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를 책으로 읽다 >
김종옥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문화예술특별위원회 위원장)
- 더 누리는 것의 고마움
때로 옛날 사람들보다 지금의 내가 훨씬 더 좋은 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입고 먹고 자는 일에 덜 불편하고 아플 때 치료받을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으니 복지 수준이야 말할 것도 없이 더 좋다. 먹고 자는 일 말고, 예전 사람들보다 훨씬 더 좋은 건 또 무엇일까. 아마도 세상을 읽어낼 도구를 더 많이 갖게 되었고, 이에 보태서 보고 듣고 누릴 기회가 더 많다는 것이겠다.
물론 내가 누리는 것을 80억 인류 모두가 누리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누리는 것을 내가 모두 누리는 것도 아니어서, 누린다는 행위는 참으로 불평등하고 미안한 일이거니와 그 점에 있어서는 마냥 예나 지금이나 훨씬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 요컨대 ‘누린다’는 것이 일정 부분 호사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상당 부분 미안한 마음을 동반해야 마땅하다는 말이다. 그렇다, 그저 좋다고 하려니 미안해서 하는 말이다.
서두가 거창하지만 실은 무엇보다 책에 대해 고맙다고 말하려는 참이다. 서점에 가서 바닥부터 천정까지 가득 꽂힌 책을 볼 때 나는 수백만 년 전 원인류에서 달려와 현생인류에 이르러 내가 지금 인간역사의 가장 끝에 도달해 있는 것이 감사하다.(물론 어떤 인간도 그가 태어난 곳이 역사의 가장 끝일 테니, 끝이라는 사실에 특별히 감사할 일은 아니나, 이만큼이나 쌓인 지금에 내가 도착한 이 행운에 소박하게 감격해서 하는 말이다. 오십년 후, 백년 후에 태어나지 못한 것은 애석하지 않느냐고 누군가 멱살 잡고 묻는다면 슬며시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른다만.)
책을 읽는 마음
어쟀든 나고 죽고 함께 살고 있는 그 모든 인간들이 해주는 이야기가 책에 그득하니 이처럼 고마울 데가 없다. 그 중에서도 우연히 내 손 안에 포착된 책들로부터 얻은 즐거움과 경이로움, 반성과 웅숭깊은 위로는 각별한 가운데서도 더 각별하다. 책들은 책꽂이에 그저 꽂혀있는 게 아니라 어깨를 이어 도열해 서서 내게 다정한 말을 건네는 얼굴들 같다.
연애를 책으로 배웠다, 고 하면 현실 경험 없이 글로 배운 일반론이 다인 줄 아는 헛똑똑이에 대한 조롱이지만, 우리는 내가 맞닥뜨렸으나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책에서라도 답을 찾아보려고 애쓰기 마련이다. 그 책 속에서 꼭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조언과 질책과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으니 어찌 고맙지 않으랴. 게다가 책을 읽는다는 행위 자체, 그 시간 자체가 내 안의 얼룩과 상처를 닦아주는 일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내가 아이를 낳고 서툰 어미가 되어 아이의 눈을 바라보았을 때 번번이 아이의 눈길은 내 눈동자에 멈추어 맺어지지 않고 그 너머 어떤 심연으로 달려갔다. 그것이 신비롭고 경이로왔으나 한편으로는 불안하였다. 아이의 발달에 관한 책들을 이것저것 손에 잡히는 대로 사보는데 자꾸 한 대목에 가면 마음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나며 멈추게 되었다. 숱한 의심과 회의와 확신과 미련이 오고가던 끝에 발달장애 진단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한동안 발달장애 관련한 책들을 뒤지며 매달렸을 때 내 마음은 아마 한 가지 기대를 품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사례와 우리 아이는 어딘가 다르지 않을까, 그 다른 점이 우리 아이를 발달장애와 매우 흡사했으나 그 비슷한 길을 돌아서 결국 조금 특이했던 ‘보통 아이’로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을 게다. 그리고 그 때 내가 읽었던 책들은 대개 처절한 실패담이 아니고, 성공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더라도 어쨌든 어지간히 제법 좀 살아낼 수 있었다는 우쭐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랬으니 그 책들을 통해 애초에 기대했던 목적을 이룰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우연히든 뒤져서든 잡아 올린 책들은 내게 적잖은 위안이 되었다. 그 위안이란, 몰랐던 것을 알게 된 위안, 막연한 불안감을 떨치게 된 것에 따른 위안이다. 그리고 책이란 것이 늘 그렇듯 또다른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은 언제나 깊은 위로가 되었다. 특히 장애의 역사, 자폐장애부모 운동의 역사 같은 책들은 우리가 지나오거나 겪고 있는 일들을 일정한 흐름 속에서 보게 해 주었으니, 우리 운동의 방향성을 잡는 데 도움이 되었다.
엄마, 이 책은 내가 쓴 거에요
그런데 무엇보다도 내가 감명을 받은 건 당사자가 쓴 책들이었다. 나는 당사자가 쓴 글을 통해서 내 아이, 우리 아이들과 비로소 말을 건넬 수 있었고 말을 들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대화라는 것이, 똑같은 기술을 가진 쌍방간에서 가장 쉬운 일이고 보면, 발달장애를 가진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대화란 서로 엇나가기 일쑤이고 속깊은 마음을 주고받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게 틀림없다. 그 사이에는 그저 열심히 듣고 열심히 말해서 서로의 언어를 더 많이 이해하는 것 말고 다른 게 없다. 사실 세상 모든 사람과의 대화가 마찬가지일 테지만.
발달장애를 가진 이 가운데 누군가 자기 얘기를 많이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통해 나는 그 세계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행운을 얻는다. 남이 대신해 짐작으로 해 준 이야기 말고, 스스로가 하는 말이란 얼마나 귀한가. 나는 커다란 벽에 난 작은 틈 같은 그 귀한 글들에 감사한다. 그러나 그 귀한 글들을 만날 기회는 애석하게도 많지 않다. 책을 꾸려낼 정도로 자기기술이 가능한 발달장애인이 많지 않고, 그들의 서술이 가능하도록 도와서 잘 끌어내는 경우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발달장애의 스펙트럼이 넓은데다가 글을 쓸 정도의 능력은 템플 그랜딘 쯤 되는 고기능자폐나 장애 정도가 가벼운 이만 가능한 특별한 경우이니 그들의 글을 통해 보통의 발달장애를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훌륭한 통로가 되어준다고 믿는다. 그나마 열려있는 작은 통로, 그나마 들여다 볼 가느다란 틈이 곧 시작이다. 커다란 실꾸러미에서 한 가닥 풀려나온 실마리가 바로 그들 자신이 쓴 글들이다. 저마다 갖고 있는 통로와 틈을 모으고 쌓으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보게 될 게다. 게다가 그 통로와 틈은 일방이 아닌 쌍방이니 우리의 행복한 소통은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발달장애를 가진 이가 직접 쓴 글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그리고 세상에 이미 나와 있는 그 글들을 더 많이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발달장애를 가진 청년(소년에 가까운)이 쓴 ‘별종 괴짜 그리고 아스퍼거’라는 책을 발견했을 때 우리 아이를 이해하는 꼭 맞춤한 망원경이라도 만난 듯해서 몹시 기뻤다. 바로 내 아이가 들려주는 말을 읽는 것 같았다. 아이에게 권했더니 단박에 훌렁 읽고는 기쁜 표정으로 내게 책을 내밀며 말했다. “오, 엄마, 이건 제가 쓴 책이에요.”
나는 그 책을 통해 아들의 많은 것을 이해했고, 아들은 자신의 많은 것을 엄마에게 이해시켰다. 발달장애를 가진 이가 쓴 글들이 꽤 있을 테고, 그것들은 그들이 갖는 다양함만큼이나 다양한 발달장애인들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유용한 통로가 되어줄 것이다. 남의 세계를 이해하는 건 너무 어렵고 불가능해 보인다. 물론 내가 내 세계를 이해하는 것 역시 어렵고 힘들다. 그러나 누구라도 자기 세계를 정성껏 들려준다면, 그리고 그걸 포착하는 성의가 있다면 나를 제외한 숱한 세계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별종 괴짜..’를 만난 이후 아들은 인터넷에서 발달장애와 관련한 텍스트들을 종종 채집해서 본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자기정체성에 관한 생각들을 쌓아가고 있다. 나는 언젠가는 아들도 자기 이야기를 기술할 거라고 기대한다. 곁에서 그 작업을 행복하게 도울 참이다.
* 붙이는 말 : 작년 가을에 아주 재미있게 읽은 책이 두 권 있다. 하나는 발달장애를 가진 청년이 쓴 자기 이야기이고, 하나는 발달장애를 이해하려는 청년(소년에 가깝다)이 쓴 소설이다. 다음 칼럼에서는 이 두 책을 소개하려 한다. 그 전에, 장애는 물론이고 모든 이의 인권에 관심 있다면(마땅히 누구나 그래야 하고) 우리는 모두 이 책을 기본서로 먼저 읽고 시작해야 한다. <선량한 차별주의자>(김지혜, 창비)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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