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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칼럼

[김도현]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다시 생각한다③
글쓴이보다센터 게시일2020-01-23 조회수2,385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다시 생각한다③

- 자기결정권은 자유권을 넘어선 사회권이다





앞선 두 번의 글을 통해 우리는 자기결정권과 자기결정능력은 같은 것이 아니며, 자기결정권이란 혼자서 결정한 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님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여전히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는 일이 실질적으로는 어렵다, 현실적으로는 안 된다고 이야기를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회적 상황이 전혀 아닌 듯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는 자기결정능력이 부족할 수 있는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기 위해 아직까지 아무것도 해본 게 없기 때문이지요. 분명히 발달장애인의 경우에는 자신의 의견과 판단을 소통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조율하는 능력이 비발달장애인들보다 낮을 수 있습니다. 그런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려면, 지난 번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일정한 결정이 내려질 때 그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도 관련 당사자의 의견과 판단을 소통하고, 존중하고, 반영하는 것이 보장’될 수 있도록 하는 촘촘하고도 세밀한 시스템이 구축되고 인적 지원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그런 적극적인 노력을 해 본적이 전혀 없습니다.


인권은 흔히 자유권과 사회권으로 구분이 됩니다. 그리고 자유권을 소극적 권리라고도 하고, 사회권을 적극적 권리라고도 합니다. 거칠게 말해서 소극적 권리인 자유권은 타인이나 국가의 간섭과 침해만 없으면 보장되는 권리인 반면, 적극적 권리인 사회권은 공동체와 국가가 말 그대로 적극적인 조치를 시행해야만 보장되는 권리입니다.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프라이버시권 등이 자유권에 속하는 대표적인 권리이고, 교육권이나 사회복지와 관련된 권리 항목들은 사회권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요. 따라서 후자의 사회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예산이 반드시 수반됩니다. 그런데 어떤 권리가 자유권에 속하는가 사회권에 속하는가의 구분 역시 우리 사회에서는 일차적으로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예컨대 이동권(right to mobility)은 비장애인에게 있어 자유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강압적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다거나, 정치적 탄압에 의해 연금 상태에 빠지지 않는 한 어떤 비장애인의 이동권이 침해될 일은 거의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권리여서 2000년대 초반까지는 이동권이 하나의 권리로조차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국립국어원의 신어자료집에 이동권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재된 것이 2003년의 일이니까요. 그러나 대다수 장애인에게 있어 이동권은 ‘아무런 방해도 하지 않을 테니 알아서 잘 누리세요.’라고 한다고 해서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전에도 장애인들이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지 못하도록 누가 와서 강제로 막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장애인들은 지하철이나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을 탈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거리와 건물 입구의 턱을 없애고, 경사로와 유도블럭을 깔고, 공공건물과 지하철에 엘리베터이터를 설치하고, 저상버스와 특별교통수단을 도입하는 등의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합니다. 즉, 장애인에게 이동권은 자유권적 성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사회권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갖습니다.


언어권(right to language) 역시 흔히 자유권으로 분류됩니다. 언어권은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자신의 모국어를 사용하여 자유롭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권리인데요,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청인(聽人)에게 언어권은 자유권이 맞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청인의 입에 재갈을 물려놓고 말을 하지 못하게 한다거나,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며 한국어 말고 영어로만 일상생활을 하라고 겁박을 하지 않는 한 우리사회에서 청인의 언어권이 침해될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농인(聾人)에게 있어 언어권은 그저 자유권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국가가 공권력을 동원해서 농인들이 수화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단속을 한다거나, 과거처럼 수화가 아닌 구화(口話)를 사용해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억압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농인들은 자신들의 모국어인 수화를 사용해서 자유롭게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즉, 농인들에게 언어권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수화를 보급하고, 수화방송을 확대하고, 공공기관에 수화통역사를 배치하고, 수화통역을 활동지원서비스와 같은 사회서비스의 형태로 제공하는 등의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한 사회권이기도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발달장애인에게 있어 자기결정권은 자유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권입니다. 우리는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주변의 침해만 없으면 그들이 알아서 누릴 수 있는 소극적 권리라고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즉, 현재와 같은 조건을 전제로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권 보장을 얘기하는 것은, 저상버스도 지하철 역사의 승강기도 없이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을, 그리고 수화에 대한 적극적 인정과 체계적 지원도 없이 농인의 언어권 보장을 운운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기 위한 적극적인 사회적 조치는 어떠한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할까요? 자기결정권을 상호적인 관점에서 올바로 이해한다면 그 핵심은 소통과 의견의 조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대다수 비발달장애인은 발달장애인과 함께 어울려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상호간에 소통을 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데 있어 상당한 장애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대다수의 농인과 청인이 서로 소통을 하는 데 있어 장애를 경험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농인이 청인과 ‘의사소통을 할 수 없음’이라는 장애를 경험한다고 해서 이것이 농인의 청각에 존재하는 손상이나 무능력 때문으로 설명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반대로 그 책임이 청인에게 귀착되는 것은 아닙니다. 장애는 청인과 농인 어느 한 쪽이 아닌 그들 ‘사이’에 존재하며, 그러한 장애를 제거할 수 있는 사회적 노력과 조치가 필요한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발달장애인과 비달장애인 사이에 존재하는 의사소통의 장애 역시 어느 한쪽의 무능력이나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법무부에서는 지난 2013년 12월부터 성폭력 피해를 당한 발달장애인이 수사와 재판의 과정에서 겪는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지원하기 위하여 진술조력인 제도를 운영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 제도를 알리기 위해서 법무부가 2018년에 제작해 홈페이지에 게시한 카드뉴스에서는 진술조력인의 본질을 일종의 ‘통역사’라고 나름 적절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장애인들 중에서는 사법경찰․검사․판사만이, 그리고 발달장애인들 중에서는 성폭력 피해자만이 상호 소통의 과정에서 장애를 경험할까요? 당연히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발달장애인들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진술조력인 제도와 같은 지원 체계가 새롭게 확대 개편되어 보다 다양한 일상생활의 영역에서 하나의 사회서비스로 제공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발달장애인들이 자신의 일상생활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되는 학교나 직장에는 그들의 자기결정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감독하고 지원하는 권리옹호 인력이 배치되거나 일시적으로 파견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적극적 조치가 이루어질 때만이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은 하나의 온전한 권리로서 사회적으로 보장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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