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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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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들이 여러분들께 ‘발달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건네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시선으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 계시나요?
이 게시판은 보다센터에서 초대한 각 분야의 칼럼니스트들이 여러분들께 ‘발달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건네는 곳입니다. 발달장애와 관련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칼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또한 발달장애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의 일상이야기,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의 소박하지만 통렬한 이야기와도 공감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은 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게시물 총 120

  • 근로지원사를 통해 본 서로 통한다는 의미​ 뉴스에서 장애 전담 어린이집 교사들이 어린이들을 폭행하고 학대, 무시하는 등 도를 넘는 행동을 뉴스로 접하면서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희로애락은 태어나면서 가지게 되는 기본 감정이고 감정에 불균등이 일어날 때 불편함과 불쾌감을 당연히 느껴야 하는데, 사람의 기본 감정까지도 무시한 채 아이들을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장애 부모로서 지켜보는 것은 여전히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장애인을 대하는 편견과 무시가 너무도 큰 슬픔으로 전해졌다.아들 또한 어렸을 때부터 또 성인 된 지금까지도 현실에서 마주하게 되는 커다란 벽과 견뎌야 하는 낯선 시선들과 부딪히므로 암담함을 느끼면서 살고 있기에 수많은 장애인이 앞으로도 느껴야 할 수많은 힘듦과 어려움을 단편적으로 보는듯해서 가슴이 더욱 아팠다. 또한 수많은 장애인과 그 부모들이 풀어야 할 과제 중의 하나인 것을 느끼게 했다.아들이 학교를 졸업하니 또 다른 숙제가 시작되었다. 어렵지 않은 직장에 하루 몇 시간의 일거리가 있으면 경험으로 사회일원으로 성장할 계기가 될 것 같았다. 그때 우연히 지인을 통해 카페 근무를 시작으로 그다음 ○○슈퍼에, 그 후에는 장애인고용공단을 통한 취업에 도전했고 그때에는 근로지원인 제도가 있다는 걸 알아서 그 제도를 이용하게 되었다.그 제도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 취업하고 직무에 적응하는 동안 함께 도움을 주는 근로지원인이 동반해주는 제도여서 장애인 취업자에게는 커다란 힘이 되고 출근 후 퇴근 시간까지 집에서 온통 신경을 쓰면서 혹시나 무슨 일이 있지는 않을지 노심초사하는 부모 마음에 안심을 주기도 했다.장애인 일자리는 장기가 아니고 대부분 주로 6개월~1년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자의든 타의든 그래서 근로지원인분들을 몇 차례 접할 기회가 있었고, 그러면서 취업 때 근로지원사 분들과의 상호작용과 유대관계에 대해 아들이 경험한 일들을 한번 이야기하려고 한다.근로지원 제도를 이용한 취업의 시작은 ○○병원부터였다.그것이 근로지원 제도를 통한 근로지원사를 만난 첫 번째 경험이었다. ○○병원에서 하는 일은 휠체어를 대여하고 또 되돌려 받는 업무였는데 어렸을 때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탓에 거동이 불편한 환자 더구나 연세 드신 분들의 휠체어 사용을 도와주고 때로는 진료받는 과까지 모셔드리기도 했다. 그때 감사하다며 환자분들이 전해 주신 음료나 과자 한 봉지에 너무 좋아하고 칭찬을 받았다며 집에 돌아와서는 하루 일들을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해주면서 일상의 또 다른 재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그중에서 근로지원사분과의 일상도 빼놓지 않았는데 때로는 함께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어떤 날은 선생님께 감사하다며 식사를 대접하기도 하고 퇴근한 후에도 저녁이면 전화도 주고받았다고 했다. 어떤 날은 아들이 몸이 아파서 조금 늦어지면 버스 정류장까지 선생님이 직접 마중을 나오시는 것으로 보아 아들과 선생님은 상호작용이 잘되는 듯했다. 선생님도 아들이 너무 인정스럽고 성격도 밝아서 너무 재미있다며 칭찬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더욱 감사와 사랑을 느끼게 했던 경험이 있었다.그 후 몇 년도 인지 확실한 기억은 아니지만 아마도 3~4년이 지난 듯한 일이었다. ○○호텔 직원 식당 정규직원 모집을 보고 이력서를 제출 후 면접에 통과하게 되었다.소통 토론 강의를 보면 대부분 이럴 때 서로 잘 즐기며 일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던데 우리 가족은 기쁜 나머지 합격이라는 문자 통지를 보고 물론 축하한다고 시작은 했지만, "이제 ○○맨 이야. 직원들한테 잘하고 열심히 하고 잘못하면 끝이야…."등 지금 또 생각해 보면 하지 않아도 될 말들을 군더더기처럼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렇게 정규직이 되기 전 통과의례로 2주간 사전훈련이 시작되었다.정규직이 되기 전 통과의례로 그동안 직무의 적응도나 성실성 등의 평가로 합격 불합격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아들과 동행해 주는 근로지원사가 배정되었다.아들의 말에 의하면 8호선 장지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2호선 잠실역에서 내려 맥도날드 앞에서 근로지원 선생님을 만난다고 했다. 처음이라 지하에서 찾기가 좀 어렵다며 첫 출근 후 그다음 날은 함께 가 주기를 원했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장지역에서 내려 8호선으로 갈아타고 잠실역에 내려서 약속 장소를 찾아가는데 나도 어디가 어딘지 너무 힘들었다. 여긴가 저긴가 아들은 몇 번 잘못 들기도 했지만, 용케 약속한 장소라며 가리켰다. 그리고 잠시 후 어떤 여자분이 다가오더니 대뜸 하는 말이 "○○씨! 여기서 기다리라니까 왜 거기서 기다려요?" 몇 걸음 더 내려와서 기다렸다고 저러지? 가시 돋친 듯 내뱉는 말투를 지켜보는 나의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인사를 할 겨를 도 없이 그분은 내가 엄마인지도 모른 채 아들을 데리고 사라지는 뒷모습을 쳐다보는데 몹시 씁쓸했다. 그 순간에 아들의 평소 모습은 다정다감하고 친절하고 목소리 톤이 부드러운 사람을 좋아하고 너무 많은 말(잔소리)을 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평소 모습이 떠오르며 어쩌면 이분은 아들과 정서적인 코드가 잘 맞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혼자서 출근이 어렵다는 말 없이 잘 다니기에 대견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2주 동안 그 선생님과 직원들의 평가점수로 정규직으로 전환이 결정된다는 말은 미리 듣고 시작했던 터라, 출근 후 며칠이 지나서 영양사님의 전화는 너무 쾌활하고 좋아서 분위기가 살아난다는 말과 또 힘든 부분 있으면 최대한 도와주시겠다고 하는 전화에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2주간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고 어떤 날은 근로지원사님으로부터 아들이 락스 냄새를 싫어한다. 어떤 날은 이런 일 한 번도 안 해 봤다고 하며 투덜댄다고 하면서 아들로 인해 좀 힘들다는 내색을 하기도 했다. 혹여 평가점수가 낮아질까 봐 "죄송합니다. 잘하도록 지도하겠습니다~~"라고 응대를 한 뒤 퇴근해 오면 전해 들은 일들을 아들에게 "조심하고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 말대꾸도 하면 안 되고, 버릇없는 행동을 하면 안 되고~" 하면서 앵무새처럼 되뇌었다.그러던 어느 날 대형 사건(?)이 터졌다. 공단 직원이 집으로 전화해서 근로지원인 분이 아들 때문에 울면서 전화했고 더 이상 안 하겠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말은 해주지 않고 말을 함부로 해서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평가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때였고 괜히 더 신경이 쓰여 퇴근해 온 아들을 앉혀놓고 혼도 냈지만 수긍하지는 않는 눈치였고, 근로지원사님을 이해하는 데는 무엇인가 걸림돌이 있어 보였고 아들 또한 근로지원사를 몹시 못마땅하게 느끼는 눈치였다.이전의 분들과는 다른 서로 소통하는 행동이나 톡이나 전화 문자 등은 물론 근로지원사에 대한 언급을 한 번도 하지 않는 걸 보면 둘 사이에는 차가운 기류가 흐르는 게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에 아들은 "엄마 합격 되는가 봐?"라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듯 해서 "왜?"라고 물으니 "다음 달 일정표에 내 이름이 적혀있던데…."라며 얼굴이 상기 되기도 했다. 떨어져 실망할까 봐 걱정도 되었지만 "그래 잘되겠지."라고 기다리던 마지막 날 근로지원사님의 전화가 왔다.이런저런 2주간의 이야기와 기분 상하고 자존심이 상했다는 말과 함께 결과는 기다려봐야 아는 거고 자기가 어떻게 합격 불합격을 내라는 건 아니다 말속에는 아들이 되는지 봐라 그건 내 탓이 아니라는 말로 들렸다.그리고 마지막 날 결과가 나오는 날 아들은 힘없이 퇴근 후 "내일부터는 안 나와도 된대"라며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가슴이 덜컹 무너졌고 기대했던 마음을 알고 있어서 너무 가슴이 아팠는데 저녁에 영양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이번 정규직에는 불합격했다기에 아들은 다음 달 일정표에 이름까지 있다고 좋아했다는 말을 전했더니 그랬는데 근로지원 선생님과 의견충돌이 있는 모습을 보고ᆢ 죄송하다며 아들 위로 잘해주라는 말을 전해 들으니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의견충돌이 아닌 감정 충돌이었다. 어떤 이유로 자존심이 상했는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지만, 장애인을 대상으로 직무의 어려움을 도와주고 조금이나마 직무에 익숙해지는 시간과 때로는 격려 또는 응원해줄 수 있는 역할을 가진 사람이면서 더구나 가장 가까이 장애를 이해하고 도와주어야 하는 직무를 가진 분이 그 도중에 자존심을 운운하고 또 자존심 상해서 그만두어야겠다고 공단에 전화했다는 사실도 합격 불합격을 떠나 그 일이 스스로 맞지 않거나 최소한 장애인의 지적 수준이나 성향 등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지 못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이야말로 어른답지 못하다고 생각했고 감정 장애가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최소한 장애아를 맡아주는 장애 전담 어린이집 교사나 근로지원사처럼 가장 가까이 장애인에게 도움을 주고 보살펴주는 사람들은 장애를 이해하고 진심으로 대하지 못한다면 그 직업군에 도전조차도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게 장애인을 둔 부모의 경험에서 나오는 마음이다. 그 후에도 몇 차례 또 다른 근로지원사님과의 만남이 더 있었고 다정다감하며 애정으로 아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통한다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한다는 건 감정의 소통이 잘되어 서로서로 잘 이해하고 걸림이 덜 하다는 것도 그래야 부딪힘도 적어진다는 것도 아들을 통해 거울처럼 바라볼 수 있었다. 

    게시일2023-07-21

  • 나홀로 여행   바닷가에서 자랐지만 바다와 친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수영복 차림으로 수건 하나 걸치고 3~4분 뛰어 바다로 가곤 했는데, 커서는 지척에 바다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결혼하고 서울에서 살다보니 바다가 그리웠다. 가까이 있는 한강으로 달래지지 않아 가끔 동해 일출과 서해 일몰의 황홀한 바다에 빠져들곤 했다. 부산에서 살던 둘째언니가 거제로 이사한 지 8개월이 되어간다. 가족여행으로 너 댓 번 갔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장소만 옮겨졌지 여전히 내가 챙겨야 할 가족이 있으면 여행의 맛이 반감된다.일 때문에 바쁜 남편을 두고 아들과 거제에 가겠다고 했다. 혼자 긴 시간 운전 힘들다며 남편은 기차로 혼자 가란다. ‘아싸! 이게 웬 떡이냐’ 내심의 소리는 숨기고 ‘그래도 될까?’ 걱정스런 표정을 했더니 흔쾌히 ‘돈 워리’라는데 사양할 이유는 없었다.   못이기는 척 나선 여행길은 SRT 기차에 오르는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앞좌석 뒤에 붙은 테이블을 내려 휴대폰과 안경집을 나란히 놓고 오래 전에 구입했던 시집 ‘컵라면이 익어가는 시간에’를 읽었다. 내가 여태 보아온 시집의 시들은 마침표가 없었는데 여기 수록된 시들은 꼼꼼하게 마침표가 찍혀 있었다. 차이가 뭔지 단순하게 시인의 마음인지 궁금했다. 짧은 문장으로 많은 것을 표현하는 시인들은 위대하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메타포를 접하면 몇 번을 반복해서 읽기도 하지만 결론은 그저 내가 읽고 싶은 대로 읽을 뿐이다.국내 최장 50km의 율현터널을 지나니 눈부신 바깥세상이 시집을 덮게 만들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천천히 움직이는 산과 하천에 비해 빠르게 지나가는 나무들은 환한 미소로 내게 손을 흔들었다.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일상에 찌들어 사는 나는 대체 무슨 걱정을 하며 살고 있나 싶었다.   부산역에 나온 두 언니들을 만나 거제로 향하는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승용차보다 높은 대형버스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더 넓고 깊어 보였다. 거가대교와 해저터널을 지나 깊은 산골에 도착한 우리는 텃밭채소와 문어 등 도시와는 질이 다른 저녁을 먹었다. 다섯 자매가 모이면 뭐든 해먹이려고 동분서주하는 형부가 고맙기도 하고 몸이 안 좋으니 안타깝기도 하다.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마을은 인기척이 없다. 영화 ‘이끼’에서 이장 정재영 배우가 마을을 두루 바라보는 그 느낌이 갑자기 전해온다. 멀리 거가대교는 섬과 육지를 연결해 주느라 고정된 분주함이 보인다. 다리를 건너올 때 보는 바다와 섬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같지만 다르다. 서 있는 자리가 바뀌면 보이는 것도 달라진다는 말이 새삼스럽지 않다. 날이 좋으면 움직임이 거의 보이지 않던 바다였는데 바람과 비를 만난 바다는 제법 일렁거림이 보여 거대한 늪을 상상하게 한다. 생명을 앗아가는 거센 해일 말고 이런저런 모습의 바다는 언제나 옳다.   조그마한 배를 타고 섬에서 섬으로 이동했다. 둘레길 2.9km를 잘 조성해 둔 작은 섬 이수도. 1박3식으로 유명한 그곳은 거의 대부분 가정집이 민박을 하고 있었다. 일반 음식점은 보이지 않았고 민박 예약을 하면 그 집에서 세 끼 밥을 제공했다. 사실 1박까지 하면서 구경할 거리는 없었는데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밥을 먹고 바다를 끼고 둘레길 걷는 것만으로 충분한 힐링이 되었다. 장마철이라 후텁지근하고 끊임없이 오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꿉꿉한 비마저 싫지 않았다. 두어 시간동안 걸으며 흘린 땀을 샤워로 씻어내니 세상 부러울 게 없는 밤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나란히 누워서 이런저런 얘길하며 천장을 뚫고나갈 기세의 웃음소리에 잠자던 새들이 벌떡 일어날 것만 같았다.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양껏 웃을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참으로 고맙게 느껴졌다.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게 남이 해주는 음식이라고 했던가. 아침까지 든든하게 먹고 이수도를 빠져나왔다. 지난번에 가봤던 멀리 보이는 매미성에 다시 가보고 싶었으나 언니네 집 야채와 과일 딸 욕심에 바로 돌아왔다.주렁주렁 열린 살구는 제풀에 떨어진 것이 정말 맛났다. 새들이 쪼아 먹은 흔적을 보니, 우리가 먹을 거라 상관없지만 상품으로 출하하여 생계를 잇는 사람들에겐 치명적일 것 같다.   2박3일의 여행에서 돌아오니 집이 낯설지 않았다. 나름 정리정돈도 잘 되어 있었고 설거지도 제때 해서인지 씻어 놓은 그릇들이 많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사흘 동안 나는 집을 잊고 있었다. 예전에는 혼자 집을 나오면 가끔 전화해서 잘 있냐고, 아들 어떠냐고 먼저 묻곤 했다. 이번에는 부녀의 긴 말들이 오고가는 가족대화방도 외면했다. 남편이 급기야 ‘거제 간 엄마는 지금 묵언수행중’이냐고 물었다. 그럴 리가, 언니들과 수다 떠느라 입에 침이 마를 지경이었는데.아들을 조금씩 마음속에서 떠나보내는 중인 나를 느꼈다. 어쩌면 독립을 주저하는건 아들의 부족함이 아니라 엄마인 내 마음이지 싶다. 나홀로 여행으로 나는 내 삶을 즐기고 아들은 엄마의 간섭과 참견을 벗어나 스스로를 챙길 줄 아는 일일우일신하는 일상이 되면 좋겠다.  

    게시일2023-07-14

  • 선택도 연습이 필요해      익숙한 등굣길에 내가 좋아하는 푸른색이 지천에 가득하고 뜨거운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걸 보니 7월이다. 그리고 요즘은 열기를 식히듯 예고하지 않은 잦은 비가 오고 있다. 그러다보니 매일 아침 출근을 앞두고 일기예보를 재차 챙겨보며 고민한다. 오늘은 우산을 가져갈 것인가, 가져가지 않을 것인가? 어느 날은 나의 직감으로 우산을 가져가지 않기도 하고, 어느 날은 우산의 예쁜 무늬를 핑계로 챙겨가기도 한다. 그리고는 매일의 선택에 따라 비오는 날 우산이 없어 낭패를 보기도 하고 우산이 무색하게 쨍쨍한 날 무거운 우산의 무게를 한껏 느끼며 땀 한 바가지와 함께 퇴근을 하기도 한다. 물론 어느 날은 딱 맞는 선택에 스스로를 칭찬하며 콧노래 흥얼거리는 퇴근길을 맞이하기도 하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매 순간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오늘 입고 나갈 옷과 양말, 점심 메뉴, 버스를 탈 것인가 지하철을 탈 것인가, 운동을 갈 것인가, 침대와 한 몸이 될 것인가. 정말 사소하지만 인생은 매 순간이 선택이다. 나의 경우, 대부분의 선택 상황에서 어렵지 않게 의사를 결정하고 선택한 것에 대한 후회나 미련은 가지지 않는 편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의 의견을 경청해주고 결정을 지지해주는 부모님의 양육 태도가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는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을 것이며, 내 선택에 따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온 몸으로 받으며 지나온 과거의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여전히 선택의 순간에 서면 망설이게 되고 누군가 나 대신 선택을 해주었으면 좋겠고 선택하지 않은 선택지에 대한 결과가 어떨지 궁금하고 지금 한 선택을 후회하게 될까봐 두렵다.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는 우리 아이들은 비장애인들과 비교하여 많은 순간 자신의 의사와는 다르게 또는 의사를 묻지 않고 보호자, 부모님, 교사 등 타인이 대신 무언가를 결정하는 순간에 숱하게 놓인다. 영유아기를 비롯해서 학령기에도 당사자의 선택 이후의 변수에 대한 예측이 어렵거나 또는 안전을 우선으로 하거나 혹은 선택의 기회를 주어야한다는 것도 잊은 채 당연한 듯이 장애인 당사자의 의견 없이 많은 것들이 결정된다. 하물며 특수교육현장에서 법적 근거로 인해 반드시 실시해야하는 개별화교육지원팀 운영에 있어서도 장애 학생 본인의 의견이나 선택이 우선시 되거나 반영되는 경우는 극히 제한적이다. 물론 장애의 정도와 유형에 따라 의견을 반영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공감한다. 다만 일상에서 아주 사소한 선택이라고 할지라도 장애인 당사자, 나에게 있어서 우리 학생들이 스스로 본인의 인생을 살아가는 만큼 본인의 의사와 결정을 최대한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현재까지 기고자가 만난 많은 학생들 중에서는 장애인복지법의 장애 판정 기준에 해당하지는 않고 교육적 어려움은 있는 것으로 판단되어 현장에서 이야기하는 ‘복지카드 없는 특수교육대상학생’들이 있다. 보편화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학생들은 대부분 장애의 정도가 심하지 않은 편이며 자신의 의사를 행동이나 말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한다는 것은 선호도를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며 선호도가 확실하다고 하면 이전 칼럼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사소한 것은 일상생활패턴에서부터 크게는 직업적 선택까지 수월하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당사자 개인의 명확한 의사표현은 선택에 따른 만족도와도 대부분 일치하게 된다. 따라서 학교 현장에서 사회로 나가는 전환기에 있는 고등학교, 전공과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특히 ‘자기결정’, 선택의 중요성에 대해 꼭 가르치려고 노력한다. 덧붙여서 선택에 따른 ‘책임’도 함께 따르는 것임을 꼭 설명한다.    ​그러나 일 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자기결정’을 가르치는 일은 쉽지 않다. 특히나 ‘선택’의 경험이 없는 학생들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큰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가르치는 나조차도 힘이 들 때가 빈번하다. 실제로 올해 맡게 된 이제 졸업반인 남학생 A는 장애 정도도 심하지 않고 교우관계도 좋으며 학습 능력도 뛰어나 여러모로 미래가 기대되는 학생이다. 그러나 지역사회현장학습을 진행하며 주어진 예산 내에서 먹고 싶은 점심 메뉴를 고를 때 늘 한 발짝 뒤로 물러나고, 간식을 먹을 때도 두 개의 과자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을 극도로 어려워하며, 자신의 선택이 본인을 포함한 타인의 일정에 영향을 주는 경우가 되면 몹시 당황해하고 얼굴이 빨갛게 변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평소의 A학생의 성품을 알기에 선택의 상황에서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기를 몇 번 반복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선택 상황의 해결은 주변인 누군가의 결정으로 종료되는 것을 관찰하게 되었다.    ​어느 날, A학생과 둘이 이야기를 나누며 허심탄회하게 물었다. 왜 선택을 하지 않으려고 하느냐고. 그랬더니 A의 대답이 한 편으로는 마음이 아팠다. 자신의 형도 장애가 있고 형은 꼭 자신이 원하는 걸 해야 부모님이 덜 힘드시고(A학생은 지적장애이며 A학생의 형은 자폐성장애를 가지고 있다) 무언가를 결정해본 적이 없어서 선택 상황이 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긴장된다고. 그래서 솔직하게 이야기해줘서 고맙다고 말하고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에는 ‘선택’이라는 것을 해야만 한다고 말해주었다. 오늘 사용할 연필을 고르는 아주 사소한 선택부터 시작해서 점차 연습해나가면 선택 상황에 대한 불안함도 줄어들 것이라고 격려하면서.    ​‘선택’이 어려운 건 비단 발달장애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선택’없이는 자기주도적이고 자신을 중심에 둔 삶을 살아가는 게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선택’도 연습이 필요하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사소한 선택사항에도 당사자의 의견을 물어주고 수용해주는 것. 그러한 연습이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힘을 키우는 우리 학생들에게 꼭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 

    게시일2023-07-10

  • 생애 최초로 시작한 설거지   전 10대 재학 시절 처음으로 설거지를 시작했습니다. 비록 첫 설거지인지라 그리 능숙하진 못했지만, 이후로 조금씩 횟수를 늘려가며, 실력을 키워갔습니다.하지만 그때의 전 설거지 하는 게 보다, 어른스러워 보였기에 멋있을 것 같아 시작하게 된 거였지만, 점차 실력을 늘리다 보니 어느샌가 그릇에 묻은 기름때 같은 것도 곧잘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설거지 횟수를 늘리고 설거지의 기름때도 말끔히 제거하게 되자 언젠가부터는 설거지가 점점 즐거워졌고, 지금은 하나의 취미로 자리매김하게 됐습니다.물론 설거지하는 게 그리 즐거운 일만은 아니고 힘들다는 생각이 들 수는 있지만, 저는 집에서부터 설거지한 경험이 있어선지 바리스타로서 첫 출근 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식기를 그 누구보다 꼼꼼하게 씻게 됐고, 손님들에겐 보다, 청결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됐습니다.비록, 다리나 팔이 골절된 사람들은 당장 하는 게 어려운 일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조금씩 회복되고 언젠가 완치되었을 때부터라도 배워두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장애인이 다른 사람들보다 시간이 오래 걸릴지언정 조금씩 연습하다 보면, 언제나 큰 도움이 될 테니 자신감을 가지십시오.장애인도 엄연한 사회의 일원이며 능숙해지는 시간이 다를 뿐,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익혀두면, 장애의 장벽을 허무는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게시일2023-07-04

  • 학교폭력에 쉽게 노출되는 우리 아이들   TV 프로그램 중에 요즘은 트로트가 대세이고 미스터트롯을 통해 임영웅이 영웅이 되면서 여느 때보다 유난히 더 많은 트로트 경연대회가 방송국 여기저기서 펼쳐졌었다. 그중에서 불타는 트롯맨에서 우승자로 거의 확정된 사람이 지난날의 학교폭력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결국 도중 하자를 하게 되면서 그 결과를 보고 어렸을 때 철모르고 한 것을 한 번만 선처해 주면 앞으로 더 반성하고 돌아보면서 살 수 있게 기회를 주자는 사람과 그 반대로 그것은 용서할 수도 있는 사과할 수도, 피해자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 안고 살았을 세월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냐면서 반기를 드는 사람으로 나누어져 의견들이 분분했었다.돌아보면 아주 오래전 학교폭력이라는 게 언급되지도 않았고 학교에서 선생님과 학생, 그리고 학생과 학생 사이에 일어난 폭력들도 그저 선생님이 제자를 선배가 후배를 잘되리라고 사소하게 생각했고 그래서 때로는 사랑의 매로 불리기도 했었다.   지금은 20대 후반인 아들도 초등학교를 일반 학교 일반학급에서 생활했다. 그런데도 걱정과는 다르게 저학년 때에는 별문제 없이 지냈었다. 그런데 고학년이 되면서 아들은 키가 큰 편에 속했고 거기에 비해 다른 친구들과는 좀 달라 보였던 이유에서 인지, 유난히 한 반 아이에게 지금 생각하면 괴롭힘을 당했었다. 하교 시 기분 좋게 집으로 오는 적이 없고 늘 울면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눌하게 상황설명을 들어보면, 00이라는 아이가 뒤에서 가방을 발로 차고 왜 그러냐고 하면 돌아서서 안 그런 척하고 때로는 바보라며 놀리는 등등의 행동과 또 다른 아들을 자극하는 언어로 화를 돋게 했다. 그 아이로 인해 조용할 날이 없었고 그러한 일들로 아들이 학교에서 등·하교 시간은 살 얼음장 같은 날로 보냈었다. 하지만 그저 우리 아이가 보통 아이와 다르다는 이유로 혹시나 또 다른 피해나 따돌림을 당할까 늘 그냥 아들을 달래며 그 친구가 뭐라고 하든 대꾸도 하지 말고 그 자리를 모른 채 피하거나 지나쳐 오라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교문 앞에서 그 아이를 만났다. 또래보다 훨씬 키가 크고 덩치도 커서 애아범처럼 느껴지는 그 아이에게 지금껏 아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사이좋게 놀았으면 하는 말을 전했다. 그 아이는 우리 아들이 자꾸 먼저 그런다고 하길래 그 말끝에 덧붙여 그럴 경우가 생기면 이제부터는 나한테 직접 말하라고 한 데 얼마를 지났을까. 아들은 또 그 아이 때문이라며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너무나 화난 표정과 그리고 억울한 감정을 어쩔 수 없어서인지 처음으로 아이들이 하는 욕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하라고 했던 이유로 그 애는 아들이 자기에게 잘못 했다며 집으로 가자며 손을 끌고 당겼던 모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이를 대신해서 찾아가 자초지종도 들어보고 잘잘못을 따져 혼을 내고도 싶은 마음이 더 컸지만, 장애가 있는 부모로서 늘 위축되고 자존감이 떨어져서 냉철하게 대응을 잘못하지 못해서인지 그때는 그래봐야 또다시 그 아이는 어쩌면 아들에게 더 큰 화풀이를 행사할 것 같아서 속상한 마음을 삼킨 채, 담임선생님께나 그 누구에게도 언급도 하지 않고 속앓이하면서 속상한 마음에 아들을 안고 펑펑 울었던 생각이 난다.   20여 년 전만 해도 그렇게 학교폭력 자체가 드러나지 않은 때였고, 부족한 아들이라는 그 핸디캡을 감내하고 참고 혹여 그런 일들이 학교에 전해져 봐야 좋을 게 없다고만 생각하며 단지 그 아이 같은 애들이 두 번 다시 그런 행동을 하지 말기를 기도로 대신 하곤 했었다. 그러고는 아마도 한두 차례 그러한 일들이 더 있었고 학년이 바뀌고 또 중·고등학교를 가면서 그 아이와는 더는 마주치는 일이 없어져서 한결 학교생활이 부드러워졌었다.그리고 몇 년을 지나 대학생이 된 어느 날, 우연히 이사한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 아이를 만났다. 우리 아들은 그 아이 이름을 또렷이 기억했고 그 아이 이름을 중얼거리며 내 뒤에 얼른 숨는 것이었다. 나도 그 아이 얼굴을 보니 지난 일들이 다시 생각나서 심장이 뛰었지만, 조심스럽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 아이를 향해 우리 아들을 알아보겠냐고 물었더니 그 애 또한 머뭇거리며 우리 아들 이름을 말했다. 나는 갑자기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 우리 아이는 수년 동안 그 아이로 인해, 저만치 또래 아이들이 보기만 해도 삽시간에 어디론가 숨어버릴 만큼 그 아이를 싫어했고 무서워했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그 많은 세월 시간을 과연 어떻게 지냈을까? 짧은 시간에 수만 가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00아! 너 그때 왜 그랬니?"라고 말을 하는데 가슴이 떨리면서 그때의 고통과 우리가 겪어야 했던 아픔들이 되뇌어지면서 얼굴도 상기되고 목소리까지 떨려나 왔다. 왜 그랬냐는 말에 그 애도 무엇을 내가 말하는지 자기가 했던 일을 기억하는 듯 쭈뼛거리더니 "죄송합니다. 그때는 철이 없어서~~" 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나는 "그랬구나! 그런데 너로 인해 우리 아들은 그 시간 동안 얼마나 아프고 힘들어했는지 알고 있니? 그럼, 네가 정말 잘못을 인정한다면 진심으로 우리 아들에게 사과해라."라고 했고, 그 애는 아들에게 다가가 "정말 미안했어! 미안해~"라며 아들의 손을 잡기도 하고 안아 주었다. 당황하던 아들도 내 말과 00이가 하는 말과 행동을 보고 자기에게 사과한다는 것을 느꼈는지 다가가 안으면서 대성통곡을 했다. 그 모습의 가슴에 얼마나 상처가 응어리로 남아 있었을지 짐작이 갔다. 옆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나는 그 아이에게 "00야! 시간이 지났지만, 진심으로 사과해 주어서 고마워"라고 안아 주었다. 죄송하다는 말과 아들에게는 미안했다며 다시 악수를 청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얼마를 지나 엘리베이터에서 그 아이를 만났다며 환하게 웃는 아들의 모습에서 평안함을 느꼈다.   문득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아들이 초등학교 그 시절로 돌아가 그런 일들로 또다시 힘들어한다면, 지금처럼 그냥 참고 그리고 그 순간을 피하라고만 했을지? 아니면 학교에나 그 아이 집에 알려 징계받게 했다면 우리 아들은 더 이상 힘들지 않고 상처도 깊어 지지 않았을까? 아니면 확대된 일로 많은 사람의 시선에 더 깊은 아픔을 낳게 했을까? 수많은 질문이 나에게로 쏟아졌고, 또 한편으로는 이런 경우는 일어날 기회가 없을 수도 있지만 아들의 경우처럼 어느 시간이 흘러 우연이라도 만나 진심으로 사과받게 되는 게 옳았을까??아들은 지금은 그 아이를 보면 겁나고 싫냐고 하는 물음에, "괜찮아"라고 하니 묵은 감정들이 조금은 사라지는 기분이 드나 싶어졌다. 요즘은 가끔 페이스북에서 그 애 소식을 보고 알려줄 정도가 되었으니 일단은 안심이지만. 어떤 게 현명한 대처이고 최선이 될지에 대해서는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일반적인 경우가 아닌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경우라서 더 특별하고 조심스러워서 지금도 그때도 적절하게 대응을 한 것인지 모른다. 다만, 사과는 상대에 대한 진심이어야 하고 상대가 그걸 받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사과하면서 안 받아 준다고 사과하는데 왜 안 받아 주냐고 되레 화를 내는 경우를 본 적도 있는데, 그 애와 아들은 진심으로 사과하고 진심으로 사과받아주어서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수 있었던 것 같다.그래서 하여튼 누구에게나 어디서든 그러한 괴롭힘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를 지금도 기도하며 장애인이라고 해서 무시하고 무관심하고 함부로 해도 된다는 몰지각한 사고들이 사라진 건전한 세상 밝은 세상에서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날들을 꿈꾸어본다. 

    게시일2023-06-29

  •  이보다 더 좋을 수 있다    책 제목이 신박하다. ‘싱글맘의 마음 보고서’라는 부제에는 입을 삐죽거렸다. 약간의 궁상과 열심히 사는 젊은 엄마의 뻔한 이야기려니 생각했다. 큰 오산이었다. 우선 재밌다. 이혼이라는 과정을 부모, 형제, 본인까지 다 겪으면서도 선천적으로 보이는 명랑, 쾌활함이 그녀를 어둠 속에 가두지 않았다. 살다보니 어둠은 다른 어둠을 불러들이거나 내 몸과 마음을 땅 속으로 꺼지게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저자는 달랐다. 고비마다의 고뇌는 그 정도 당연한 것이었고 잘 흘려보내는 현명함이 있었다.세 번의 유산으로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네 번째 아이를 만나면서 남편과 헤어졌다. 헤어진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리셋 하겠다는 남편이 새로운 사랑을 찾아 일방적으로 떠나버렸다.책 읽는 내내 이보다 더 좋을 수 있다는 희망이 보였다. 배우자의 배신은 일상을 무력하게 하는 강력한 이유가 될 것 같은데 글 속에 남편을 비하하거나 원망하는 일이 없다.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않고 딸 재희와의 일상에만 전념하는 모습이 독자로 하여금 안심하게 만든다.   오래 전, 정치인 출판기념회라는 곳에 가서 장애부모들이 두 시간 내내 손피켓을 들고 서 있었던 적이 있다. 그 정치인이 선동하여 지역에 들어설 장애인 시설을 막았기에 힘없는 우리 엄마들이 할 수 있는 건 우리를 봐 달라고 묵언 투쟁하는 것뿐이었다. 그 때와 달리 독자로서 당당히 참여한 ‘이보다 더 좋을 수 있다’의 저자 북토크 현장은 따뜻했다. 싱글맘 저자의 환한 웃음 뒤에 든든한 연대의 힘을 보았다. 부산에서, 진주에서 작가를 응원하고자 찾아왔다니 남편 없어도 세상 부러울 게 없어 보였다. 책속의 등장인물들이 다 참석했다. 할머니, 엄마, 딸, 이모, 이혼한 남편의 어머니와 미용실 여인까지, 저자의 오늘이 늘 이보다 더 좋을 수 있도록 함께 살아온 많은 이들의 응원과 격려가 어린 모녀의 삶을 지켜주고 있었다.   책에 없는 내용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걸 들으며 싱글맘이 받는 사회적 시선이 장애인 가족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알았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불행의 프레임에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다르게 사는 이들을 가두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빠 없는 아이 표정이 밝다는 말을 들을 때의 심정, 장애인 자녀 키우면서 어둡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듣던 나와 다르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이 그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봐 달라는 것, 장애가 있건 아빠가 없건 그래서 불행할 거라는 선입견은 거둬 달라는 바람은 닮아 있었다.   최근 6개월 동안 전 남편이 양육비를 보내지 않는다고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곤 있지만 다달이 쓰임이 빤한 비용을 지불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면 얼마나 불안할까 싶어 안타까웠다. 이런 것들을 제도적으로 보완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얘기하는데 공감이 되었다. 국가가 양육비를 선지급하는 것, 정당한 사유 없이 양육비 채무를 이행하지 않음으로 미성년 자녀의 안정적인 환경을 파괴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 국가의 책무는 이런 것이다.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외면하지 않고 지원하는 것. 악의적인 행동으로 누군가의 삶이 망가지게 하는 것을 막아주고 지켜주는 일.   우리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해 무조건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선입견은 버렸으면 좋겠다. 한부모, 조손, 장애인, 다문화, 재혼 가족 등 각자의 상황에서 열심히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따가운 눈총이나 동정의 시선은 옳지 않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뭔가를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필요하고 중요하다. 싱글맘의 수필에서 보여준 일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매우 컸다. 공감과 동감으로 읽혔고 가족의 형태에 따라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다시 생각해 보게 했다. 벌써 2쇄를 발행했다니 많은 이들이 읽고 저자의 삶에서 통통 튀는 삶의 활기를 느꼈으면 좋겠다. 지금 행복하냐는 독자의 질문에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모아 ‘오케이’하던 저자의 환한 표정에서 박수치는 많은 이들에게 행복이 전염되고 있음을 느꼈다.우리 모두의 삶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기를 바란다.   

    게시일2023-06-19

  •    * 이번 칼럼에는 좀처럼 보기 어렵다는 꽃을 피워낸 우리 교실에서 키운 호야 꽃 사진을 함께 첨부하여 보냅니다. 함께 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행복’을 찾아가는 일       ​“얘들아, 안녕~! 다들 즐거운 휴일 보냈니?”   ​6월 5일 학교장재량휴업일과 6월 6일 현충일을 더해 4일 간의 휴일을 보냈을 아이들에게 반가운 마음을 담아 아침인사를 건넸다. 이 녀석들, 또 웃으며 ‘으~~ 학교 오기 싫었어요~.’라고 하겠지라는 마음 속에 예상 답안을 써두고서. 그랬더니 통학 거리도 시간도 가장 멀고, 점심 식사 시간 이후부터 줄곧 ‘집에 가고 싶다!!’를 입에 달고 다니던 한 녀석이 이렇게 말한다.   ​“아 학교 못 와서 너무 너무 심심했어요! 학교와도 되니깐 너무 좋아요!!”   ​여지없이 나의 예상을 빗나가는 녀석의 말에 나도 ‘그랬어? 하하하!’하고 웃었다. 주변의 친구들도 동조하며 함께 웃는다. 행복감이 느껴지는 공기, 그리고 그 대화의 끝에 생각이 머물렀다.     ​어느 날이었던가, 좋아하는 라디오를 듣던 중이었는데 청취자들에게 디제이가 묻는다.   ​“여러분에게 행복한 순간은 어느 때인가요? 누군가 행복한 순간이 언제였느냐고 물었을 때 답할 한 순간이라도 있다면 당신의 마음은 이미 풍족할 겁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툭 마음이 튀어나왔다.   ​“저는 매일 아침 출근해서 교실을 환기하며 아이들을 기다릴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그냥 좋아요. 행복하구요.”   ​그래서일까, 오늘 학교에 오고 싶었다는 아이들의 말이 내 마음 속에 훅 들어와 앉았다. 분홍색 물감이 확- 하고 퍼져 꽃물처럼 따뜻하게 번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감사한 마음이 일었다. 우리 대부분은 살아가면서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선택과 조정을 고민하며 직업을 가진다. 스스로가 최선을 다하고 싶고 다하고 있는 일이면서 동시에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나는 정말 얼마나 행복한 사람일까.     ​길지 않은 시간, 알알이 보석처럼 빛나는 아이들과 학부모님을 만나며 느낀 점이 있다면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한 이후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결정을 내린 가정의 경우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아이가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인가?’에 대한 가족들의 합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합의가 된 가정의 경우에는 사회적(지원 인력), 경제적(소요 비용) 여건에 따라 무엇보다 학생의 의사를 존중한 진로 선택이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그런 경우 특수교사로서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지원을 제공하는 것도 훨씬 수월하였다. 반대로 진로 선택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가정의 대부분은 외부의 시선, 취업의 조건, 개인 내적인 어려움 등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경우가 다수였다.   ​나의 경우, 특수교육 현장에서 우리 아이들을 만나 아이들과 함께 자라고 아이들의 졸업 이후의 삶을 함께 고민하는 것이 너무나 의미 있고 행복한 일이다. 이러한 일과 직업에서 오는 가치와 행복을 우리 아이들과 꼭 느껴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자면 우리 아이들과 아이들의 부모님, 함께 사는 형제자매들이 행복해야한다. 아이들이 만나는 교사 역시 행복해야한다. 행복은 내면의 힘을 단단하게 해주고, 가끔 살면서 시련이 닥쳐도 툴툴 털고 일어나는 힘이 되어주고, 지칠 때 기댈 어깨가 되어줄 것이며,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안내해주는 나침반도 되어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어떤 장소에 있을 때, 무엇을 할 때, 누구와 함께 있을 때 행복한가?’     

    게시일2023-06-08

  • ​울 아들은 갬성쟁이     어느새 담장이나 울타리마다 장미가 붉게 타오르는 아름다운 계절이 돌아왔다. 이 아름답던 꽃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떨구어져 바닥을 붉게 물들이는 시간이 온다. 꽃은 피어 있어도 예쁘지만, 또 떨어져 깔려있는 모습에서는 피어 있을 때 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나에게는 지금 29살이 된 아들이 있다. 지금은 언어의 발달도 사회성도 많이 좋아진 편이라 때로는 능청스럽게 농담도 하고 때로는 자기에게 불리한 상황에서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대충 얼버무릴 줄도 알게 될 정도로 많은 발전이 있었지만 5살까지만 해도 겨우 필요한 몇몇 단어를 말할 정도의 언어와 인지능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아들은 그 중에서 그나마 유난히 감성이 풍부했었다. 그래서 쇼핑이나 시장에 가게 되면 주인분들의 말이나 행동에 리액션을 너무 멋지게 잘해서 정육점에서 고기를 써는 모습에도 백화점에 즐비한 상품을 보고도 "와~~"라는 감탄사를 연발하곤 했다. 그 모습에 그분들은" 너 때문에 기분이 좋아서 덤을 준다"라며 무엇인가를 하나씩 더 얻어 오기도 하는 것처럼 마음에 어떤 느낌이 작용하면 그렇게 리얼한 표정을 지으면서 감정을 전달하기도 했다.     ​3살~4살쯤 어느 봄날이었다 개나리 진달래가 피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온통 주변이 꽃 대궐이던 때, 우리가 살았던 창동 하나로마트 근처 가로수길에도 벚꽃이 만발했었다. 정말 길 양쪽으로 즐비하게 서 있는 나무마다 하얗게 핀 꽃들을 보면 누구나 탄성이 저절로 나오기도 했지만, 어느 날 시장을 보고 나오며 그 벚꽃 핀 모습에 영락없이 감탄의 언어가 튀어나왔는데 너무도 웃겨서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너무도 아름다운 벚꽃 무리를 보고 아들이 동그랗게 눈을 크게 뜨고 벚꽃을 향해 하는 말이 ‘와~~이쁘다 민들레!!’라고 반전 언어를 보여주어 모두들 박장대소 하게 했고 지금도 우리 식구는 봄날 그렇게 만개한 벚꽃 광경을 마주하게 되면 입을 모아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와~~이쁘다 민들레"라는 말이 동시에 터져 나온다. 그리고 아들에게 그런 어릴 적 이야기들을 해주면 머쓱해서 피식 웃고 만다.   ​내 기억 속에는 또 꽃에 얽힌 아들의 감성을 엮어 내던 또 다른 일 하나가 생각난다. 장미의 계절이 오면 5살이던 유치원 시절의 한 장면이 바로 그날이다. 유치원을 집에서 떨어진 곳에 보내게 되어 늘 차로 등·하원을 시켜야 했고 그날도 하원 시간에 맞춰 아들을 데리러 갔다가 조금 이른 시간이고 여유가 있어서 주변을 거닐다가 문득 빨갛게 떨어진 장미꽃잎이 너무 예뻐서 무얼 할까 생각하다가 무심히 차 앞 범퍼에다 꽃잎을 모아서 커다랗게 하트를 만들어 놓았다. 만들 때는 아들에게 보여줄 이벤트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고 단지 떨어진 꽃잎이 너무도 이쁜데 아깝고 아쉬운 마음에 심심풀이로 한번 해 본 거였는데, 아들이 보여준 의외의 모습에 마음이 더 뭉클해졌던 일이라 아직도 기억에서 붉게 남아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게 하얀 차 범퍼 위를 빨간 장미 꽃잎으로 일궈낸 하트는 내가 봐도 정말 이쁘긴 했었다. 아들은 멀리서 뛰어오다 순간 걸음을 멈추고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달려와 내 품에 와락 안겼다. 그래서 엉겁결에 "엄마가 널 사랑하는 마음이지"라고 처음 의도와 다르게 분위기가 그렇게 말하게 했고 주위의 모두도 아들을 위해 엄마가 이벤트를 했다고 느끼고 있었다. 선생님이 가까이 다가오시더니 "어머님 저도 눈물 나려고 해요"하시며 "○○이 감성이 어머님을 닮아서인 것 같아요" 그래서 그렇게 한바탕 사랑타령을 했던 날도 있었다.   ​활짝 핀 민들레 홀씨가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린다는 사실을 아직 알지못할 때 딴에는 민들레 홀씨의 하얀 아름다움을 따다가 선생님께 드린다고 뛰어 가다가 홀씨가 다 날아가는 바람에 꽃대만 들고 마냥 섭섭하며 야속한 마음과 선생님께 드리고 싶었던 마음이 불발이 된 속상함에 과부화가 생겨 그날은 또 한차례 전쟁을 치루기도 했던 일들이 새록새록 기억이 피어난다.     ​또 감성이 풍부해서인지 흥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ᆢ... 테크노 댄스가 열풍이던 때 그때는 길거리 가게들에서 테크노 음악을 크게 틀어 놓기도 해서 길을 걸으면 여기저기서 신나는 음악 소리를 듣게 되고 아들은 브릿지라고 머리카락 전부가 아닌 몇 가닥만을 탈색해 멋을 때 부리는 걸 참 좋아했다. 그래서 옆 머리카락 몇 가닥을 노랗게 염색해주면 너무 좋아했다. 그런 모습으로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하고 신나는 테크노 음악에 오른손을 반쯤 꺽어 세우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리듬을 타면 주위에서 보는 사람이 "어머 저 애기 좀 봐!"라며 박수를 쳐 주곤 했었다. 세월이 흘러 생각을 해보면 그때는 모르고 지나쳐서 순간순간을 힘들다고만 했었는데, 이제와서 돌아다보니 아들로 인해 웃고 행복하고 즐거웠던 일들이 참 많이 있었구나. 다시 한번 소중해진다.     ​아들은 그렇게 자라 어느새 올해 29살이 되었고 이제는 제법 어엿한 청년의 모습을 갖추는데 한 걸음씩 더 가까이 가게 되었고 가족들의 생일이나 기념일은 꼭 기억해서 립스틱 향수 모자 등을 얼마인지 가격은 모르지만, 선물이라며 몰래 사와 머리맡에 두기도 하고 가끔은 달려와 안기며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엄마가 최고지"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뽀뽀하기도 하면 나는 "다 큰 것이 징그럽게~~"라고 말은 하지만 고맙고 또 얼마나 감사한지. 그러면서 어렸을 때부터 풍부했던 갬성쟁이 우리 아들이 그런 감성으로 모두에게 사랑을 주고 또, 사랑받는 가슴 따뜻한 남자로 아들로 그렇게 더 성장하고 더욱 성숙해지기를 바라며 기도한다.​ 

    게시일2023-06-07

  • ​ 생애 최초로 혼자 간 영화관   전 고등학생 시절 태어나서 생전 처음으로 영화관을 다녀왔습니다.어릴 적부터 친구나 가족들과 함께 영화관을 다녀온 적은 많았고 그 외에도 많이 다녀봤기에, 혼자 영화관을 다니는 것에 로망을 품고 있었습니다.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처음으로 영화관을 갈 때는 굉장한 흥분과 긴장감을 동반했는데, 어찌나 긴장했는지 영화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하지만, 그 후로, 2번 3번 조금씩 영화관에 가는 걸 늘리며, 문화생활을 만끽했는데, 학창시절과 직장생활이 제법 바빠서 많이 늘리진 못했지만, 확실한 건 장애인이라도 스스로 문화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여부를 떠나서 제, 스스로 영화관 같은 곳을 들린 건 처음이고, 애초에 제가 장애인임을 알기 전에도, 영화관에, 들린 적이 없기에, 굉장히 색다른 느낌이었습니다.그렇게 장애인의 판정을 받은 뒤, 들린 영화관은 제게 있어서 그저 처음으로 혼자 즐기는 문화생활이란 의미 외에는,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해서인지 그리 개의치 않았습니다.생애 최초로 혼자 간 만화방   전 20대가 되자마자 마치 중ㆍ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것처럼 여러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그중 한 곳엔 만화방이란 곳이 있었습니다.거긴 소설이나 일반적인 만화책과는 달리 주로 흑백 만화가 주를 이뤘지만, 중학생 때 자주 봤던 슬램덩크나 이누야샤 같은 만화책을 주로 볼 수 있어서 느낌이 새로웠습니다.솔직히 슬램덩크는 중학생 때 만화책으로 처음 본 것이기에 딱히 새롭다기보다는 정겹다는 느낌이 강했지만, 이누야샤 같은 건 애니메이션으로 많이 본 적은 있어도 만화책으로 본 경험이 한 번도 없어서 굉장히 신선했습니다.애초에 만화책에서부터 애니메이션이 시작된 것이고 제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만화책으로 본 경험이 한 번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지만, 다들 한 번쯤 가보시는 것도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그리고 만화방 같은 곳에선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막론하고 모두가 사이좋게 만화를 보고 있던 지라 딱히 소외감을 느낀 적도 없어서 장애인들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습니다.장애인도 엄연한 사회의 일원으로 비장애인들과 이용방식의 차이는 있을지, 언정 여가 공간을 이용하지 못하리란 법은 없습니다. 

    게시일2023-06-02

  • ​   ​네버엔딩 우리들의 이야기​ 준수한 청년이 마이크를 잡고 웃었다. 준비해 온 원고를 펼치며 자기소개부터 하는데 말투가 살짝 어눌한 것 빼고는 훌륭했다. 삭발과 농성으로 부모운동의 역사를 언급하며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체계 구축을 위해 이 자리에 섰다고 말하는 청년은 장애부모 단체의 상근자였다. 진행자의 질문에 적절한 미소와 유머로 참가자들의 환호를 받았다. 혼자 사는 것에 대한 외로움을 말하면서도 연애를 하고 싶지만 바빠서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말에 모두들 박수치며 응원했다. 딱 요즘 젊은이의 모습이었다. ​수줍음 많은 청년은 등장부터 시선을 모았다. 큰 키와 웃음기 머금은 얼굴은 편안함이 묻어 있었다. 돈도 많이 벌고 싶고 댄스와 노래, 난타 등을 취미로 가졌으며 8년차 자조모임을 하면서 자립과 독립을 통해 여행을 꿈꾸는 청년. 여자친구 생기면 투쟁 현장에 함께 오고 싶다니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이 몸에 밴 것 같다. 2년째 댄스로 아침을 연다는 말에 음악을 틀어주니 바로 나오는 춤사위에 집회 현장은 콘서트장이 되었다. 길쭉한 팔다리를 양껏 휘두르며 아이돌 춤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모습에 다들 열광했다. ​바이올린 앙상블 연주자들, 예술적 기능을 타고 태어난 부분도 있겠지만 매일 연습하며 보냈을 노력의 시간들이 보였다. 그들 곁에서 뒷바라지한 부모들의 땀방울도 맺혀 있었다. 여러 곳에서의 공연을 통해 그 일로 자신들의 삶이 얼마나 빛나는지 알 것 같은 청년들, 참 훌륭하다.흥 많고 끼 많은 이분들의 삶이 늘 즐겁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부모가 세상을 바꾸는 일에 더욱 박차를 가할 이유다.    ​당사자들의 이야기는 늘 웃음을 선사한다. 마이크 잡은 모습만 봐도 대견하고 기특하다.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할 때는 한마디 한마디가 신선하다. 부모인 우리들의 고민과 걱정이 무색할 뿐이다. 저들은 나름의 일상을 재밌게 잘 살고 있다는 안도감이 슬쩍 생기기도 하지만 세상은 약자들을 노리는 요소들로 가득하다. 이분들의 웃음을 지켜주기 위해 부모가 나서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하는 부담감이 크다. ​발언하는 당사자들을 보면 순간적으로 찾아오는 부러움이 있다. 저 정도만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어느 새 자리 잡고는 내 아이와 비교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내가 그들을 부러워하는 지점은 좀 다르다. 남들 앞에서 말하는 거와 여러 가지 능력이 있는 것이 부러운 게 아니다. 타인의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남들이 웃을 때 함께 웃는 모습을 보면 그들의 공감 능력이 좋아 보인다. 웃음 코드가 각자 다르긴 하겠지만 대중들과 호흡을 함께 하는 느낌, 오늘 자리한 청년들을 유심히 보니 특히 자신들의 말에 더 많이 웃고 즐거워하는 모습들이 인상적이었다. 아는 사람이라 더 집중하고 반응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은가. 어쩌면 그것이 훈련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 또한 나쁘지 않다. 감정을 표현하는 건 연습이 필요한 부분도 있으니 말이다.    ​장애자녀와 함께하는 삶을 이야기하는 부모들의 이야기는 다들 비슷해서 더 공감이 간다. 생후 1년 정도는 여느 아이와 다를 게 없어 보였지만 고집과 집착이 강하고 울음떼와 잠을 안 자던 시절은 대부분 겹치는 것 같다. 온갖 치료와 교육의 열을 어려서부터 들이댔던 경우도 다 비슷하다. ​한때는 차라리 편하게 놀도록 놔두는 게 더 나았을 거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교육을 놓친 엄마들의 얘기는 또 그때 더 많이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이래저래 우리의 과거는 후회와 반성의 날들이지만 다들 열심히 살아왔다는 점은 또 인정한다. ‘열심히’보다는 ‘잘’ 했어야 했는데... ​우리만이 아는 지난한 과거로부터 벗어난 이들도 있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경우도 있다. 벗어난 이들은 남들 앞에서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아직도 힘든 경우는 말을 아끼고 그저 안으로 삭이며 살고 있다. 그저 남들처럼 큰 소동없이 잔잔한 일상을 원하지만 크고 작은 일들이 끊이지 않으니 장애가족의 삶은 고단하다.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체계 구축’을 위한 끊이지 않는 우리들의 이야기에 고단한 삶을 말하는 부모들 얘기도 좋지만 당사자들이 직접 말하는 자신들의 이야기가 더 많아지면 좋겠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 그들이 바라는 세상을 더 많이 소문내고 알리면서 함께 살아가는 ‘여기’를 만들어야 되지 않겠는가.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 탄탄해지는 그날까지 매주 화요일 오전 11시, 여의도 이룸센터 앞 농성장에서 진행되는 우리들의 이야기는 네버엔딩이다.     

    게시일2023-05-22

  • ​ “안녕하세요, 올 한해 여러분들과 함께할 000선생님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개학날, 아이들과 부모님을 눈으로 빠르게 스캔하며 나누는 설레는 첫인사. 경력이 10년이 되어가도록 적응되지 않는 낯설고 설레는 순간이다.  ​특수교사에게 1년 중 가장 떨리는 때가 언제냐고 물어본다면 아마 10명 중 8명은 담당하게 될 학급이 발표되는 때라고 말할 것 같다. 3월 개학일을 앞두면 어떤 개성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을 만나게 될지, 그 아이들을 낳고 기르신 부모님은 또 어떤 분이실지, 아이들이 날 잘 따라줄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며 걱정과 설렘으로 잠을 설친다. 일반학교의 특수학급에 근무하며 타교과 선생님들과 특수교사를 비교해볼 때, 특히 특수교사는 비장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반교과 선생님들에 비해 내가 맡게 된 학생 뿐만 아니라 그 학생의 부모와 가정까지 가까이 들여다보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개학 첫 날이 더욱 긴장되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 사람을 만나는 일은 하나의 우주를 만나는 크고 값지고 무거운 일이라고 했는데 특수교사는 하나의 우주와 그 우주를 감싸고 있는 또 다른 우주까지 만나게 되니까 말이다.  ​특수교육 현장에서 발달장애학생을 만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실제로 2022 특수교육통계(교육부) 결과를 살펴보면 2022년 4월 1일 기준으로 발달장애인에 포함되는 지적장애와 자폐성장애를 가진 특수교육대상자가 전체 인원의 68.7%로 과반수를 훨씬 뛰어넘고 기고자 역시 학교에서 만난 학생들의 80%는 발달장애학생이었다. 그렇다면 학교 현장에서 발달장애를 가진 학생들을 만난 특수교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할까? 의심할 여지없이 가장 기본적으로 발달장애학생들의 학업적 성취를 도울 수 있는 교육 전문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할 것이다. 더하여서 지적장애학생과 자폐성장애학생이 공통적인 어려움을 가지는 사회적 능력의 제약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교육적 지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사회적 능력은 사회생활에 필요한 자기조절, 일상생활능력을 포함하여 타인과의 대화나 협력 등을 포함한다. 학생의 사회적 능력에 대한 현행수준은 교사의 직접적 관찰만으로 파악하는 것은 제한점이 있어 부모나 주양육자의 면담이 필수적이며, 현행수준 파악을 통한 교육적 지원과 중재가 효과적인지 확인하거나 일반화를 위해 학교-가정에서의 공통된 지원이 필요한 경우에도 가정과의 협력과 소통은 반드시 필요하다. 문제는 특수교사가 파악해야 할 정보가 너무 방대하다는 것이다. 학생의 기저질환, 복용 중인 약에 대한 정보, 정기검진일 등 건강에 관한 정보를 포함하여 가족 구성원과 학생의 상호작용, 거주 환경, 가정의 지원 정도, 방과 후의 활동 내용까지 살펴야 하는 부분이 광범위하다.  ​다행히 지금까지 만났던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학생의 학습적, 사회적 교육에 많은 관심과 흥미를 보이며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고 소통에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 그러나 가정형편이 극도로 빈곤하거나 의복이나 개인 위생 부분에 있어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아 규칙적인 등교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학생의 경우 학습적 측면의 지원은 차치하고 생활에 있어서의 지원이 우선이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학생의 부모가 관공서에 직접 지원을 요청할 여건이 안 될 경우에는 특수교사가 대신하여 관할 주민센터 복지 담당 부서에 직접 연락을 해 도움을 요청하거나, 가정에 방문하여 학생의 등하교를 지원하는 등 특수교사 혼자 감당하기에 버거운 일들도 있었다. 교육도 물론 중요하지만 학생들의 안전이 가장 최우선 되어야하는 상황에서 교육적 전문가로서의 교사의 역할과 생존 또는 돌봄의 교사 역할이 혼동되는 경우가 많았고 때때로 특수교사의 역할은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다행인 것은 특수교육대상학생을 포함하여 교육비, 교육환경개선 등이 필요한 학생들을 지원해주는 교육복지사를 배치하는 지역교육청이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복지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제도의 확대를 통해 교육 이전에 생활 환경이나 돌봄에 어려움이 있는 학생들을 지원해주는 보편적인 제도가 실시되고 특수교사가 학생의 안전과 생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면, 발달장애학생들에게 쏟을 수 있는 특수교사의 에너지와 교사로서의 역할도 보다 더 분명해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게시일2023-05-11

  • 회사의 급한 사정으로 미리 계획했던 가족 여행에 휴가를 낼 수 없다며 딸이 아쉬워했다. 다행히 다른 직원의 도움으로 이틀 휴가를 하루로 변경했다.수도권에서 혼자 사는 딸은 여행 당일 아침 7시에 서울 집으로 출발한다고 연락이 왔다. 딸 도착하면 같이 아침 먹으려고 음식 해놓은 걸 보고 기다려야 하는 아들은 힘들어 했다. 일찌감치 만들어 놓은 나물 종류와 된장찌개 냄새는 아들의 식욕을 자극했다. 손을 씻고 오더니 수저를 챙겨 식탁에 놓았다. “하진아, 좀 있으면 누나 올 건데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폐인 아들은 두 손으로 본인 머리를 치며 눈을 부릅떴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이 필요 없다는 걸 알고 돌아섰다. 괜히 냄비 뚜껑을 열어 큰소리 나게 닫았고 음식 준비로 지저분한 씽크대 주위의 식기들을 세게 들었다 놨다 하며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평소와 다른 엄마를 보며 아들은 살짝 겁을 먹었다. 소파에 앉아 주방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화난 엄마를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어? 이게 통하네?’하는 마음으로 분이기를 풀지 않았다. 한편으론 먼저 밥 먹게 하려던 마음이 싹 달아났다. 평소 8시에 먹던 아침을 9시 반이 넘도록 준비만 하고 먹지 못하게 했으니 아들에겐 고역일 수도 있었다. 순간의 자해 행동은 있었지만 더 고집 피우지 않고 잘 참아준 아들이 또 기특했다.넷이 식탁에 앉자마자 아들을 칭찬했다. “누나 올 때까지 기다려줘서 고마워 하진아.” 아들은 자신의 행동이 엄마의 소리없는 화남으로 억지춘양이었음을 알고는 겸연쩍은 듯 웃었다.   바삐 움직여 도착한 강릉 아르떼뮤지엄은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제주에 이어 여수와 강릉에 설치된 빛과 소리의 미디어아트 전시관은 눈과 귀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거울로 반사된 공간은 실제보다 훨씬 넓은 착각을 불러왔다. 파도가 밀려와 발을 적시는 느낌은 실제와 흡사했다. 낯선 걸 피하는 편인 아들도 모든 걸 즐겼다. 손으로 만지거나 얼굴을 대보기도 하면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경포호 주변을 산책하며 벚꽃과 목련 등 봄꽃에 취해 적당한 인파 속에서 봄을 즐겼다. 숙소에 도착해서 옷장을 열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우리 앞의 투숙객이 옷을 놔두고 퇴실했나 싶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아들은 안방 옷장에 겉옷을 걸어두고는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있었다. “세상에나, 말로 일일이 지시하고 눈짓으로 싸인 줘야 움직이는 우리 아들이 이렇게 훌륭하게 옷을 걸어놨네, 정하진 최고!” 엄지를 치켜세우며 호들갑스런 나의 반응에 ‘뭘 그런 걸 가지고’의 표정으로 미소짓는 아들은 꽤 늠름했다. 할 수 있는 걸 안하다 보니 못할 거라는 짐작으로 늘 다그치고 명령하는 나를 또 반성했다. 기다려줘야 한다는 기본 전제를 잊고 재촉하는 버릇을 버리는 게 참 어렵다. 낮에 찍은 사진을 가족대화방에 올리며 웃고 떠드는 사이 밤이 깊었다. 아들에게 침대와 온돌방 중 어디서 자고 싶냐 물으니 침대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집과 비슷한 구조의 숙소라 아들은 모든 게 낯설지 않아 보였다. 편안한 익숙함이 지속되도록 아들의 독립을 현재와 비슷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다음 날은 포천 광릉식물원을 방문했다. 유독 고사목이 많아 화려한 봄꽃보다 갈색 나무들이 즐비했다. 만보 이상 걸으며 가끔 걷기 싫은 티를 내면서도 아들은 우리 뒤를 잘 따라왔다. 남매가 개나리꽃 아래 다정하게 서 있는 모습은 그림 같았다. 아들 주위의 풍경을 찍으려고 폰을 들면 어느 새 자기 찍으라고 폼 잡는 아들을 보며 우리는 또 크게 웃었다. 포천 하면 이동갈비라고 어디가 좋은지 검색해서 찾아간 곳은 꽤 인적 드문 외진 곳이었다. 영업을 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용했는데 주차장에 대여섯 대의 승용차가 보였다. 반찬도 깔끔하고 갈비는 연하고 맛났다. 우리가 먹고 나올 때쯤 식당은 만석이었다. 단골로 보이는 손님이 많았는데 맛과 친절로 사람들이 많이 오는 것 같았다. 이런 외딴 곳에 까다로운 고객을 고정으로 확보하려면 얼마나 치열했을까 생각하니 사는 게 경이롭다.   한두 번쯤 식당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아들에게 인상 쓰기도 하던 예전과 달리 이번 여행은 무난함을 넘어 만족스러웠다. 짧아서 아쉬웠다. 여전히 우리 가족의 분위기는 아들이 주도하는 것 같지만 아들에게 과한 간섭이나 반응을 그냥 봐주고 넘어가다 보니 자연스런 가족여행이 되어간다.우리를 놀라게 하는 아들의 행동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유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짙어진다. 그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가족의 힘이 크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가족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아들의 모든 것을 그냥 받아들이기보다 상황에 맞게 생각하고 움직일 수 있도록 내가 더 세심하게 두루 살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아들의 돌발행동으로 침묵의 순간이 잦았던 과거와 달리 여행의 즐거움이 이번 정도면 딱 좋다. 남산공원 벚꽃 축제 무대 앞에서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춘 것 정도는 흥이 많아 그런 걸로 이해하고 넘어간다. 

    게시일2023-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