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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김영희③] 그렇게 대표가 된다 / 홍은전
분류비마이너뉴스 글쓴이홍은전 게시일2021-11-03 조회수149

《 존재 확인, 내 인생의 숙제 》
① 나는 커서 뭐가 되지
② 빗장을 여는 사람들
③ 그렇게 대표가 된다

장애여성공감 창립자들. 오른쪽에서 세 번째, 휠체어를 타고 노란색 블라우스를 입은 사람이 박김영희 대표. 사진 제공 박김영희
장애여성공감 창립자들. 오른쪽에서 세 번째, 휠체어를 타고 노란색 블라우스를 입은 사람이 박김영희 대표. 사진 제공 박김영희

- 장애여성의 이름으로

고덕동 그 집에서 9명이 여성주의 세미나를 시작했어요. 장애여성 6명, 비장애여성 3명을 발기인으로 98년엔 ‘장애여성공감’을 창립하고 99년부터 잡지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사무실도 따로 없었고 단체 등록을 한 것도 아니었어요. 장애여성운동이란 걸 해보자고 했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어요. 학연, 지연 같은 사회적 자원이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에서 단절되어 있는 사람이 운동을 한다는 건 어떤 걸까 고민하다 자신의 언어를 만드는 것이 우리 운동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도 우리가 낯설어요. 길을 갈 때 내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걸어 다녀요. 그러다 갑자기 쇼윈도에 내가 비쳤는데 나는 휠체어를 타고 있어요. 내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 유리창에 비친 나는 너무 달라요. 아, 나도 내가 어색하고 생소한데 다른 사람들에겐 얼마나 그럴까. 우린 왜 이렇게 생소한 존재가 되었을까 생각했어요. 내 존재를 내가 스스로 탐구하고 내가 경험하고 느끼는 것에 대해 내가 얘기하지 않으면 나도 나를 모르고 사람들도 장애여성을 잘 모르겠죠. 우리는 그렇게 계속 묻혀 왔던 거예요. 장애여성인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글 쓰는 훈련을 했어요.

그 집엔 많은 사람이 들락거렸어요. 사는 사람은 넷인데 살림살이는 열 명 규모였어요. 설거지하다 자꾸만 그릇을 깨먹으니까 절대로 안 깨진다는 코렐 그릇을 사야 한다면서 현대백화점 가서 비싼 밥공기를 산 게 아직도 우리 집에 있어요. 방이 두 개였는데 큰 방은 일하고 밥 먹는 공간으로 쓰고 작은 방에서 넷이 같이 잤어요. 낮엔 텔레마케터로 일하고 밤엔 세미나하고 글 썼어요. 밤에 자려고 누워서 내일은 뭘 할지 의논하다가 복주랑 순천이가 베개 싸움을 하면 영란이가 말리다가 둘을 다시 패고… 그 시절엔 사는 게 너무너무 정신없이 바빠서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몰랐어요.

하루 종일 통신사 고객 관리 업무에 쫓기다 보면 돈 30만 원을 벌려고 이 일을 계속해야 할까, 본격적으로 운동을 해야 하지 않을까, 마음속에서 갈등이 되었어요. 그즈음 한 사건이 터졌어요. 2000년 강릉 음촌리에서 지적장애여성이 초등학교 6학년부터 7년간 동네 남자들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던 사건이었어요. 그 여성이 결혼해 다른 동네로 갔는데 3개월 만에 출산을 해서 쫓겨난 거예요. 알고 봤더니 피해자는 몇 차례 낙태를 했었고 심지어 결혼 후에도 고향의 남성들이 그녀를 불러내 계속 성폭력을 저질러왔더라고요. 동네 사람들과 여성단체가 고발해서 세상에 알려졌어요.

김은정이 서울과 강릉을 오가며 대응하다가 나중엔 토론회도 열었어요. 장애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를 최초로 공론화한 거였어요. 알려지지 않았을 뿐 이런 문제가 너무 많았어요. 도박하는 남성들이 장애여성과 섹스를 하면 재수가 좋다는 속설이 있어서 시장에서 장사하다가 갑자기 끌려가서 당하는 경우도 있고요. 폭력을 당한 장애여성이 피신할 곳이 없으면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와 지내기도 했어요. 그 가족이 쫓아오면 집 문을 닫고 버텼어요. 여기서 밝힐 수 없는 일들이 진짜 많았어요. 장애여성을 전문으로 하는 성폭력 상담소가 없었기 때문에 대응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어요.

박김영희 일러스트. 쇼윈도에 바친 휠체어 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다. 그 뒤로는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 나무와 빌딩이 보인다. 그림 훗한나   
박김영희 일러스트. 쇼윈도에 바친 휠체어 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다. 그 뒤로는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 나무와 빌딩이 보인다. 그림 훗한나   

저는 일을 그만두고 이 운동에 집중해보기로 결심했어요. 다들 열심히 참여하고 잡지도 만들었지만 이 일만 하겠다고 총대를 메는 사람은 없었어요. 조바심이 났어요. 독립해서 자유롭게 사는 것도 좋았지만 뭔가 의미 있는 걸 만들고 싶었거든요.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이 결심해주면 좋겠지만 언제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었어요. 잘할 만한 사람들이 준비될 때까지 내가 먼저 시작하겠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하는 상담원 양성 교육을 신청했어요. 2주간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는 교육이었고 장소는 합정동이었어요. 고덕동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였죠. 가끔 내가 생각해도 나 자신이 대책 없이 용감할 때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그런 때였어요. 교육장은 2층이었는데 엘리베이터도 없고 장애인 화장실도 없었어요. 내가 온다면 최대한 지원하겠다는 얘기를 실무자한테 듣긴 했지만 매일 거기까지 가는 게 제일 큰 문제였죠. ‘한벗 장애인 이동봉사대’ 이사님께 전화해서 도와주세요, 믿을 데는 여기밖에 없습니다, 비장하고 간곡하게 말했어요.

이사님이 한번 해보자면서 아침엔 당신이 차를 갖고 와 이동시켜 주시고 저녁엔 다른 봉사자들을 연결해주셨어요. 사람을 못 구한 날엔 당신이 하던 일 다 제쳐두고 쫓아와 주셨어요. 아침에 2층 교육장까지 사람들이 들어 올려서 책상 앞에 앉으면 그날의 교육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야 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나가서 점심 먹는데 저는 도시락을 싸서 다녔고 종일 화장실엔 못 갔어요. 2주를 하루도 빠짐없이 다녔는데 정식 수료증을 받지 못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관련 단체에서 3년 이상 근무한 사람에게만 수료증을 주는 거였더라고요. 저는 종이 색깔이 다른 조건부 수료증을 받았어요.

그럼에도 그 교육은 너무너무 좋았어요. 교육을 마친 강사들이 실무자한테 가서 하나 같이 그 휠체어 탄 눈 큰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대요. 내가 눈을 너무 반짝이면서 들어서 굉장히 눈에 띄었대요. 대체 어떻기에 그러나 궁금해서 실무자들이 일부러 들어와 볼 정도였다고 나중에 들었어요. 여성주의에 대한 교육이었는데 그때 배운 것이 이후에 운동하는 데 기반이 되었던 것 같아요. 오랜 세월 여성은 어때야 한다는 억압적 관습이나 규정이 있었고 아무도 그것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어요. 폭력의 배경에 대해 알았다고 할까, 나에게 향하던 이름 붙일 수 없었던 시선들이 어디에 기반하는지 알게 되었어요.

어렸을 때 동네 할머니가 “인물이 아깝다, 처녀귀신은 면해야 할 텐데” 하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어요. 여자라면 꼭 결혼을 해야만 하고 아내로서의 의무가 있고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내 몸은 장애가 있으니 그걸 못할 거라는 뜻이죠. 장애여성들은 무성적 존재로 여겨지면서 동시에 여성이기 때문에 더 무시당하고 차별받아요. 사람들은 나를 박영희라고 보는 게 아니라 여성 그리고 장애인으로만 인식하고 반말하고 무시해왔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사람들이 나에게 함부로 내뱉었던 말들을 떠올리며 ‘아, 그 말이 그런 뜻이었구나’, 세미나 할 때 여성주의자들이 했던 말들이 하나의 맥락으로 꿰어지면서 ‘아, 그런 뜻이었구나’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어요.

2002년 장애여성공감이 제주로 간 첫 번째 캠프 ‘억압된 천사에서 자유로운 마녀로’에서. 사진 제공 박김영희
2002년 장애여성공감이 제주로 간 첫 번째 캠프 ‘억압된 천사에서 자유로운 마녀로’에서. 사진 제공 박김영희

- 억압된 천사에서 자유로운 마녀로

어느 날 성당에서 알고 지내던 분이 갑자기 2천만 원이 생겼다면서 후원을 하겠다고 했어요. 사람들이 편하게 드나들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늘 꿈처럼 말해왔던 터라 그 돈을 받아 사무실을 내면 어떻겠냐고 동료들한테 말했어요. 의견이 분분했어요. 사무실을 내면 상근자가 있어야 하고 상근자를 두면 월급을 줘야 하고 그러다 보면 돈을 받을 수 있는 사업을 계속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다 사업에 매몰되면 순수하게 운동을 못하게 된다는 거였어요. 제도에 묶이지 않고 연구만 하자는 사람도 있었고 조직의 방향도 뚜렷하지 않은데 사무실부터 얻는 게 맞느냐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어요.

연구하고 담론을 만드는 일에 더 집중하는 말에 뭔지 모를 답답함을 느꼈어요.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서 어떻게 연구를 하지? 담론이라는 게 대체 뭐지? 저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아, 너는 그렇게 느끼는구나, 이 문제를 이렇게 보는 거구나, 터득하는 스타일이었어요. 운동을 하려면 어쨌든 사람을 만나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현장이고 담론도 거기서 나오는 거라고, 정책 같은 건 전문가들이 아름답게 포장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내용은 우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해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어요. 월세를 두 달 이상 못 내면 무조건 접는다는 각서를 쓰면서 비장하게 결의했어요. 2000년에 장애여성공감 사무실을 열고 제가 첫 상근자가 되었어요. 동료들이 10만 원씩 내서 내 활동비도 하고 잡지도 만들고 한 달에 한 번 모임도 했어요. 출근해서 혼자 덩그러니 있다가 전화 오면 받고 업무일지 쓰는 생활을 한동안 했어요. 변변한 가구도 없어서 텅 빈 사무실에 울려 퍼지는 내 목소리만 들으면서 지냈죠. 그러다 대체 이렇게 출근만 하면 안 되지 않나, 겨우 한 달에 한 번 모임하자고 단체 만들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료들도 답답했던지 두 사람이 직장을 그만두고 합류했어요. 제대로 시작할까? 하자! 안 되면 할 수 없고! 그때부터 보조금을 받기 위해 여기저기 공모사업에 신청서를 냈는데 내는 족족 선정됐어요. (웃음)

서울시에서 장애여성 성폭력상담소 사업 공고가 나와서 신청했을 때였어요. 알고 보니 서울시가 어떤 산부인과에 그 사업을 주기로 이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가 갑자기 우리가 나타나서 당황했더라고요.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아니라 오로지 의료적 기능만 보고 그걸 병원에다 주려는 게 너무 답답했어요. 최종심사는 현장 방문이었는데 오전엔 산부인과, 오후엔 우리를 방문하는 일정이었어요. 장애여성의 눈으로 직접 그 산부인과를 봐야겠다면서 그 산부인과에 찾아갔어요. 담판을 짓겠다는 마음이었죠. 혹시라도 늦을까 봐 지하철 셔터 열리기를 기다려 출발했어요.

지하철을 세 번 갈아타고 영등포의 병원 문 앞에 도착했더니 웬 남자가 서 있었어요. 병원이 3층이어서 나를 업고 올라가려고 기다리고 있었대요. 어이가 없어서 공무원들을 다 불러 모았어요. 내가 성폭력을 당한 장애여성이라면 몸에 남자의 손이 닿는 것도 참을 수가 없는데 3층까지 안겨서 올라가라는 것이 말이 되냐고 눈에 힘을 주고 말했어요. 그러고선 나를 전동휠체어에 탄 채로 들고 올리라고 했죠. 산부인과 직원들은 다 여성이었고 그 숫자만으론 모자라서 지나가는 시민들까지 모아야 했어요. 간호사들이 나를 옮기느라 신고 있던 하이힐을 벗고 낑낑댔어요. 지금 이 모습 다 사진 찍으라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공무원들한테 내가 성질을 냈죠. (웃음)

올라갔더니 진찰실 의자에도 안아서 올려야 하고 상담실도 좁았어요. 심지어 화장실은 다시 1층으로 내려가야 했어요. 의사분께 내가 물었어요. “성폭력을 당해서 질에 상처가 생기면 소변이 자주 마려울 수 있는데 화장실이 이러면 어떻게 해요?” 의사 선생님이 아무 말씀도 못 하셨어요. 3층까지 들린 채로 오르내리느라 새로 산 전동휠체어가 다 부서지고 깨졌어요. 상담하러 왔다가 이 지경이 되어야 하느냐고 물으니까 공무원도 할 말이 없었죠. 오후에 우리 사무실로 왔을 땐 다들 지쳐 있었어요. (웃음) 여기선 엘리베이터 타고 와서 화장실도 편하게 갈 수 있고 물도 편하게 마실 수 있었어요. 물도 한 잔 편히 못 마시는 상담소가 비싼 의료기구들로 가득 차 있는 들 무슨 소용인가요. 그렇게 공감은 성폭력 상담소를 운영하게 되었어요.

그 시절이 참 좋았어요. 공감은 글쓰기, 연극, 세미나 같은 활동들을 하면서 장애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고 자기의 언어를 만들어갈 수 있는 문화운동을 펼쳤어요. 장애여성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캠프를 하고 “억압된 천사에서 자유로운 마녀로”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펼쳐 들고 단체사진을 찍었을 때 우리가 정말로 이런 걸 하는구나 감격했어요. 그런 날이 올 줄 몰랐거든요. 돈 버는 일 그만하고 활동에 전념하겠다고 말했을 때, 사무실을 내면 어떠냐고 물었을 때, 동료들이 항상 물었어요. 언니, 할 수 있어? 정말 할 거야? 그 말에 대답하기가 참 힘들었어요. 자신이 없었거든요. “난 못해. 내가 어떻게 해. 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기겠지. 복주가 준비되고 똑똑한 사람들이 만들어지면 난 그만둘 거야.” 항상 그렇게 말했던 것 같아요.

사랑의 고리에서 거부당하고 이 길이 아니면 나한테 무슨 길이 있을까 생각하며 지낼 때 빗장을 만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열심히 전화 거는 일을 했고 그렇게 회원들을 만나다 보니 어느덧 그 중심에 내가 있게 됐어요. “언니 정말 할 거야? 할 수 있어?”라는 질문에 대해 “혼자서는 못해, 하지만 같이하면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사랑의 고리에서 거부당했던 상처가 나를 그렇게 움직이게 했던 것 같아요. 나도 무언가 이루는 사람이고 싶었어요.

- 장애여성 운동과 장애인 운동 사이에서

2001년에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시작되었어요. 사람들이 우르르 차도로 나가기에 그 대열에 끼었다가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휠체어가 뒤로 발라당 넘어져 버렸어요. 주로 세미나하고 글 쓰는 운동을 해왔던 제게 무척 강렬한 경험이었어요. 사람들이 네 몸 하나도 제대로 수습할 수 없으면서 거길 왜 가느냐고 걱정했는데 이동권이 정말 필요한 사람이 난데 내가 안 나가면 누가 하나 싶었어요. 얼마 후 이동권연대로부터 공동대표를 제안받았어요. 그 직전에 공감 내부에 갈등이 있었어요. 저로서는 운동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을 만큼 힘들고 괴로웠어요. 공감 문 닫는 거 아니냐면서 회원들이 걱정할 정도였죠. 공동대표를 제안받았을 시기는 그 사태를 수습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였어요. 이동권연대 대표를 수락했던 건 공감 회원들에게 힘을 주고 공감이 건재하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는 조직의 대표로서 절박함 같은 게 작동했던 것 같아요. 복주가 “언니, 거기 가면 막 몸싸움할 수도 있어. 그래도 할 거야?” 하고 물었어요. 응, 할 거야.

2001년 10월 31일, 서울 종로. 장애인들이 사다리와 쇠사슬로 몸을 묶고 거리에서 버스를 막아서고 있다. 사진 제공 장애인이동권연대 
2001년 10월 31일, 서울 종로. 장애인들이 사다리와 쇠사슬로 몸을 묶고 거리에서 버스를 막아서고 있다. 사진 제공 장애인이동권연대 

처음엔 이동권연대 분위기가 편치 않았어요. 회의하러 가려면 지하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갈아타야 했는데 그 역에 악명 높은 리프트 구간이 있어요. 전동휠체어를 탄 채로 리프트 위에 오르면 리프트가 덜덜거리기도 하고 고장이 나서 갑자기 공중에서 멈춰서기도 했어요.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전날 밤부터 너무 괴로웠어요. 마음속으로 ‘가야 돼, 가야 돼, 해야 돼, 해야 돼’ 수도 없이 되뇌었어요. 나는 그 두려움을 견디면서도 정시에 도착하려고 가까스로 노력하는데 가보니까 많은 장애남성들이 대수롭지 않게 지각을 하더라고요.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었어요. 쉬는 시간엔 자기들끼리 담배를 피우러 나가더니 들어올 땐 뭔가가 결정되어 있었어요. 버스 점거 같은 걸 할 땐 경찰들이 연행을 하네 마네 치열하고 어수선한 분위기인데 누가 이 상황에 대해서 설명해 주지도 않았어요. 박경석 대표나 비장애남성 활동가들이 “지금부터 싸워야 합니다!”하면 싸워야 되는가 보다 해야 했어요. 공동대표라고 세워놓고서 모든 정보는 박경석 대표에게 집중되어 있었어요. 슬금슬금 화가 나기 시작했어요.

공감에선 누군가 문제제기를 하면 이미 결정된 것도 엎고 다시 논의한다는 원칙이 있었어요. 이동권연대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면 공감 동료들이 언니가 힘들게 갔는데 왜 남자들끼리 결정하냐, 어디서 난 결정이냐, 하면서 따지는 분위기였어요. 내가 느낀 불쾌함이 이상한 게 아니구나 싶어져서 다음번 이동권연대 회의에 가서 질문했어요. 그 말은 무슨 뜻이에요? 왜 그렇게 해요? 꼭 그렇게 해야 해요? 그랬더니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빠 죽겠는데 뭐 그런 걸 따지냐는 분위기였어요. 그 안건 분명히 지난번에 결정 못하고 넘어갔는데 왜 이번 회의에선 이미 결정되어 있죠? 누가 결정했나요? 이런 걸 따지니까 사람들이 싫어하는 게 눈에 보였어요. 아휴, 박김영희 대표님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하겠네, 했어요. 눈치 보는 척하면서 사실은 눈치를 주는 거죠.

저는 회의를 질질 끄는 사람이 되어 있었어요. 하지만 정말로 회의를 지연시키는 건 지각하는 남성들이었어요. 한번은 지하철 막차를 타기 위해 회의 도중에 나오면서, 회의가 늦어진 것은 지각한 사람들의 책임이고 내가 떠난 이후의 회의에서 결정될 것들에 대해 나는 동의한 바가 없다고 말하고 나와 버렸어요. 당시엔 장애인 콜택시가 도입되기 전이어서 나는 막차를 놓치면 집에 갈 방법이 없는데 자가용 있는 사람들은 회의가 늘어지든 말든 느긋했어요. 저의 이동은 항상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웠어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의 리프트는 수시로 고장 났어요. 리프트가 공중에서 멈춰 있는데 막차가 들어오는 날이면 한쪽에선 역무원들이 나를 업고 내려가고 한쪽에선 전동차를 못 가게 잡고 있기도 했어요. (웃음)

여성운동 문화와 이동권 투쟁의 문화는 그렇게 충돌했어요. 하지만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는다고 페미니스트 조직의 대표라는 일정 정도의 권력이 내게 있었고 또 내 말을 들어주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차츰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고 저 역시 이동권연대 안에서 자리를 잡아갔어요. 아이러니하게도 그때부턴 공감 내부로부터 문제제기를 받았어요. 이동권 투쟁의 방식은 남성중심적이어서 힘없는 여성과 소수자의 목소리를 빼앗는데 공감의 대표가 왜 그 운동에 앞장서고 있느냐는 거였어요. 이동권연대가 커지면서 대표로서 마이크 잡는 일이 많아지니까 내가 힘이나 권력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고도 했어요. 그런 말 들으면 솔직히 기분이 상하죠. 저로선 참 힘들었어요. 두 운동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서 균형을 잡아나가기 위해 애를 써야 했어요.

2001년에 이어 2002년 5월 19일 발산역에서 또 한 명의 장애인이 리프트를 이용하다가 사망했다. 장애계는 서울시의 사과를 촉구하며, 8월 12일 국가인권위원회를 점거하고 무기한 단식농성을 선포했다. 사진은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다룬 다큐 ‘버스를 타자’(박종필 감독) 캡처
2001년에 이어 2002년 5월 19일 발산역에서 또 한 명의 장애인이 리프트를 이용하다가 사망했다. 장애계는 서울시에 사과를 촉구하며, 8월 12일 국가인권위원회를 점거하고 무기한 단식농성을 선포했다. 사진은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다룬 다큐 ‘버스를 타자’(박종필 감독) 캡처

- 그렇게 대표가 된다

2002년 5호선 발산역에서 리프트를 타던 장애인이 떨어져 사망했어요. 이동권연대는 서울시에 사과를 요구하면서 국가인권위원회를 점거했어요. 우리가 위원장실을 점거하니까 최영애 인권위 사무총장이 장애인들이 여기를 왜 왔느냐고 했어요. 그분은 내가 성폭력상담원 교육받을 때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이셨던 분이었어요. 나는 그동안 아무리 외쳐도 아무도 안 들어줬다고, 더 이상 갈 데가 없어서 여기에 왔다고,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하고 왔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최영애 씨가 암말도 안하고 나가시더라고요. 그렇게 점거하고 기자회견을 한 후에 박경석 대표는 단식에 들어갔어요.

다음날 몸살이 나서 이틀 앓은 후에 인권위로 갔더니 박경석 대표가 혼자 기운 없이 앉아있는데 얼굴이 너무 허옇고 창백했어요. 실무를 책임지는 활동가는 보이지 않았어요. 당시 이동권연대는 집행체계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어요. 모든 걸 주도하던 대표가 단식에 들어가서 꼭 죽을 것처럼 앉아있는데 공동대표인 나는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막막했어요. 점거 농성도 단식농성도 모두 처음이었고 어디서도 배운 적이 없었어요.

그날 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했는데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아래 민가협) 어머니들이 오셨어요. 한 어머님이 마이크를 잡고 서울시장을 향해 이 새끼 저 새끼 욕을 하시면서 시청에 쳐들어가자고 먼저 나서면서 나보고 따라오라고 했어요. 어머님들이 시청에 들어가서는 장애인들 다 굶어 죽는데 시장 안 나오고 뭐하냐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셨어요. 할머니처럼 머리가 하얀 어머님들이 막 그러니까 눈물이 나는 거예요. 나는 너무 막막하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어요. 발언을 하려고 마이크를 잡았는데 눈물이 나서 한참 말을 못 하고 가만히 있었어요. 너무 슬펐어요. 그때 생각하니까 지금도 그러네. (눈시울이 붉어짐)

사람들이 나보고 “우리 뭘 해야 돼요?” 하고 묻는데 나도 몰랐어요. 지금이야 이렇게 말하지만 그땐 마이크를 잡았는데도 할 말을 몰라서 한참을 가만히 있었어요. 뭐 법을 만든다고 하긴 하는데 너무 막연하고, 천만 명 서명을 받는다고 지하철역에 가서 열심히 서명을 받는데도 도대체 막막하고, 가는 곳마다 공무원들은 장애인 이동권은 한국 현실엔 안 맞는다면서 선심 쓰듯이 셔틀버스나 몇 대 준다고 하고, 그 와중에 사람들은 시위하다 계속 연행되고. 그래도 박경석 대표가 있었으니 그냥 하는가 보다 했죠.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결국 법을 만들려면 이런 것까지 해야 하는 거구나. 단식을 한다고 하는데 그땐 단식농성이란 걸 처음 하는 거니까 그때 그 막막함을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막막했어요.

끝나고 민가협 어머니들이 날 따로 불러서 말씀하셨어요. 이런 거 할 때는 무조건 대통령 만나자, 서울시장 나와라 해야 돼, 그래야지 그 밑엣 놈이라도 나와. 과장, 부장 요런 것들 만나봤자 아무짝에도 소용없어. 싸울 땐 무조건 대가리를 보자고 하면서 머리를 처박아야 돼. 무식한 놈한텐 아무도 못 당해. 그러면서 대표가 정신 단단히 차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가셨어요. 그 말 듣고 힘을 내서 사무국장한테 박경석 대표가 저러고 있는데 우리 뭐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고, 할 수 있는 게 뭔지 빨리 찾아보자고 했어요. 뭐든지, 뭐든지 해보자고, 맨 앞에 나서야 하는 게 있으면 내가 하겠다고 했어요.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에 1호선 시청역 철로를 대대적으로 점거했죠. 결국 서울시가 사과했고 박경석 대표는 39일 만에 단식을 풀었어요.

공감에선 박경석 대표는 언론사에서 뽑은 올해의 인물이 되고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데 나는 여성이라 그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 아니냐고 했어요. 그런데 그건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대표들 각자의 역할이었다고 생각해요. 박경석 대표가 주목받으려고 그런 게 아니라 이 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맡았던 역할이 있었어요. 공무원들과 면담할 때 박경석 대표가 협상을 한다면 저는 원칙적으로 화를 내는 역할을 맡았어요. 또 다른 공동대표였던 최용기 대표는 활동지원서비스를 받는 사람이라 아침 일찍 움직일 수가 없으니 새벽 차 타고 나가야 하는 건 내가 맡았어요. 두 대표는 욕창이 있어서 외박을 못 하니까 열흘 넘는 전국 순회 일정은 모두 제가 했어요. 우린 그렇게 다른 역할을 수행했죠.

힘이나 속도를 추구하는 남성중심적 장애인운동에서 분명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어요.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우리의 언어와 문화를 만들어가는 건 너무 중요한 일이에요. 공감은 힘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 관계와 문화를 바꿔나가는 운동을 지향했어요. 하지만 이 몸이 이동할 수 없다면 아무리 좋은 문화를 가졌다 해도 확장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죠. 제도의 변화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예요. 남성중심운동에서 모든 걸 다 실현해낼 순 없지만 그 안에서 다양한 목소리로 균열을 내고 보다 평등한 관계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중요한 일일 거예요.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더 잘 보는 것이 분명히 있고요.

2005년 4월 15일, 장애인교육권연대 주최로 열린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을 위한 전국부모결의대회’에서 발언하는 박김영희 대표의 모습. 사진 김유미
2005년 4월 15일, 장애인교육권연대 주최로 열린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을 위한 전국부모결의대회’에서 발언하는 박김영희 대표의 모습. 사진 김유미

용산에서 도로 점거 시위를 하다가 전원 연행된 적이 있어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대열 바깥에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경찰이 장애인만 연행하고 휠체어는 길거리에 그냥 놔두고 갔어요. 휠체어도 싣고 가야하고 연행자들이 여러 경찰서로 분산될 때 휠체어가 그 주인에게 정확히 전달되어야 한다고 경찰에게 말했는데 아무도 내 말을 안 들었어요. 나중에야 트럭이 와서 싣고 가는데 휠체어 주인의 이름을 일일이 일러주면서 이름을 써 붙여 가라고 말했는데도 들은 척도 안하고 가버렸어요. 혼자 벽보고 외치는 것 같았죠. 난 술도 못 마시는데 너무 열 받아서 그날 소주 한 병 마셨잖아요.

그런 날은 밤에 잠이 안 와요. 연행된 사람들이 화장실에 가야 할 때 경찰들이 제대로 지원해주려나? 혹시 모욕적인 일을 당하지 않으려나? 경찰들은 거의 남성이니까 남성들이라면 크게 걱정하지 않을 만한 일도 여성은 그럴 수가 없어요. 그런 것까지 다 생각하면 대체 뭘 할 수 있냐고 하면 할 말이 없어요. 왜냐하면 그 말도 맞으니까요. 그러니까 그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하는 거죠. 장애인들이 도로 위를 기어가거나 자신의 몸을 던지는 데엔 분명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운 면이 있어요. 여성운동하는 사람들이 물어요. 운동을 왜 그렇게 하죠? 저는 대답해요. 그거밖에 할 수 없으니까요.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 생존을 위한 최후의 보루로 쓸 수 있는 건 자기의 몸이니까요. 경찰에게 사지가 들려지고 내동댕이쳐지는 게 굉장히 자존심 상하지만 그게 우리가 쓸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에요. 청소년들이나 여성들이 가진 것 없이 집을 나왔을 때 마지막엔 자기 몸을 수단화할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게 우리의 투쟁이에요. 백번 천번 말해도 듣질 않는데 도로를 막고 버스라도 점거하니까 듣잖아요. 좀 우아한 방식으로 하면 안 되냐고 하지만 버스를 못 탄다는 말을, 지하철을 못 탄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우아할까요. 토론을 하려고 해도 주거니 받거니가 되어야 하는데 우린 줄 게 없어요. 가진 게 없으면 협상의 대상으로 쳐주지도 않고요.

공감 활동가들이 나한테 장애여성 대표가 그러면 안 된다고 얘기할 때마다 물었어요. “장애여성 리더는 어떤 모습이어야 돼?”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내가 상상하는 리더는 사람들을 품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통찰력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나보고 그런 사람이 되라고 하면 나는 못 해요. 경험도 없고 능력도 없어요. 그렇지만 앞장서서 열심히 하라면 그건 할 수 있어요. 저는 계속 질문했어요. “장애여성 리더는 남성들과는 달라야 한다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야 돼? 나는 잘 모르겠는데 이게 맞아?” 그러면 잘 모른다는 소리도 하지 말래요. 대표가 자꾸 모른다고 하면 사람들은 불안감을 느낀대요. 또 여성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거 같아 보기 싫다고도 해요. 나는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도 못하나? (웃음) 모르는 건 모르겠어요.

운동 역시 경험을 많이 한 사람 중심일 수밖에 없고 경험을 쌓을 기회가 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요. 그것을 인정하고 천천히 함께 가야 하는데 말이 쉽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에요. 사랑의 고리, 장애여성공감, 이동권연대의 시간을 돌아보면 나는 아무런 인적, 물적 자원이 없는 상태였는데도 내가 목소리를 낼 때마다 너 참 잘한다, 네 얘기가 맞아, 너의 목소리를 우리가 들으려고 하고 있어, 하면서 지지해주는 사람들을 만났어요. 그래서 자신을 갖고 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고 경험을 쌓을 수 있었던 거 같아요.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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