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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칼럼

초대칼럼 상단 이미지

칼럼니스트들이 여러분들께 ‘발달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건네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시선으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고 계시나요?
이 게시판은 보다센터에서 초대한 각 분야의 칼럼니스트들이 여러분들께 ‘발달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건네는 곳입니다. 발달장애와 관련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칼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또한 발달장애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의 일상이야기,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의 소박하지만 통렬한 이야기와도 공감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은 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게시물 총 116

  • 즐거운 투쟁이라고 쓰고 보니 민망하다. 목숨을 걸고 벼랑끝에서 처절한 심정으로 삶의 투쟁을 하고 있는 숱한 투사들이 있으니.하지만 때론 즐거운 투쟁의 시간도 있다. 내 기억에 몇 개의 투쟁이 그러했다. 해방구가 열리고, 희망과 열망에 달떠서 노래하고 춤추고 외치고 어깨걸이를 하던 투쟁들이 있었다.   투쟁의 추억   2016년 서울시청 후문을 점거하고 깔았던 서울장애인부모연대의 42일 투쟁도 그러했다. 날마다 몰려드는 ‘동지’들로 농성장은 늘 북적였다. 음식이 차고 넘쳐서 함께 온 아이들은 농성비만자가 되어갔다. 새벽 청소차 소리를 들으며 선잠에서 깨어나 시청앞 광장에서 이슬 젖은 잔디를 밟으며 빌딩 사이로 떠오르는 일출을 보았다. 42일 내내 지나온 얘기, 사는 얘기, 살아갈 얘기, 남기고 죽을 얘기를 했다. 우리끼리 있는 편안함에 아이들도 즐겁고 엄마들도 즐거웠다. 크게 싸우고 오래 버티고 잘 이겨냈고 크게 성취했다. 2018년 4월 수천 명이 모여 흰 상복을 입고 삼보일배 행진을 할 때도 즐거웠다. 그에 앞서 209명이 삭발식을 했으니, 까까머리에 흰 상복 차림이 잘 어울렸다. 잘 봐, 이게 장애부모 투쟁이야~! 요새 식으로 하자면, 이런 거였다. 못난 건 세상이고, 우리는 그것에 맞서고 넘어서려는 사람들이니 슬퍼하거나 주눅들 일이 아니었다. 올해는 다큐영화 ‘학교 가는 길’이 즐거운 문화투쟁을 해 준 셈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진짜 우리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깊은 공감을 받았다. 구체적인 우리 이야기를 많은 사람이 아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일이다. 바야흐로 문화투쟁이 세상을 설득하는 썩 훌륭한 방식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즐겁고 흥겨운 일이라는 것도.   해마다 11월말이면 한바탕 난리를 치르는 내년 국가 예산 작업이 있다. 부모연대도 우리 예산을 얼마라도 더 올리려고 노심초사한다. 우리의 간절한 요구 요청은 무시당하거나 그 중 한두 개 만이 제한적으로 반영될 뿐이지만, 우리는 매번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또는 의사당 본관 앞을 가로막고 기습집회를 한다. 제일 두꺼운 바지와 두툼한 양말과 겹쳐입은 패딩점퍼로 팽귄이 된 채로 양 손에 발열팩을 쥐고 몸뚱이를 맞대로 앉아 “우리는 죽지 않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대체 국가는 어디에 있습니까!”(다큐 ‘학교 가는 길’에 보면 김남연 당시 서울지부장의 이 외침이 나온다.)라고 목놓아 외치던 순간들이 있었다. 국회의사당 높은 계단에서 바라본 여의도 쪽 도심의 반짝이는 밤 풍경은 마치 먼 세상 속 그림인 양 몹시 근사했고, 그래서 더 서러웠다. 그 서러운 가운데서도 우리는 너른 잔디광장 너머 빌딩숲을 배경으로 손팻말을 들고 깔깔거리며 기념사진들을 찍었다. 미세먼지와 황사와 겨울날의 차가운 수증기가 섞여서 뿌연 공기 속에 도시의 불빛들이 반딧불처럼 반짝이고, 그 앞에서는 그처럼 당당할 수 없는 포즈의 투사들이 우뚝우뚝 서서 인생샷을 찍었다. 올해는 대표단이 단식투쟁을 벌였다. 여의도 이룸센터 앞 컨테이너에 자리잡고 앉아 붙박이로 단식을 한 분들이 셋이고, 지역에서 단식을 이어간 분들이 있었다. 일박이일씩 동조단식에 참여한 이도 여럿이다. 국회의원들이 찾아와 미안해하며 최선을 다하겠노라 약속했다. 의지는 비장하나 투쟁은 따뜻한 법이라, 집 떠나면 즐거운 역마살이 낀 것도 아닐텐데, 컨테이너에 가 앉아있으면 즐거웠다. 다만 엄마아빠가 들어오지 않은 집 아들 딸들이 하루에도 여러번 전화를 걸어와 안부를 물었다. 엄마 언제 오냐고, 아빠 뭐하냐는 전화가 오고 또왔다. “좀 있어야 해”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는 아빠와 엄마들은, 오늘 뭐했니, 뭐 먹었니를 물으며 함께하지 않은 하루의 안부를 챙겼다. 투쟁은 따뜻하고 애틋하다.   여기서는 하루에도 여러 번 계란 한 판씩을 먹었다. 무슨 소린고 하니, 죽염 한 두 알을 입속에 털어넣고 녹여 먹으면 꼭 삶은 계란 냄새가 나서 그리 부른 것이다. 밤에 화장실 갈 데도 마땅찮다고 저녁부터는 물도 마시지 않고 버티는 독한 단식을 이어가는 동안 컨테이너는 여지없이 투쟁해방구가 되었다. 이불을 펴서 발을 덮고 기대 앉은 모습들을 보면, 단칸방에 모여앉아 시답잖은 놀이를 하거나 군입거리를 먹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뜨끈한 방구들에 앉아 서로의 발을 이리저리 밀쳐내며 놀던 저녁시간. 그러다가는 꼭 묻어놓은 아버지 밥그릇을 발로 건드려 엎어버렸고, 그때면 엄마가 들어와 등짝을 후려쳤다. 안타까운 건 엄마 일이고, 형제들은 키득거렸다.(물론 키득거린다고 또 한 대 얻어맞기 일쑤였다) 이불에 다리를 묻고 앉아 모두 비슷한 풍경으로 지나왔던 어린 시절 얘기를 하며 있자니, 진짜로 어른이 되어 뿔뿔이 흩어졌던 형제사촌들이 모여앉은 기분이 들었다. 군고구마나 귤 대신 소금 몇 알이라는 게 다르지만.   투쟁풍경   끼니를 해먹거나 먹으러 가는 일이 없으니 시간이 참 여유롭게 흘러갔다.(이래서 우리가 가끔 실없이 꿈꾸는 건가 보다, 한 알 삼키면 한 끼니가 때워지는 알약을.) 해도해도 끝이 없는 아이 키우던 얘기, 지금 살아가는 얘기, 앞으로 살아갈 얘기, 잘 떠나갈 얘기를 하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잠에 들었다. 내가 굳이 좁은 컨테이너에 끼어 잔 날은 밤새 비가 왔다. 비바람에 전원콘센트가 빠져 잠깐 바닥이 냉골이 되는 바람에 선잠에서 깨었다. 귀를 기울이니 금속이며, 천막이며, 플라스틱이며, 아스팔트며, 나무들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제각기 다른 질감을 갖고 들려왔다. 지구 온난화가 가속되어 빙하가 일시에 다 녹으면 이 컨테이너는 도시의 지붕 위를 둥둥 떠다니겠지,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을 보장하라는 우리의 구호는 세상 위에 둥둥 떠다닐 게다. 누군가는 그것을 보며 희망을 얻고 누군가는 그것을 보며 또 한 층의 계단을 올라설 게다, 이런 유치한 상상도 했다.(새벽엔 감성이 정돈되지 않아 매우 질퍽거리는 시간이기 십상이다.)   매일 집회마다 회원들이 많이 나왔다. 소리쳐 구호를 외치고, 팔뚝을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사진을 찍으며 웃었다. 투쟁은 기운이 펄펄 나는 일이다. 내가 내 아이를 위해 세상을 열심히 두드리고 바꿔나가고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거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 일인가. 내 아이에게 좋은 엄마 아빠가 되고, 세상에 좋은 사람이 되는 일이다, 그것도 여럿이서.   파란 염색과 안녕   아이가 사는 것을 본다. 내 아이가 스스로 많은 부분에서 납득되지 않는 세상을 납득해 보려고 애를 써가며 살고 있는 것을 본다. 불안하고 이상하고 때론 아프고 괴롭지만, 그것을 누가 낱낱이 잘 이해해주는 것 같지도 않고 심지어 가족도 건성으로 이해하는 척 할 때가 많은 걸 느끼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많은 이가 그렇겠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도 삶은 투쟁이다. 어미가 되어서 투쟁의 동지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일찍이 전우익 선생이 ‘혼자서만 잘 살면 무슨 재민겨’라고 일갈하셨다. 혼자서만 잘 사는 걸 재밌다 여기면 못 쓴다는 말씀이지만, 지금 세상은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민겨’라고 하는 인간과, ‘혼자서만 잘 사니 너무 재밌는겨’라고 하는 인간으로 나뉘어 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이번 생에는 우리 아이와 투쟁의 동지로 살아가기로 한 거다! 아들이 얼마 전에 머리카락을 파랗게 물들이고 싶다 했다. 외모에 전혀 무덤덤한 아들이 오직 하나 관심 있는 게 바로 머리인 것 같다. 파마를 하자거나 길러서 꽁지머리를 하자거나 해도 쉽게 따른다. 해보니 반응이 좋아서일 수도 있다. 남들이 멋있다 하니 내심 흡족한가보다. 이번에는 스스로 먼저 파란 염색하고 싶다 했다. 얼씨구나, 무지개색인들 어떠랴, 처음으로 뭔가 외모를 만들어보겠다 해왔으니 얼마든지 좋은 일이다. 파란 색 매니아인 아들은 마침 옷도 파란색이 많으니 글자 그대로 온통 새파란 청년이 되는 거다! 아들의 거룩한 뜻에 호응해서 나도 함께 파란물을 들였다. 좀 튀는 일도 별난 일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재미있는 상상을 시도하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아들도 나도 탈색까지 감행하고 파란 물을 들였다. 아들은 본인이 원하던 깊은 파란색보다는 조금 더 어둡게 나왔지만(그래서 한달 있다 한번 더 파랗게 하기로 했지만), 나는 엄청 체신없는 청보라 머리가 되었다. 몰론 알록달록 머리를 해보고 싶은 내 욕망이 기꺼이 춤추며 얹혀 따라간 거라 이미 체신머리 같은 건 눈 질끈 감았지만, 앞으로 당분간은 거울 앞에서도 눈을 질끈 감아야 한다.   좋은 일은 감행하라. 즐겁고도 좋은 일은 감행하라. 이번 생에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사는 우리 아이들이 즐겁고도 좋은 일을 마음껏 감행하고 살게 될 날을 만들어간다. 그게 우리의 삶이다. 평등세상, 그 새파랗게 활기차고 즐거운 세상을 꿈꾼다.   한 해를 마감하며, 못다 한 말, 못다 한 일들이 끝없는 모래사막처럼 펼쳐져 있지만, 투쟁의 새 날을 맞기를 희망하며 인사를 고한다. 그리고 이만총총.김종옥전국장애인부모연대 문화예술특별위원장 

    게시일2021-12-16

  • “아 시끄러워! 조용히 좀 해달라고 할까?” 여행 중 늦은 아침을 먹으려고 식당엘 갔다. 주방에서 큰 그릇들 부딪치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한 두 번은 실수려니 했는데 서너 번 계속 이어지니 짜증이 났다.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맛집이라는 별 다섯 개 평을 보고 갔는데 나는 별 한 개도 주고 싶지 않았다. 구겨진 인상의 나를 보고 남편은 그냥 웃었다. 결국 말은 하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아들과 눈이 마주치면서 그동안 잊고 살았던 우리 가족의 외식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아들이 점잖게 식당에서 밥 먹는 모습 보인지가.20대 초반까지도 아들은 식당에 들어서면 주문한 음식 기다리는 시간을 견디지 못했다. 더 어렸을 때는 수저를 식탁에 대고 두드리며 소리까지 심하게 질렀다. 집에서야 그래도 모른 척 하면 되었지만 밖에서는 남의 이목이 신경 쓰여 난감했다. 한동안 외식을 중단하고 집밥만 먹었다. 하지만 살면서 외식을 안 할 수는 없는 일, 자꾸 부딪혀 보기로 했다. 붐비는 시간대를 피하고 조금 이르거나 늦은 시간에 가급적 빨리 나오는 음식을 주문했다. 기다리는 동안 난리치면 바로 데리고 나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더 심한 발버둥으로 밥을 먹지 않고는 절대 나가지 않을 거라는 강한 고집을 부렸다. 그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남편이 먼저 식당에 들어가서 음식이 나올 때쯤 우리를 불렀다. 그러면서 대기 시간을 조금씩 늘려 나갔다. 몇 년에 걸쳐 아들은 기다리는 일에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했다.   아들이 난감한 행동을 할 때 우리 가족은 아들보다 우리를 빤히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이 더 불편했다. 애써 무시하려 해도 식당 안의 분위기는 우리에게 집중되어 있는 듯 느껴져 힘들었다. 오로지 밥 잘 먹고 이 공간을 나가는 것이 목표였기에 일절 대화도 없이 다급하게 먹기만 했다. 음식 나온 지 15분 만에 다 먹고는 빨리 먹는 대회 나가면 일등 하겠다며 웃는 여유도 생겼다. 그런 과정을 겪을 때는 다른 것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아들의 행동이 점점 나아지면서 식사 시간은 늘어났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는 즐거운 외식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차츰 주위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편안해야 세상이 보이는 당연함을 뒤늦게 알아 차렸다. 처음에는 좋은 것만 보이더니 점점 불편한 모습도 보였다.담소 나누며 식사를 즐기는 3대 가족의 행복한 모습은 보는 나도 좋았다. 아이가 주위를 산만하게 뛰어다녀도 무심한 보호자들은 아랑곳하지 않는 것도 보였다. 목소리가 너무 커서 알고 싶지 않은 그들의 가족사가 내 귀에 머물기도 했다. 인상을 쓰며 ‘저 애 좀 못 뛰게 잡지 않고 부모는 뭐하냐?’라든가 ‘저 사람은 좀 살살 말하면 안되나?’라는 말을 언짢게 했다. 물론 그들이 들리지 않게 했지만 내 기분도 좋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말했다. “우리 아들 참 점잖아졌제, 누구 닮아서 이리 과묵하노, 아부지 닮았제?” 남편의 너스레를 귓등으로 흘렸다.   살다보면 내가 고쳐야 할 부분이 있고 남이 고쳐야 할 문제가 분명히 있다. 자폐성장애 아들과 살다보니 남들이 무조건 이해해 주길 바랐던 적이 있었다. 이해와 배려를 강요하며 내 삶의 힘든 점만을 부각시키진 않았나 생각한다. 변할 것 같지 않던 아들이 세상에 나와 아직은 큰 무리 없이 살게 되니 야외 활동이 자유로워졌다. 지난 25년의 세월보다 올해 1년 사이, 아들은 더 많은 변화를 보여주었다.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백신 접종을 2차까지 완료했다. 어딜 가든 시선 모으던 행동들이 많이 줄어서 가족여행 횟수도 올해 유난히 많았다. 아들 때문에 속상했던 지난날과 달리 요즘은 아들 덕분에 웃는 일이 많아졌다. 암울했던 내 삶에 이런 날이 올 줄 예상 못했다.살아갈수록 식당이나 거리에서 아들의 시끄러운 행동에 주위의 눈총이 따가웠던 일들이 기억에서 멀어져 간다. 우리를 지켜봐 주었던 사람들이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이제는 내가 세상을 따뜻하게 감싸야 할 차례다.   우리만 있던 식당에서 주방의 소음으로 인상 쓰고 있을 때 그냥 웃고 있던 남편의 표정에서 나는 보았다. 우리 가족 외식 때 힘들었던 과거를.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나를 발견한 셈이었다. 겸연쩍어 하는 나를 향해 남편이 말했다. “손님이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식당에 불만 있으면 다음에 안 오면 그만이지, 굳이 인상 쓰면서 그럴 필요는 없는기라.”말은 그래놓고 결제를 마친 남편은 주인에게 말했다.“음식은 맛있고 좋았는데 주방 쪽이 소란해서 조금 불편했습니다.” 주인은 화들짝 놀라면서 미안하다며 다음에 꼭 다시 와달라는 말을 반복했다. 시끄럽다는 말로 조용해졌으면 서로 언짢을 수 있었지만 상황이 끝나고 조용히 얘기한 결과 아무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사실 그 날, 전복미역국은 엄청 맛있었다.   

    게시일2021-12-10

  • 화장실 바닥을 수놓은 핏자국에 깜짝 놀랐다. 휴지로 엉성하게 닦은 걸 보니 누구 소행인지 짐작이 갔다. 대체 어디서 난건지 왜 났는지 짐작이 안 가 얼른 아들 방으로 달려갔다. 이불도 피 칠갑이 되어 있었다. 입술에서는 연신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아, 또 시작이구나...”   발달장애 아들은 피부 어딘가가 가려우면 딱지가 앉을 때까지 계속 긁는다. 환절기마다 거치는 통과의례다. 딱지가 생기면 그걸 못 참고 긁어서 떼어낸다. 그러면 또 피가 나는 상황이 반복된다. 심할 때는 학교도 결석했고 특수교육 치료실의 수업도 다 빼먹었다. 약이라도 발라 주면 몸에 묻은 이질감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닦아낸다. 상처 부위를 긁거나 닦는 사이 피부가 벗겨져 피가 날 수밖에 없다. 피범벅 된 옷소매는 두꺼워지고 뻣뻣해진다. 그 어떤 처치가 허락되지 않았다. 자신의 몸에 뭔가 묻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자폐적 성향이 경구용 약은 가능해도 연고나 주사는 강하게 거부했다. 손 댈 수 없는 상황으로 피투성이 아들을 일주일 이상 바라보며 십 수 년을 살았다. 그저 자연 치유만을 바랄 뿐 속수무책이었다. 다른 것은 다 봐주고 모른 척 외면할 수 있었지만 피를 보는 것만은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몇 년 동안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기더니 이번에는 입 주위를 긁어 피부가 약한 입술에서 계속 피가 났다. 예전처럼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요즘 조금씩 나아지는 아들의 변화를 볼 때 적극적으로 뭔가를 시도하면 들어 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계속 흘러내리는 걸 놔두면 그걸 닦느라 밤새 잠도 못 잘 것 같았다. 차분하게 설명을 했다.“너 계속 입술 비비고 닦으면 피가 안 멈춰. 내가 수건으로 꼭 눌러 줄게. 우리 하나에서 열까지 열 번 세어 보자. 그러면 피가 멈출거야.” 아들은 눈을 껌벅이며 자신의 입술을 누르고 있는 커다란 수건을 바라보았다. 수건을 밀어내지 않을까 긴장했다. 본인도 자꾸 흐르는 피가 겁이 났는지 밀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열까지 세고 수건을 살짝 뗐다가 깨끗한 부분을 다시 입술에 갖다 댔다. 한 번 더 하자며 백 번까지 두 번을 셌다. 멈출 듯하면서도 계속 흐르는 핏방울이 야속했다. “어쩌지? 자꾸 나네, 숫자 세는 거 좀 더 해보자.”그렇게 백을 몇 번이나 세는 동안 아들은 얌전히 기다려 주었다.한 시간 반 동안 그러고 나니 피는 멎었고 눈에 새록새록 잠이 담긴 걸 보고 방을 나왔다. 내일 아침 어떤 몰골로 나올지 염려되었지만 입술을 건들지 않고 그냥 잘 자기만을 바랐다. 다음 날 아침, 말간 얼굴로 방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이게 기적이란 생각에 울컥했다. 피가 멎고 상처도 더 이상 커지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과거엔 작은 상처가 번져 일주일 이상 얼굴 전체가 벌건 걸 보면서 가슴이 아렸다. 단 하루 만에 말끔해 지다니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피부 빛이 좀 거무스름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돌아오니 잘 아문 상처가 정말 다행이었다.   올해 아들에게 제법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게 늘었다. 말로 소통하면 좋겠지만 아들은 여전히 말을 하지 않는다. 못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말을 하려고 입모양을 만드는 걸 보면 하고 싶은데 잘 안 되는 것 같다. 의사소통 수단으로 말이 일반적이긴 하지만 말을 못하니 온 몸으로 소통하려고 애쓴다. 그것을 보고 잘 알아차리려고 나도 노력한다. 가급적 스스로 뭔가를 요구하려고 기회를 많이 주고 있다. 아들은 본인이 원하는 걸 표현하기보다 눈에 띄면 보거나 만지고 먹었다. 하고 싶지 않은 건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랬던 아들이 어느 순간부터 뭔가 하려는 게 보였다. 지시나 부탁에 의해 겨우 움직이더니 내가 혼잣말 하는 것도 잘 알아들었다. ‘어두운데 거실 불 좀 켜야겠다’라든지 ‘소파에 있는 책 정리 좀 하지’등 작은 소리로 웅얼거려도 신기할 정도로 잘 알아듣고 반응했다. 뭐든 하길 바라고 채근했던 그간의 내 욕심을 내려놓으니 아들은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스스로 생각하고 망설이기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소한 것을 해 낼 때마다 예전처럼 요란스럽게 칭찬하지 않았다. 가볍게 칭찬해도 잘 알아차리고 표정이 밝았다.   “휴지를 조금만 썼네, 잘했다.”요즘 가장 많이 하는 칭찬이다. 화장실에 들어가면 휴지 풀어 헤치는 걸 즐겼는데 내가 밖에서 조금씩 떼어주며 이만큼만 쓰라고 가르쳤다. 두세 달 동안 하면서 본인도 짜증을 내고 나도 성가셨지만 꼭 해야 할 일이기에 멈추지 않았다. 뭔가를 시도해서 달라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그동안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들이 많았기에 최근에 보여주는 소소한 행동이 무척이나 고맙다.   ‘안될 것 같더니 이게 되는구나...’작은 변화에 기뻐하고 감동하는 순간이 끊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훗날 ‘엄마!’라고 부르는 아들에게 ‘응? 왜?’ 하고 대답하는 나를 상상해 본다. 아울러 피범벅 된 아들의 모습은 더 이상 안 봤으면 좋겠다, 제발.

    게시일2021-11-23

  • 가을이 깊어간다   가을이 깊어간다. 여름 끝이 길어져서 가을이 긴가민가 했는데 이른 추위가 김을 빼놓더니 어물쩡 겨울 분위기다. 여름이라 하기도 가을이라 하기도 이상한 계절이 지나고, 가을이라 하기도 겨울이라 하기도 억울한 계절이 슬슬 지나고 있다. 아무튼, 그래도 가을은 깊어만 간다.   비가 차가와지면 가을이었다. 9월말이면 비가 내릴 때 입술이 파래지며 한기가 들었다. 10월 25일 즈음이면 한 번씩 슬쩍 이른 추위가 들렀다 갔다. 곧 겨울이 올 테니 지금 가을날의 일들을 매조지하시라, 아니면 지금이라도 가을을 어여 즐기시라, 하듯이.(25일께라고 날짜를 기억하는 이유는, 해마다 그때 강릉에서 율곡선생을 기리는 율곡제 행사를 했었고, 그때마다 장롱 속에서 겨울 외투를 꺼내입고 다녀왔기 때문이다.)   1984년인가, 가을 단풍이 고왔던 해였는데, 11월 9일에 눈이 펑펑 왔다. 엉금엉금 성기게 짠 자주색 세타를 입고 느닷없는 눈이 신기하다며 사진을 찍었다. 이른 눈을 맞고 코끝이 언 얼굴 뒤로 창덕궁의 가을단풍이 바다처럼 구름처럼 펼쳐졌다. 알록달록한 단풍바다 앞으로 쏟아지는 눈발이 찍힌 사진 귀퉁이에 11월9일이라는 날짜가 박혔다. 그래서 두고두고 기억한다, 11월9일에 불붙은 단풍 숲으로 떨어지던 차사나운 눈발을.   살다보면 봄이면 봄이라 좋고, 가을이면 가을이라 좋았던 시절이 있기 마련이다. 좋았던 봄, 빛나던 가을을 찬찬히 꼽다보면 오후 차 한잔의 시간쯤은 흐뭇하게 훌쩍 넘어간다. 나도 물론이거니와 누구에게나 그 목록이 두툼하길 빌지만은-.   가을이 깊어간다. 가을엔 무거운 얘기를 나누기에 좋은 계절이다. 자신에게도 남과도, 누구랄 것도 없이. 그래서 오늘은 무겁고 무서운 이야기다.   불면보다 무서운 것   며칠 반짝 잠이 길었다. 여느 때보다 한 두 시간씩 더 잔 듯하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면 좀 더 자게 되는 것은, 서늘한 기운과 포근한 이불이 합쳐져서 그럴게다. 다만 그 시간만큼 에너지가 축적되어 기운이 돋았다기 보다는 그저 거칠고 엉성한 잠의 양이 한 두 시간 늘어버린 것뿐이라, 몸에 미안하기는 매한가지다. 몸에 미안하지 않으려면, 단풍이 찬란한 들판을 가을바람을 쐬어가며 싸돌아다니다가 따뜻한 물에 발 닦고 푸근히 잠들어야 하는 거다. 멍하니 담요 뒤집어쓰고 조는 듯 자는 듯 구겨져 있다가 잠들어 버리는 게 아니라.   불면증까지는 아니더라도 잠이 부실한 사람들이 주변에 차고 넘친다. 갱년기에 시작한 불면증은 삶의 고정값이 되어버린 지 오래라 새삼스런 화젯거리가 못 된다. 여든이 넘은 친정 엄마의 불면증 하소연도 삼십년 넘었으니 소리 나지 않아도 들리는 익숙한 노래 같다. - 엄마, 얼굴이 부스스하네. - 당췌 잠을 못 잤다, 잠을 자야 사람이 살 거 아니냐.- 한 숨도 못 주무셨소?- 한 숨도 못 자면 어떻게 사냐, 죽지. 잠깐 잤다가 새벽에 눈 떠지고 다시 잠들지 못하고 날을 새니 걱정이다. - 그냥 눈 감고 누워있으면 안 되려나. - 산 송장이냐, 눈 감고 누워있게. - 낮에 좀 몸을 움직여 보시든지. - 잠을 못 자서 몸이 천근만근인데 어떻게 낮에 움직이냐. - 어제 보니 낮잠 주무시던데, 낮잠을 참았다가 밤에 푹 자야. - 매정한 것 같으니라고. 밤에 한 숨도 못 자는데, 낮에 잠깐 눈 붙이는 것도 하지 말라면, 사람 죽으라는 거냐. - 억지로 자려고 하지 말고 편하게 생각하시는 게... - 고문이 따로 없는데 어떻게 편해지냐. 걱정하는 체 그만하고 불면증 없는 너나 잘 자고 살아라.   설핏 웃음이 난다. 불면증은 없지만 잠의 시간이 낡은 그물처럼 헤지고 구멍이 나버린 지는 오래 되었다. 나는 그 낡은 잠의 그물을 다독이지 않는다. 나는 나의 투정을 외면하는 오랜 버릇이 있다.  누구나 그렇듯이 아이 손을 잡고 이 치료실 저 조기교육실을 미친 듯이 다니는 시절이 끝나고 아이가 사춘기를 맞을 무렵이 되었을 때, ‘자다가 벌떡’ 증상이 시작되었다. 아이가 조금씩은 나아지겠지만 결국 범주 자체를 넘어서서 따라잡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고 나면, 아, 어찌 살 것이냐, 너를 어찌 살아가게 할 것이냐, 하는 날카로운 외침이 시도 때도 없이 나의 잠을 싹둑 끊어냈다. 어렴풋하게 슬슬 잠결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누가 불어댄 듯이 잠이 훅 달아나버리는 것이다. 자식의 성장을, 그 앞에 펼쳐질 미래를, 설레는 기대로 그려보는 게 아니라 그가 디딜 땅이 그만 풀썩 먼지를 내며 무너지는 장면이 떠오른다. 다음 발을 디딜 곳은 어디인가. 그 다음 발을 디딜 곳은 어디인가.   그 무서운 그림을 무시하고 다시 잠들 수는 없었다. 잠이 오느냐, 앞이 어둡고 해가 뜨지 않을지 모르는데 잠이 오느냐. 내면에서는 숱하게 어두운 음성이 들렸던 듯하다. 불면보다 무서운 것이 있었고, 그 두려움을 무시하고 잠이 들지는 못했다. 자다가 문득 가슴이 저며 화들짝 눈을 뜨고 나면, 무엇엔가 사무치는 슬픔의 구름 속에 파묻혀 있는 것 같았다. 자려다 가위 눌리고, 슬픔에 사무쳐 놀라 잠이 깨는 나날이 계속되면서 나는 나의 잠과 더 이상 친하게 지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나를 재우지 않으려는 어떤 의지가 있으니, 나는 그것에 순응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잠에 대해 애닯거나 안타깝지 않았다.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니 각별히 신경을 쓸 일도, 곁을 내 주고 마음에 걸리적거릴 일도 아니었다.   불면인들   독일에서 온 독일할머니를 만난 적이 있었다. 비행기로 먼 길을 왔으니 피곤하시겠다고, 좀 주무시라고 했더니 그 분 말이, ‘어차피 좀 살다가 길게길게 누워 깊은 잠에 빠질 텐데 뭐하러 지금 자느라 시간을 보내겠냐’는 거였다. 그 분의 낙천적 노년이 참 보기 좋았다.   돌아가신 지 한참 된 우리 할머니는 앉아서 깜박 조는 일은 있어도 절대 등을 대고 눕지 않았다. 졸고 계신 할머니에게 이불이라도 내어드릴라치면 손을 내저었다.     “놔둬라, 경을 칠. 낮에 등 대고 누워 자는 게 아니다.” 할머니는 중풍으로 쓰러지고 나서도 처음에는 밤에도 절대로 전등을 끄지 못하게 하셨다. 자는 게 죽는 것 같아 무서워 그랬다는 걸 얼마 뒤에 알았다. 그러던 할머니가 정신이 흐려지니 낮이건 밤이건 코를 골고 주무셨다.   아기들은 엉덩이를 높게 쳐들고 눈을 부비며 잠투정을 한다. 심리학자들 말로는 잠들기 싫은데 몸은 졸리니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빨리 자려고 투정하는 게 아니라 잠에 빠져드는 자신에게 맞서고 있다는 거다.   독일할머니도, 우리 할머니도, 아기들도 잠이 들기 싫었던 건 무엇일까. 삶의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아까워서, 다시는 삶의 시간으로 깨어나지 못할까봐 무서워서, 남들은 깨어있는데 나 혼자 어디론가 가는 게 까무러치는 것 같아 싫어서였을 터이니, 대체 달콤한 잠의 나라는 어디 있다는 걸까.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은 잠을 제대로 못 자거나 안 잔다. 방에서 잠들지 못하고 거실에서 자는 사람도 많다. 아이가 수면장애가 있어서 제대로 못 자니 덩달아 엄마도 못 잔다. 아이가 문득 현관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적도 있으니 현관에 이중자물쇠를 해놓고도 인기척이 날 때마다 화들짝 놀라 깬다. 깊이 잠들어 렘수면 상태가 되면 쉽게 각성되지 않을 테니 의식적으로 깊은 잠에 빠지지 않으려고 기를 쓴다.  지금은 문을 걸어 잠그고 자니 밤에 몸서리를 치며 자는지 누에벌레처럼 폭폭 달게 자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 아들도 어렸을 때 무언가에 놀란 듯 자다말고 방에서 튀어나올 때가 종종 있었다. 처음엔 아이를 붙잡았을 때 어딘가 까마득히 낯선 다른 세상을 쳐다보는 듯한 그 얼굴을 보고 무서워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몇 번 거듭하면서는 마음을 금세 진정시키는 요령을 찾았다. 깜짝 놀라 깨어나더라도 마치 얕은 잠에서 깨어난 듯 순식간에 각성할 것, 얼굴을 마주하지 말고 그저 안아주기만 할 것. 그리고 그 밤은 잠을 포기하고 그저 졸기만 할 것.   자다 뛰어나오는 일이 없어진 다음에도 아들의 잠은 달지 않고 거친 날이 많았던 듯 했다. 아침에 벗어놓은 옷을 보면 잡아당겨서 목과 소매가 늘어나거나 아코디언처럼 주름이 잔뜩 잡혀있기도 했다. 지금은 옷을 잡아늘이고 잠을 자는 것 같지는 않으니 아들 방에서 나는 기척에 귀를 세우고 밤잠을 설치지 않아도 된다마는, 아들의 잠을 괴롭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내내 궁금하다.   드림캐처   오로라를 보러 캐나다 옐로나이프에 간 적이 있다. 우주라는 영혼의 옷자락, 오로라는 내 버킷리스트 1번이었으니 기회가 되자 만사 제쳐두고 갔었다. 오로라를 보며 살던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영혼의 날개를 밟고서 살았을 거라고 느꼈다. 거기서 참으로 반가운 물건을 만났다. 드림캐처, 나쁜 꿈을 걸러내는 부적같은 물건이라 했다. 머리 맡에 놓고 자면 밤잠을 잘 자게 해준다던 그 물건을 보자마자 우리 식구들은 저마다 두어 개씩 집어들었다. 이건 엄마에게 꼭 필요해, 하면서.   식구들의 애정어린 기대에도 불구하고, 인디언의 영험한 기운이 깃든 드림캐처를 온 방 가득 주렁주렁 걸어두어도 나의 잠은 그리 푸근하지 않다. 그저 잠이 들어버린 시간은 여전히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그 시간에 했어야 하는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 같고, 그 시간에 깨어서 생각해야 할 어떤 것들이 있는 것 같다. 제대로 말하자면, 그 시간에 지켜야 할 어떤 삶이 있어서다. 그 삶이 놓일 자리가 마련되지 않았으니 나의 잠은 여전히 성글고 거칠다. 그러니 드림캐처는 임무를 다하지 못해 딱한 처지이다.  그뿐이랴, 문득 잠들었다 퍼뜩 깨어보면, 잠들지 않고 바라보아야 했던 별과 달이 있었던 것 같고, 허연 구름이 밤하늘을 스쳐 지나갔던 것 같고, 그 아래를 비행기가 날아갔던 것 같다. 기온이 떨어지는 밤마다 초록이 빠지고 단풍물이 들고 있었던 것 같고, 어떤 새는 까만 밤을 홀로 날았던 것 같다. 그 새가 내 방의 창문을 흘깃 보았었을 것 같고, 마른 번개가 쳤을 것도 같다. 오로라가 일렁이는 밤하늘을 북극여우가 한참을 쳐다보았을 것이다.   나는 자느라 놓친 그것들을 애석해 마지않으며 밤마다 떠나지 않았던 세상으로 돌아오고, 친정 엄마는 새벽도 되기 전에 지겹게 잠이 깨어서는 빈방에 홀로 앉아 있을 것이니, 모녀의 가을밤은 이래저래 깊어간다.김종옥전국장애인부모연대 문화예술특별위  

    게시일2021-10-31

  • 국회는 10월 초순~중순까지 정부 등의 국가기관이 잘하고 있나를 보며 사회적 문제에 대해 국가기관을 상대로 비판하는 국정감사 기간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 장애인 이슈에 대한 국회의원들의 질의와 국가기관들의 답변들도 오고 갔다.   자폐성 장애가 있는 필자로선 지적‧자폐성 장애인 관련 국정감사 소식을 인터넷을 통해 조금씩 챙겨봤는데, 그중에서도 필자의 관심을 끈 소식을 몇 가지 말해보겠다.   먼저 장애인 거주시설 인권지킴이단 관련 국정감사 결과 지킴이단 외부단원 과반수 이상 지정 조건을 지키지 못한 거주시설이 전국 767개소 중 78개소였고, 최소 구성 인원 등의 법적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 시설은 10개소였다고 한다.   인권지킴이단이란 ‘장애인복지법’에 따라 장애인 거주시설 장애인의 인권침해 발생 시 확인과 필요 조치를 통해 장애인 인권보장 및 인권침해 예방 목적으로 시설 내 설치‧운영하는 걸 말한다. 5인 이상 11인 이하로 인권지킴이단 단원을 구성하고, 단원 임기는 2년이되 연임 가능하며, 시설별 외부단원은 과반수 이상 지정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외부단원 과반수 이상 지정 조건을 지키지 못한 78개소 경우라면, 시설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사실에 대해 지적장애인이 말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외부단원들이 적고 그만큼 시설 측과 관계가 있는 단원들 구성이 많다는 것, 시설의 종사자들과 지적장애인 간 위계관계를 고려한다면 과연 인권침해 사실을 제대로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상황에서의 인권지킴이단은 요식행위이며, 인권침해 방지에 아무런 도움이 못 된다,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지적‧자폐성 장애인 당사자 몫이다. 물론 인권지킴이단 지침에 규정된 인원 수 및 구성 요건을 명확히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건 시설의 인권침해에 대한 외부의 독립적인 정기적 모니터링 체계가 갖추어지는 것임을 말이다.   장애인고용공단 관련 국정감사에선, 작년에 수면 위로 나온 대기업 사내카페 사건이 국감 테이블에 올라왔다. 공단 알선을 통해 고용된 장애인 바리스타들이 인권침해를 겪은 사건이었다. “웃는 게 바보 같다”, “여기가 어린이집이냐?”등 인격 모독적 말을 피해 장애인들은 들어야 했단다. 음료 제조 순서를 퀴즈로 내서 틀리면 공개질책을 당하는 등의 괴롭힘이 1년여 동안 계속돼, 심지어 약물치료를 받는 장애인까지 생겼다고 한다.   이 사건을 들으며, 지적장애인의 장애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들이 일하고 싶은 내적 동기가 생기게 하지 않는 표준사업장의 고압적 분위기가 결국 인권침해가 발생된 요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사자 의견이 반영된 체계적인 국가 차원의 지적‧자폐성 장애인 자기옹호 체계 부재가 상당히 아쉬웠던 대목이었다,   또한, 장애인복지법, 발달장애인법에선 장애인 학대 발생 시 고용주, 종사자들이 신고할 의무가 있는 사업장에 표준사업장이 포함돼 있지 않고, 설령 자발적 신고의 경우에도 소극적 대응으로 끝나기 일쑤란다. 이걸 보며, 장애인고용공단을 포함, 정부가 근로 장애인 인권에 상당히 무관심, 아니 무신경하다는 느낌마저 들게 만든다.   그래서 장애계에서 장애인 학대 시 신고의무대상에 표준사업장 사업주와 종사자, 근로지원인을 포함하도록 명시하라고 국회에 촉구했는데, 어떻게 될지는 추후 경과를 지켜보기로 하자. 또한, 장애인 당사자의 의견을 깊게 반영해 체계적인 자기옹호 체계를 마련하는 작업을 지금서부터 차근차근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한편, 국립민속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등 국립문화예술시설에서 장애인 관련 예산이 바닥 수준이라는 뉴스를 들었을 땐 장애인도 예술작품 감상 등을 통해 문화생활을 누릴 권리를 향유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에 조금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프랑스 항구도시 마르세유에 있는 지중해박물관에 필자가 유물을 보러 갔었던 걸로 기억한다. 불어로 설명되어 있어, 불어를 잘 모르는 필자로선 이 유물이 어떤 성격인지 이해가 쉽지 않았다. 가이드한테 물어봤더니 약간은 서투른 영어로 대답하긴 했다.   하지만 설명이 충분치 않았고 약간은 이해가 어려워 유물에 대해 제대로 음미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이해될 수 있게끔 영어를 잘하거나, 쉬운 말로 설명해줄 수 있는 가이드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긴 했다.   국민의 힘 김예지 의원에 따르면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국립민속박물관의 2021년 전체예산 대비 장애관련 예산이 각각 0.9%, 0.19%, 0.37%였다. 장애인 관람 지원인력도,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국립민속박물관의 경우 각각 1.8%, 1.3%. 1.2%였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경우, 장애 관련 예산, 지원인력 다 전무했다.   더군다나 국정감사에선 지적‧자폐성 장애인 지원인력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지적‧자폐성 장애인이 문화시설 관람할 수 있도록 차분한 분위기 조성하는 색감 등으로 마련한 시설, 쉬운 말 하는 문화관람 가이드 인력 등이 필요한데, 여기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이들의 문화생활 향유에 대해 과연 관심이 있기나 한 걸까 하는 의구심이 많이 들었다.   이외에도 국립장애인도서관에 발달장애인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이야기, 탈시설을 반대하는 시설 측과 부모들의 이야기 등 여러 국정감사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런 얘기들을 통해 아직도 국가는 지적‧자폐성 장애인의 삶과 권리 향유에 관심 없다는 걸 국정감사를 통해 새삼스레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지적‧자폐성 장애인도 대한민국의 엄연한 국민이요, 시민이다. 권리 객체가 아닌 주체다. 이들이 당당하게 권리의 주체로 자신의 삶과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장애인 당사자들을 필두로 장애계와 전문가, 시민단체 등이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 통해 나온 대안들을 국가, 지자체에 강력하게 요구해야 한다고 본다.   지적‧자폐성 장애인 삶에 관심 없는 정부와 지자체 이제는 그만 보고 싶다. 이들도 다른 사람과 당당하게 어울려 자신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세상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라며 2021년 남은 시간 동안이라도 이들의 삶에 신경과 관심을 쓰는 정부로 다시 거듭나길.  

    게시일2021-10-29

  • “지금도 자해를 하나요?”“아직도 혼자 울거나 웃기를 반복 하나요?”“여전히 식탐은 심하고요?” 아들이 받고 있는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를 점검하러 국민연금공단 직원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방에서 노래를 듣고 있던 아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거실로 나왔다.“아까 엄마가 얘기했지? 오늘 너 만나러 오신 분들이야, 인사하고 편하게 있으면 돼.” 불안함이 묻은 표정으로 입바람을 불며 아들은 조용히 소파에 앉았다.방문자의 질문을 듣고 답하면서 나는 비로소 아들의 변화를 알아 차렸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하기 싫은 것을 요구하면 스스로를 때리던 자해,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던 조울증, 하루에도 열두 번씩 냉장고를 열고 먹을 것을 찾던 행동들. 그 중에서도 제발 자해만 안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던 날이 있었다. 그것들이 서서히 사라진 걸 의식하지 못한 채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실사를 끝낸 그들이 돌아가고 나는 아들에게 한 번만 안아 보자고 했다. 아들은 뻣뻣한 몸짓으로 나의 포옹을 받아들였다. 고맙다고, 이렇게 달라져 줘서 고맙다고 나는 아들의 넓은 등짝을 토닥였다. 엄마의 칭찬에 기분이 좋은 아들은 금세 몸을 빼면서도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3년을 돌이켜 보면 아들보다 내가 달라진 걸 느낀다. 말이 안 나오는 아들에게 따라하라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작은 저지레나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보면 하지 말라고 얼마나 닦달했던가. 간단한 심부름조차도 눈을 마주 보고 또박또박 말하면서 지시하곤 했다. 굳이 그리 과하게 하지 않아도 아들은 자신이 들어야 할 말은 다 듣고 있다는 걸 늘 무시했다.아들은 자신의 표현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입술을 깨물면서 머리를 때리며 나에게 시위했다. 먹고 싶은 것을 살찐다는 이유로 못 먹게 하면 보란 듯이 나를 공격했다. 정말 배가 고파서라기보다 채워지지 않는 뭔가를 갈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3~4년 전까지 그러고 살았다.아들을 편하게 해 주려고 노력했다. 한없이 먹어대는 걸 볼 때마다 음식을 빼앗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아들에게 잔소리가 될 수 있는 말들은 가급적 삼갔다. 쉽지 않았다.자기결정권 연습을 시작하면서 나도 아들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주려고 노력했다. 억지로 바라보게 하면서 내 입을 보라며 채근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말을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것을 아들은 자신이 듣고 해야 할 일이면 알아서 움직였다. 때로는 뜸을 들이기도 하지만 내가 인내력을 가지고 기다리다보니 일상적인 생활은 순조로워졌다.자기결정 연습반 선생님은 아들의 마음 읽기에 주력했다. 마음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아들에게 큰 위안과 안정감을 주는 것 같았다. 선생님의 방법을 나도 배우면서 잘 안 되는 부분은 상담을 통해 연습하고 실행해 나갔다. 여전히 숙제가 남아있긴 하지만 3년 전과 비교하면 눈에 띄게 달라진 아들이 대견하다. 잊고 있던 행동들이 다시 나오더라도 그 전의 모습과는 또 다를 거라 생각한다. 막무가내로 했던 것과 소통하면서 하는 행동의 차이쯤으로 이해한다.이제 20대 중반의 아들이 조금만 더 점잖은 청년이면 좋겠다.흥이 많은 아들은 음악소리만 들리면 펄쩍펄쩍 뛰는 것으로 좋음을 표현한다. 흥에 흥분이 더해지면 표정이 심오해진다. 그 표정은 마냥 좋아서라기보다 다른 감정도 보인다. 근엄과 해맑음이 섞인 모습은 뭔가 쌓인 것을 과격한 몸짓으로 내보려는 발버둥처럼 느껴진다. 야외에서는 내 아들 아닌 척 시치미를 뗄 수 있지만 실내에선 참 곤란하다. 내버려 두기엔 아들 한 번 보고 바로 나에게 꽂히는 시선이 견디기 힘들다. 다른 사람들이 조용하게 음악 감상할 자유를 뺏는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 투명 칸막이로 우리만의 공간이 설치된다면 서로 맘 편하게 자신의 방식으로 음악회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바라건대 아들이 그 큰 덩치를 꿀렁거리며 뛰는 행동은 이제 좀 그만하면 좋겠다. 가끔 그런 행동을 보일 때마다 나보다 남편이나 딸의 표정이 너무 어둡다. 가족 나들이에 기분이 상해져 침묵하거나 말다툼을 하기도 한다. 나는 그냥 봐 주자고 하지만 부녀 둘은 그러지 못하니 옥신각신 한다. 어릴 때 비하면 정말 많이 좋아졌다. 바닥에 드러누워 울며 떼쓰기 선수였던 걸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그럼에도 아들의 행동이 좀 점잖아지고 한 번씩 과한 행동으로 민망할 때를 가족들이 잘 봐 넘겼으면 좋겠다.3년 후 다시 평가 하러 온 그들의 질문과 내 대답을 상상한다.“아직도 머리 꼬기와 입바람 부는 건 여전한가요?”“장소 불문하고 뛰는 행동은 그대론가요?”“아니요, 많이 줄었어요. 때와 장소 가리지 않고 뛰는 건 요즘 거의 하지 않아요.”엄마의 야무진 상상을 상상 못하는 아들은 행복해 보인다. 음악에 맞춰 머릴 꼬면서 입바람을 불며 몸을 흔든다. 눈이 마주치면서 엷은 미소를 나눈다. 조금 더 크게 웃는 미래를 꿈꾸는 건 신나는 일이다.  

    게시일2021-10-27

  • 대학 때 잘 놀았던 선배 중에 술자리 좋아하던 이가 있었다.(이렇게 얘기하자니 좀 우습다, 술자리 안 좋아하던 이가 없었으니.) 그때는 누구나 용돈이 궁해서 점심을 싼 것으로 대충 때우고 저녁엔 제일 싼 홍합탕이나 오뎅을 시켜놓고 소주를 마셨다. 사정이 그마저도 어려울 땐 볼품없이 담긴 김치쪼가리를 안주 삼기도 했다. 맥주를 마실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는 안주를 시키지 않고 기본으로 주는 팝콘을 눈칫밥과 같이 먹었다. 그 때 궁상맞은 버릇이 들어서인지 이후로도 술은 안주 없이 먹는 게 젤 맛있긴 하다. 물론 술 잘 먹던 얘기는 옛날옛적 얘기다. 그리고 지금 술 얘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술자리 좋아하던 선배 중 하나를 문득 떠올렸다는 얘기를 하려다가 알콜 냄새 나는 샛길로 잠시 혹해서 들어갔던 게다, 주책스럽게도.   아무튼, 술자리 좋아하던 선배가 있었다. 어느날 그 선배와 같이 학교 언덕을 내려오다가 문득 광장 너머 서쪽 하늘을 보았다. 시나브로 해거름에 붉은 놀이 장관이었다. 긴 숲 위로 넓게 펼쳐진 하늘이 술에 취한 듯(또, 술!) 붉었다. 지금은 하늘 가득 진홍빛의 바람꽃이 일어나듯 하던 그 광경이, 한 폭의 그림으로 기억나지 않고 단지 그랬었다는 사실로만 기억에 남아있지만(아나로그가 아니라 디지털데이터로만이라는 얘기다), 어쨌든 자주 보던 놀이 아니고 아주 특별하게 근사했던 것 같다. 나는 호들갑을 떨며(술 한 잔, 또?) 소리쳤다. “형, 저거, 저거 좀 봐요.”그러나 선배는 뜨악했다. “응, 뭐,,,,?”“저거, 저 놀 좀 보라고! 우와, 장엄하지 않아?!”“음....., 그러니?” 나는 그 미적지근한 반응에 기가 막혀서 선배의 어깨를 흔들어댔다. 보라고, 얼굴에 놀의 빛이 가는 화살처럼 와서 꽂히는 것 같지 않아? 일 년에 몇 번이나 이런 놀을 볼 수 있겠어, 이건 행운이지, 어쩌고 하면서. 선배는 그러나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뗐다. 나는 아쉬움에 조금 뒤쳐져서 고개를 외로 꼬고 놀을 좀더 쳐다보다가 다시 함께 걷기 시작했다. 선배는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근데, 몰랐구나. 나 적록색맹이라서 놀이 안 보여.”....! 붉었던 놀이 어서 지고 사위가 검기울기를 바라마지않던 그 날은, 아마도 저녁나절부터 뭔가 부실한 안주를 앞에 놓고 술을 마셨을 게다. 좀 많이 마셨을 수 있다. 내 얼굴은 저녁 내내 부끄러움인지 미안함인지 안타까움인지 범벅이 되어 붉었을 테고.   저거 좀 봐, 우와~! 산만하게 싸돌아다니는 걸 좋아한다. 어떤 목적지를 두고 쭈욱 걸어가는 것보다는 건들건들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우연히 마주치는 풍경을 누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어딘가 여행할 때, 나랑 같이 걸으려면 시간이 늘어져버린다. 우리 식구들은 이런 내 버릇을 참 못마땅해 한다. 특히 아들이 제일 싫어한다. 밖에 나갈 때부터 언제 몇 시에 어디로 가고, 무슨 일을 보고 몇 시에 어떤 경로로 집에 오는지가 명확해야 안심이 되는 아들은(자폐를 가진 이들의 특징이기도 하니), 내가 예고도 없이 멈춰서고 쓸데없이 옆길로 새는 것을 못견뎌한다. 특히나 더 질색하는 건 바로 이런 거다.   “우와, 00아, 저거 좀 봐, 너무 멋있지 않냐, 우와, 우와~!”   어렸을 때부터 손을 꼭 붙잡고 걷다가 멈춰서서 이렇게 소리지르며 아이에게 감탄을 강요할라치면 아이는 뜨악한 얼굴을 했다. 어딘가 엄마가 말하는 그 곳을 쳐다보기는 해야겠는데 대체 어디를 쳐다봐야 하는지 모르겠고, 더구나 감탄까지 하라니 난감하기도 이렇게 난감할 데가 없는 표정으로.   나는 마치 풍경에 감탄하는 방법을 가르쳐서 끄집어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 앞에서 집요하게 호들갑을 떨어댔었다. 그러다 어느날 문득 덤덤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저녁놀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선배 얼굴을 떠올렸다. 그 때 깨달았다. 저녁놀만큼이나 붉게 부끄럽던 그 날의 내가, 멈추지 않고 내내 아이에게 저것 좀 봐, 라면서 또 어깨를 잡아흔들고 있던 것이다.그렇게 문득 선배 얼굴을 떠올린 다음부터는 아이에게 어떤 풍경을 보고 멈춰서서 감탄하기를(감탄에 열렬히 동참하기를) 강요하지 않고 슬쩍 한번 소리 질러보고는 이내 그만둔다. 흥은 덜 나지만 고약한 에미가 될 수야 없지. 나중에 선배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러면 세상 풍경이 무슨 색으로 보이냐. 선배는 색맹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각기 자신이 느끼는 색깔의 미묘함이 다를 거라 했다. 내가 감탄해마지않는 깊은 푸른 색, 아스라한 청회색, 맑은 감청색, 품위있는 자주색이 정확히 어떤 색인지 잘 모르겠지만, 자기 나름대로 느끼는 색감이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때 내가 느끼는 회색이 선배가 느끼는 미묘한 여러 색깔의 결을 다 담고 있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가 보는 색깔들과 남이 보는 색깔들이 꼭 같다고 어떻게 자신할 수 있으랴. 그러면서 속으로 적이 안심했던 것도 같다. 다행이야, 내가 보는 것을 다 못 보는 것이 아니라, 좀 다른 것을 보고 있다는 말이지, 참 다행이야-.‘  다만 인간은 단일종족이라 인간들의 눈 구조도 한결같을 것이고, 물리적 작용 또한 한결같을 것이니 내가 느끼는 색깔의 감각이 78억이 느끼는 색깔의 감각과 크게 어긋나지 않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파란 눈의 외국인이 보는 파란 물빛이 혹시나 더 파랗지는 않을까, 그는 붉은 빛이 좀 덜 뜨겁지 않을까 하고 궁금했던 내 안의 아이는 여전히 어른이 되어서도 그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지만, 나는 나대로 내 눈의 세상 속 여러 결의 빛을 느끼고, 남은 남대로 자기 눈 속 여러 결의 빛을 느끼고 살아간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나를 안심시키기도 하고 자제시키기도 한다. 나는 때때로 자주 감정을 가라앉히고 주저 않아서, 똑같은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나, 누구나 나름대로 느끼고 살아간다는 것, 그러니 내가 보는 것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애태울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 그리고 내가 보고듣고 느끼는 것을 굳이 상대에게서 찾으려고 기를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아들의 항의와 즐거운 거래  얼마전에 아들 녀석이 이렇게 나에게 항의를 했다.  엄마는 거실에 앉아서 티비를 보다가 시도때도 없이 이것 좀 보라고 식구들을 불러제끼면서, 왜 내가 좋아하는 게임장면을 보라고 부르면 이따가, 나중에, 라고 하면서 안 봐주나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엄마도 봐야 해요.   아,이것은, 공평하게 주고받자는 거래의 기본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엄마의 이중적인 태도 - 아마도 권위적 판단을 지적하기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녀석 소견이 이렇게까지 큰 것이 충격적으로 놀랍고 대견하면서도, 한 대 얻어맞아서 정신을 못 차린 듯한 얼빠진 얼굴로 사과를 했다. 그리고 간사하게도 당장에 아들이 권하던 만화영화 ‘슈퍼소닉’을 얼른 다운받아 함께 보았다. 그랬는데, 재밌었다. 물론 며칠 전에 본 ‘샹치’만큼 재밌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보게 하려면 나 역시 걔가 좋아하는 것을 봐주면 된다. 우리 사이에는 이런 거래가 성립된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것처럼 훌륭한 공정거래가 없다. 어쨌든 우리는 각자 감격해마지않는 어떤 것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 그만큼 느끼거나 못 느끼거나간에 우리는 적어도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존중하는 태도를 통해서 우애를 돈독히 할 수 있을 것이고, 혹시나 그런 기회를 자주 갖다보면 각자 자기 세계에 있는 복잡미묘한 감각의 촉수들을 일정 부분 공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물론 공유가 목적은 아니나.)   아름다운 흑백영화  ‘자산어보’를 보면서 또 문득 그 선배 생각을 떠올렸었다. 그가 보는 세상이 이런 것일지 아닐지 모르지만, 혹시 그는 내가 자산어보를 보면서 아름답다 감탄하는 것의 열배, 백배만큼 느낄지도 모른다고. 마찬가지로 아들이 내가 가리키는 곳의 아름다움을 내가 부르짖는 방식으로 느끼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건성으로 대답하는 그 속에서 뭔가 다른 것을 움켜쥐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 일이다. 각자 자기 세상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게 또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지. 김종옥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문화예술특별위 

    게시일2021-10-05

  • 지인과 점심 약속을 잡았다. 코로나로 인해 ‘집콕’중인 자폐성장애 아들을 혼자 둘 수 없어 같이 나갔다. 지인이 좀 늦는다는 연락에 혹시 아들이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소란을 피우면 어쩌나 살짝 불안했다. 예전처럼 수저를 번갈아 흔들거나 식탁을 치는 요란한 행동은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갑자기 보이는 돌발행동은 예측불허라 아들 표정을 살폈다. 불만을 표현하는 아들 특유의 표정이 나오려고 했다. 미간을 찡그리면서 혀를 조금 내밀어 깨무는 행동. 배가 고픈 것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음식을 먹고 있는데 우린 왜 계속 기다리기만 하느냐는 불만이 얼굴에 묻어 있다.“우리 오징어순대 먼저 주문해서 먹을까?”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아들. 마침 샐러드가 나와서 아들은 그것을 먹으며 오징어순대도 맛있게 먹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까지 식당에 들어선 지 30여분의 시간 동안 동요하지 않은 아들, 얼굴 붉히지 않고 별 일 없이 식사를 끝낸 아들이 나는 또 기특하다.   지인과 한강변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부모 마음대로 자녀를 휘두르는 일, 이들의 미래를 위해 부모가 해야 할 일과 연대해야 되는 것 등,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나눴다. 아들은 우리 뒤에서 마스크를 벗었다 썼다 반복하며 따라 왔다. 가끔 우리 앞으로 뛰어와 겅중겅중 걷는 모습이 우스워 대화가 끊어지곤 했다.   강변의 넓은 잔디밭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아들도 우리 옆의 바위에 앉는가 싶더니 이내 잔디밭을 뛰어다녔다. 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길 바라며 얘기를 계속 이어가던 중, 아들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일어서서 아들을 불러 더 멀리 가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지인의 이야기가 귓등으로 들렸다. 아들의 직진 본능이 발동하여 먼 곳으로 뛰다가 우리 있는 곳을 모르면 어쩌나 불안했다. 아들을 믿어 보자고 엉덩이를 들지 않았다. 대화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아들이 내가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엄마 있는 곳으로 되돌아오길 바랐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내겐 꽤 길게 느껴졌다. 얼굴에 함박웃음을 머금고 상체를 흔들며 돌아오는 모습에 나는 ‘감격’했다.   아들은 밖에 나가면 무조건 뛰는 걸 즐겼다. 놀이터에서 그네나 미끄럼틀을 타는 모습을 나는 벤치에 앉아 흐뭇하게 웃으며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들은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아이들이 없는 놀이터 구석에서 혼자 풀이나 모래를 입에 넣고 뱉기를 반복했다. 늘 바로 옆에서 아들에게 시선을 고정시켜야만 했다. 잠시 한 눈이라도 팔면 아들은 달릴 수 있는 곳까지 무조건 달렸다. 아들과 둘이 외출할 때 예쁜 신발은 그림의 떡이었다. 항상 뛰기 편한 운동화를 신었다. 몸집이 커가면서 아들의 가벼운 발걸음은 내가 전력 질주하는 것 보다 빨랐다. 더 멀리 가버리면 내가 힘이 드니까 가급적 아들을 불러 세웠다. 다행히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지 않고 멈춰서 되돌아 와주면 그게 고맙게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다.   한동안 나는 아들이 내 주위에서 놀다가 엄마 있는 곳으로 돌아오기만 해도 참 좋겠다는 작은 소망을 품고 살았다. 점점 체력이 좋아지는 아들에 비해 노쇠해가는 나의 체력이 아들의 질주를 막는 건 불가능해지면서.그러다보니 외출이 꺼려졌고 승용차로 움직였다. 하지만 그게 능사는 아니었다. 아들의 체력과 몸은 점점 더 커져만 가는데 내가 힘들다고 아들을 통제하며 살 수는 없었다. 아들과 둘 만의 ‘뚜벅이 여행’을 시작했다. 전철을 타고 이동했고 한강공원에서 산책을 했다. 앞서 가던 아들이 갑자기 보이지 않아 실종 신고를 해서 찾기도 하면서 아들과 나는 서로의 동선을 예측하기 시작했다. 몇 번의 길 엇갈림으로 고생을 하면서 아들은 엄마 곁을 떠나지 않고 주위를 맴도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아들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에 이름을 불러 더 이상 먼 곳으로 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어쩌면 그동안 아들은 충분히 본인 하고픈 걸 하고 내게 돌아 올 수도 있었다. 다만 내가 아들을 기다리지 못하고 불러들인 건 아니었는지 생각해 본다. 워낙 실종 사고가 많은 것에 대한 불안감이 아들을 믿지 못하게 했다고 변명해 본다. 성인 대접을 해야 한다고 말을 한 건 가슴이 아닌 머리에서 나와 입으로만 한 거였다. 어떤 일이 닥쳐서 내가 의기소침해지더라도 아들을 믿고 세상을 더 활보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 잊지 말아야겠다.   남들에겐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우리에겐 고비가 많다. 그런 고비를 잘 넘어줄 때마다 아들이 고맙다. 당연하고 사소한 일이라도 장애인이라는 이름으로 인한 긴장과 안도의 한숨은 우리 일상을 흔들기도 하고 감사하게도 한다.아들이 식당에서 잘 기다려 준 것도, 혼자 뛰어다니다 내게로 돌아와 준 것도 아들의 결정이었다. 앞으로도 그런 결정 하도록 계속 기회를 줄 것이며 아들의 선택과 결정에 응원의 박수를 보낼 것이다.  

    게시일2021-09-24

  • 1. 구봉서  구봉서라는 코미디언이 있었다. 우리나라 코미디언 1세대라고 할 만한 분인데 2016년에 89세로 돌아가셨다. 이 분이 어떤 인터뷰 중에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하고 살 수 있으면 그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았다. 기억이 까마득한데, 내가 아마도 중고등학교 학생 때였던 것 같다.(오래 되었다는 뜻이다, 참고로.) 이 말을 듣고 여러 가지로 감동을 받았다. 어수룩하고 눙치고 웃긴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웃기던 분이, 행복한 삶에 대한 정의를 그토록 간명하게 하고 있지 않은가. 희극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이 행복하다는, 자긍심 넘치는 말이었겠지만, 삶에 대한 깊고 오랜 생각 속에서 나온 중간 결론처럼 느껴졌다. 그때부터 진정 행복한 삶이란 바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보면 맨 먼저 저 이는 저 일을 하면서 사는 게 행복한 일이 될까, 하고 생각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물론, 많지 않았다, 자기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실컷 하면서, 더구나 그 일로 넉넉히 밥 먹고 살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이. ‘   자기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밥벌이는 다른 일로 하는 사람도 있고, 밥벌이 때문에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뒷전으로 미뤄놓는 사람도 있고, 아예 밥벌이와 좋아하는 일 사리에서 헤매다 밥벌이를 포기하는 사람도 있고, 그도저도 다 못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 숫자가 더 많은지는 잘 모르겠다. 하기야, 세상엔 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다양한가. 직업하고 연결되지 않는 ‘하고 싶은 일’들은 얼마나 많겠는가. 하고 싶은 일과 직업이 같은 경우가 최상위일 테지만 그런 행운은 드문 일이겠고,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그 일을 할 만한 형편이 된다면 그게 또한 대단한 행운이지 싶다. 나는 어떤가 생각해보면, 가장 좋아하는 일이 무엇일까를 놓고서 이리 재고 저리 망설이고 하다가 기회를 놓친 경우에 가깝겠다.   하고 싶은 일이란 무엇인가. 요컨대 내가 나를 거기에 써먹어도 아깝지 않은 일이다. 요샛말로 하면 내가 나를 거기에 ‘갈아넣어도’ 아깝지 않은 일, 기꺼이 나를 바치는 일이겠다. 그런 일이 있다는 것 자체도 행운이다.(있긴 하되 그리 못해서 애닯은 이들에게는 불행일까.... 잘 모르겠다.) 직업이 되었든, 직업으로 뒷받침하든, 어쨌거나 하고 싶은 일은 하는 편이 행복에 가까울 것이다. 행복한 삶을 얘기하려던 게 아닌데, 앞머리가 길어졌다. 정작 하려던 얘기는,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사는 연예인의 말에서 무한 감동을 받은 때가 많다는 것이었다.(글이 아니라 말하는 도중이었으면 겸연쩍게 실실 웃고 다시 말줄기를 찾아가는 타이밍이다.)   2. 싸이   누군가 싸이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 당신은 도대체 왜 무대마다 죽을 듯이 그렇게 열심히 하는가. 싸이의 대답은 이랬다. 예전에 군대를 ‘재차(!)’ 가게 되었을 때, 다른 것은 모르겠는데 그 직전의 무대가 떠올랐다. 혹시나 내가 앞으로 무대에 설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럴 줄 알았으면 그것이 마지막 무대였을텐데, 아, 그랬으면 더 했어야 했는데, 그 무대에 내 모든 것을 남김없이 쏟아넣었어야 했는데-. 그래서 싸이는 그 이후엔 모든 무대가 마치 다시없을 마지막 무대가 될 수 있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선다고 했다. 그 비장함의 극단 덕에, 우리는 싸이가 소리도 잘 나지 않는 쉰 목소리로 우리에게 뛰라고 명령하고, 셔츠 앞단추가 터져나가라고 몸뚱이를 흔들고, 땀으로 범벅이 되어 번질거리는 얼굴로 미친 듯이 웃어가면서 한바탕 잘 놀아주는 모습을 본다. 굿판에서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고 남은 힘의 바닥까지 그러모아 뒷전굿을 하고는 풀썩 바닥에 쓰러져버리는 무당, 마치 그하고 같이 펄펄 뛴 듯, 우리는 그의 무대를 함께하고 나면 개운하다못해 탈피한 곤충들마냥 새로워지는 것이다.   다시없는 순간일지도 모르기에 나는 지금 여기에 최선을 다하겠다. 싸이의 무대를 볼 때마다 그 말을 떠올린다. 어영부영 재고 따지고 하다가 슬쩍 다음으로 미뤄버린 일이 얼마나 많은가. 대충 얼버무리고 다음에 잘하자 했던 일은 얼마나 많은가. 늘 있는 일이니, 내일도 있을 일이니 이름 없이 넘겼던 날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오늘 여기 있으니, 내일도 근처에 있겠지 하고 흘려보낸 사람은, 그와의 시간은 또 얼마나, 얼마나 많은가. 3. 마이클 잭슨   마이클 잭슨이 지금까지 살았다면, 우리는 그 덕에 실험적이고 강렬하고 엄청난 무언가를 어마무시하게 즐길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두고두고 슬프다. 그가 재기하면서 마련했던 런던공연의 준비과정을 찍은 ‘디스 이즈 잇’(This is it)이라는 다큐영화가 있다. 마이클 잭슨은 공연 마지막 리허설을 하면서 이번 공연이 그의 마지막 공연이 될 거라고 얘기한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지만, 그저 해보는 말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더 이상의 최고의 공연은 이제 없을 거라고 한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끝내 그 공연을 하지 못하고 죽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이 마지막 리허설 장면에서 그가 마지막 공연 운운할 때부터 관객들이 펑펑 울었었다. 아, 런던 공연은 열렸어야 했다! 그 아쉬움은 이루 다 말하기 어렵다. 그 공연이 얼마나 엄청난 공연이 되었을지 리허설만으로도 짐작하고 남는다. 대중문화사에 있어 기록될만한 대단한 공연이 되었을 게 틀림없다. 그와 우리는 이걸 놓치고 말았다.   그 때 알았다, 우리는 살면서 마지막을 할 기회를 놓칠 때가 많다는 것을. 이번이 마지막이야, 했다가 그것이 마지막이 아닌 게 되는 일도 많고, 마지막으로 이것만은 해내고 끝내야지 했다가 결국 마치지 못하기도 일쑤다. 마지막으로 하려 했다가 마음에 안 들어 마지막이 아니라고 우기다가 그저 포기하고 만 일은 또 오죽 많은가. 그 일들은 아직도 마지막을 맺지 못한 채로 어정쩡하게 남아 있으니, 엉킨 실타래를 풀다가 다 못 풀고 깨어난 사나운 꿈자리들은 다 그것들의 작당짓거리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인 줄 모르고 있다가 졸지에 그것이 마지막이 되어버렸을 때의 허망함을 안다. 삶에 있어서 그것만큼 헛헛하고 큰 구멍이 있을까. 일만 그런 게 아니다. 사람도 그러하니, 작별인사를 못하고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은 얼마나 많을까. 내가 보낸 인사를 그가 받기 전에, 그가 보낸 인사를 내가 받기 전에 자리를 뜬 일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니, 살다보면 예정된 마지막을 이루지 못할 때가 있으므로 마지막인가 싶으면 너무 벼르지말고 얼른 해치워야 할 일이다. 또한 결코 마지막이기를 예측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았지만, 하다 만 숙제 같은 이것이 결국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 끝내 허망하지 않으려면 마지막인 듯 준비를 해야한다. 뒤돌아보면 매번 아쉬운 일 천지이고, 미련한 마음을 오갈 데 없이 길섶에 슬며시 놓아두고 떠나온 일이 태반이다. 이러다 정말로 마지막에 이르도록 마지막인 줄 모르다가 마지막을 맺지 못한 일들을 가슴에 쌓아두고 사라질까 걱정이다.(쓰기는 이렇게 쓴다만, 걱정은 무슨! 삶이란 누구나에게 대체로 이렇게 흘러가기 마련인 걸. 풋!)   일년하고도 여덟 달을, 세계테마여행을 반복해서 보고 또 보고 하면서 식구들과 옴지락꼼지락 지내면서 보니, 이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목구멍 넘어 귓구멍 관자노리께까지 차오른다. 무언가 일년하고도 여덟달을 미뤄온 것이 있는가 하고 곰곰 생각해 본다. 아니면 무언가 예전에 미뤘던 새로운 어떤 것을 지난 시간동안 담아온 것이 있던가 하고 애써 생각해 본다. 뭔가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내 기억이 날 위안하지 못한다. 그러나 여전히 다행스럽게 건넌방에서 아들이 두드리는 게임소리, 딸이 또각거리는 자판 소리가 들린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그건 바로 지금이다. 시간이란, 지금이 늘 마지막이므로.   * 추신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우연찮게도 8월 29일, 58년 개띠 마이클 잭슨이 태어난 날이다. 잭슨에게 인사를 건넨다. 이틀 전인 8월 27일에 돌아가신 구봉서 님에게도 안부를 드린다.   김종옥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문화예술특위)​

    게시일2021-08-31

  • 자폐인 관점에서 본 도쿄올림픽 소회작년에 개최하기로 예정했지만 코로나19 팬더믹(세계적 전염병)으로 인해 1년 연기된 도쿄올림픽이 우여곡절 끝에 지난 7월 23일 무관중 속에 개회식을 진행했다. 16일 동안 각 나라의 선수들은 조국의 명예를 위해 서로 치고받는 싸움을 전개한 후 8월 8일 파리에서 다시 만날 걸 약속하고, 도쿄에서의 올림픽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필자도 올림픽 경기 보는 것을 좋아하는지라, 관심 있는 경기를 즐겨봤다. 박태환 이후로 수영에 조금씩 관심이 생기게 되었고, 올해 국가대표선발전 남자 자유형 200m에서 1분 44초대에 터치패드를 찍은 황선우의 기록이 메달권이기도 하는 등, 겸사겸사 이 선수의 경기를 보게 되었다.   처음 올림픽에 출전한 것 치고는, 결선에서 7위를 차지하고 예선에서 한국 신기록을 수립하는 등 앞으로 다가올 파리올림픽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게 되었다. 24년 동안 묵힌 한국 높이뛰기 기록을 경신한 아름다운 4위 우상혁 선수 경기도 마찬가지로 다음 올림픽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키게 만들었다.   수영, 승마, 펜싱, 사격, 육상 3200m 달리기 등 5종목을 잘해야 하는 근대5종 경기에서 메달을 거머쥔 전웅태 선수의 최선을 다한 경기 모습도 필자의 마음에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모두 우리나라를 위해 수고해준 선수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고, 다음 파리올림픽에도 멋진 활약을 기대한다.   이번 올림픽을 주관하는 국제올림픽위원회 IOC 제9대 토마스 바흐 위원장이 내세운 모토는 ‘Unity in Diversity(다양성 속의 통합)’이다.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에서 그 부분에 신경이라도 쓰듯 이번 올림픽 개회식 때 진행한 성화 점화식에서 그런 모습이 상징적으로 보였다.   격투기 종목, 야구에서 활약했던 전 운동선수들과 일본 내 코로나 방역을 위해 힘쓴 의사들이 먼저 성화주자로 뛰었다. 그다음엔 휠체어 사용인인 와카코 츠치다 선수가 성화주자로 나섰고 이어 일본 스포츠의 미래인 청소년 선수들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청소년 주자가 든 성화는 최종 점화자인 일본의 테니스 스타 오사카 나오미에게 전달되었고, 그녀는 구처럼 생긴 모양의 성화 점화대에 불을 붙였다. 참고로 오사카 나오미는 아이티 국적의 아버지와 일본 국적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혼혈 출신이다.   장애, 연령, 국적, 인종에 상관없이 모두가 하나로 어우러진 성화 점화식이었기에, 그 부분에서 다양성을 강조하려는 것이 느껴졌다. 이처럼 장애, 연령, 국적, 인종, 성적 지향에 상관없이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라면 서로가 어울리며 사회통합을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세계랭킹 2위인 오사카 나오미가 도쿄올림픽 여자 테니스 단식 16강에서 탈락하자, 일본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오사카는 일본인이나 일본어 못하고, 그녀가 왜 성화 최종주자가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단다. 이 말을 들으며 성화 점화식 때 전했던 다양성의 메시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인종 차별 및 혐오 분위기가 느껴졌다.   세계랭킹 2위라고 해서 경기를 다 잘하는 건 아니다. 2위도 경기하는 날의 몸 상태에 따라 실력이 달라지기도 하고, 때로는 상대에 따라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날의 경기 모습만 가지고 말하면 되는 건데도, 그걸 인종과 연결해 비하하는 의미로 얘기하니 선수 입장선 얼마나 모욕감이 들겠는가?   또한, 오사카 나오미에게 우울증이 있었을 때, 일본 누리꾼들이 성차별적 이유까지 곁들여,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처럼 일본 사회에서는 정신건강 문제를 드러내는 걸 금기시하기까지 한단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일본 사회가 겉으로는 다양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배타적인 사회라는 생각이 든다. 다양성을 ‘실체’가 아닌 ‘정치적 수사(Rhetoric)’로만 여기지 않나 의심까지 든다.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배타적인 사회의 모습은 우리 사회에도 존재한다. 지적장애, 자폐성 장애 등 정신적 장애에 대한 혐오와 차별로 자신의 장애를 드러내지 못하는 장애인이 많은 등 장애를 이유로 한 차별이 우리 사회에선 정말 흔하다.   자폐인, 정신장애인에게는 장애를 이유로 교육대학 입학이 원천적으로 불허된다. 정신장애를 이유로 의사, 변호사 등의 직업을 제한하는 결격조항이 대한민국 법령에 아직도 버젓이 있다. 이러한 정신장애인 차별 법령을 철폐할 것을 정신장애계에선 요구하고 있지만, 아직도 철폐되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다.   또한, 국가인권위원회의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에선 한국 사회에 있는 트랜스젠더(출생 시 지정된 성별과 다른 성별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65.3%가 최근 1년 동안 본인의 성별표현으로 인해 차별을 겪었다고 답했다. 성적 지향에 따라서도 차별하는 대한민국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성적 지향, 장애, 연령 등에 따른 차별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만연한 현상을 철폐하기 위한 목적으로 국회를 비롯해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논의가 최근 분주했지만, 지금은 입법기관인 국회에서 오히려 잠잠하다. 차별금지법 제정보다 당들이 정략적인 궁리를 한다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이러다 다양성이 실체가 없는 ‘정치적 수사’로 끝나진 않을지 두렵기만 하다.   물론 차별금지법 제정을 한다고 해서 차별이 만연한 현실을 바로 없앨 수 있다는 건 거짓말일 것이다. 하물며 자신의 가치관을 바꾸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데, 차별에 길들여진 더 큰 단위의 사회에서 차별철폐를 하는 게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러기에 어려서부터 장애인, 성 소수자 등 자신과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도록 하는 문화가 형성될 수 있도록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다양성이 ‘정치적 수사’가 아닌 ‘실체’, 현실로서의 모습을 지닐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럴 때 서로를 존중하는 분위기 속에 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질은 높아지고 구성원들이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게시일2021-08-31

  • 병원 근처만 봐도 겁을 먹고 후다닥 뛰어가는 자폐성장애 아들에게 백신 접종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냥 안 맞고 감염병에 걸리지 않기를 바랄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건 꽤나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주사 맞는 연습을 해보기로 했다. 반팔 옷의 소매를 올리면 바로 내려버리는 아들에게 우선 민소매티를 구입해서 입혔다. 소매 올릴 필요 없이 바로 알콜스왑으로 팔을 소독하고 코바늘로 꾹 눌러 5초간 견디는 연습을 했다. 처음엔 인상을 쓰며 내켜 하지 않다가 계속 반복하다보니 반소매를 입은 날도 스스로 소매를 걷어 올려 주사 놀이가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정하진씨, 주사 맞읍시다.”라고 말하면 바로 달려와서 팔을 내밀었다. 무사히 잘 맞을 수 있을 거란 기대와 한바탕 전쟁을 일으키고 정작 주사는 구경도 못하고 돌아올 수 있겠다는 절망감이 수시로 찾아왔다. 누군가는 잘 맞았다고 좋아하는 소식이 들렸다. 부러웠다. 또 누구는 소란만 피우고 끝내 접종하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고도 했다. 아들도 그럴 것 같아 심란했다. 그래도 열심히 연습을 했고 드디어 접종 당일이 되었다. 열 체크와 예진표를 작성하고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아들의 표정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의사와의 문진은 순조로왔다. 선생님을 바라보며 얌전하게 앉아 약물에 대한 이상 반응과 접종 후의 주의할 점에 대해 잘 들었다. 대기실로 나와 마지막 관문을 기다렸다. 부스에 들어가 주사만 맞으면 끝인데 아들이 겁을 먹기 시작했다. 주사기를 들고 있는 간호사를 보자마자 냅다 뒤돌아서 대기실 의자에 도로 앉았다. 불안한 눈빛과 빠른 손놀림으로 머리카락을 꼬기 시작했다. 나는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괜찮다느니, 안 아프다느니, 넌 할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게 무의미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냥 조용히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집에서 연습할 때랑 분위기가 달라서 당황했구나. 기다려 줄게.” 의사와 간호사들이 부스에서 나와 한 마디씩 했다. 다들 걱정스런 마음인 걸 알지만 아들에게는 소용없는 조언들이었다.“과자로 유인해서 들어오게 하면 될텐데...”아들은 식탐이 있긴 해도 상황에 따라 먹거리를 포기한다. 까짓 거 안 먹으면 되는 걸 너무 잘 안다.“엄마가 안고 아빠가 아들 못 움직이게 꽉 잡으면 되는데...”아들은 안기는 걸 거부한다. 설사 내가 안는다 해도 바로 빠져나가는데 아들의 덩치를 감당할 수 없다. 남편 역시 아들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을 수 없다. 아들이 몇 번을 부스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걸 본 접종센터장이 진심으로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고민해 주었다. 차 안에서 맞고 간 경우가 있다며 우리도 그래 보자고 했다. 넓은 공간에서 마치 큰 죄를 지은 사람 생포하듯 건장한 남자들이 아들의 사지를 잡고 뭔가를 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차라리 예방 접종을 포기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에 그나마 차 안의 좁은 공간에서는 시도할 만했다. 엄마와 아빠가 자신의 몸을 잡고 있는 걸 불편해 하는 사이 간호사는 재빠르게 아들의 팔에 주사기를 꽂았다. 팔을 움직이는 바람에 주사 바늘이 아들의 팔을 길게 스쳐가서 피가 났다. 통증으로 그랬을까? 아들이 멈칫하는 사이 간호사는 접종을 마쳤다. 반창고를 붙이려 했으나 얼마나 긴장했는지 온 몸이 땀에 젖어 반창고가 미끄러져 붙지 않았다. 15분 동안 대기하면서 아들은 자신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예방 주사 맞은 거야. 수고 했다.”나는 덤덤하게 말했고 남편은 고생했다며 아들을 칭찬했다.   주사 맞는 연습은 사실 무의미한 것이었다. 주사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분위기가 문제였다. 낯선 사람이 자신의 팔을 잡는 자체가 아들에겐 공포였다. 본인이 두렵다고 결정한 이상 그 어떤 설명도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아들을 힘으로 제압하고 주사를 맞게 하는 건 하고 싶지 않았다. 본인 스스로 점잖게 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가지고 대했으나 아들은 두려운 분위기와의 싸움을 견디지 못했다. 그나마 어릴 때처럼 바닥에 누워 뒹굴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사는 게 늘 고비다. 앞으로 어떤 고비가 우리 앞에 나타날지 생각하면 암담하다. 하지만 또 이렇게 넘어갈 수 있음이 다행이다. 미리 겁먹지 말고 평소에 내공을 잘 쌓아 현명하게 대처하며 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병원만 보면 피하던 아들이 병원 안까지는 잘 들어가고 있으니 예방주사쯤 아무렇지 않게 맞고 나올 날도 오지 않겠는가.  

    게시일2021-08-20

  • 1. 자랑질은 부끄럽다   자랑하는 일은 많이 부끄럽다. (안다, 이렇게 말하면, 나로부터 자랑질을 들어왔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쓰나미같은 반론, 태산같은 반증을 들이댈 사람들이 있는 것을. 하지만 뭐 어쨌든 자랑하는 일은 몹시 부끄럽다는 말이다.) 언제부터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니 꽤 오래전부터 몸에 밴 정서인 것 같다. 또한 내가 나를 자랑하는 것을 부끄럽다는 말은, 남들이 스스로를 자랑하는 것도 못마땅하다는 뜻이겠다. 생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내 머릿속 거울뉴런이 유난히 극성스러워서, 내가 나를 자랑할 때 남이 나를 부러워하거나, 속으로 욕하거나 할 것이 분명하다는 판단으로(내가 그러하므로 남도 틀림없이 그럴 것이므로), 이런 마음 속 병통이 생겼으리라. 자기의 장점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씩씩한 사람들을 보면 설핏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것이 더 건강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뭐 어쩌랴, 이렇게 생겨먹은 것을. 뭔가 이런 정서적 태도가 나름 합당한 이유가 있고 사회적으로도 긍정적인 것이라면, 자랑을 부끄러워하는 일을 자랑할 수도 있겠으나, 뭐 그렇게까지나~~.   어렸을 때(굉장히 오래 전 일이라는 뜻이다!) 학교에서는 온갖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가정환경조사라든가 하는 게 있었다. 조사서에 자기 집의 사는 형편을 낱낱이 기록해 제출했는데, 이도 모자라 선생님을 이것들을 통계까지 냈었다. 일일이 조사서를 들춰가며 통계 내기 귀찮았던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한 항목씩 불러가며 손을 들라 했다. - 집이 자기 집인 사람 손들어봐. (집이 우리집이지 우리 집이 아닌 것도 있어요?) - 집주인이 엄마아빠가 아니고 다른 사람인 사람 손들어봐. (아, 그렇군요~)- 집에 텔레비전 있는 사람 손들어봐. (으쓱~) - 집에 냉장고 있는 사람 손들어봐. (우와)- 집에 라디오 있는 사람, 아니 라디오 없는 사람 손들어봐. (!) - 집에 자가용 있는 사람 손들어봐. (......)   모두 비슷비슷하게 가난했던 우리들은 손도 비슷비슷하게 들었고, 간혹 ‘~ 없는 사람 손들어봐’가 나올 때마다 유난히 주눅들어 하는 아이들 속에 자기가 포함될까봐 조마조마 했었다. 그러다보면 꼭 ‘~있는 사람’에 계속 손을 들고 있으려니까 팔이 아프다며 투정을 부리는 것들이 생긴다. 그것들의 자랑질이 얼마나 무례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나, 부잣집 아이야, 너희들은 이런 거 없지? 그러니 나를 무한히 부러워하고, 너희의 가난을 부끄러워하렴. .... 걔들의 도시락 반찬을 절대 힐긋거리지 않는다. 알록달록하고 폭신해서 절대 연필심이 부러지지 않는 걔들의 필통을 절대 부러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절대 부럽지만 티를 내지 않겠다. 그리고 나는 절대 부자가 되어도 자랑하지 않겠다.   2. 칭찬과 자랑 사이 마음의 가시   이후로 티를 낼만큼 부자가 되지 못했으니, 절대 부자를 자랑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매우 쉽게 지켜졌다. 대신 그 욕망을 다른 방식으로 풀긴 했다. 잘 달린다, 더 높이 뛴다, 아이들을 웃기게 해준다, 더 많이 읽었다...... 내가 자랑질하지 않고도 남들의 칭찬을 들을 수 있었으니, 이것이 가장 윗길의 전략이었을 게다. 칭찬은 듣되 부러움(시기, 질투 포함)의 대상이 되지는 말자.   그런데 차츰 느끼는 것은, 칭찬을 듣고 싶어하는 인정욕구라는 것 역시 자랑질과 다를 것 없는 비슷한 류의 괴물이지 않은가. 하는 사실이다. 내가 뭔가를 공들여 하거나 우연히 잘 하게 된 것을 남들이 알아주지 못할까 안달이 나서 드러내고 과시하려 한다면, 그것이 자랑질이 아니고 무엇이랴. 가족이 아닌 타인에 대해 부러움 없는 칭찬이 가능할까. 나도 힘든데, 남들에게 부러움 없는 칭찬을 듣겠다는 욕심이 가당키나 한 걸까.   그러니 자랑질을 미워하는 것은, 남들의 자랑질에 동요되는 얄팍한 내 정서를 가리기 위해 이도저도 모두 포기하자는 비겁한 태도가 아니었던가, 하는 지적질을 스스로에게 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또 어쩌랴. 어쨌든 자랑질이든, 칭찬받기 구걸이든, 남을 심사를 괴롭히는 일은 하지 말자는 결단은 칭찬받을 만한 태도가 아닌가. 다만 극복해야 하는 병통은, 내가 이러할진대 너는 대체 왜 그러냐, 내가 이렇게 자랑질 하지 않으려 하는데, 너는 대체 왜 자랑질이냐, 하는 마음의 가시를 다스리는 일이다.(물론 이놈의 가시는 거대하고 끈질기다!)   3. 엄마의 자랑질 우리 엄마는 사람은 편식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에 투철하신 분이다. 편식을 한다는 것은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을 잊어먹은 자들의 교만이고, 음식을 해준 사람에 대한 무례이고, 나아가 외면당하는 콩과 고등어, 고기와 미꾸라지, 우거지와, 당근, 오이에 대해 매우 미안한 일이라고 했다.(그러면서 고기를 한참 거르면 어지럼증이 생긴다고 하신다.) 그렇기에 자식들에게도 편식을 몹시 나무라셨는데, 막내동생은 대체로 엄마의 뜻에 따라 편식하지 않고 두루 잘 먹지만 오빠와 나의 고집스런 편식과는 지금까지도 평생 싸우고 있는 중이다.   나는 내가 하필 싫어하는 음식을 기어코 먹이려는 엄마와 맞선 싸움이 참 싫었기에, 우리 식구들의 편식은 절대 허용이다. 그러다보니 우리 식구들은 희한하게도 누가 좋아하면 누군가는 싫어하고, 누가 싫어하면 누군가는 좋아하는 이상 식욕들이 강화되었다. 물냉과 비냉을 함께 차려야 하고, 콩국수와 볶음국수를 함께 차려야 하고, 고기와 생선을 각기 차려야 한다. 내가 자초한 것이니 불만은 없다. 좀 불편할 뿐이다. 이 얘기를 꺼낸 이유는, 엄마의 편식무시의 원칙이 참 싫었는데, 이것 말고 또 하나 내가 싫어하는 것이 있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다. (이러고보니 참 고약한 딸이다. 엄마 흉을 보기 위해 이것저것 들이민다는 말이니.)   엄마는 동네 아주머니들(할머니들이겠으나, 내가 우리 엄마를 할머니라고 하지 않으니 엄마의 동료들도 할머니라고 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나서, 가끔 내게 그 말들을 전하는데, 그 속에 꼭 남들이 했던 자랑들이 어김없이 들어있다. 누구 아들이 진급을 해서 뭐가 됐다더라, 하던 자랑들은 그 아들들이 은퇴하는 나이가 넘어서고 보니 사그라들었다. 그 자리를 이젠 취직 잘한 손주들이 차지했다.   - 누구 손주가 취직했다고 인사를 왔다더라, 유명한 회사인데 월급을 많이 준다더라. - 누구 손주며느리가 어디 다니느라 바쁜데, 할머니 선물을 사왔다더라. - 누구 손주가 생일이라고 할머니 모시고 나가 근사한 곳에서 밥을 샀다더라. - 누구 손주가 할머니랑 자고 싶다고 가방 싸들고 와서 일주일 있다 갔다더라.   이 중에서 많은 부분이 과장되어 있거나, 가상의 희망이 섞인 픽션으로 윤색된 것이리라. 그리고 이런 많은 자랑들을 듣고 있을 때 시새움이 없을 리 없는 우리 엄마라고 가만 있었겠나. 엄마도 똑같았겠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 아주머니들의 자랑들에는 과장이 있고, 그것을 스스로 모를 리 없다. 한 번 온 것은 세 번 온 것이 되고, 한 번 밥 먹은 것은 세 번 밥 먹은 것이 되는 것을 누가 모르랴. 그러니 이 아주머니들은 뭔가 자식 손주들이 자신들이 나가서 자랑을 할 만한 거리들을 만들어주기만을 바라고 또 바란다. 그분들과 다르지 않아, 뭔가 자랑거리가 생기지 않을까 호시탐탐 탐색을 하는 우리 엄마와 나의 대화도 늘상 이렇다. - 누구 손주가 뭐 어쨌다더라. - ....... - 누구 손주가 결혼을 한다더라. - ...... - 누구 손주가 초밥을 사왔다더라. - ......- 00이는 인턴 사원으로 잘 다니고 있니? - 격주로 다녀. - 하루 네 시간 근무면 월급은 얼마나 나오니? - 근무한 만큼 나오지.- ...... - 짜증 안 부리고 잘 다녀. - ...... 기특하구나. - 00이가 우리 집에서 제일 착해. - ...... 그렇겠지. 걔가 뭐 악한 마음을 갖겠냐. - @#$%^&*&^%$#~! (이건 속으로 쏴올린 속사포다)   4. 자랑스러워 하기   자랑은 나쁘다. 그건 염치없고 유치한 짓거리일 때가 많다. 나보다 많이 가진 상대 앞에서 내 것을 자랑하는 것은, 열등해 보이지 않으려는 서글픈 몸짓이며 나를 과장하고 포장하려는 거짓이다. 듣고 있는 상대가 내가 가진 것만큼 못 가졌을 때 자랑하는 것은 상대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것이고, 상대가 나를 부러워하는 것을 보면서 즐기려는 못된 취미이다. 사실 내가 가진 것만큼 그가 못 가졌다는 건, 그에게 참 미안한 일이 아닌가. 그가 못 누리는 것을 내가 누린다는 것은 참 미안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불쑥불쑥 자랑질 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 내 마음이 참 밉고 싫으며, 누군가 내가 하는 수법이랑 비슷하게 안 그런 척 하면서 자랑질을 할 때 온 마음을 다 해서 그가 밉다. 제일 윗길은, 역시 내가 내 입으로 자랑하지 않는 거다. 남들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말이다.   자랑질은 하지 않되, 자랑스럽기만 하면 된다. 자랑스러워 하기에는 참 많은 조건이 붙는다. 남들이 보기에도 좋아야 하고,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줄 만 해야 한다. 남들이 못 갖는 행운을 눈치 빠르게 얻어낸 것이 아니어야 하고, 자기가 하지 않고 남의 덕에 얻은 성취가 아니어야 한다.   그러니 나는 내 아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남을 넘어서려는 마음이 없고, 남을 괴롭히려는 마음도 없다. 스스로 조금씩 자가발전을 해가며 구사할 수 있는 어휘가 늘고 이해할 수 있는 말의 범위도 넓혀간다. 정확히 얘기해주면 그만큼은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편식은 하지만 반 점은 먹어달라 하면 먹어주고, 제 방문을 고집스레 닫아놓긴 하지만 밤새 닫아두진 말고 새벽에는 열어놓으라 하면 무거운 책을 받쳐놓고 십센티쯤은 열어준다. 요컨대 남의 마음을 헤아려준다는 말이다. 아빠와 여동생이 서로 의견차이로 대립하면 ‘누구나 일리는 있다’는 말로 점잖게 중재를 선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좋아요를 눌러주는 이가 열 명이 채 안 되어도 절대 실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약속이었기에 상관 없다고 하면서(!).   내 주변에는 자식자랑질을 하지 않는 이들이 참 많다. 나도 그렇거니와 그들은 대체로 자랑질은 하지 않고, 다만 자랑스러워 한다.   이뻐서, 이쁘게 웃어서, 착해서, 잘 먹어서, 좋은 습관이 있어서, 어제 못했던 것을 오늘은 할 수 있게 되어서.... 그리고 내 옆에 있어서.   나는 이런 이들이 참 좋다. 미안해서 자랑하지 못하는 병통이 있는 이들이.                                                                                         김종옥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문화예술특위) 

    게시일2021-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