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울을 보다
철학이란 자기 자신에 대한 근심이다, 라고 어떤 철학자가 말했다고 하거니와, 사람이 제일 관심 많은 분야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동물과 사람이 구분되는 지표 가운데 하나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란다. 그래서 거울을 보고 거울 속 사람이 자기인 줄 아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의미라 했다. (그렇지만 나이 먹어가면서 거울 보는 게 참 싫어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거울 속에 보이는 그 순간의 내가 바로 남이 아닌 내가 맞다는 게 참 싫어서 거울을 잘 안 보게 된 나는, 나에 대한 관심도 식어버려 그러는 걸까, 하고 실없는 생각도 자주 하긴 한다.)
거울 속에 비친 게 자신이라는 것을 아는 동물이 꽤 있다고 한다. 원숭이는 물론이고 몇 종류의 새도,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고래도 그렇다고 한다. 문어가 그렇다는 얘기도 어디선가 들었다. 걔들은 거울 속 자신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남의 살 먹는 게 무서워진다. 이렇게 ‘나’를 안다는 건 아주 복잡하고 거창한 일이다. 남의 삶(단지 ‘살’이 아니라)을 빼앗는 행위는,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탐닉할 일은 분명 아니다. 얘기를 시작하다보니 채식찬양 비슷한 데까지 갔다. 그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라, 오늘은 사람을 규정하는 일에 대한 얘기를 하려는 거다.
2. 나누어 보자
내가 어렸을 때는 혈액형에 따라 사람 성격이 다르다 하기도 하고, 별자리에 따라 다르다 하기도 했다. 태어난 띠에 따라 분류하기도 하고, 사상체질에 따른 분류도 했다. 무언가 무리에서 분류하는 것은 그 개체를 이해하는 데 기본이 되는 일이니,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자꾸만 분류하는 건 자연스런 시작일 수 있겠다. 다만 그 기준이나 도구라는 게 비과학적이거나 억지스러운 게 많아서 탈이지.
언젠가부터는 MBTI 로 사람의 성격을 재고 판단하는 게 유행이다. 80억 인구를,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세상에 나타난 이래 모든 인류를 고작 열여섯 가지의 유형으로 판단한다는 건가, 하며 뜨악해 했는데 막상 해보니 ‘고것참 신통하네’ 소리가 나온다. 딸내미는 내 결과표를 조목조목 읽어가며 까르륵까르륵 웃어댔다.
사람을 단순하게 판단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리 보기만 할 것도 아닌 게, 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일정한 도움을 주기도 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 평소 내가 자기를 전혀 공감해주지 않는다고 불만이던 딸내미가 “엄마는 역시 T 야” 하면서 나를 이해(라고 쓰고 ‘포기’라고 읽는다)하는 듯한 말을 하는 것을 보니 과연 그렇다. 딸의 말은, 엄마는 T 형 인간이니 공감능력이 좀 부족하겠구나, 하는 이해의 말이니까 말이다. 물론 나의 T 스러움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은 아닐 게다. “T 가 훈장이 아니니 부족한 줄 알면 고치려고 노력해”라는 살벌한 지적이 들어가 있는 말이기도 한 것을, 나는 ‘논리적’으로 판단해 알고 있다.
3. “나는 발달장애를 가졌어요” 라는 말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 예로부터 다양한 분류를 해왔지만 어쨌든 사람은 그 분류들보다 훨씬 더 다양하다. 그 말은, 어떤 사람 하나는 모든 사람의 개체수보다도 더 복잡다단한 것들이 그 안에 들어있다는 뜻이다. 수십억년 동안이나 얽히고 설킨 조합이니 그렇지 않겠는가. 그래서 사람을 나누고 분석하는 것이 그 사람을 이해하는 데 편하긴 하겠지만, 한 개체 인간을 놓고 보면 끝에 가서는 늘 허망해지기 마련이다. 분류에서 벗어나는 편차가 커서 그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거나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장애’를 놓고 보면 그런 생각을 더욱 많이 하게 된다. 애초에 장애의 판단은 기계적 분류였다. 어떤 표준상태(정상상태)를 상정해 두고, 그것에 미치지 못하면 장애라 했다. 그러나 사람을 함부로 규정하는 건 위험하고 무례한 일이다. 다름을 비정상이라고 말하며 ‘정상화’를 강요하는 것은 예의 없는 짓이다. 누군가 다르기는 하되 그 때문에 불편하지는 않아야 한다. 그를 계속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나, 그를 불편하게 여기는 것 모두 그 사회가 인간에 대한 존중이란 점에서 매우 저열하다는 뜻이다.
발달장애도 그렇다. 나는 우리 아들이 “나는 발달장애를 가졌어요.”라고 말할 때, 그 속에 들어있는 느낌과 의미가 그에게 어떤 것인지 무척 알고 싶다. 그저 나는 당신들과 달라요 라는 걸까, 나는 당신들에게 미치지 못하고 부족해요 라는 걸까, 나는 당신들이 당신들에게 맞춰서 발전시켜놓은 세상과 좀 맞지않는 부분을 갖고 태어났어요 라는 걸까, 궁금하다. 나는 발달장애가 있어서 좀 다른 내면과 좀 다른 감각과 좀 다른 언어를 갖고 있기도 해요, 라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나는 당신들끼리 하는 유창한 언어와 당신들끼리의 공감 감각을 잘 이해할 수 없는데, 당신들은 나의 이런 면을 가리켜 발달장애인이라고 부르지요, 라는 걸까.
이렇게 말할 때 아들이 갖는 느낌은 어떤 걸까. 나는 당신들에게 맞춤한 세상에서는 좀 예외적 존재라서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아야 하는 걸 알고 있어요 라는 말을 담고 있을까.
그렇지만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 두 개를 동원해서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아들을 보니 스스로 심각하게 애석하다 여길 만큼 뭔가 대단히 많은 것을 포기한 표정이 아닌 것 같아 참 알쏭달쏭하다. 내가 그 속까지 앞질러 가서 엉뚱한 감정스위치를 지레 눌러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감정을 논리적으로 재단해서 매번 핀트가 어긋나는 판단을 하는 나는, 정말 T인가 보다.
어쨌든 장애를 가진 이가 ‘나는 장애를 가졌어요’라고 말할 때, 표준형이 아니라거나 규격품이 아니라는 게 아니라, ‘나의 불편함을 덜기 위해 당신들이 내게 해줄 것이 좀더 있다, 그뿐이다’는 것으로 상호간에 온전히 이해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 아들이 “나는 발달장애를 가졌어요.”라고 말할 때 가슴이 아려오지 않을 것 같다. (2024.07)
저작권표시
저작자와 출처 등을 표시하면 자유이용을 허락합니다. 단 영리적 이용과 2차적 저작물의 작성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총 댓글수 : 0개
전체댓글