흘릴 때면 같이 울었다. 울음보다 더 보기 힘들었던 건 자해였다. 양 손으로 뺨을 때릴 때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들의 얼굴을 내가 두 손으로 감싸면 아들은 내 손등을 때렸다. 이렇게 아픈데 아들은 왜 통증에 약해서 자신을 학대하는건지 마음이 찢어졌다. 진정시키려고 안아주면 발버둥치는 아들과 씨름하는 날이 많았다, 화장실을 더럽히고 종이를 찢는 등의 내가 움직여서 치우면 되는 저지레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제발 자해만 하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자폐인 아들과의 동거는 늘 불안했고 모두가 잠든 밤이면 이 고요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곤 했다. 아침이 두려웠다. 뻔한 하루가 지겨워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20년이 넘게 겨우 살아냈다. 그런대로 별 일 없이 지나가는 날이면 아들을 칭찬했다. 칭찬 들은 다음 날은 어김없이 더 심하게 자해를 하거나 울음떼를 써서 나를 자극했다. 말로 내뱉으면 부정 탄다는 생각에 속으로만 흐뭇하게 여기며 아들 눈치를 보곤 했다.    ​힘들게 학령기를 지나 성인 대열에 서면서 아들의 일상에 변화가 생겼다. 발달센터에서 좋은 분을 만나 아들을 대하는 나의 언행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면서 남들이 이상하게 볼 것 같은 행동들을 억제하고 다그쳤던 걸 멈추라고 그분은 아들 대신 나를 가르쳤다. 그곳은 아들을 교육하거나 상담하지 않았고 또래 청년들과의 자조모임을 통해 사람들 속에서 지켜야 할 것들을 몸소 보고 듣고 깨닫게 하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7여 년간 먹던 정신과 약 ‘아빌리파이’가 아들에게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아 끊을 수 있도록 도움 받았다. 단약하면 과잉행동이 다시 나올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이 신경쓰였지만 아들의 일상을 잘 관찰하면서 서서히 약을 끊을 수 있도록 세심하게 봐 준 덕분이었다.    ​눈에 띄는 아들의 보기 힘들었던 행동이 거의 사라져 평온한 날을 보내던 차, 아들의 자해 연락에 나는 잠시 흔들렸다. 너무 잦아서 또 그랬구나 생각했던 과거와 달리 왜 그랬는지 궁금했다. 아들의 행동을 잘 관찰하며 살다보니 물론 추측성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행동에 대해 아들을 곁에 앉혀두고 조곤조곤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표현언어가 없는 아들은 곧잘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시늉을 하곤 했다. ​간헐적으로 보이던 자해와 감정의 소용돌이가 점차 줄면서 아들 때문에 마음 졸이던 때가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잔잔한 날들을 보내던 차, 오랜만의 자해 연락은 신경이 많이 쓰였다.그래도 아들에게 아는 체하지 않고 평소처럼 대했는데 그날 밤 한바탕의 짧은 소동이 있었다.  ​욕실 청소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들의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고성을 지르며 집안 곳곳을 뛰어다니던 과거와 달리 본인이 낼 수 있는 흥분한 소리를 내며 뛰어 다녔다. 남편과 나는 외면했다. 각자 할 일에 집중하고 조금 기다렸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그래봤자 엄마 아빠가 자신을 다독거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는지 밤새 잘 자고 일어났다. 이상한 소리와 벌컥 문 열고 닫는 소리에 가족 모두 밤잠을 못 자게 했던 날들을 생각하며 오랜만에 불면의 밤인가 살짝 긴장했는데 최근의 평온함이 이어졌다.    ​27년을 아들과 함께 살면서 내공이 어느 정도 쌓였다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보는 상황으로 느낀 나의 내공은 그리 두껍지 않았다. 집에서야 내가 감당하면 되지만 밖에서 그러면 주변인들의 불안함이 높아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올라왔다.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사는 게 우리 삶이거늘 모두가 다 평탄한 일상이면 좋겠지만 예기치 못한 일들도 보고 들으며 사는 건 자연스런 것이라 생각하자고 나를 다독인다.    ​편안해 보였던 아들의 내면은 여전히 요동치고 있는 건 아닌지 그것을 자해로 나타내는 건 아닌지 그냥 넘어가기엔 아들에게 미안하다. 어떤 메시지를 엄마에게 보내는데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니 요즘 너무 안일하게 사는 내게 긴장하란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아들의 행동 하나에 내 마음이 허물어지진 말아야겠다. 몸과 마음이 다 아팠던 긴 시간을 나는 잘 넘어오지 않았는가. 평온 속에 감춰진 불안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확대해석하고 내공을 갉아먹도록 방치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불안조차 즐기려고 다짐하는 나는 강한 엄마다.  

    게시일2023-11-17

  • ‘역지사지(易地思之)’, 서로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      올해 내가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 중에 한 가지가 바로 이 곳, 보다센터에서 특수교사의 시선으로 칼럼을 쓸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늘 글쓰기에 갈증이 있었던 필자는, 특수교육 현장에서 겪는 소중하고 다양한 일들을 나의 필체로 쓰고 또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지금 작성하는 다섯 번째 칼럼이 아마도 올해의 마지막 칼럼이 될 것 같다. 그래서 꼭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는 11월 즈음해서 우리 아이들도 인생에 몇 안 될 수도 있는 긴박하고 긴장되고 떨리는 순간을 맞이한다. 바로 고등학교 졸업 이후의 진로 및 직업교육을 받기위해 지원하는 ‘전공과’ 입학 전형에 임하기 때문이다. 의무교육으로 실시되는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 과정과는 달리 전공과는 무상교육이기는 하지만 전공과가 운영되는 학교나 학급의 수는 한정되어있어 교육대상자를 선발하여 입학대상자를 선정하게 된다. 그렇기에 경쟁률이 때로는 2대 1을 넘기도 하고, 시험이라는 압박으로 평소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아쉬운 경우도 때때로 발생하며, 동일한 날짜에 동시에 실시되는 전형이므로 한 학교에만 지원해야한다는 이유로 원서 접수 시 눈치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는 살벌한 시즌이 바로 이맘때이다.    ​마침 올해 배정받은 업무가 전공과 신입생 입학전형 운영과 관련이 되어있어 합격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새로운 곳에 대한 설렘이 느껴지는 순간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게 되었다. 원서를 내며 걱정과 염려의 마음을 담아 지원한 아이들의 합격을 기원하는 선생님들과 부모님의 마음,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마주하여 치르는 시험에 잔뜩 얼어 표정이 굳어버린 아이들의 긴장된 마음, 그리고 그 긴장된 상황을 타개하고 끝끝내 합격이라는 성취를 얻어낸 아이들과 아이들을 지지하는 어른들의 기쁜 마음이 오롯이 느껴졌다. 물론 아쉽게 떨어져 못내 서러워 안타까운 마음도 있었고. 누군가는 발달장애인들이 치르는 시험에 얼마나 높은 긴장감과 경쟁이 있겠느냐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늘 울타리 속에서 지내온 우리 아이들에게 전공과 입학 전형은 큰 도전일 수도 있음을, 매해 전형을 치르며 느끼고 있다.    ​현재 시점에서는 전공과 입학 시험이 끝나고 합격자가 발표된 이후, 합격자들의 등록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학생 본인 또는 보호자가 와서 합격증을 수령하고 등록란에 서명을 하게 되는데 오늘 합격증을 수령하러 온 두 분의 학부모님께서 어찌나 기뻐하시던지, 두 분을 마주한 내내 나 역시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상기될 정도였다. 얼마나 아이들을 기특해하시고, 무사히 전형을 치른 것이 기쁘고, 가족들 모두 아이의 전공과 합격을 얼마나 기원했는지 진심어린 기쁨과 감사의 말을 나에게 나누어주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학교라는 안전한 울타리에 2년을 더 있을 수 있게 되어서, 전형에 참여하며 마주하게 되었던 본교 선생님들이 참 다정해보였는데 그런 분들에게 우리 아이를 맡길 수 있게 되어서, 사회에 나가서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직업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서, 모든 일이 감사하다 이야기하셨다.    그렇지, 내 아이의 일에 진심이 아닌 부모가 어디 있을까.    ​이십 대 초반,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 특수학급에서 담임으로 근무하게 되며 아이들의 부모님들을 대하기 전 스스로 했던 다짐이 있다. 바로 나의 부모님, 엄마와 아빠를 대하듯 학부모님을 대하겠다는 것이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할 수 있겠지만, 나의 부모님은 일찍 가정을 꾸리셔서 내가 처음 학교에서 근무하며 만나게 되었던 학부모님과 대부분 동년배이거나 되려 나이가 더 적은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학부모님의 과한 요구도 우리 부모님이 학생인 나의 일과 관련된 사항에서는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생각하면 이해가 되었고, 장애를 가진 아이를 평생 돌보는 부모의 마음을 전부 알 수는 없어도 심한 몸살을 앓아 축 늘어진 나를 보며 애타하던 부모님을 떠올리며 상담을 할 때 진심으로 위로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학부모님을 대할 때의 언행도 나의 부모님이 사회에서 타인들을 마주했을 때 받기를 원하는 대우와 언행을 생각하며 재차 물어보는 질문에도 친절히 대답해드렸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면 학생들의 의복, 태도, 말씨만 보아도 가정에서의 부모님 얼굴이 그려졌기에 나 역시 부모님을 담은 거울이라 생각하고 온화한 말과 행동을 실천하기 위해 애썼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주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참 감사하게도 좋은 학부모님들, 좋은 보호자들을 많이 만났다. 아이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아이를 낳고 기른 부모님도, 짧게는 한 두 달, 길게는 몇 년씩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더 나은 방향으로 아이가 가기를 바라고 보다 행복하게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은 똑같다는 것, 그렇기에 대립의 각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해야하는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는 분들을 만났다. 그래서 예상치 못한 일들의 발생으로 아주 가끔 힘들었던 적도 있었지만, 서로의 입장을 생각해주고 이해하며 솔직한 대화를 나누고 여러 어려움들을 함께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지난 7월, 태양의 열기가 뜨거운 여름에 한 초등학교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면서 교사의 입장, 교사의 처우에 대한 이야기가 풍선 터지듯 터져 그 파편의 여파가 퍼져나갔다. 그리고 특수교육 현장에서도 학부모와 교사의 대립 관계가 두드러지는 사건이 공유되면서 학부모가 보는 특수교사, 특수교사가 보는 학부모의 시선이 날 서게 대립하기도 했다. 사실 그 즉시 특수교사로서 보는 나의 관점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었지만, 말을 아꼈던 이유는 바로 역지사지(易地思之) 때문이었다. 학부모들도 어떤 선생님의 학생들이었고, 선생님들도 어떤 학생들의 부모이며, 둘은 완전히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면 너무나 잘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문제의 해결은, 학교에서 여러 학생들을 동시에 살펴야하는 선생님의 입장을 학부모가 헤아려주고, 소중한 자녀이기에 필요한 교육적 지원을 받길 원하는 부모의 마음을 선생님이 헤아려주는 것에서 시작되어야한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보는 것, 갈등과 고민을 해결할 더 넓은 마음과 시선을 가지는 첫 단추가 아닐까. 

    게시일2023-11-08

  •  붐비는 휴게소에서 청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사람들의 눈길이 약속이나 한 듯 청년에게 쏠렸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일행이 있다는 안도감에 타인의 불편한 시선이 두렵지 않았다. 두 시간 넘게 고속도로를 달려오면서 차 안에서의 점잖았던 모습은 유지하되 소리만 크게 지른 청년1. 그의 엄마는 이유를 알았지만 우린 ‘왜 저러지?’의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엄마 넷과 아들 넷이 서울에서 영암으로 2박3일 여행을 갔다. 자폐성장애인 아들들의 무덤덤한 표정에 비해 오륙십 대 엄마들은 신이 났다. 자녀들의 행동을 분석하고 자립준비를 위한 월1회 스터디를 시작한 지 3년차, 사실은 공부를 위장한 수다가 정기적인 만남의 기쁨이었다. 사흘 동안 그 수다를 양껏 풀 수 있어 우리는 설렜고 청년들은 그들대로 함께하는 시간을 즐기기를 바랐다.우리의 목적지인 영암은 청년1의 외가인데 가족끼리 갈 때는 휴게소에 자주 들렀단다. 몇 개의 휴게소를 그냥 지나치는 바람에 항의하는 걸로 소리를 지른 거라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 건 잘한 거지만 그 방법이 적절치 않았다고 청년1의 엄마는 아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하고 본인이 원하는 걸 표현도 잘하는데 달리는 차 안에서 ‘휴게소’ 한마디만 했어도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런 얘기는 당사자들이 듣지 않도록 차 안의 좁은 공간에서는 하지 않았다. 모든 대화 주제에 명확한 칭찬 아니고는 아들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기에 이분들이 다 듣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우리는 일상의 소소한 경험을 나누며 많이 웃었다.   영암에 도착하여 미리 메모한 먹거리를 사기 위해 마트에 들렀다. 청년4는 연신 생글거리며 물건 사는 일을 즐겼다. 출발할 때 엄마들은 앞좌석에, 청년들은 뒷좌석에 앉아가려고 했으나 일찌감치 앞쪽을 차지하고 폰에 열중하던 모습이 고집이 센가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사흘 내내 밝은 표정으로 눈 마주칠 때마다 웃는 표정에서 기분 좋은 느낌을 받았다. 휴게소를 들른 후 청년4는 맨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우리는 그의 선택을 존중했고 그는 스스로 자리를 바꿔 줬으니 이거면 된 거다. 사흘간 먹을 양식들을 넉넉하게 구입하고 숙소에 닿았다. 모두들 분주하게 움직여 고기를 굽고 야채를 씻어 푸짐한 저녁을 먹었다. ‘맥주’라고 말하며 캔맥주를 가져오는 청년1에게서 낮에 휴게소에서 소리 지르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고기 먹을 땐 역시 술이 있어야 한다며 모두들 건배했다. 날이 흐려 달님은 어둠 속에 숨었지만 칠흑같은 시골의 밤은 고요했고 청년들은 그들끼리, 엄마들은 불멍하며 담소를 나눴다.   이튿날, 일행은 목포 유달산 조각공원으로 갔다. 12인승 승합차에서 내리는 청년3을 보고 우리는 깜짝 놀랐다. 숙소에서 신던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어른들이 많았어도 나올 때 아무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니 학교든 기관이든 선생님들이 아이 관찰 못한다고 푸념이나 원망하면 안된다고 우린 입을 모았다. 오래 전 남이섬으로 나들이 갔을 때 늦게 오는 아이가 있어 기다리고 있었는데 배가 오니까 혼자 탔던 우경이가 생각났다. 자원봉사자가 많았지만 배 타는 아이를 보지 못했다. “우경이는 혼자 배를 타고 가는구나”똘똘한 자폐인 성민이 국어책 읽는 듯한 억양으로 내뱉는 말에 인솔자였던 나는 혼비백산 떠나려는 배를 세우고 우경이를 데려왔다. 얼마나 식겁했는지 성민이 아녔으면 큰 일 날 뻔 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던 게 생각났다. 청년3의 슬리퍼 정도는 애교다. 우리나라 최초로 야외에 조성되었다는 유달산 조각공원은 규모가 상당했다. 계단과 경사로가 적절하게 배치되어 휠체어나 유아차로 이동해 누구나 목포시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조각공원 하늘에 유유히 떠다니는 케이블카를 보고 바로 이동하여 스테이션에 도착했다. 추석연휴라 북적이는 인파 속에 8매의 티켓을 각자 손에 쥐고 대기줄에 섰다. 바닥이 보이는 크리스탈 캐빈이라 느낌이 다를 걸 예상하며 설렜다. 움직이는 캐빈에 올라탈 때 조금 긴장은 됐지만 몇 번의 가족여행으로 아들이 경험한 적이 있어 나는 아무 생각없이 먼저 올랐다. 뒤를 돌아보니 아들이 저만치 도망가고 있었다. 가족 여행할 때 얼떨결에 타도록 아들을 에워싸고 움직였던 걸 잊고 이제 스스로 잘 탈 거라 믿었던 나의 신뢰는 무너졌다. 결국 우리 둘만 덩그러니 남았다. 잠시 틈을 두고 아들에게 두어 번 사정했으나 매몰찬 아들은 끝내 거부했다. 우리 때문에 마음 놓고 구경 못 하고 내려 올 것 같은 일행이 신경쓰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옥상 벤치에 앉아 팸플릿을 뚫어져라 보는 아들의 속내는 ‘이거 봐도 되는데 굳이...’로 읽혔다. 아들을 바라보며 이동기구를 이용해 더 좋은 곳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게 아쉬웠고 살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이렇게 거부한다면 본인도 주변인도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한 걸까.어디선가 소음에 가까운 노랫소리가 들렸다. 건물 앞 공터에서 트로트를 애절하게 부르는 여성이 물러나고 통기타를 맨 남녀가 7080 가요를 불렀다. 가사와 멜로디가 주는 아련함에 빠져들었고 별로 느낌 없어 보이는 아들은 곁에서 내 눈치를 보며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자신의 행동에 엄마가 속상했을 거란 생각을 하는 듯 했다. 그렇다면 너도 좋아하지 않는 이 순간을 견디라는 보복 심리로 나는 아들을 외면했다.   마지막 날 아침은 샌드위치와 컵라면을 먹었다. 평소 집에서 라면을 멀리하는 편이라 아들이 먹는 걸 말리고 싶었지만 다들 먹는데 혼자 못 먹게 하는 건 아니지 싶어 놔뒀다. 집안 정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휴게소에서 화장실에 들어가는데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저기 남자가 여자 화장실에 들어왔어요. 빨리 신고해요.” 평소 호기심 많은 나였지만 남자로 보이는 여자일 거라 생각하고 바로 나왔다. 화장실 앞에서 청년3의 엄마가 아들을 찾고 있었다. 차에 간 거 아닐까 중얼거리며 같이 둘러보다가 문득 여자 화장실의 남자가 생각났다. 우리 둘은 쏜살같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는데 고장 나서 제거한 듯 출입문이 없는 칸에 청년3이 앉아 있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우리 아들이에요. 저희가 데리고 나갈게요.” 했더니 다들 안도의 숨을 쉬며 조용해졌다. 엄마가 아들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했는데 엄마 따라 들어간 청년3. 몰라서가 아니라, 하면 안 되는 것을 그냥 해본 걸로 보였다. 평소 잘 하는 걸 한 번씩 저질러 주는 우리에겐 작은 해프닝이 다른 사람들에겐 사건이 되는 일상이다. 자폐인의 반듯한 외모가 장애인으로 보이지 않고 변태로 보였나 보다며 우리는 웃었지만 사람들은 놀랐을 것이다. 이럴 때 크게 꾸짖거나 과한 호들갑은 재미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 적절한 주의 한 마디로 끝내야 한다.   관광 목적이 아니라 자녀와 엄마의 일상을 체크하고 점검해 보자는 여행이었지만 그래도 여행은 좋은 곳을 구경하는 맛을 빼놓을 순 없다. 서로 말을 주고받진 않지만 표정과 행동으로 소통하는 그들이 함께 있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엄마들끼리는 우리의 노후와 독립된 자녀들의 삶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희망을 보았다. 혼자가 불안할 때 모여서 대안을 찾아간다면 우리의 미래가 그리 암울하진 않다. 함께의 힘이다. 이분들 다 독립시키고 우리 엄마들만의 여행을 기대해 보는 모자들의 가을여행이었다. 

    게시일2023-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