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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칼럼

[왁자지껄 가족 31_조미영]피아노 치는 여자
글쓴이관리자 게시일2023-01-11 조회수945

크게 다를 것 없는 일상이지만 새해가 밝았다. 살다보니 이제 달력 바뀌는 것에 무덤덤해졌다. 예전처럼 신년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작심삼일 될 것이 자명했고 딱히 뭔가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사실이 버거워졌다.

 

자폐인 아들이 피아노에 관심을 갖는 것 같아 디지털 피아노를 덥석들였다. 삶이 단조로운 아들이 뭔가 좋아하는 기색을 보이면 가급적 제공하려고 신경 쓰는 편이다. 생활비를 쪼개서 딴에는 큰 맘 먹고 샀는데 아들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아까웠다. 흉물스럽게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 이참에 내가 배우자생각하고는 피아노 왕초급을 검색했더니 수많은 자료들이 좌르르 펼쳐졌다. 악기라고는 어렸을 때 언니들 어깨너머로 배웠던 리코더 외에 아무 것도 못하는 내 자신을 잘 알기에 채근하지 않았다. 배우는 과정을 즐기자고 다독였다. 부담과 스트레스로 다가오면 그만 두자 생각하며 열심히보다 꾸준히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20대 초반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피아노 악보를 가슴에 안고 다니는 선배가 있었다. 연주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가늘고 긴 손가락이 건반 위를 춤추는 상상만으로도 그녀는 멋져 보였다.

나도 배우고 싶었다. 동네 피아노 학원에 갔더니 초저학년과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아이들로 붐볐다. 조막만한 손들이 피아노 건반 위를 날아다녔다. 나도 저런 날 기대하며 등록했다. 바이엘 책을 끼고 다니려니 쑥스러워서 멋진 선배 흉내는 내지 않았다. 종이 가방에 넣어 다니면서 하루 한 시간 한 달 쯤 되었을 때 내게 피아노는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겨우 한 손 연습인데도 어려웠다. ‘포기는 빠를수록 좋다며 바로 접었다.

기타를 기웃거렸다. 남들은 노래 부르며 쉽게 연주하는 듯 보였는데 세상에 쉬운 건 없음을 또 깨달았다.

하모니카가 나를 빤히 쳐다보던 날, 인연이 되려나 싶었지만 역시나 내겐 무리였다. 더 이상 도전하고픈 악기는 없었다. 부는 건 호흡이 달리고 손으로 하는 건 손목이 뻐근해서 내 몸은 악기와 친할 수 없는 구조라 생각했다.

 

아들 핑계로 우리 집에 들어 온 피아노는 서서히 접근하는 나를 내치지 않았다. 공짜 동영상이 나를 피아노 앞에 앉혔고 매일 한 시간 정도씩 몰입하게 만들었다. 바이엘은 한 손으로만 해서 재미가 없었는데 요즘은 흥미를 위하여 처음부터 양손으로 하도록 지도했다. 어설프지만 재미있었다. 하다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버려 깜짝 놀라는 날이 많아졌다. 당구를 처음 하면 잠자려고 누웠을 때 천장에 당구대가 보인다더니 집을 비우는 날이면 피아노가 아른거렸다.

CG코드를 익히고 도레미만 뚱땅거리면 되는 동요 비행기를 자연스럽게 연주하던 날 나는 내가 대견스러웠다. 그렇게 어렵다고만 느끼던 피아노를 스스로 배우고 동요를 치다니 놀라웠다. ‘생일축하를 더듬더듬 치고 귀에 익은 모짜르트 소나타 11을 제법 흉내 낼 때는 뿌듯했다.

영상을 오래 보다 보니 스마트폰의 데이터 소모가 상당했다. 계속 영상을 볼 필요는 없었기에 설명을 들은 후 악보만 캡처해서 인쇄했다. 폰 보는 것보다 종이 위의 악보가 더 보기 편했다. 이런 잔머리 굴리는 내가 영리한 편이라며 혼자 잘난 체도 했다. 초보들을 위해 쉽게 편곡한 악보를 영상으로 제공하는 유투버들이 고마웠다.

올해 계획이 생겼다. 피아노 연주를 SNS에 올리는 것이다. 동요보다 조금 더 난이도 있는 곡을 공개하여 혼자 해 낸 것이라 자랑하면 지인들이 칭찬하는 댓글에 답글 쓰는 나를 상상한다.

그리고 내 연주에 반한 아들이 슬그머니 내 옆으로 와서 감상하는 모습도 그려본다. 굵고 짧은 손가락을 주무르며 이순을 넘긴 나이에 피아노 치는 여자를 꿈꾸는 나는 오늘도 디지털 피아노와 한 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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