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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시설장애인 박창능 씨, ‘새 생명, 희망’ 나누고 떠나다
분류비마이너뉴스 글쓴이허현덕 기자 게시일2022-06-29 조회수163
27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층 9호실에 마련된 고 박창능 님의 빈소에 조문객이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 허현덕
27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층 9호실에 마련된 고 박창능 님의 빈소에 조문객이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 허현덕
27일 오후 6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층 9호실에서 박창능 씨 추모식이 열렸다. 추모식 참석자가 순서지를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다. 사진 허현덕
27일 오후 6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층 9호실에서 박창능 씨 추모식이 열렸다. 추모식 참석자가 순서지를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다. 사진 허현덕

탈시설장애인 박창능 씨(향년 60세)가 25일 뇌출혈로 사망했다. 그는 장기와 조직을 기증해 100여 명의 사람들에게 새 생명과 희망을 나누고 떠났다. 가족과 지인들은 “평소에 나누는 삶을 실천했고, 죽어서도 나누고 떠났다”라고 전했다. 

27일 오후 6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층 9호실에서 박창능 씨 추모식이 열렸다. 추모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박 씨의 생전 모습을 담은 영상을 보며 고인을 추모했다. 추모식에 참석한 이들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함께했던 그가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 19년간의 거주시설 생활… 1년 9개월의 짧은 자립생활

1961년 8월 26일에 태어난 그는 네 살 무렵, 뇌병변장애를 갖게 됐다. 그는 지적장애와 뇌병변장애가 있다. 2001년 지적장애인거주시설 누림홈에 입소했다. 당시 그의 나이 40세였다. 40년 동안 형과 함께 살았지만, 어머니의 치매가 악화하면서 시설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누림홈에서 19년을 살았다. 

고 박창능 씨의 생전 모습. 사진 프리웰지원주택 제공
고 박창능 씨의 생전 모습. 사진 프리웰지원주택 제공

지난 2020년 9월 서울 목동에 있는 지원주택으로 탈시설했고, 자립생활을 시작했다. 자립생활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첫 자립생활에 박 씨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토로하곤 했다. 그러나 그 기간은 길지 않았다. 1년 9개월 동안 박 씨를 지원했던 유정화 프리웰지원주택 코디네이터는 자립생활을 하면서 많은 점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창능 씨가 처음 지원주택에 오셨을 때 혼자 방을 쓰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한 달 정도는 ‘누림홈이 좋다, 그립다’라는 말을 종종 했어요. 그런데 활동지원을 받고, 지원주택의 삶에 익숙해지시니 ‘두 번 다시 시설로 안 가고 싶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사는 지역에 익숙해지고는 이 생활이 너무 좋다고 하셨어요.” 

박 씨는 생전에 트로트 부르기, 전화 통화하기, 담배 피우기, 사람들과 대화하기를 즐겼다. 그 밖에도 술과 짜장면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지원주택 직원들에게 하루 용돈을 아껴서 순대와 튀김을 사서 나누는 것도 그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이처럼 그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매우 깊은 사람이었다. 이웃 주민들도 항상 웃고, 먼저 인사하는 이웃으로 그를 기억한다고 했다. 유 코디네이터는 그가 “장애가 있지만 장애가 중요하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창능 씨는 본인을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기보다는 ‘나는 박창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당당하게 세상을 살았어요. 늘 다른 사람에게 ‘잘 주무셨어요?’, ‘밥은 뭐 먹었어요?’, ‘언제 집에 한 번 오세요’라며 배려 섞인 말을 했어요. 베풀기를 좋아했고요.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에도 두려움이 없었어요. 뭐든 한번 해보겠냐고 하면 늘 좋다고 하셨거든요. 싫다는 표현을 정말 안 하시는데, ‘담배 끊는 건 정말 싫다’라고 했어요. 그만큼 의사표현이 확실했어요.”

박민규 우리하나은평장애인자립생활센터 간사가 고인을 추모하며 울먹이고 있다. 사진 허현덕
박민규 우리하나은평장애인자립생활센터 간사가 고인을 추모하며 울먹이고 있다. 사진 허현덕

그는 자립한 후 우리하나은평장애인장립생활센터(아래 우리하나센터)에서 서울시중증장애인권리중심공공일자리(아래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로 일했다. 박민규 우리하나센터 간사는 추모식에서 울먹이며 말했다. 

“작년 4월 권리중심공공일자리를 통해서 창능 씨와 처음 연을 맺게 됐는데요. 솔직히 많이 놀랐습니다. 저렇게 환하게 웃으면서 사는 사람이 있을까? 나도 일하면서 힘든 일이 많았지만, 창능 씨를 보면서 힘을 냈습니다. (울먹이며) 너무 보고 싶습니다. 환한 모습 다시 한번 보고 싶습니다.”

- 장기·조직 기증으로 100여 명에 ‘새 생명, 희망’ 나누고 떠나

자립 후 노동을 하며, 지역사회에서 탈시설장애인에 대해서도 알렸던 박창능 씨. 그러던 지난 6월 21일 쇄골이 부러져, 24일 수술을 해야 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불과 몇 시간 뒤 뇌출혈 진단을 받았다. 25일 사망 판정 당시 의료진이 박창능 씨의 가족에게 장기·조직 기증을 권유했고, 형 박창식 씨가 동의하면서 기증이 이뤄졌다. 장기·조직 기증은 의학적 사망상태에서 유족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에 따르면, ‘장기기증’은 심장, 신장, 간, 폐 등 장기의 손상이나 정지된 기능 회복을 위해 이식이 필요한 환자에게 기증하는 것이며, ‘조직기증’은 인체의 각막, 뼈, 피부, 인대, 혈관 등 기능적 장애가 있는 환자의 재건과 기능회복을 위해 조직 일부를 기증하는 것이다. 이 중 조직기증은 ‘기증 과정에서 신체적 훼손이 많이 발생한다’는 이유로 장기기증보다 상대적으로 기증하는 수가 적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 홈페이지 통계에 따르면 2022년 장기기증자(6월 28일 기준)는 211명이고, 조직기능자는 85명으로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김윤식 한국장기조직기증원 홍보팀 팀장은 “조직기능은 신체 훼손이 있다는 이유로 가족들이 꺼리는 경우가 많다. 한해에만 2500여 명, 하루에만 6.8명이 이식을 기다리다 돌아가신다”라며 “장기·조직 기증은 아픈 이들을 살리고 돕는 이타적인 희생이다. (박창능 씨의) 장기·조직 기증으로 100여 분 이상이 새 생명과 희망을 나누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다”라고 의미를 설명했다. 

추모식에서 이혜규 문예노동자가 고 박창능 씨가 생전 가장 좋아했던 ‘꽃을 든 남자’를 불렀다. 사진 허현덕
추모식에서 이혜규 문예노동자가 고 박창능 씨가 생전 가장 좋아했던 ‘꽃을 든 남자’를 불렀다. 사진 허현덕

- “평소에 나누는 삶 실천했던 창능 씨, 죽어서도 나누고 떠났다”   

형 박창식 씨의 아내도 처음에 신체 훼손을 이유로 장기·조직 기증을 반대했다. 그러나 박창식 씨는 동생이라면 흔쾌히 허락했을 것이라며 아내를 설득했다. 

“의료진들에게 장기이식을 기다리며 꺼져가는 생명이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말을 들은 직후에는 많이 망설였어요. 그런데 동생이 자립생활을 하면서 사회, 또는 주변에서 사랑과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을 생각하니, 동생이 하늘나라 가기 전에 나누고 가는 것도 의미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생전 나누는 것도 좋아하고 잘 베풀던 동생이라면 분명 동의할 것 같았어요. (장기·조직 기증은) 창능이의 생각이 반영됐다고 할 수 있어요.”

고 박창능 씨의 형, 박창식 씨가 추모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허현덕
고 박창능 씨의 형, 박창식 씨가 추모식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허현덕

박창식 씨는 동생이 시설에 있을 때 종종 만나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어머니의 병간호와 코로나19로 인해 연락이 뜸해졌다고 말했다. 동생이 탈시설 후 지역사회에서 산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직접 사는 곳을 찾아간 것은 사망 후였다. 그는 지원주택을 찾아 지원인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에야 동생이 어떻게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창능이가 또 다른 삶을 살았던 것 같아요. 시설보다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고, 창능이만의 공간이 있었더라고요. 그렇다고 창능이를 혼자 방치하고 놔두는 게 아니라 잘 지낼 수 있게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추모)영상을 보니까 즐겁게 더 오래 살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뒤늦게라도 자립하다 생을 마감했다는 게 다행이고 형으로서도 위안이 됩니다.”

고 박창능 씨는 28일, 파주 용미리에 있는 서울시립추모공원(자연장)에 안치됐다. 장례기간 동안 가족,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동료들, 거주시설에서 만난 친구들, 지원주택 주민들과 직원들, 활동지원사들이 고인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창능 씨는 자신의 인생을 그리다가 가셨어요. 집회에 참여하고 투쟁하는 것처럼 큰 목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창능 씨 나름대로 ‘이렇게 살고 싶다’라고 투쟁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삶을 끝내 이루었어요. 장애가 있다고 해서 늘 지원받고 약한 존재로 인식되기보다는 끝까지 ‘나도 (타인을) 도울 수 있다’라는 걸 알려주셨어요. 참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유정화 코디네이터)

추모식 참석자가 슬픔에 잠겨 있다. 사진 허현덕
추모식 참석자가 슬픔에 잠겨 있다. 사진 허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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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마이너뉴스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3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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