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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칼럼

[너와 나의 시간들 04_김명희] 지나온 학교생활
글쓴이관리자 게시일2023-07-28 조회수395





지나온 학교생활

 

아들은 초등학교 중학교를 일반 학교 일반학급에서 수업받았다. 그러면서 일 년 행사의 시작은 늘, 학기 초가 시작되면 학사일정에 앞서 가장 먼저 담임선생님이 정해지는 그날이 두근거렸다. 어떤 분이 담임이 되느냐에 따라 그 선생님의 장애 이해도와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에 의해서 1년이 어떻게 정해질지 감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담임이 정해지면 그다음 순서로 선생님을 찾아뵙고 아들에 대한 history를 하나도 빠짐없이 녹음테이프 틀어 놓은 것처럼 되뇌었다. 아들이 1년을 잘 보낼 수 있게 하려, 때로는 탐탁하지 못한 눈빛과 때로는 왜 하필 우리 반이라는 불편한 시선을 극구 거부하며 그저 잘되리란 잘할 수 있으리라는 그렇게 초·중학교의 시작을 되풀이하곤 했다.

1학년 때는 전교조 선생님이라 그런 편견이 없으셨고 한 반에 있던 짓궂은 아이 하나로 인해 아들이 피해를 본 적이 있었는데, 나는 상관없다고 했음에도 그 아이와 그 아이의 부모님을 함께 사과하도록 도와주셨고 감사의 선물 하나도 괜찮으시다며 극구 사양을 하시며 학급에서 모둠활동에도 적극 참여하기를 원하기도 하셔서 처음으로 시작하는 학교생활은 나름 잘 할 수 있었다.

2학년 때는 담임선생님이 처음 발령받아 부임한 곳이 그곳 초등학교였다. 때 묻지 않은 열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시고 도움을 주려고 했지만, 교단에서의 경험 부족 때문인지 아들과 의사전달에도 의사소통도 잘 이루어지지 못해서 둘 다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그 한 예로 아들이 정말 배가 아파서 수업 중에 화장실 가기를 원했는데 수업 방해라는 이유로 화장실 가는 걸 허락하지 않아서 결국 실수하게도 하고, 굳이 선생님 책상 옆에 아들의 책상을 붙여놓고 옴짝달싹도 못 하게 하는 과한 관심을 보여 주시기도 했다.

3학년 때는 퇴직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연세가 드신 선생님이었다. 엄마들이 보는 앞에서도 아이들이 점심시간에조차 눈에 조금 벗어난 행동만 해도 등짝 스매싱을 해대고 그때는 급식 도우미를 학부모님들이 도와주었는데 급식 후면 남은 반찬에 점심을 함께 먹는 게 일반적이고 보통 있는 일이었지만 그 선생님은 그것마저도 금기하시는 특별나고 악명(?)높은 선생님이셨다. 그분은 장애아를 둔 나한테 유난한 관심을 주시면서 반 대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반대표 역할을 짊어지게 하셨는데 학교행사 때 교장 선생님 방에 꽃꽂이를 비롯해 그 외에 사소한 필요한 주문을 전해왔다. 돌아보면 힘들게 하는 아들을 대신해서 엄마가 물질적으로나마 반을 위해 도움을 주라는 뜻이었음을 시간이 지난 뒤에야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은 문득 면담 때 아들로 인해 반 평균이 다 깎였다며 하소연하셨다. 아들이 어떠한지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반 평균을 운운하는 말에 너무도 놀라서 이번에는 강한 어조로 그러면 시험 날 결석을 해야 하느냐고 조금 불쾌한 심기를 표시 하고고 집으로 왔다.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집으로 전화하셨대서 무슨 일인가 싶어 다시 찾아갔더니 내가 한 말에 조금 그러했던지, “00 어머니 정말 존경하고 제가 절만 믿는 분입니다~~ 그리고 00을 위해서 제가 매일 기도합니다.”라며 내 손을 잡아주기까지 하는 황당한 상황을 만들었다.

5학년 때는 무관심한 선생님. 아들이 소풍을 갔다 왔는데 입고간 점퍼가 다 찢어져 있을 때도 무념무상으로 대처했고 결국 상대 아이 집을 직접 찾아가겠다는 말에서야 겨우 아이 엄마 전화번호를 전해주는 하여튼 무관심과 안일한 사고의 선생님 탓에 있는지 없는지 존재감마저도 확인되지 못하는 시기가 지나갔다.

6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은 애정으로 아들을 신경 써주는 게 눈으로도 보였다. 학과 수업을 따라가기는 어려웠지만 예체능 시간이면 꼭 학생들과 함께 축구 경기든 어떤 게임이든 동참시켰고 교실 뒤편 학생들의 작품이 걸리고 하는 곳에도 어설프지만 이름을 붙여 함께 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중학교 진학 시에도 함께 고민해 주시며 특수학교로의 진학에 대한 내 생각을 되새겨 보고, 최종적으로 겪어본 후에 옮겨도 괜찮으니 일단은 일반 학교에서 그래도 함께 어울려 지내기를 조언해 주셨다. 결국 선생님 생각이 깊어 그 의견에 일반중학교로 입학했다.

1학년 때의 친절한 담임선생님 배려로 무탈하게 지냈다. 감사의 표시로 어느 날에는 귀걸이 하나를 선물해 드렸는데 다음날하고 와서는 아들에게 이쁘냐고 엄마가 선물 주셨다고 하며 사소하지만, 아들과 관계 형성을 위해 많은 정성을 보이셨다. 친구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작은 일들도 분배해주면서 누군가를 도와주는 기쁨도 나눌 줄 아는 방법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2학년 때 선생님은 또 정반대의 성향이라 몹시 못마땅한 내색이 역력했다. 조별 모임이나 외부 체험에도 누군가 챙겨주어야 하는 불편함을 핑계로 불참을 넌지시 종용했다. 1학년 때 선생님의 어머니께서 함께 오셔도 되니 꼭 참석하세요.”라고 했던 일과는 너무도 상반되어서 결국에는 그 선생님이 추천해주시는 대안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전학이 아니고 학적은 그대로 본 학교에다 두고 따라가지 못하는 학습 부분에서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학교였다. 대안학교는 영등포 신길동에 있었다. 거기는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 하는 일반 학생이나 발달장애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처음 등교 때에는 자유자재로 때로는 책상이 없는 바닥에서의 수업 등 낯선 교실 풍경에 쭈뼛거렸지만, 차츰 적응하면서 도봉에서 영등포까지 혼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등하교하는 등 학교 수업 뒤에 새로이 경험하는 일상들에서 많은 변화가 시작되었다. 늘 어디를 가든 함께 이동하던 모습에서 차츰 시내버스 지하철의 이용 방법도, 환승 방법도 터득했다. 전까지 일반 학교에서는 볼 수 없었던 비슷한 학생들끼리 조금은 어눌해도 서로의 감정과 생각들 그리고 하고 싶은 말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대안학교 수업 대부분이 체험을 위한 익힘으로 서로 함께 늘 모둠활동과 조별 활동으로 야외수업과 여행 등에서 듣고 보고 느끼고 만드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을 나누고 도와주며 친구라는 개념도 형, 동생이라는 선후배가 아닌 가족 같은 개념으로 더 친근해져서 학교생활이 활기차게 변했다. 일반 학교의 선생님에서 느끼는 거리감도 좁혀지고, 함께 뒹구는 체험학습이 대부분이어서 의식주를 함께 같은 공간에서 나누는 시간이 많은 까닭에 일반 학교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사제 간의 정도 돈독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중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3년 과정을 마치면서 친구들도 생기고 형, 누나, 동생이라며 전화도 연락도 하게 되는 즐거운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느껴졌다. 일반 학교에서 버거운 학사일정을 벗어나 자유로운 방식의 학사일정이 성장하는데 커다란 계기와 기회가 된듯했다. 학기 말에는 발표회가 있어서 그동안 길고 닦은 여러 방면에서의 소질을 발휘하는데 누구는 사회를 보고 그 진행에 따라 연극도 하고 단체 안무도 하는 등 그 재미 또한 모든 학부모의 가슴에 학기 말이 기다려지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대안학교로 옮긴 후 처음 1주일간 제주도로 체험 여행을 떠날 때는 난생처음 아들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어서 온 가족이 노심초사했던 기억도, 그리고 돌아오는 날은 이산가족 상봉처럼 감격의 눈물을 흘렸던 기억도, 지금 생각하면 많은 추억거리가 되어서 새삼스러운 느낌으로 전해온다.

졸업하고 나서도 이제는 20대 후반이지만 그때 그 친구들이랑 연락도 하고 일상을 공유하는 모습을 본다. 처음 일반 학교에서 대안학교로 옮겨 갈 때 혹시라도 적응을 못 해서 여기도 저기도 소속감 없이 길을 잃어버릴까 염려했던 마음이 후회스럽지 않을 만큼, 아들은 대안학교에서의 자유를 몸소 체험하며 한걸음 성장하고 성숙했다. 지금도 아이들의 진로와 학교의 선택에 힘들어하는 부모님이 계시리라고 본다. 경험을 통한 대안학교의 장점을 공유하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의 골프에 입문하게 되면서 골프대학을 문을 조심히 두드려보았고 당시 골프대학 학장님이 골프와 장애학생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많아서 면담할 수 있었다. 벌써 장애학생인 선배 한 명이 입학해 골프를 전공하고 있어서 아들이 진학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수시 입학전형을 통해 입학하게 되었다.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고, 한 번도 없었던 일이라 처음 기숙사에 들어가는 날은 얼마나 떨리고 또 설레기도 했다. 짐을 싸서 기숙사에 혼자 두고 오는 발걸음은 얼마나 무겁던지 함께 생활하는 룸메이트에게 매달 장학금 비슷하게 전달해주고 도움을 받았는데, 일주일마다 금요일 수업이 끝나면 학교가 있는 횡성에서 원주까지는 셔틀버스를 타고 원주에서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하면 마중을 가곤 했다. 그 일주일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길고 길던지ᆢ 학교에서 학과장님이 여자교수님이셔서 엄마라고 부르라며 다독이고 챙겨주었고, 남자교수님들도 형이라고도 부르라며 아들에게 학교에 잘 적응하기를 도와주었다. 처음 1주일 학교생활 후 금요일에는 집에 와서 색다른 곳에서의 학교생활과 기숙사 생활에서 어색함과 긴장감으로 심리적으로 몹시 불안하게 보였고 일요일 오후 다시 학교로 들어갈 시간이 되면 예민해져서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사소한 것에도 짜증을 냈다. 그래서 첫 일 주일은 조마조마했다. 혹시나 학교로 다시 가지 않겠다고 하는 비상사태가 생겨날까 봐 조심하며 아들의 심기를 살폈는데, 싫은 모습이 역력했지만, 잠실에서 학교로 가는 버스에 오를 때는 다녀오겠습니다.”라며 순순히 차에 오르는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쉬곤 했다.

학교생활은 교양과목과 매주 한 번의 라운딩, 골프의 기초 그리고 체력 보강을 위한 헬스, 필라테스 등으로 이루어졌고, 교내 연습장에서는 수시로 숏게임을 비롯한 자율적으로 연습을 한다고 했다. 염려와는 달리 교수님들의 관심과 배려로 한 학기만 룸메이트의 도움을 받았고, 그 후부터는 다른 학생들과 생활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저녁이면 함께 치킨을 시켜 먹었다고 나누어 내기 때문에 돈을 보내달라기도 하는 등 조금씩 학교생활에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스크린골프를 함께 치기도 하고, MT를 함께 떠나기도 했으며, 겨울이면 필리핀으로 한 달간 전지훈련을 떠났다 오기도 했다. 그래서 그 덕분으로 지금도 온 식구가 함께 라운딩을 즐길 줄도 알고 때로는 엄마 아빠의 스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나름 조언을 하기도 하는 시간이 왔다.

 

지나온 학교생활은 늘 처음은 마음 졸이며 시작했지만, 차츰 적응하면서 또 즐기게 된 시간이 오니 감사할 따름이다. 이제 또 다른 시작, 사회생활도 학교생활을 지나왔던 것처럼 긴장과 또 설렘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우려와 염려를 지나 어느 시간에는 또 한걸음 발전하고 성숙해져서 맡은 바 자기 일을 잘할 수 있는 능력도 책임감도 조금씩 생겨나는 것을 볼 수 있으니 이 또한 더 감사할 일이다. 늘 그대로인 듯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콩나물시루에 매일 흡족한 물을 주면 어느 날 쑥~자란 콩나물이 보이듯이, 분명 그렇게 잘 자라나리란 생각으로 매일 사랑의 물, 정성의 물, 믿음의 물 그리고 가끔 채찍질도 하면서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아들에 환희의 박수를 보낸다.

울 아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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