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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칼럼

[백선영]죽음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희망을 말하는 방식
글쓴이관리자 게시일2022-09-13 조회수885

 



이제는 입 밖으로 잘 꺼내지 않는,천형이라는 단어를 기억하는가. 장애아를 낳아 양육하는 삶 자체를 하늘에서 내린 무거운 형벌쯤으로만 여기던 시절, 장애는 사회가 만들어내는 장벽이라 말하지도 못했던 시절, 장애를 가진 개개인 당사자와 가족·주변인들이 세상 속에서 부딪히는 모든 문제들을 다 떠안고 살아가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절조차도 당사자들은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당사자와 가족들, 뜻이 있는 사람들은 함께 모여 문제로 정의되어 오던 우리들이 다시금, 대체 어떤 것이 문제인가를 묻고 문제 자체를 재정의하자고 외쳤다. 이는 장애 운동의 핵심적 의제이기도 하다.

 

 

그러한 권리 운동의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애인들은 여전히 죽음과 가까이 있다. 한국의 발달장애인 평균 기대수명을 조사한 결과 지적 장애인은 56.3, 자폐성 장애인은 23.8세로 장애인들 중 가장 낮았다. 특히 참사라 호명되는 발달장애인 존속살해는 끔찍하고도 불행하게 지속되고 있다. 발달장애인을 살해한 가족들이 자기마저 죽거나 죽음에 실패하여 법정에 간다 하더라도 가벼이 처벌된 사례는 그간 부지기수였다. 발달장애인에 대한 지원과 돌봄은 사적 영역으로만 남겨두고서 이들을 죽이는 것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죽임의 형태, 이 잔인한 모순을 그간 사회는 용인해왔다. 개인이 저지른 살해이긴 하지만, 근저에는 통상 사회 제도적인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는 걸 상기해 보면 (발달)장애인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이 사라지는 것 이상이 아닌 것이다. 물론 발달장애인들에 대한 지원과 네트워크들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가족들이 져야 할 부담이 상당한 것은 사실이다. 당사자와 물질적·정서적 환경, 주변인들, 이를 바라보는 나의 상태까지 끝없이 살피고 관리하는 삼중 사중의 노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사건들이 날 때마다 추모만 하지 말고 심리적·사회적 부검을 하자고 말한다. 타당한 지적인데, 대체 무엇이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는가에 대한 공통된 진단을 내리기에 사건들의 맥락은 제각각이다. 그간 기록된 존속 살해 사건들 중에서 장애라는 진단만으로 사람을 죽였을지, 장애에 대한 배제와 소외, 여러 돌봄 노동에 지치고 소진돼 자신도 죽음을 선택했을지, 산 자가 섣부르게 판단할 수는 없는 몫이다. 다만 이것 하나는 짐작해 볼 수 있다. 사람이 가진 속성에 불과한 발달장애라는 것이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공포스럽고 절망적인 것인가 하는 것. 힘듦, 불가능, 고통, 죽음 이런 서사들 말고 발달장애인들은 다른 삶의 서사들을 써 내려갈 수는 없는가라는 간절한 질문.

 

 

최근 진행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발달장애를 발견한 연령은 평균 7, 등록된 연령은 평균 17세라고 한다. 장애를 등록하기까지 통상 10년의 시간이 걸리는 것은 무엇을 방증하는가. 장애에 대한 낙인은 개개인마다 다른 수준과 형태로 내재화되었을지 모르지만, 이를 강화하는 가장 강력한 기제는 사실 사회적·구조적 낙인과 배제다. 장애인들은 사회를 유지하는 거의 모든 구조와 제도 등에서 배제되어 있다. 노동력을 팔아 자기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애를 노동력 손실로 보는 관점은, 자연히 장애를 가진 노동자를 현장에서 보기 어렵게 만들었다. 국가의 생활 보조나 지원도 극히 미미한 상태다. 장애와 가난은 불가분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기후 위기에 따라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있는 때, 폭우의 강수량을 견딜 수 없는 집에서 가장 먼저 죽음을 맞이해야 할 정도로.

 

체제가 낳은 기후위기 속에서 가장 먼저 죽는 사회적 소수자, 그들 중에서도 발달장애인은 가장 먼저 호명된다. 가족에 의해 살해되는 발달장애인의 사건을 두고도 참사라는 단어 말고 다른 말들이 들리지 않는 것 역시 문제적이다. 나조차 발달장애 당사자의 가족으로서 숱하게 절망하고 죽음에 가까운 절망감들을 여전히 한 편에서는 갖고 있다. 그러나 그런 서사들만 알려지는 것은 장애에 대한 사회적 억압을 은폐하며, 편견만 강화하는데 일조한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예컨대 가정폭력으로 죽은 여성들을 생각해보면 남성 생계부양 모델이 근본 원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그 모델 속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가장으로 대표되는 남성 하나에 의존해 무능력하게 살아야 하고, 부양되어야 하는 존재로 그려졌던 것처럼. 그렇기에 한때 가장의 폭력은 쉽게 묵인되거나 정당화되었다. 양육자나 형제자매 등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발달장애인들의 현실이 과연 이와 다르다 말할 수 있을까. 신경 발달의 차이로 인한 다른 삶의 양태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것은 발전, 정상성, 속도만을 중시하는 사회다. 발달장애인들이 나름의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는 다양한 환경들을 구성하고 조직해 내는 것은 전체 사회의 몫이지만 지금까지는 개별 가정에게만 맡겨 왔다. 노력의 지분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이들은 당연히 가까이 있는 가족들일 테지만, 이 가족들이 할 수 없는 것들까지 끝없이 요구하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는 방치되어 있다. 우리가 고민하는 것들은 대체로 우리 스스로만 노력해서는 할 수 없는 것들이다. 발달장애를 이해하고 발달장애를 가진 구성원들을 어떻게 사회화할 것인가에 대한 노력들을 역으로, 사회에 국가에 요구하자. 실제 장애관련 단체들에서는 신경 다양성이라는 개념의 확산을 위해 연구와 교육에 매진하고 있으며, 교육권, 노동권, 주거권, 건강권 등 삶에서 누려야 할 각종 기본권과 24시간 지원을 요구하는 발달장애 국가책임제를 부모 단체를 비롯한 여러 장애인 단체 및 시민사회단체에서 요구하고 싸워나가고 있는 중이다.

 

한 꺼풀 벗겨보면 장애는 그 자체로 총체적인 삶의 형태다. 산다는 것 자체를 긍정이든 부정이든 어떤 특정한 의미로 정의할 수 없듯이 장애와 함께하는 삶은 마냥 힘들고 외롭고 고립되어 있지 않다. 어쩌면 깊은 파고를 건너야만 하는 운명이라도 서로의 삶을 함께 견뎌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분명히 있다는 것만큼은 어쭙잖은 양육자에 불과한 나도 전할 수 있다. SNS를 하지 않는 양육자들이 있다면 해보고, 발달장애 관련 여러 이슈들을 팔로우업 해보시라, 발달장애에 대해 연구하거나 조력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도처에 있다. 네트워크를 맺을 수 있고, 심리·정서적 임파워링도 얻을 수 있다. 지역의 장애인 부모 조직을 찾아가 상담도 지원받고 활동도 해보시라. 이해받을 수 있고 함께 일궈가는 공동체의 기쁨도 느낄 수 있다.

 

 

희망은 장밋빛 미래가 아니다. 무엇이든 낙관할 수 있고 긍정적이고 좋은 방향으로 상호작용해야만 삶이 온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무수한 절망들을 반복하는 것, 그러나 반복되는 절망 안에 갇히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닥쳐 있는 문제들은 절대적이지만 동시에 충분히 상대화할 수 있는 힘 역시 우리에게 있다는 것. 우리 삶을 견딜 수 있을만한 것으로 만들고 또 여러 우여곡절들을 거쳐 익숙해지는 과정 역시나 소중한 삶의 부분이라는 것. 고통 한가운데에서 무너질 때마다 내게 반복해서 외는 주문이다.

부디 글을 읽는 양육자들에게도 전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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